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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시 연구
―상실의식을 중심으로
A Study on Chang-hwan Oh's Poetry: the Analysis of Loss Consciousness inherent in his poems.
이은봉(Eun-Bong Lee 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1. 서론-상실의식의 구조와 양상
2. 본론-상실의식의 실제
1) 자아상실
2) 가족상실
3) 고향상실
3. 결론-조국 상실의 역설적 형상화
1. 서론-상실의식의 구조와 양상
오장환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의식지향은 세계상실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루 주목이 된다. 이때의 세계상실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것은 가족상실과 고향상실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가족상실과 고향상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자아상실을 토대로 하는 조국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상실의식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사회ㆍ역사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전자는 낙원상실의 원형적 상상력의 한 양상으로, 후자는 조국상실의 역사ㆍ사회적 상상력의 한 양상으로 해석되고 있다.1)
그런데 가족상실과 고향상실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상실의식은 1930년대 시사의 보편적인 특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역사ㆍ사회적 의미를 띤다.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상실의식을 바로 알기 위해 그것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구조와 양상부터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에 담겨 있는 모든 상실의식은 나날의 삶의 세목들을 구체화하는 가운데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각각의 시에 자리해 있는 상실의식은 예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보편적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언제나 인간의 정신내면에는 “완전한 어떤 것의 상실이라는 원초적인 의식지향이 잠재해 있기 때문”2)이다. 원형적으로 동일성에의 상실의식, 즉 일체감에의 상실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정신내면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는 역으로 인간의 정신내면에 ‘완전한 어떤 것’에 대한 회복이라는 근원적인 상상력이 잠재해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정신내면에는 동일성의 상실의식에 상응하는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동일성의 회복의식, 즉 일체감의 회복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완전한 어떤 것’에 대한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은 모든 인간의 정신내면에 공유되어 있는 비극적 자기인식의 실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아담과 이브의 에덴으로부터의 일탈을 인간이 인격으로서의 자유의지를 갖게 된 근원적인 신화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간이 자연을 포함한 세계 전체로부터, 곧 낙원으로부터 동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3)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내면에는 일탈의지와 회귀의지라는 의식지향이 양가적으로 동시에 자리해 있다고 파악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니 만큼 언제나 완전한 낙원을 꿈꾸어온 것이 인간의 보편적 의식지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에덴의 상실, 곧 낙원의 상실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인간이 완벽한 행복의 공간으로 회억되는 에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식, 즉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낙원에의 노스탈쟈’ 개념도 실제로는 “타락 이전의 조건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랜 소망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4) 낙원에의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다름 아닌 여기에 있다.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은 본래 하나의 의식의 뿌리가 키워 올린 각기 다른 두 개의 줄기이기 때문이다.5)
인간의 정신내면에 존재해 있는 근원적 상실의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개념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무의식 속에 억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원천적으로 균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세계에 투사되는 것과 동시에 의식 이전의 무의식을 억압의 형태로, 곧 상실의 형태로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를 계승하여 무의식의 언어학을 세운 라깡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곧바로 언어(문화, 관습, 법률) 속에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를 인간과 인간의 무의식(억압)이 동시에 태어나는 공동모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라깡인 셈이다. 물론 이는 억압(무의식)이 인간의 정신 속에 형성되는 시기와, 언어가 인간의 정신 속에 형성되는 시기가 동일하다고 파악하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유아기의 극히 짧은 기간 동안, 곧 강보에 싸여 어머니가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하는 기간 동안을 제외하고는 온갖 억압, 곧 상실 속에 처해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라깡은 억압 이전의 세계를 상상계라고 부르고 억압 이후의 세계를 상징계라고 부른다. 라깡에 의하면 끊임없이 억압 이후의 상징계로부터 억압 이전의 상상계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이러한 논의는 잃어버린 낙원, 곧 상상계에 대해 지속적인 동경심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라깡의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살펴본 적이 있는 낙원 상실의식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7) 상상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과 낙원에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국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무의식으로서의 상실의식이 각각의 시에 막연하고 불투명한 관념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형태로 상실의식이 표현되어 있는 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논의를 예의 상실의식이 막연하고 불투명하게 원형 그대로 표현되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는 명확하고 가시적인 상실의 대상을 포괄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구체적인 현실생활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 거개의 시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의 실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오장환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에서도 상실의식은 확실한 대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확실한 대상은 일단 가족과 고향을 가리킨다. 가족상실과 고향상실이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상실의식의 실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가족상실과 고향상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자아상실을 토대로 하고 있는 조국상실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고는 오장환 시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을 좀더 정밀하게 살펴보는 가운데 그것이 갖는 바른 의미를 탐구하는 데 목표를 둔다.
