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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200× 93매
철 지난 바닷가
安 輝
'무쇠솥 진곰탕'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깊은 맛이 있었다. 담백한 국물의 구수한 뒷맛이 일품이었다.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였던지 사십여 평은 되어 보이는 널따란 식당 안에는 저 만큼 붙어 앉아서 시시덕거리는 젊은 남녀 한 쌍과 나, 그렇게밖에 손님이 없었다. 식당 한 구석에는 주인인 듯한 중년 내외가 파를 다듬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아닥다닥 어지럽게 엉켜있는 주점·나이트클럽·여관 그런 유흥업소 간판들이 보였다.
문득 곰탕 생각이 났던 것은, 첫날 바다에 도착한 기분으로 우럭 회에다가 소주를 마신 것을 시작으로 어제까지 사흘 째 줄곧 술과 함께 비린내 나는 해물음식만 먹은 결과였을 것이다. 이곳에 온 후 나의 일상은 내가 묵고 있는 콘도의 침대 위에서 뒹굴며 책을 읽거나, 밖에 나가 해변을 산책하거나 그러다가, 결국은 술을 찾아 마시는 일로 이어졌다. 식사를 하면서 반주로 술을 마셨고,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술과 안주를 사들고 와서 혼자서 줄기차게 홀짝거렸다. 그러다가 지치면 잠이 들었다.
출판사 일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려고 들면 한이 없는 것이 출판 일이었다. 아니, 아마도 그것은 출판사 밥 먹은 지 몇 해 동안 줄곧 일에만 몰두해온 나 혼자만의 생각일 지도 모른다. 그런 저런 일을 모두 팽개쳐 두고 무작정 이 곳으로 오면서 나는 내가 살아온 세상을 향해 잠시 커튼을 쳐두었다. 신문을 보지 않았고, 한 번도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휴대폰은 아예 자동차 어딘 가에다가 내던져 놓았다. 실로 몇 년 만에 가져보는 여유이던가.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세상일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나는 정말 모처럼, 한결 느긋해지고 단순해진 생활을 술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속이 쓰리기 시작했고, 시원하고 뜨끈한 곰탕 생각이 나도 모르게 간절히 솟아오른 것이었다. 나흘 전 이 곳으로 올 때 스쳐 지나오면서 보아 둔, '무쇠솥 진곰탕'이라는 플래카드를 크게 써서 내건 식당을 가까스로 기억해 낸 것은 다행이었다. 그래서 사흘 만에 처음으로 나는 콘도 주차장에 있던 내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던 거였다.
피서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해변, 한 고등 여름내 태양 볕이 쏟아져 내려 이글거렸을 모래밭은 이따금 씩 불어오는 해거름 바닷바람에 멱살을 잡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해풍은 가을 냄새를 살짝 풍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드문드문 귀했다. 해수욕장 입구를 빠져나오다 보니 그 동안 안으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세워져 주차비·청소비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던 임시 톨게이트가 철거되고 있었다. 미상불, 여름 해수욕장은 파장이었다.
사실 내가 철 지난 해수욕장을 찾아온 것은 일종의 도피와도 같은 것이었다. 야 이 눔아, 네 나이가 벌써 서른 하고도 둘이야. 정말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래? 아직도 그 년 못 잊어서 그러냐? 늦어지는 결혼문제를 두고 허구 헌 날 볶아대는 어머니의 성화와, 그에 못지않게 극성인 누이의 소개로 알게 된 인숙(仁淑)의 부담스러운 접근을 한꺼번에 누그러뜨릴 묘책으로 나는 홀연히 '잠적'하는 길을 택했다. 물론 이런 방법은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껏 어떤 상황이든 단 한 번도 나는 이 같은 방법을 동원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이런 도피 아닌 도피에는 충분히 설명될 만큼 특별한 동기나 목적 같은 것이 있지도 않다. 막연하지만,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 내가 가진 솔직한 대답의 전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은 나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곰탕집은 국도에서 해수욕장 쪽으로 꺾어 들어오는 길목 입구 유흥상가 일층에 있었다. 나는 땀을 흘려가며, 텁텁하지 않고 담백한 국물을, 구수한 그 뒷맛을 음미하며 하나도 남기지 않고 천천히, 끝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그리고는 엽차 잔의 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의 움직임에 대한 정확한 조건반사의 모습으로, 파를 다듬던 흙 묻은 손을 행주에 쓱 문지르면서 여주인은 카운터로 종종걸음을 쳐왔다.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식당밖에 세워 두었던 승용차에 올라앉아 막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당겨 맸을 바로 그 즈음이었다. 유흥 주점과 나이트클럽 따위의 간판들 사이에서 초라한 글씨로 얼굴을 겨우 내밀고 있는 '럭키장'이라는 이름의 여관 정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나오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이었다. 그 뒤를 이어 벌거숭이 사내 하나가 뒤뚱거리는 듯한 발걸음으로 따라 나오며 천둥치듯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야! 너 이년들 거기 안 서?"
