'생리컵'이란 물건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은 동학이, "오래전부터 첫월급 받으면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물건이다. 관리만 잘하면 10년은 너끈히 쓴다하니....동학으로서의 인연도 10년은 너끈하길 바라며" 라는 메시지와 함께 내게 선물했던 '레드컵'.
듣도보도 못한 물건이었고, 일단 그 크기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시각적인 충격을 숨길 수 없었지만, 워낙에 에코-페미니스트로서 도덕적 신념이 남달랐고 선물 주고받는 것에도 강박적일만큼 신중한 그이가 얼마나 고르고 또 골랐을지를 생각하며 선뜻 사용해보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워낙 생소한 물품이었는지라 적응하는 과정도 오직 서로의 경험담이 나침반이 될 뿐이었지만, 성경험이 없었던 동학들은 '생리컵으로 처녀막을 없애라/긴장을 풀고 익숙하도록 훈련하라/ 혹시 조금씩 생리혈이 새어나오더라도 케겔운동으로 주변 근육을 강화해서 해결하라'는 식의, 압도적이다 못해 어딘가 혁명적이기까지한 영어로 된 사용설명서를 참고해 가며 생리컵에 몸을 맞춰가는 '성적 실천'을 하였다.
그때도 모든 여성동학이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유형론을 빌려 말하자면, 새로운 문물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이 앞서고, 환경오염문제와 자기책임성의 인지 정도, 결정적으로 '여성의 가장 내밀한 신체이자 숨겨야할 일상'로 여겨지는 생식기와 성에 대한 주체적 자각 정도, 마지막으로 사물과 자기신체에 대한 일종의 미학적 감수성(-'아무리 편리하고 여러모로 바람직하다지만 나는 쓰고 싶지 않다(!)'는 식이 가능하다) 등이 함수처럼 어우러져, 몇몇 여성동지들은 일반적인 냅킨형에서 탐폰으로, 생리컵으로 조금씩 옮겨갔다.
생고무재질로 된 짙은 갈색의 '레드컵'은 생리컵계의 조상격인데, 실리콘이 아니라서 생고무 특유의 냄새가 나고 훨씬 단단하여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정말로 10년이 넘도록 내 일상에서 요긴한 역할을 해주었다. 단점이라면, 워낙 튼튼한 지라 몸 속에 삽입했을 때 다른 장기에 주는 압박감이 생생하여 예민한 사람은 변의나 복통으로 착각될 정도였고, 단단한 만큼 제거시 고통도 커서 꽤 오래 훈련을 요한다는 점이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차가 있겠지만 당시 사용자들의 경험을 생각하면 공통되는 대목이었다. (-이 글은 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최초의 국내제품'이라고 홍보하는 '위드컵'에 대한 불매운동에 동참하고자 쓰는 글이다)
세월이 지나 손잡이가 떨어지는바람에 두번째로 구입한 '디바컵'. 고무가 아닌 투명한 실리콘 소재라 한결 사용감이 부드럽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장점이 곧 단점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외부활동을 하거나, 어쩌다 산행이라도 하게 되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때문에 불편했고, 생리혈이 샐까봐 늘 조금씩 불안하여 냅킨형 생리대나 팬티라이너라도 병행해야했지만, 그래도 생리컵이란 물건은, 그 경제성과 친환경성, 활동성과 인체유해성면에서 공산품 냅킨형이나 탐폰과는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장점이 있어 지금까지도 몇 년째 그럭저럭 사용중이다.
일주일째 집을 떠나 있으면서, 뜻하지 않게 세 번째 생리컵을 구입하게 되었다. 대형 유통업체의 '수퍼마켓'이었는데, 생리컵 뿐 아니라, '한나패드'라는 면생리대도 판매하고 있어서 함께 구매하였다. (탐폰만 하더라도 아직 국내에는 플라스틱 어플리케이터가 없는 제품이 생산되지 않고 있지만, 호주나 유럽에는 주변 수퍼에서 파는 대부분의 제품에 어플리케이터가 딸려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자연환경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대목이다.)
끓는 물로 소독하고 사용해 본 결과, 이런 제품은 판매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일단 제품의 디자인이 여성의 신체구조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전혀 없었고, 재질이 너무나 얇아 생리컵의 일반적인 두 가지 사용법(C자나 U자로 접어쓴다)으로 삽입해도 몸 안에서 펴지지 않았다. 생리컵은, 그저 작은 소주잔을 몸 안에 넣는 느낌이 아니라, 질벽 내부와 단단하게 밀착되어, 일종의 씰링(Sealing)역할을 함으로써 생리혈이 새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적인 기능인데 이 제품은 그와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실리콘이 너무 얇고, 말랑했으며, 하부둘레가 쓸데없이 크기 때문이었다. 실리콘 생리컵에 무슨 개발비가 들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내구성, 탄성, 무독성이란 요건을 다 충족시켜야 할 뿐 아니라 너무 단단하면 사용감이 떨어지고 너무 부드러우면 삽입 후 절로 원형이 복원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핵심 기능이 떨어지니, 그 적정강도의 탄성을 도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듯 한데 그저 시중에 출시된 제품들 중 하나를 택하여 '대충, 그럴듯하게' 카피하여 만들어진 물건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런 제품을 3만원이 넘는 가격에 팔고, 이곳저곳에 '국내최초'니, '100%의료용 실리콘'만 내세워 판매하는 업체측의 상술에 심히 분노한다.
이 작은 제품 하나를 만드는데 이토록 허술한 것이 연중 빈발하는 안전사고와 무관하겠는가. 도대체 개발과 판매에 '장인정신'이란 도무지 쓸모없는 윤리이기만 한가.
'위드컵은 한남이 만들었으니 사지말자'는 식의, 혐오에 기반한 불매청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허락도 없이 생리컵을 쓴다니 괘씸하다"거나, "하루종일 느끼고 좋겠다"는 식의, 무지를 흉기로 삼는 발언이 여전히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래도 일말의 선의를 지니고 이 제품을 선택했을, 아무것도 모르고 선택할 나와 같은 많은 여성 소비자들에게 알린다. "그냥 수입품 쓰세요. 불안하면 사이즈별로 하나씩 사서 시착해보고 결정하세요. 그게 가장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