2. 본론-상실의식의 실제
1) 자아상실
오장환의 시를 맨 처음 상실의식의 관점에서 논의한 사람은 정한숙이다. 정한숙은 일찍이 “悲觀的인 現實認識이 지배하는 그[오장환]의 시의 喪失感은 결국 고향으로 향하는 끝없는 출발조차도 쓸쓸한 旅程에 묻어버리게 하는 아득한 슬픔으로 나타”8)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한숙의 이러한 지적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매우 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정한숙의 예의 지적이 오장환의 시세계 일반을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이라는 양가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장환의 시에 대한 연구도 이제는 상당한 정도로 그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고향’ 모티프를 점검하는 정도에 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한숙의 예의 지적 이래 ‘고향’이 오장환의 시를 연구하는 핵심 대상으로 불거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만으로도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이라는 양가적 관점으로 그의 시세계 일반을 탐구하려고 하는 본고는 충분히 의미를 갖는다.
물론 오장환의 시에 신화적이고 무의식적인 의미에서의 ‘상실의식’과 ‘회복의식’만 표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면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상황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상실’과 ‘회복’이라고는 했지만 각각의 시에서는 그것이 ‘가족상실’과 ‘가족회복’, ‘고향상실’과 ‘고향회복’의 양상으로 드러나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조국상실로부터 발원되기는 하더라도 자아상실을 토대로 하는 가운데 가족상실과 고향상실로 구체화되는 것이 그의 시의 상실의식의 실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상실의식은 각기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도 자아상실→가족상실→고향상실→조국상실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자아상실의 양상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장환의 시에 나타나 있는 자아상실의 양상과 관련하여 정작 주목이 되는 것은 타락한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타락한 자아’이다. 하지만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타락한 자아가 그 자체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회복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타락한 자아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타락한 자아’를 중심으로 그의 시에 담겨 있는 자아상실의 면모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둔다.
망명한 귀족과 어울려 풍성한 도박, 컴컴한 골목 뒤에선 눈자위가 시푸른 청인이 괴침을 훔칫거리며 길 밖으로 달려 나간다. 홍등녀의 嬌笑, 간드러지기야. 생명수! 생명수! 과연 너는 아편을 가졌다. 항시의 청년들은 연기를 한숨처럼 품으며 억세인 손을 들어 타락을 스스로이 술처럼 마신다.
榮養이 생선가시처럼 달갑지 않는 해항의 밤이다. 늙은이야! 너도 수부냐? 나도 선원이다. 자 한 잔, 한 잔, 배에 있으면 육지가 그립고, 물에선 바다가 그립다. 몹시도 질척어리는 해항의 밤이다.
-「海港圖」부분
이 시는 “홍등녀의 嬌笑”가 “간드러지”는 어느 해항의 “컴컴한 골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그곳에서 “연기를 한숨처럼 품으며 억세인 손을 들어 타락을 스스로이 술처럼 마”시는 청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일단 “해항의 밤이다. 늙은이야! 너도 부수냐? 나도 선원이다. 자 한 잔, 한 잔”과 같은 구절에 의해 확인이 된다. 이를 테면 도박과 술과 계집과 아편의 향연에 빠져 있는 것이 이 시의 화자라는 것이다. 이처럼 타락한 화자는 또 다른 시의 “현화식물과 같은 계집”과 “시꺼믄 얼굴”의 사내가 이루는 “퇴폐한 향연”(「매음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위의 시 「海港圖」에서 시인이 화자를 이처럼 타락한 존재, 즉 상실된 존재로 그려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우선 그가 화자를 “배에 있으면 육지가 그립고, 뭍에선 바다가 그”리운 ‘선부’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항구의 “컴컴한 골목”으로 술과 계집을 찾아다니는 선부가 온전한 자아를 갖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가 화자를 이처럼 타락한 자아로 드러내게 된 데는 좀더 깊은 운산이 깔려 있는 듯싶다. 이러한 논의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깊이 병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8) 실제로도 저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깊이 병들어 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시인 오징환이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나는 병든 사나이
-「黃昏」부분
딱따구리는, 불길한 가마귀처럼 밤눈을 밝혀가지고 병든 나무의 뇌수를 쪼웃고 있다.