양손에 신발을 움켜쥔 채 앞서서 화급하게 달려 나온 사람들은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들이었다. 두 여자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곧바로 내 차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어떤 판단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승용차 뒷문을 열고 와락 쏟아져 들어와서는 문을 닫아걸었다.
"아저씨! 우리 좀 살려주세요!"
애원하는 그 목소리의 볼륨은 앳된 아이들의 것에 가까웠다. 뒤따라오던 사내가 내 차를 거칠게 가로막고 섰다. 은빛 거울처럼 온통 사물이 반사되는 짙은 색안경이 우악스러워 보이는 그는 덩치가 컸고, 대머리가 약간 벗겨져서 그런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였다.
"그 애들은 내 여동생들이야. 빨리 내려 놔! 야, 이 년들 안 내려?"
기름기가 흐르는 큼지막한 얼굴에 암갈색 피부를 한 사내는 맨발이었으며, 트렁크 스타일의 팬티차림이었다. 배가 불룩한 상반신을 드러낸 벌거벗은 사내의 팔뚝에는 화살이 꽂힌 하트 문양의 문신이 아주 서툰 솜씨로 투박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그 말 믿지 마세요! 빨리 도망가 줘요! 네?"
뒤통수에다 대고 외치는 불청객 아가씨들의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스위치를 눌러 운전석의 창문을 삼분의 일쯤 천천히 내렸다.
"아저씨! 아저씨가 정말 이 아가씨들 오빠 맞아요?"
그러자, 범퍼 앞쪽에 완강히 버티고 서있던 그는 얼른 차 옆 운전석 쪽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인지, 노여움 때문인지 알 수 없도록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쩌면 잠이 덜 깬 얼굴 같기도 했다.
"정말 맞다니깐? 빨리 문 열고 내 보내!"
그러면서 성급한 몸짓으로 그는 잠긴 뒷문 손잡이를 두 차례나 난폭하게 잡아당겼다. 그 사이 뒤쪽에서는 또다시 애원조의 두 목소리가 경쟁을 하듯 터져 나왔다.
"아녜요, 저 아저씨 우리 오빠 아녜요! 절대 아녜요! ..... ."
그 소리를 귀 밖으로 들은 척 하며 나는 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차창 밖을 향해 말했다.
"양 쪽 이야기를 다 믿을 수 없으니까, 일단 파출소로 갑시다. 저기 해수욕장에 있는 여름파출소로 오시오!"
그렇게 소리치듯 말하면서 나는 재빠른 동작으로 자동차의 전진기어를 넣고 액셀 페달을 왈칵 밟았다. 차는 덜컹 소리를 내면서 튀듯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야 이 새끼야! 안 서? 야 이 년들 안 내려? 다 뒈질래?"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펄펄 뒤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백미러 안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약이 단단히 올라 길길이 뒤고 있는 곰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자동차가 해수욕장 입구 마지막 진입로를 통과할 즈음에 나는 처음으로 여자들의 용모를 흘끔 살펴보았다.
"어디에서 왔어요?"
그때까지도 사색이 되어 있던 아가씨들은 비로소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
"서울에서요."
그러는 목소리는 아무리 넉넉하게 들어주어도 열여섯이나 열일곱 나이를 넘기기 어려울 것 같은 소녀들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아저씨! 진짜 파출소로 갈 거예요?"
그 중 하나가 앞좌석 사이로 얼굴을 내밀면서 물었다. 담배냄새가 풍겼다.
"그래야죠. 아까 그 아저씨가 오빠라면서요?"
그러자, 갑자기 두 여자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오빠? 웬 오빠?"
그러고 한바탕 또다시 까르르 웃고 나서는 이죽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오빠 좋아하시네. 순 날 건달 거지깽깽이 같은 새끼들! ...... . 그건 그렇고, 아저씨. 파출소보다도 우선 우리 밥 좀 사 주세요. 배가 너무 고파요. 아침부터 굶었거든요. 좀 사 주세요, 네?"
