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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2월 24일 대강절 넷째주일 낮 예배 설교 +
+ 제 목 : “예수오심(8) - 보배로 오신 예수님!”
+ 본 문 : 고린도후서 4장 7절 – 18절 (신약 289쪽)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아멘!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선포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 성경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여 /
100배의 복을 받으리라. / 아멘! 아멘!
“인사만 잘 해도 먹고 산다.” - 사고행축 /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축복합니다.”
오늘은 예수님 오심을 기념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넷째 주일,
“예수 오심(8) :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오신 예수님!” 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선포합니다. “예수 믿는 나는 / 우리의 보배로 오신 예수님을 / 믿습니다. / 아멘!”
찬양합니다. /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위대한 사도 바울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 서게 됩니다.
사도로 선 게 아니고, 복음을 전한다는 죄목의 죄인으로 서 있지만 너무나 당당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명령 선포를 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아멘!
참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구원의 확신이 가득찬 신앙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그리고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도, 그렇게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당당하게 신앙고백 할 수 있었던 능력이 오늘 본문에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7절 - 10절까지 한 목소리로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고 우리도 보배로운 예수님을,
질그릇 같은 저와 여러분의 몸에 모셨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질그릇과 같이 보잘 것 없고,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유한한 존재입니다.
호흡이 멈추는 순간, 영혼이 떠난 육신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흙으로 지음 받은 질그릇 같은 우리의 육체 안에, 보배로우신 예수님을,
모시므로 예수님께서 질그릇과 같이 깨지기 쉬운 우리 육체를 성전 삼고 함께 계십니다.
보배와 같은 예수님, 연약하고 부족하여 깨지기 쉬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보배와 같은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잘 모시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보배와 같은 복음이심을 믿습니까?’ 아멘 믿습니다.
‘우리 자신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부족하여 깨지기 쉬운 존재임을 믿습니까?’ 아멘!
‘보배와 같은 복음이신 예수님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정말 잘 믿으시겠습니까?’ 아멘!
우리 고백하는 마음으로 부릅시다. /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배와 같은 복음이신 우리 예수님은, 보잘 것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여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배와 같은 예수님이 계신지, 우린 늘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배와 같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 우리들의 삶도 정말 달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질그릇인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신, 내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첫째로, 질그릇인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내 삶은 행복한 삶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여러분도 그토록 원하는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상식적인 행복론, 심리적인 행복론, 윤리적인 행복론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론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믿음을 가지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말씀합니다.(시2:12/65:4/112:1/갈3:9)
사도 바울은 두뇌가 명석했습니다. 천성이 선했고, 학벌이 훌륭했으며, 문벌도 좋았습니다.
이처럼 대단한 스펙을 갖춘 바울이 세상적으로 출세를 꿈꾸었다면, 크게 출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예수님을 모신 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다 버렸습니다.
아그립바 왕이나 베스도 총독은 이런 바울을 두고, 참 아까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모든 좋은 스펙도 다 버리고, 재물도 없고, 행복한 가족도 없고,
세상적인 누림도 없고, 몸은 병들고, 지금 복음의 죄인으로 쇠사슬에 얽매여 곧 죽게 될,
위기에 놓여 있는 바울을 보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 자신은 불행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115편 15절 말씀처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이 말씀처럼 바울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복을 많이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로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쇠사슬에 결박된 손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당당하게 “나는 행복한 사람” 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 자신은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보배이신 예수님께서,
그 질그릇과 같은 자기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까?
보배이신 예수님을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모신 그리스도인임을 확신한다면, 나는 행복하다고,
고백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나는 행복해요, 죄사함 받았으니, 아버지 품안에서,
떠나 살기 싫어요. 나는 행복해요, 사랑이 샘솟으니, 이 세상 무엇이든 채우고도 남아요.“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은혜의 삶입니다.
둘째로, 질그릇인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평안한 삶이 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육신과 영혼의 죽음이 있게 되고, 하나님과 분리된 삶이 되어,
불안하고, 두렵고, 양심이 고통스럽습니다. (롬6:23/사59:2/시32:3/시51:3/행24:25/행2:37)
그런데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그 은혜로 죄 사함 받아서,
의인의 삶을 살므로, 근심도, 두려움도, 불안함도 없는 평안한 삶을 살게 됩니다(요 14:27).
이것이 질그릇과 같은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눅 12:20)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도 바울은 항상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다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너무 평안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감사기도가 나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울 불렀습니다.
이것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약한 것 같고, 모자라고 부족한 것 같아도 질그릇과 같은,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선한 양심대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때문에 죄로 인한 두려움이나 불안은 사라지고, 주님 주시는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넘쳐나는 기쁨과 평안 때문에, 찬송이 흘러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배로우신 모신 우리 이 은혜, 이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질그릇인 내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자족하는 삶이 됩니다.