-「毒草」부분
수박씨를 까부수는 병든 계집을—
-「海獸」부분
병든 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The Last Train」부분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病든 서울」부분
병든 것은 너 뿐이 아니다. 온 서울이 병이 들었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부분
위의 예문은 ‘병든’이라는 수식어가 들어 있는 그의 시 몇 편이다. 이들 시에 따르면 고향이며, 서울이며, 나무며, 계집이며, 歷史며, 그 자신이며 병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병들어 있다는 것은 타락해 있다는 것이고, 타락해 있다는 것은 상실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대의 제반현실과 상호 맞물려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병든 자아, 타락한 자아, ‘상실된 자아’라는 얘기이다. “신뢰할만한 현실은 어디 있느냐”(「旅愁」)고 하면서 그가 극단적으로 당대의 삶 일반을 부정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시의 화자가 상실된 자아 그 자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詩作의 全過程에 끊임없이 상실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山峽의 노래」중의 “한동안 그리움 속에/고운 흙 한줌 내 마음에는 보리이삭이 솟아났노라”와 같은 구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회복의 정서보다는 상실의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인 것은 분명하다.
2) 가족상실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상실된 자아는 좀더 폭넓게 세계와 관계하는 가운데 점차 상실된 가족으로 구체화된다. 현실성과 객관성을 획득하면서 점차 그 중심이 가족상실 쪽으로 이동되어 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시의 대상도 차츰 자아에서 세계로, 주체에서 객체로 이동되어 간다.
물론 자아상실과 가족상실의 양상이 상호 맞물린 채 드러나는 그의 시도 없지는 않다. 「다시 美堂里」와 같은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 시에서 화자는 “돌아온 탕아라 할까/여기에 비하긴/늙으신 홀어머니 너무나 가난하시어/ /돌아온 자식의 상머리에는/지나치게 큰 냄비에/닭이 한 마리/아즉도 어머니의 가슴에/또 내 가슴에/남은 것은 무엇이냐”라고 하며 강하게 ‘母喪失意識’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시에서의 모상실의식은 자아상실의식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자아상실’(돌아온 탕아)과 맞물려 표출되고 있는 것이 여기서의 ‘모상실’(늙으신 홀어머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가족상실의식이 근원적으로는 모상실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지적을 그의 시가 전적으로 모상실의식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비중이 약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부상실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가족상실의식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님
내가 혹시 고향에 가면, 그리고 그 때가 겨울이라면
고이 쌓인 눈을 헤치고라도
평생에 좋아하시는 술, 고진음자 술.
그 대신에 성냥불만 그어도 불이 붙는 술.
-「고향이 있어서」부분
솔잎이 모다 타는 칙칙한 더위에
아버님 산소로 가는 산길은
붉은 흙이 옷에 배는 강팍한 땅이었노라
-「성묘하러 가는 길」부분
위의 두 편의 시는 공히 “아버님 산소”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오장환 시의 경우 가족상실의식은 이처럼 부상실의식, 나아가 父死亡意識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부사망의식, 즉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다는 의식은 결국 가족의 중심이 해체되고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가족상실의식은 부사망의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장환의 시에 나타나 있는 부사망의식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정신내면에서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가족상실의식은 모상실의식에 좀더 기울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모상실의식’은 ‘모회복의식’을 포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어머니는 일단 원망의 대상으로, 곧 거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어머니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맨든 것이냐! 나는 異港에 살고 어메는 고향에 있어 얕은 키를 더욱 꼬부려가며 무수한 세월들을 흰머리칼처럼 날려보내며, 오 어메는 무슨, 죽을 때까지 윤락된 자식의 공명을 기두리는 것이냐. (…중략…) 한나절 나는 향수에 부다끼었다.