그것은 최소한의 수치심도 남겨놓지 않은 맹랑한 태도였다. 게다가 방금 전에 일어났던 소용돌이 따위는 금세 다 잊어버린 듯한 영판 딴 모습이었다. 나이가 무척 어린 아가씨들일 거라는 짐작을 했기 때문일까, 그러는 그네들의 응석 섞인 사정이 무작정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아이들일까? 의아스러운 마음을 감춘 채 허허허 웃으면서 나는 해변 식당가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찌개전문'이라고 써 붙인 식당에서 김치찌개 백반을 주문하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불청객 아가씨들의 용모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솜털을 제대로 벗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한 것 말고는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 똑 같이 노란 물을 들인 짧은 파마머리.... . 둘 중 좀 마른 듯한 아가씨는 목덜미가 다 드러나 보이는 빨간 초미니 원피스 차림에 낡은 보라색 핸드백을 오른 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비껴 걸었고, 굽 높은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다른 아가씨는 바지같이 생긴 통 큰 치마가 특색인 검은색 투피스차림에 회색 핸드백, 그리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는 얼마나 오래 빨지 않았던지 때가 꼬질꼬질 했다. 얼굴을 빼고는 둘 다 햇볕에 심하게 그을린 검은 피부를 하고 있었고, 은빛 나는 귀걸이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리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다.
"식사 같이 하세요, 아저씨."
여자아이들은 종업원이 미리 갖다 준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자근거리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귓속말을 서로 나누고 키득거리다가, 그 개새끼들, 망할 X새끼들 어쩌고... 험한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그러던 그네들은 큼지막한 뚝배기에 담겨 펄펄 끓고 있는 찌개와 공기 밥이 나오자 내게 같이 먹자고 권했다.
"난 좀 전에 아까 거기에서 곰탕 한 그릇 했어요."
내가 사양하는 사이 숟가락을 든 아가씨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배가 많이 고팠던 모습이었다.
인숙은 된장찌개를 좋아했다. 일주일 전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된장찌개를 시켰다. 펄펄 끓는 찌개를 숟가락으로 뜨면서 인숙은 내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혹시 독신주의자가 되신 건 아닌가요?
나는 내가 최소한 독신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간 한 여자의 충격으로 인해 남들이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결혼이라는 일에 대해서 흥미를 잃었고, 그런 세월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최소한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여자에 대해 잃어버린 흥미를 되찾는 일이 가능할 지 아닐 지에 대해서는 물론 나도 모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그리고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여자 가희(佳姬), 그녀는 첼리스트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다. 같은 반 동기생 가현(佳鉉)의 연년생 동생이었던 그녀를 처음 본 것은 한 연주회에서였다. 가현과 함께 우연히 가게 된 공연장에서, 나는 첼로를 연주하는 무대 위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연주하는 첼로 곡에 대해서는 별 다른 흥미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허리께 까지 길러 내린 검은머리의 청초한 그녀의 외모에 매료됐을 뿐이었다. 그 날 그녀의 모습은 한마디로 눈부셨다. 숫기가 많지 않은 편이었던 나는 그러나 그 날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축하의 인사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 이후 내가 대학생이 되기까지, 나는 그녀를 몇 차례 더 만날 수 있었음에도 끝내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분명 아니었다. 우연히 일이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 땐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K대학교 국문학과에 적을 두고 다니기 시작한 이듬해, 그녀는 같은 대학교 음대 기악과에 입학을 했다. 그 일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자, 나는 큰 용기를 냈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저씨. 밥 좀 더 먹어도 되요?"
체면 따위 아랑 곳 없이 우걱우걱 밥을 퍼먹던 아가씨들 중 빨간 원피스가 웃음기를 섞어가며 물었다. 나는 식당 종업원에게 공깃밥 두 개를 더 시켰다.
"죄송해요. 아이구 참, 아저씨가 우리를 완전히 걸신들린 돼지로 알게 생겼네. 히힛."
이번에는 검정 투피스였다. 다시 보니 두 아가씨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이 대개 그렇듯 볼우물이 파지는 귀여운 얼굴들이었고, 둘 다 눈이 좀 작은 편이어서 그렇지, 아주 밉상의 용모는 아니었다.
"좀 물어봐도 될까?"
그러고 보니 나는 말을 놓고 있었다.
"네? 뭔 데요?"
새로 가져온 밥을 두 숟가락 째 퍼먹던 빨간 원피스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자네들 몇 살이지?"
둘은 눈을 서로 마주치며 약간 긴장을 나누는 듯 했다.
"열아홉 살인데요. 우리 둘 다."
검정 투피스였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빙긋이 담고는 번갈아 그네들을 보았다. 그러자,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숟가락을 놓으며 정색을 했다.