백여 년 전, 네바다 주에 살던 헨리 콤스톡이라는 사람은 버지니아 시티에 위치한,
큰 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우리나라 돈으로 약 천만 원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산에서 미국 최대 규모의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었고, 그 매장량을,
돈으로 계산하니, 5억 달러 이상 - 우리나라 돈으로 6천 억원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콤스톡씨는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화만내다가 1885년 10월에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는 6천억 짜리 산을 천만 원에 판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그보다 더 큰 두 번째 실수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천하하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스승을 은 30에 파는 실수를 회개하지 못하고, 자살해 버린 실수를 저질렀던,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와 같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육신의 건강을 잃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가깝게 지냈던 사람으로부터 물질에 손해도 보며, 억울한 말을 들으면서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나도 다른 사람을 배신하고, 물질의 손해도 주고, 상처주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당하고, 이런 일을 당하게 한 후에 나의 행동이 문제입니다.
그 모든 실수와 아픔을 내 안에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주시는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실수와 아픔을,
예수님과 함께 극복하고, 주님 안에서 성공자로서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사람의 가치는 입고, 먹고, 살아가는 의식주로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찬양과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후부터는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복음 전하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예배출석 잘하고, 교회에서 맡은 일 성실히 하며, 헌금 많이 하고, 기도생활 하고,
인간관계 잘하면, 신앙생활 잘 한다고 말하고, 자신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사람에 비교하면 잘 한 것이지만, 그것은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적인 신앙생활이지, 나처럼 신앙생활하라고 자랑할만한 자랑거리도 못되며,
사람들에게 칭찬받아야 할 만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큼 승진하고, 부자가 되고, 자식들 잘 되면,
축복받았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예수 안 믿는 불신자들도 받는 세상적인 일반 축복입니다.
진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랑거리가 되고, 칭찬받을 만한 성숙한 신앙인의 삶은,
교회 안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적인 신앙생활은 물론, 경건과 절제생활을 통해,
이웃에게 선한 일, 곧 은밀한 구제와 선교사업에 동참하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신앙 연조도 있고, 입으로는 제법 신앙적인 이야기도 하고,
세상적으로도 살만큼 사는데, 교회 안에서 당연히 해야 할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직분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눌 만큼 가졌으면서 모으고 쌓아 둘 줄만 알지, 은밀한,
나눔을 통한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고, 선한 사업에 인색한, 그래서 움켜잡는 일에만,
길들여진 사람들, 그리하여 일평생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쁨, 진정한 축복을 맛보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은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복된 신앙생활, 은밀한 나눔이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존경받는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나의 나 된 것은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배로우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나의 삶은 질그릇 같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축복된 삶이 되었다.‘ 고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간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생활과 자신의 삶의 원칙 다섯 가지를 세운 다음,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목숨이 살아 있는 한 전력을 다하여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욕이 되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셋째는, 어떤 말이나 행위도 앙갚음이나, 복수심에 의한 것일 때, 결코 하지 않는다.
넷째는, 내가 하려고 하다가 걱정거리가 되거나 부끄러움으로 남을 일은 결코 안 한다.
다섯째, 모든 시간은 창조적이며 건설적으로 쓰고, 어물어물 시간을 보내지 않게 한다.
그리고 결단하기를 보배로우신 예수님을 모신 나의 삶은, 오직 예수님만을 위하여 산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그의 신앙과 삶의 원칙이, 그를 존경받는 성공자가 되게 했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소개할 사람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파스칼입니다.
그는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겨우 39세로 일생을 마쳤습니다만, 그의 삶의 중심부에서,
꿈틀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파스칼은 누구나 깨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날마다 감사 신앙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팡세’ 라는 작품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제 2의 바이블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환난과 고통이 계속되는 자신의 삶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예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임을, 팡세를 통하여 고백하였습니다.
세 번째 제가 소개할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으로, 목사님은 인간의 평등,
비폭력의 평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위한 군사 무력주의를 외치다가 1968년 4월 4일,
39세의 나이로 암살당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예수님을 담고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류의 생명을 위해 죽으신 예수의 삶을 본받아 30회 이상 체포되는,
고난의 삶 가운데서도 날마다 감사하고,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정의를 외쳤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경찰관에게 끌려가는 것을 TV에서 본 네 살 난 딸이 울기 시작하자,
6살인 아들 마티가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울지마, 아빠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러 가는 거야.’
킹 목사님은 죽었지만, 이후 미국의회가 목사님의 생일인 1월 20일을 국가공휴일로 정했고,
그는 지금도 세계 양심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예수님 모신 삶은,
불행한 것 같으나, 항상 행복했습니다. 항상 평안했으며,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우리들의 삶은 행복한 삶이 됩니다. 평안한 삶이 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아,
의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자족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보배와 같은 예수님을 담은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신앙,
은밀한 나눔이 있는 성도의 교제가 있는 이웃 사랑의 삶,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천국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