어메야! 온 세상 그 많은 물건 중에서 단지 하나밖에 없는 나의 어메! (…중략…) 어메여! 아는가 어두운 밤에 부두를 헤매이는 사람을.
-「鄕愁」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무슨 필요가 있기에 나를 만든 것이냐”라고 하며 어머니를 강한 어조로 원망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타락한 자아의 실존적 고통 때문으로 보인다. 화자가 저 자신을 “어두운 밤에 부두를 헤매”고 있는 “윤락된 자식”으로 명명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의 가족상실의식도 자아상실의식과 상호 뒤얽혀 있는 것이 된다. ‘자아상실의식’→‘가족상실의식’의 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시에서의 상실의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에 담겨 있는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어머니에 대한 소망과 다르지 않다. 어머니로부터 떠나가고자 하지만 결국은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에의 일탈과 회귀를 동시에 포유하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상실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오장환의 시가 포유하고 있는 ‘모상실의식’과 ‘모회복의식’은 「小夜의 노래」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어메야, 아즉도 차디찬 묘 속에 살고 있느냐/정월 기울어 낙엽송에 쌓인 눈 바람에 흩트러지고/산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개울물도 파랗게 얼어/진눈개비는 금시에 나려 비애를 적시울 듯/徒刑囚의 발은 무겁다”와 같은 구절에 담겨 있는 의식지향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의 시 일반에 드러나 있는 ‘모상실의식’은 일탈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회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야 옳다. 상실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회복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대부분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래한다. 어머니의 품에서…
황토산이 사방으로 가리운
죄그만 동리.
한동안 시달려 강줄기마저 메마른 고장
머리 숙이나이다. 땀 흘리는 사람들이여!
그래도
무연하게 넓은 들에는
온갖 곡식이 맺히어 스사로 무겁고
산고랑에까지
목화다래는 따스하게 꽃피지 아니했는가!
칠십 가차운 어머니
이곳에 혼자 사시며
돌아오기 힘든 아들들을 기다려
구부렁구부렁 농사를 지신다.
아 그간
우리네 살림은 흩어져
내 발 디딜 옛 마을조차 없건만
나는 돌아왔다.
어머니의 품으로……고향에 오듯이
-「어머니의 품에서」부분
이 시에는 제목 그대로 ‘어머니의 품에서’ 느끼는 시인의 일체감이 노래되어 있다. 여타의 시가 보여주는 우울한 상실감 대신 쾌활한 회복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이 시에서의 ‘어머니’가 오직 칭송과 상찬의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은 아니다. “혼자 사시며/돌아오기 힘든 아들들을 기다려/구부렁구부렁 농사를” 짓고 있는 존재가 여기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어머니’가 앞의 시들에서처럼 거부나 원망의 대상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앞의 시들에 비하면 훨씬 더 긍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어머니’이라는 뜻이다. 평화와 안식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어머니이거니와, 이는「다시 美堂里」ㆍ「어머니 서울에 오시다」등의 시를 통해서도 익히 찾아볼 수 있다.