"아녜요. 맞아요, 우리 열아홉 살. 올해 열아홉 됐어요."
그네들은 악센트를 높이며 억울하다는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주민등록증 좀 볼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허허허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그네들의 나이 따위가 내게 그다지 중요할 이유는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 밥이나 마저 먹어요."
둘은 다시 숟가락을 들고, 남은 찌개국물로 밥을 비벼 먹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밤 내 꿈 동산 사랑우물을 찾아가 한 여인의 맑고 고운 영혼을 길어다가 내 가슴에 붓고 있습니다. 내 가슴에 가득 찬 그 여인의 영혼은 이미 나의 생명수이며, 내 삶의 의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아 나는 아무래도 이 그리움의 늪을 헤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나의 편지는 단 며칠을 띄우지 않고 연달아 씌어졌고, 가희에게 배달되었다.
***
"아저씨. 바닷바람 쐬러 가요, 우리."
식당을 막 나왔을 때, 빨간 원피스가 말했다. 그 여자아이가 말끝에 붙인 '우리'라는 말에 대해 나는 문득 마음속으로 물음표를 달고 있었는데, 어느 새 검정 투피스가 스스럼없이 내 팔을 잡고 해변 쪽으로 이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 그러구러 혼자서 해수욕장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고작이었던 탓이었을까, 여자아이들의 그런 행동이 내게 무턱대고 싫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팔월 말. 해가 많이 짧아진 셈이다. 뭍에서부터 끼인 옅은 이내가 벌써 수평선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나니 순식간에 바람도 맛을 바꿨다. 분명히 한 여름 바닷바람은 아니었다. 차갑다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바람의 갈기 사이사이에 약하긴 해도 아닌 듯하게 선선함이 스며 있었다. 여름이 저물도록 여전한 것은 철썩거리는 파도뿐이었다. 썰물 진 백사장에는 군데군데 젊은 남녀들이 팔짱을 낀 채 물 모래 경계를 찰박거리며 다정스럽게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저씬 혼자이세요?"
검정 투피스가 약간 통통한 몸을 돌리며 물었다.
"혼자야."
"왜 혼자이신 데요?"
이번엔 빨간 원피스였다. 왜 혼자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혼자더라? 왜 나는 혼자일까.... . 씁쓸한 기운이 허전한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불현듯 젖어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야."
그쯤에서 여자아이들은 말을 끊으며 몸을 흠칫했다. 백사장 저 만큼 바로 앞에서 몇몇 청년들이 쏘아 올린 폭죽이 슈우욱 빠방 빠바방 하고 잇달아 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들과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급한 초저녁 별 몇 개가 희미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날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아저씨. 우리 여기 앉아요."
빨간 원피스가, 낮에 누군가가 만들었다가 반쯤 무너뜨린 모래성 주위에 먼저 앉으면서, 말했다. 나는 엉거주춤 바다 쪽을 향해 주저앉았다. 파도가 끊임없이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몰려왔다가는 되돌아가고 있었다.
"자네들 언제 여기에 왔지?"
검정 투피스가 부서진 모래성 옆에 다가앉을 즈음에 내가 물었다. 빨간 원피스가 대답했다.
"한 열흘 됐어요."
"열흘? 열흘 동안이나 있었다고? 그럼 집에는 연락을 하나?"
그러자, 여자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쳐다보며 소리 없이 웃음을 나눴다.
"저어, 아저씨 혹시 학교 선생님이세요?"
검정 투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아니! 학교 선생님 아냐. 왜? 선생님처럼 보이나?"
빨간 원피스가 받았다.
"네. 약간은 그래요."
"집에서 자네들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합창을 하듯이 함께 대답했다.
"그럼요. 매일 집에 전화해요."
하지만 그네들의 대답은 왠지 건성인 것처럼 보였고, 별로 진지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저씬 언제 여기 오셨어요?"
검정 투피스가 뜬 금 없이 물어왔다.
"이제 나흘 됐지."
"어디에 묵고 계세요?"
"응. 저 쪽에 콘도 보이지?... 거기 703호."
콘도까지만 말해도 되는 거였는데 하고, 나는 호실까지 밝혀 뱉은 말을 곧바로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질한 쪽을 바라보며 여자아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틈을 헤집고 저 만큼에서 폭죽소리가 아까보다도 더 크고 길게 슉슉 따다당거리며 들려왔다. 바람이 좀 거세어진 것과 비례하여 파도소리도 조금 더 커진 듯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빨간 원피스가 앉은 채로 반나마 부서져 있던 모래성을 발바닥으로 사정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아저씨 우리 술 마시러 가요."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깬 건 검정 투피스였다.