오장환의 시에 이처럼 ‘모상실의식’과 ‘모회복의식’이 양가적으로 드러나는 데는 그 자신의 개인사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머니 韓學洙는 원래 그의 아버지 吳學根의 첩실이었다가 본처 李民奭이 죽은 다음에야 적실이 된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그가 남달리 어머니에의 집착을 보여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오장환의 시에는 가족 일반의 모습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가족상실의 구체적인 예로 ‘母喪失’이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시인, 예컨대 백석이나‧ 이용악의 시와는 달리 그의 시에는 이른바 가족주의적 편린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져보면 이 또한 그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첩실의 자식으로 적잖은 억압을 받았을 그가 가족주의적 발상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 「어머니 품에서」는 ‘고향상실의식’과 ‘고향회복의식’이 동시에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이 된다. 이 시가 ‘모상실의식’과 ‘모회복의식’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이 시의 화자가 “황토산이 사방으로 가리운/죄그만 동리”를 “노래”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 때의 “죄그만 동리”는 다름 아닌 그의 고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 ‘歸鄕日記’라는 부제가 덧붙여져 있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시는 ‘가족상실의식’과 ‘가족회복의식’, ‘고향상실의식’과 ‘고향회복의식’이 동시에 담겨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가족상실의식’과 ‘가족회복의식’에서 ‘고향상실의식’과 ‘고향회복의식’으로 확장되어 가는 내용을 포유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서로 다를 바 없는 것이 가족의 품(어머니의 품)이고 고향의 품이기 때문이다.
3) 고향상실
오장환의 출생지는 충청북도 報恩郡 懷仁面 中央里이다. 그는 1927년(10세)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가족을 따라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西理로 이사를 한다. 따라서 오장환의 시에 나타나 있는 고향은 각기 다른 두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충북 보은군 회인면(출생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와 살게 된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성장지)이다.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고향이 탄생지인 보은군 회인면 일대일 경우도 있지만 성장지인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일대일 경우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9)
대부분의 그의 시에서는 고향이 어머니가 현재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창작연대를 포함한 시간적 배경과, 작품의 제재를 포함한 공간적 배경을 따져 보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고향은 충북 보은이 아닌 경우도 적잖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처럼 세세한 사실이 아니라 그의 시에 고향의 제재가 매우 강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 자체이다. 물론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고향은 ‘상실’의 면과 ‘회복’의 면을 동시에 포유한다.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고향도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이 서로 맞물려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 담겨 있는 ‘고향’의 제재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잖은 연구가 이루어져온 바 있다. 정한숙ㆍ박윤우ㆍ김명원ㆍ최두석ㆍ오세영ㆍ성기각ㆍ김학동ㆍ송기한 등의 논고가 그 예이다.10) 하지만 이들의 논고의 경우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고향’의 제재를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이라는 양가적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다.
이들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에서 ‘고향’은 詩作의 초기부터 나타나는 핵심 모티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성벽』(1937) 시절의 작품만 하더라도「목욕간」‧「旅愁」‧「黃昏」‧「鄕愁」등에 ‘고향’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아 나의 마음을 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샅, 썩은 울타리, 늙은 아배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혀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황혼」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황혼의 저자” 위에 서 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낼 만큼 깊은 향수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통해 그가 떠올리는 고향은 그다지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다. “날마다 야위어가는” “병든 학”으로, “썩은 울타리”로 비유되고 있는 곳이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고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고향은 일종의 愛憎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고향이라는 공간이 지속적으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회복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 이처럼 고향에 대한 열망이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단은 그가 현재의 거주공간인 서울을 만족할만한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언제나 비판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서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장환의 시에서는 서울이 “번성하”는 “화장터”이고, “거대한 胃腸”이며 “화농된 오점”(「首府」)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가 시를 통해 꿈꾸는 이상향은 ‘고향’인 보은이나 안성도 아니고, ‘타향’인 서울도 아니라는 것이 된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로 미루어 보면 그의 내적 욕구를 완전하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삶의 터전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 고향의 모습이 점차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계속되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도 끝내 꿈과 이상을 잃지 않고자 하는 저 자신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고향’의 제재가 시집 『나사는 곳』시절에 이르러 좀더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이 대부분 1939년 7월 이후 1945년 8월 사이에, 이른바 일제말의 암흑기에 씌어진 것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이 창작될 무렵 그의 시의 주요 모티프가 ‘고향’이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고향’의 모티프야말로 이 시절의 그의 시를 가늠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시절의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고향’은 현실적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그 나름의 암중모색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고향’의 제재 이외에는 어떠한 시적 돌파구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렵에도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곧 향수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밤늦게 들려오는 기적소리가/산 짐승의 울음소리로 들릴 제,/고향에도 가지 않고/거리에 떠도는 몸은 얼마나 외로울 건가”(「나사는 곳」)와 같은 구절에 담겨 있는 의식지향이 그 예이다. 고향의 제재가 보여주는 이러한 점은 「영창」‧「귀향의 노래」등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물론 ‘고향’을 제재로 취하고 있는 그의 시의 핵심 정서가 오직 향수라고만 할 수는 없다. 고향에 돌아가 고향의 자리에서 고향의 풍물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 즈음의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고향’이 청록파의 그것처럼 자연친화를 보여주거나 신석정의 그것처럼 신화적 모성회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삶의 터전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고향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 짐승의 우는 소리를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나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서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며 따뜻하리라.