"술? 자네들 술도 마셔?"
"많이는 아니고요. 조금 마실 줄 알아요. 기분 내자면 필요하잖아요."
기분 내자면 필요하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정체가 무엇인가? 내 가슴속에 한 가닥 의심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가출소녀들인가?
"어디 포장마차에라도 가지."
가슴속에 일고 있는 의심의 숨결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이른 저녁 무렵 이어서였던지, 바다 쪽으로 시야를 틔워놓고 설치되어 있는 해변 포장마차에는 손님이 없었다. 여름 한 철 득시글거렸을 손님들에게 질린 탓만도 아니게, 키가 작은 중년의 포장마차 여주인은 맥 빠진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손님을 맞았다.
"아까 그 자칭 오빠라는 사람은 뭐야?"
여자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소주와 해물탕을 안주로 시켜놓고, 곰탕 집 앞에서 본 사내 생각이 언뜻 떠올라서 내가 물었다.
"오빠요?"
빨간 원피스가 말했고, 두 사람은 또 한 번 마주보며 킥킥 웃었다.
"여기 해수욕장에서 만난 거지같은 놈들이에요. 참. 아까 그 대머리 말고, 여관 안에 말라깽이 한 놈 더 있었어요. 한 사흘 같이 지냈는데, 알고 봤더니 빈털터리 건달에다가 우릴 어디에다 팔아먹을 궁리까지 하고 있더라고요, X새끼들! 낌새를 눈치 채고 짜식들 낮잠 자는 사이에 신발 챙겨들고 도망쳤죠. 그래서 아저씨를 만난 거구요."
그래. 그랬었구나. '새끼' '놈' '짜식'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뱉어내는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진작 품었던 의심의 우물을 더 깊이 파내려 갔다. 이 친구들, 어쨌든 평범한 아이들은 아니구나.
술과 안주가 나왔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진 냄비에는 해물보다 훨씬 더 많은 야채들이 고춧가루를 뒤집어쓴 채 가득 담겨 있었다.
"아저씨 한 잔 받으세요."
어느 새 술병 마개를 딴 검정 투피스가 내게 잔을 권하고 술을 부었다. 그리고는 잇달아 저희들 잔을 채웠다.
"우리 건배해요, 아저씨..... . 자, 원 샷!"
빨간 원피스가 잔을 들며 외치듯 말했다. 잔을 부딪친 다음 그네들은 능숙하게 입에 대고 뒤집어 꿀꺽 소리가 나도록 술을 삼켰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은 삽시간에 빈 병이 되었고, 가스레인지 위의 해물탕이 막 끓어서 비린내가 약간 섞인 매콤한 냄새를 풍길 무렵에 세 사람은 반찬으로 나온 물미역과 시큼한 깍두기김치를 안주로 또 한 병의 소주를 거의 다 비워 버렸다.
"술 잘 마신다, 너희들?"
아마도 술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느 틈에 여자아이들을 '너희'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네들은 대답을 하지 않고, 숟가락으로 해물탕 냄비를 뒤적거렸다.
"못 마시는 것보단 낫잖아요, 아저씨?"
혀가 약간 풀린 목소리로 검정 투피스가 말했다.
"그런가? 허허허... ."
가희가 나의 집념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대학교 이 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다. 그 해 봄 나는 학군단(ROTC)에 입단했다. 일 년차(3학년 후보생)가 된 나는 머리를 파랗게 깎고, 교복을 줄 세워 입고, 교정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직각보행을 하고 다녔다. 이 년차(4학년 후보생)를 만나면 교정이 떠나가도록 목이 터져라 '충성!'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하던 바로 그 무렵에, 가희는 문과대 강의실로 나를 찾아왔다.
서로를 알고 지낸 지가 오래 된 탓이었던지 우리는 조금도 서먹하지 않았다. 금방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쉽고 편하게 자주 만났다. 하지만 가희는, 내가 끊임없이 편지를 보낸 일 년 동안 사뭇 냉담하던 모습을 갑자기 바꿔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는 않았다.
***
간판만 노래방이었지 그곳은 유흥주점이었다. 못 팔게 되어있는 술을 그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팔았다. 커다란 플라스틱 물 컵에다가 채워 온 맥주를 하나 씩 돌리되, 술병이나 맥주 캔 따위는 아무에게도 구경시켜주지 않는 그런 편법이 동원되고 있었다.