고향 가차운 주막에 들려
누구와 함께 지난 날의 꿈을 이야기 하랴.
양구비를 끊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고향 앞에서」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고향 가차운 주막” 어디쯤에 서 있다. 그곳에서 화자는 고향을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나려”가는 강이 있는 자연의 공간으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공간이라고 했지만 “울멍울멍” 등의 구절로 미루어 보아 다소간은 인간화되어 있는 곳이라고 해야 옳다. 그가 자신의 고향을 “양구비를 끊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가 “공연히 눈물지”우는 공간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그가 자신의 고향을 구체적인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고향은 별로 아름답거나 그윽하지 않다. 그의 시에서 고향이 이렇게 인식되는 것은 무엇보다 고향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고향의 자연을 “붉은 흙이 옷에 배는 강팍한 땅”으로, “팍팍한 산길”(「省墓하러 가는 길」)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에는 그가 이 나라의 산하를 “거츠른 풀잎이 함부로 엉클어”(「荒蕪地」)져 있는 황무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끔 솔나무 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같이 어리고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붉은 산」전문
이 시에 의하면 시인 오장환에게 고향은 단지 “붉은 산”일 따름이다. “붉은 산”일 뿐인 ‘고향’을 바라보고 있는 오장환의 정신내면은 매우 절망적으로 보인다. “이따끔 솔나무 숲이 있”기는 하지만 황무지와 다름없는 것이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도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고향 안에서 고향을 인식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고향은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이 양가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장환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고향’은 그 의미를 확산시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고향에 대한 이런저런 절망은 식민지 조국의 산천에 대한 깊은 애정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11) 고향 산천의 “깊은 산골/인적이 닿지 않은 곳에” 내리는 “소나기”로부터 (「노래」) 조국의 ‘노래’를 듣는 것이 그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급한 벼랑을 도는” “숨이 가”뿐 “강물”(「강물을 따라」)에서, 그리고 “큰물이 갈 때” “떠내려가는” “시뻘건 물 우에 썩은 용구새”(「장마철」)에서 조국의 ‘역사’를 깨닫는 것이 그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시에 담겨 있는 ‘고향상실’과 ‘고향회복’의 의미가 ‘조국상실’과 ‘조국회복’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絶頂의 노래」ㆍ「山峽의 노래」ㆍ「山골」등에 담겨 있는 자연 일반에 대한 애정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첫서리」ㆍ「첫겨울」등에 나타나 있는 고향의 풍광에 대한 섬세한 점묘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 인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대들어 과일 따는 어린애/날마다 사다리 놓고 지붕 우에 올라가더니/ /홍시 찍어먹는 가마귀, 검은 가마귀/가 소년을 부른다./무서리 나린 지붕 우에/멀고 먼 하늘이 있다”(「첫서리」)와 같은 표현은 조국의 산천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향의 산천이 내포하는 이러한 의미는 해방기에 씌어진 그의 시「봄에서」에 이르러 더욱 자명해진다. 조국의 대지를 상찬하고 있는 이 시에서는 “유구한 조상들의 땀과/메마른 시체를/그리고/기름진 압제자의, 반역자의/드러운 몸채를 받고도/말없이 티끌로 돌이키는/오, 흙이여!”하고 외치고 있는 것이 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즈음의 그의 시에 담겨 있는 ‘고향’이 완전한 회복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全詩作年限에 걸쳐 자신의 시대를 ‘회복의 시대’가 아니라 ‘상실의 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그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얼마간의 변화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상실’과 ‘회복’을 동시에 포괄하고 것이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고향’이라는 것이다.
3. 결론-조국 상실의 역설적 형상화
오장환의 시에 상실의식이 표출되도록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상실된 조국이다. 물론 이때의 상실의식이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의미를 갖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든 일제강점기라는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 그의 시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시 일반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은 당대의 현실에 대응하는 양상에 따라 대강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당대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의 현실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당대의 현실을 극복의 자세로 임하는 경우를 뜻하고, 후자는 당대의 현실을 좌절의 자세로 임하는 경우를 뜻한다. 전자는 다시 초월의 방식을 취하는 경우와, 투쟁의 방식을 취는 경우로 나누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시 일반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은 초월의 방식, 투쟁의 방식, 좌절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2)
‘초월의 방식’이란 불완전한 현실을 포기하고 관념의 세계에서 그 완전성을 구하려는 현실대응의 방식으로, 이는 당연히 초월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초월의 세계란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낙원의 세계를 가리킨다. ‘투쟁의 방식’이란 이 땅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상실의식을 극복하려고 하는 현실대응의 방식을 뜻하는데, 이러한 측면에서의 현실대응의 방식은 당연히 사회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1920년대 이래의 프롤레타리아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좌절의 방식’이란 상실의식은 표출되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포기되어 있는 경우로, 거듭되는 체념에 따라 감각적 향락에 빠지고 마는 현실대응의 방식을 뜻한다. 이러한 현실대응의 방식이 갖는 세계관은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고, 그 삶의 양식은 퇴폐주의라고 할 수 있다.13)
그런데 오장환 시에 내포되어 있는 상실의식은 이러한 분류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그의 시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은 ‘좌절의 방식’에서 ‘투쟁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상실의식은 좌절의 방식으로 현실에 대응하더라도 회복에의 의지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체념과 좌절, 나아가 감각적 향락에 빠져 있는 듯할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그것으로부터 극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의 화자이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자아→가족→고향이 항상 ‘상실’과 ‘회복’의 범주 안에서 동시적으로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 존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시에서는 상실의식이 투쟁의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른바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꿈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현실세계의 안에서 상실의식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시의 화자가 그것을 선전적이고 선동적이라고 할 만큼 적극적인 세계관을 통해 개진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의 시의 화자가 계속되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상실의 현존을 극복하기 위해 능동적인 의지를 감추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이 되는 것은 고향의 모티프이다. 이는 상실의식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일상의 면에서도 그렇거니와, 본래 향수라고 하는 것이 고향을 떠나면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는 심리의 면에서도 그렇다. 그의 시에서 고향이 이처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조국의 山河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산하는 곧 국토이고, 국토는 곧 조국이다. 따라서 고향의 상실은 국토의 상실을 뜻하고, 국토의 상실은 조국의 상실을 뜻한다. 물론 국토의 상실은 자아의 상실과 맞물려 있다.
오장환의 시에는 이처럼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이 두루 공유되어 드러난다. 하지만 회복의식보다는 상실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의 시에 이처럼 상실의식이 강화되어 드러나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1930년대 후기에 이르러 일제의 지배와 탄압이 훨씬 간교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1936년에 부임한 미나미 시로오(南次郞) 총독은 취임과 동시에 내선일체라는 구호에 따라 훨씬 적극적으로 황국신민화정책을 수행한 바 있다. 그의 시에 상실의식이 강화되어 나타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갖는 문화적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유학을 통해 예술적 교양과 감수성을 고양시키고 돌아온 최고의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식민지적 상황에서는 그 역시 문화적 열등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은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본고에서 이루어진 그동안의 논구를 요약ㆍ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 그의 시에 내포되어 있는 ‘상실의식’의 전모를 해명하기 위해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자아상실→가족상실→고향상실→조국상실의 축이다. 이와 관련해 살펴보면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자아상실’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타락한 자아’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시와 함께 하는 ‘타락한 자아’로서의 자아상실은 무엇보다 타락한 세계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그의 시의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는 ‘병든’이라는 수식어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병든 세계’를 반영하는 ‘병든 자아’, 곧 ‘타락한 자아’가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자아상실의 실제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가족상실’의 양상은 대부분 모상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가족상실의식의 핵심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대체로 전통의 의미(초기시)와 고향의 의미(후기시)를 갖는다. 전자의 경우는 일탈의 대상이 되고, 후자의 경우는 회귀의 대상이 된다. 일탈의식(초기시)→회귀의식(후기시)의 축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모상실의식의 기본구조인 셈이다.