포장마차를 나왔을 때, 비교적 술이 센 편에 속하는 내가 비칠거릴 만큼 취기가 올랐는데도 빨간 원피스, 검정 투피스 그 아이들은 끄떡없어 보였다. 그네들은, 다음 코스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나의 양팔을 붙잡고 근처 노래방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첫 손님인 노래방의 중년남자는 비교적 큰방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아저씨. 노래 한 곡 때리세요."
검정 투피스가 노래목록이 담겨있는 선곡 집을 내밀며 살랑살랑 말했다. 나는 내가 자주 부르곤 하는 '그 겨울의 찻집'의 번호를 입력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내가 노래를 부를 동안 흥을 맞춰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그 아이들의 얼굴에는 재미없어하는 표정이 그득했다.
그러나 그 뿐, 내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아이들은 마이크 쟁탈전을 벌여가며 가사도 잘 안 들리는 고약한 노래들을 번갈아 부르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삼류 댄스가수들의 막무가내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쇼를 벌였다. 둘은 합창과 독창을 섞고, 기괴한 춤을 곁들여가며 저희들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한 판 제대로 놀고 있었다. 그네들의 분위기 속에는 포크송이나 트로트를 끼워 넣고 마이크를 잡아 볼 엄두를 내볼 만한 틈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의자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앉아서 멋 적은 동작으로 더러 박수를 치면서 그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희와 나의 만남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졸업반이 되면서 논문 준비다 뭐다 하여 내가 바빠지고, 그녀 역시 늘어난 공연일정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하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어가고 있을 뿐, 우리는 변함없이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만나고 있었다. 함께 다닌 곳도 많았다. 때로는 다른 대학교 학생이던 가희의 오빠 가현이 함께 하기도 했다.
이듬해 봄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이 되어 입대했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달랬다. 물론, 그녀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편지를 쓰려고 막상 편지지를 놓고 앉으면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그녀의 변명 앞에서, 나는 애초부터 답장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졸업반이 된 그녀 역시 잦은 연주회로 시간이 여유롭지 못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하늘만 동그랗게 올려다 보이는 강원도 산골 전방의 소총소대장이었던 나는 편지에다가 드디어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자, 내 가슴은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빠져들었다. 열정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분출하는 것처럼 거센 감정의 물결을 이루었다. 나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리움에 잠을 설쳤고, 소대원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해 십이월, 어렵사리 얻어낸 휴가기간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만난 가희는 뜻밖으로 내 감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 휴가기간 일주일 동안 가희를 세 번 만났다. 두 번 째 만났을 때 가희의 얼굴에서 나는 야릇한 초조로움을 읽었다. 가슴속에서 기하급수로 늘어가는 수많은 의문을 억누르면서,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가희는 내 안에서 폭발하고 있는 열정에 대해서, 또는 가슴속에 수 없이 부풀어 오르다가 흩어지는 의문에 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너무나 지친 모습이었다. 무엇이 가희를 저토록 힘겹게 하는 것일까 안타깝고 궁금했지만, 한숨을 거푸 토하는 그녀에게 나는 결국 아무 것도 물어보지 못한 채 귀대를 하고 말았다.
나는 더욱 더 정성을 다해 가희에게 편지를 썼다. 답장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이미 습성이 되었던 내게, 편지를 쓰는 일은 내 가슴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그녀에 대한 사랑의 불씨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이었다.
이듬해 이 월 초순, 대학교 졸업시즌을 저만치 앞둔 어느 날 오후 가희는 내가 근무하는 전방부대로 불쑥 면회를 왔다.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아니, 단지 당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뜻 밖이었으나, 그것은 황홀한 충격이었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기도 했다.
나 내일 갈 거예요. 중대장의 배려로 외출을 나온 내가 가희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리고 마지막 직행버스를 태우려고 서두를 때였다.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그녀가 했다. 나는 그녀가 면회를 왔다는 사실과 함께 또 한 번 속으로 크게 놀랐지만, 그 충격을 가희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그 날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밤을 함께 보냈다. 내가 그 날 밤 가희에게 한 말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진심으로 맹세했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그 밤에 가희는 울었다. 왜 자꾸 우느냐고 내가 걱정을 하자, 그녀는 너무 기뻐서 운다고 대답했다. 그러던 가희의 얼굴이 문득 야위어 보였다.
가희가 돌아간 그 며칠 뒤, 나는 처음으로,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오빠를 진정으로 사랑했어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의 또 다른 목표를 위해 이제 나의 사랑을 접으려고 합니다. 첼로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납니다. 오빠의 사랑을 끊어내지 않고는 더 이상 제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이 제 못난 결론입니다. 저를 영원히 놓아주세요..... .
사념의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회억(回憶)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가희에 관한 몹쓸 그리움이 또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까닭일까. 나는 문득 노래방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여자아이들은 내가 저희들끼리 발광하듯이 춤추고 노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낯선 음악 속에서 여전히 알아먹을 수 없는 노래가사를 붙들고 오랫동안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네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넉넉히 꺼내어 테이블 위 한 쪽 귀퉁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는 척 노래방을 빠져 나왔다.
***
나는 식당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에서 휴대폰을 찾아들고 콘도로 돌아왔다. 제 철을 넘긴 해수욕장의 콘도는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거실 소파에 옷을 벗어 던진 다음,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베란다로 나갔다.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붙이고 앉아서 핸드폰을 열었다. 예상대로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가 다섯 통, 누나가 보낸 호출번호가 네 통, 인숙이 보낸 메시지가 세 통, 그리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틀림없이 출판사 일과 관련됐을 부재중 전화가 여섯 통 그렇게 기록이 된 채 꺼져 있었다. 나다. 에미다. 출판사에서는 지방출장이라고 하는데, 왜 전화도 한 번 안 하니?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처음에 그렇게 시작한 어머니의 음성메시지는 이내 짜증으로 이어졌다. 도대체 죽은 거냐, 산 거냐?.... 그런데, 호출번호만 남긴 것으로 보아서 눈치 빠른 누나는 내 의도를 어느 정도 짚어낸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일이세요? 제발 별 일 없기를 바랄게요. 인숙의 음성메시지는 한 결 같이 완곡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나긋나긋하고, 교양을 지키려고 애쓰는 흔적이 보인다. 가식이든 아니든, 이상스럽게도 나는 모든 게 싫다. 상대가 인숙이기 때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나는 이미 그렇지만은 않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세상에는 영원한 시작도, 영원한 끝도 없다. 시작은 또 하나의 끝이고, 끝은 언제나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한다. 가희가 그렇게 떠난 것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내가 그 지옥 같은 세월을 어떻게 견디고 살았는지 모른다. 혀를 깨무는 인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큰 사고를 저지른 소대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군문(軍門)에 갇혀있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몸으로, 그것도 수 십 명 사병을 거느린 장교의 신분으로 그런 실연의 시간은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용케도 잘 견뎌냈다. 그 해 가을 휴가를 나왔을 때, 방위근무를 끝내고 일찌감치 회사원이 되어있던 가현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의 대답은 가희의 편지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가희의 장래를 위해서 그 아이를 놓아줘라. 그런 가현의 말처럼, 나는 가희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기실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가슴속에 새겨진 고약한 문신처럼, 가희에 대한 그리움은 세월을 따라 말끔히 씻겨 진 듯 하다가도 망령처럼 되살아나기를 거듭했다.
진실은 언제나 잔인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고 했던가. 가희는 미국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제대를 하고, 출판사에 취직이 되어 다닌 지 두 해가 지났을 무렵, 나는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우연히 가희를 보았다. 키가 크고 얼굴이 꽤 흰 편인 어떤 남자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는 그녀는 돌을 훨씬 넘긴 듯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찾아가 만난 가현은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 가희는 너를 한 때 사랑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때 그 아이는 한 치과의사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많은 고민 끝에 스스로 내린 가희의 결정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달리 말할 수는 없었어. 너를 속인 건 네가 조금이라도 덜 아파했으면 하는 배려였을 거야. 미안하게 됐지만, 그게 운명인데 어쩌겠어? 네가 하루 빨리 잊어버리는 수밖에...... .
그 때의 나는 너무나 처절했다. 솔직히 말해서 차라리 미국이든 어디든 멀리 떠나 있더라도,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가희의 고백을 추억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고 싶었다. 내가 끝내 이해하거나 좋아할 수 없었던 첼로음악의 세계 속에서, 가희는 나와의 일들을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음악가의 길을, 세계적인 연주자의 길을 가고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진실은, 가희가 다른 남자를 선택하면서 나를 따돌렸던 것이다.
그 때의 내 행동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이상스러운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어금니를 덜덜 떨며 분노해야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내 속내를 들키는 것은 사랑을 얻지 못한 못난 사내의 초라한 모습으로 비쳐질 것만 같았다. 더욱 비참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나는 서둘러 가현과 헤어졌다. 그리고 그 날 밤 길거리에서, 그리고 집에서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울었다.
어디선가 아까부터 초인종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다른 방인가 싶어서 내버려뒀더니,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소리치면서 베란다를 벗어나고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빨강 원피스와 검정 투피스, 그 아이들이 와 있었다.