오장환의 시에서 ‘상실된 고향’은 우선 향수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일단은 어머니가 기다리는 휴식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상실된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고향이 항상 행복하고 아름답게 반추되는 어떤 영원의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더러는 거부되어야 할 전통의 공간으로, 더러는 고통스러운 생존의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의 시에서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고향에 돌아와 고향에서 고향을 노래하고 있는 시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고향상실의식은 동시에 ‘귀향’과 ‘탈향’이라는 양가적 내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장환의 시에 담겨 있는 가족상실의식과 고향상실의식은 조국상실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아상실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자아상실의식을 바탕으로 가족상실의식과 고향상실의식을 통해 조국상실의식을 표상하는 것이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상실의식의 기본구조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상실된 자아와 가족과 고향이 끊임없이 회복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상실의식은 1930년대의 시사 일반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특징과도 두루 통한다. 한편으로는 개별성도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도 갖고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상실의식의 실제라는 것이다.
키워드: 한글(영문): 상실(Loss), 회복(Recovery), 자아(Ego), 타락(Depravation), 가족(Family), 어머니(Mother), 고향(Native Place), 조국(Fatherland)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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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사』, 남만서방,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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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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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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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각,「오장환의 시세계와 그 변모 양상」, 경남대 대학원 석사 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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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식민지 문학의 상실의식과 낭만주의ㆍ상」, 『현대문학』, 1990년 12월호.
구중서, 「오장환론」, 『시문학』, 1989년 6월호, 68쪽.
〈한글 요약〉
오장환의 시에 담겨 있는 상실의식은 ‘좌절의 방식’에서 ‘투쟁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다.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상실의식은 좌절의 방식으로 현실에 대응하더라도 회복에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회복의식보다는 상실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있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해야 옳다. 그의 시에 이처럼 상실의식이 강화되어 드러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1930년대 후기에 이르러 일제의 지배와 탄압이 훨씬 간교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상실의식이 강화되어 나타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갖는 문화적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표현되어 있는 상실의식과 회복의식은 비교적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본고에서 그의 시에 내포되어 있는 ‘상실의식’의 전모를 해명하기 위해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자아상실→가족상실→고향상실→조국상실의 축이다.
오장환의 시에 드러나 있는 ‘자아상실’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타락한 자아’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시와 함께 하는 ‘타락한 자아’로서의 자아상실은 무엇보다 타락한 세계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그의 시의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는 ‘병든’이라는 수식어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병든 세계’를 반영하는 ‘병든 자아’, 곧 ‘타락한 자아’가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자아상실의 실제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 함유되어 있는 ‘가족상실’의 양상은 대부분 모상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가족상실의식의 핵심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대체로 전통의 의미(초기시)와 고향의 의미(후기시)를 갖는다. 전자의 경우는 일탈의 대상이 되고, 후자의 경우는 회귀의 대상이 된다. 오장환의 시에서 ‘상실된 고향’은 우선 향수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일단은 어머니가 기다리는 휴식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상실된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고향이 항상 행복하고 아름답게 반추되는 어떤 영원의 공간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더러는 거부되어야 할 전통의 공간으로, 더러는 고통스러운 생존의 공간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오장환의 시에 담겨 있는 가족상실의식과 고향상실의식은 조국상실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아상실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자아상실의식을 바탕으로 가족상실의식과 고향상실의식을 통해 조국상실의식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와 함께 하는 상실의식의 기본구조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상실된 자아와, 가족과, 고향이 끊임없이 회복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상실의식은 1930년대의 시사 일반이 보여주는 보편적인 특징과도 두루 통한다. 한편으로는 개별성도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도 갖고 있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상실의식의 실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