"아저씨! 그냥 그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문을 열자마자, 그네들은 눈을 흘기면서, 노래방에서 슬며시 빠져나온 나를 힐난함으로써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물어보려는 내 입을 지레 막고 나왔다. 다음 순간 나는 아까 해변에서 무심코 내가 묵고 있는 호실을 말해버린 실수를 떠올렸으므로, 그네들이 어떻게 왔는지 물어볼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이야, 여기 콘도 무지하게 좋다! 방도 두 개나 되네?"
내가 결코 들어오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여자아이들은 넉살좋게 이미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네들 손에는 필경 소주병과 안주가 들어있을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노래방에 끝까지 함께 있어주지 않은 죄 아닌 죄 때문에, 한밤 중 또다시 불청객이 되어 나타난 맹랑한 여자아이들의 무례(?)를 나는 그렇게 어정쩡 받아들이고 있었다.
***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사온 소주를 나눠 마시다가 불현듯 밀물처럼 밀려드는 피로의 습격을 받은 나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서 곧바로 골아 떨어졌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뱀처럼 나의 몸을 스르르 휘감고 있는 느낌이 오고 있었다. 이게 뭘까? 나는 온몸에 스며들어 있는 취기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몸에 맞닿아 있는 것은 살이었다. 가슴에서도, 허벅지에서도, 그리고 팔꿈치에서도 그런 느낌은 퍼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등을 켰다. 취기의 끝자락에 매달린 지독한 어지러움으로 인해 눈앞이 아뜩했다.
"아니? 너희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침대에 올라와 있는 것은 여자아이들이었다. 그네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채 침대 위 좌우에서 내 몸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하는 짓이라뇨?"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치뜬 것은 빨간 원피스였다.
"아저씨는 2대1 섹스도 모르세요?"
그 아이의 입에서 '섹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내 몸에는 갑자기 화르르 소름이 끼쳤다.
"뭐라고? 너희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러자, 검정 투피스가 발딱 일어나 침대를 내려서며 외치듯 말했다. 혀가 많이 꼬부라진 말소리였다.
"아저씨! 왜 고상한 척 하고 그래요? 우리도 알 건 다 안다구요. 나이는 어리지만 산전수전 다 겪었다구요. 아저씨들은 다 똑 같잖아요.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데리고 자고, 용돈 좀 주고 그게 다잖아요. 아저씨라고 뭐 별 수 있나요? 물론 어제 그 X새끼들은 우리를 사흘 밤이나 가지고 놀아 놓고서도 밥조차 안 사준 나쁜 새끼들이지만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 여자아이들의 태도는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얘들아. 세상에는 그런 사람만 있는 게 아니란다...... . 무슨 얘길 해도 좋지만, 밤도 늦고 했으니, 어서 저 쪽 방으로 가서 잠부터 자거라."
나는 더 이상 대화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두 여자아이들에게 팔짓을 해가며 방밖으로 내몰았다. 밖으로 몰려나간 발가벗은 아이들이 쓴웃음을 짓고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문을 닫아걸어 버렸다.
피로가 몰려왔다. 사실은 나 제주도엘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여름휴가 때 저 좀 데리고 가주시면 안 되시나요? 일 년 가까이를 시나브로 그렇게 만나고도 물 덤벙 술 덤벙 하는 내게, 여행을 데리고 가달라며 속 보이는 유혹을 하던 인숙 생각이 났다. 누나가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소개해주어서 만난 그녀였지만 나의 마음은 도무지 열리지를 않았다. 그것은 인숙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그리고 여전히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취기에 젖어든 졸음이 눈시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잔 것일까. 잠깐 눈을 붙였던 것 같은데, 바다 쪽 창문이 훤했다.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 아래 전자시계를 보니 여덟 시. 아차,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의 엄습으로 머리가 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옆방으로 갔다. 예상대로 여자아이들은 이미 없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던져 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었다. 뒤늦은 예감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그 때 거실 응접세트 티 탁자 위에 비딱하게 놓여 진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아저씨는 위선자 아니면 머저리이시겠군요. 돈 잘 쓸게요. 감사해요. 아마도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 안녕!'
소파에 걸터앉아, 나는 내 몸의 모든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바다 쪽에서 새삼스럽게 파도소리가 철썩거리며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나를 향해 쏟아지는 한바탕의 조소처럼 가슴을 황량하게 쓸어내리며 야릇한 아픔을 만들고 있었다.
(2001.9.9 아침7시8분 밤을 지새운 끝에)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