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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시대 전라도 남부 지역의 신앙 공동체
“전라도 교회에 일찍이 교우 촌이 형성되어 왔지만 그 공소의 소재가
어디였는지 알려 주는 자료가 없다.”
천주교 전주 교구사 1권. p475.
전라도 남부 지역 성지라고 한다면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살았던 교우 촌을 말한다. 박해 시대에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면서 살았는데 어렵고 힘든 시기에 신자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교우 촌을 이루며 함께 살았다. 특히 남부 지역인 정읍군 회문산과 쌍치면 고당산 자락 심산궁곡이 그 중의 하나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굶주림과 싸워가며 살았던 삶은 곧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이러한 삶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회문산 깊숙한 곳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의 묘와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박해 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애절한 삶을 밝혀내면서 그분들의 삶과 죽음의 터를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남부 지역 교우 촌은 곧 성지이다. 이번 기회에 박해시대에 우리 신도들이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살았던 교우촌의 형성 과정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 분들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알아보고자 한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입교와 초남리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그해 9월에 이벽과 권일신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유항검이 권일신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이 전라도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전라도 지역의 최초의 신앙인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이다. 유항검의 입교에 대해서 교회사는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해인 1784년 가을에 양근 땅에 살고 있는 권철신 집을 찾아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듣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권일신을 대부로 삼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유항검이 언제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나타나있지 않지만 가장 초기인 1784년 겨울로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항검이 1801년 법정에서 자신이 입교한 시기를 1791년이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교회사는 유항검이 형량 때문에 시기를 늦추어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1785년 조선 교회가 가성직제도를 설정하면서 1786년에 유항검이 10명의 신부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행하였다가 1787년 가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바로 잡는 것을 보면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되면서 신앙을 가진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유항검의 입교와 활동으로 전주 초남리에 최초의 교우 촌이 형성되었고, 따라서 초남리가 전라도 지역의 최초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입교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들과 초기 조선 교회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다 윤지충의 인척들이었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윤지충의 고모였고, 윤지충의 어머니 안동 권씨는 권상연에게는 고모였고 또한 유항검에게는 이모가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의 인척관계를 보면 권상연은 내외 종간이었고 유항검은 이종 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은 1784년 겨울, 서울에 갔던 길에 우연히 명례방에 사는 중인 김범우의 집을 방문하여 그 집에서 천주 실의와 칠극이라는 책을 보았고 김범우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한편 권상연은 양반으로 유업에 종사하여 왔으며 윤지충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 윤지충이 서울을 다녀 온 후 천주 실의와 칠극 두 책을 탐독하자 그 역시 빌려 보았고 1787년 윤지충이 세례를 받고 귀향하자 자신도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에게 세례를 집전한 사람은 유항검이었다. 유항검은 1786년 봄부터 가성직단의 일원이 되어 전라도 교회의 성사집행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전라도 전주 지역 교우촌은 유항검이 중심이 되었고, 진산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중심이 되어 교우 촌이 형성되었다.
진산 교우촌의 와해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상을 당하였다.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평소에 죽거든 장례식을 천주교 교리l에 따라 치르도록 말하였다. 미신적이거나 또는 천주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일렀다. 윤지충은 외종형인 권상연과 상의한 후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교회의 교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정중하게 상례를 갖추었다. 그러나 유교의 제사 의식에서 봉행하였던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의식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교 의례 거부 사건이 어머니의 상례를 소흘리 한 것으로 와전되어 알려지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체포되어 참수 당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였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시각과 같았다. 이때 윤지충 바오로의 나이는 33세, 권상연 야고보의 나이는 41세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로 진산에 형성되었던 교우촌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윤지충과 권상연의 모범적인 순교는 초대 신자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신자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남아 있었다.
전주 초남리 교우 촌
유항검은 세례를 받은 후 고향에 돌아와 마음 놓고 전교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으로 가족, 친척, 친지, 그리고 자기 집의 많은 노비들, 광활한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들, 작인들, 문전 식객 등 서로 마음과 사상이 통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암암리에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1795년 4월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초남리를 방문하여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행함으로써 전라도 신앙 공동체는 탄탄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건강한 교우 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6-7일 동안 초남리에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전라도 신앙 공동체는 유항검의 활동으로 전주, 고산, 무장을 축으로 확산되어 가면서 금구, 김제, 영광까지 은밀히 전해졌다. 따라서 당시에 전라도 교세는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산 저구리 교우 촌
1791년 신해 년 ‘진산 사건’이 발생하자 진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순교자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은 박해로 가문이 폐쇄 되자 고산 저구리로 이사하였다. 이때가 1791년 말이었다. 그 무렵에 충청도의 사도였던 내포의 이존창이 저구리로 이사 왔고, 금정역졸 김유산도 이존창의 뒤를 따라왔다. 이후부터 충청도 내포 지방의 신자들이 고산 저구리로 피신해 왔으며, 서서히 교우 촌이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가 저구리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금산 솔티, 진안 용담 등에도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산 저구리 교우촌은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이존창과 유관검의 안내를 받아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들림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어졌고 더욱 튼튼해졌다. 주문모 신부는 저구리에서 여러 날 머물면서 성사를 집행하고 교리를 가르치면서 세례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때 이존창은 주 신부를 은익 시킬 안전한 장소로 고산 저구리를 생각하였다고 한다.
고창 무장 교우 촌
전라도 신앙 공동체는 1791년 신해 박해 이후 10년 동안 박해가 없어 조선 교회에서 신자가 대단히 많은 곳이었다. 이때 천주교는 전주, 고산, 고창 무장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고창 무장 교우촌은 최여겸 마티아가 전교에 전력하였다. 그는 무장현 동음치면(현재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태어난 양반 계급의 출신이었다. 그가 교리를 처음 배운 것은 윤지충으로 부터였다. 그 후 충청도 내포 지방의 남쪽에 있는 한산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게 되어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 온 그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전교하였다. 무장에 사는 조카 최수천,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 흥덕의 김처당, 영광 고을 양반이요 최여겸의 제자인 이화백 등 28명을 입교시켰다. 최여겸 마티아의 전교는 고창 지역에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충청도 신자들과 연결되어 무장에 교우 촌이 형성되고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와 전라도 교우촌의 와해
1801년 서울에서 일어난 신유박해는 박해가 심해지자 전라도 쪽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크게 번졌다. 전라도에 신도수가 날로 증가 일로에 있었다는 것은 조정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따라서 조정은 포도청을 통하여 전라 감사에게 유항검을 검거하라는 지시를 비밀리에 내렸고 유항검의 집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염탐하며 체포하기 위해 감시하였다.
그 후 전라도에 유명한 인물들은 다 체포되었다. 유항검, 유중철, 이순이 누갈다 등 일가가 모두 체포되었고, 고산 저구리의 이존창과 김유산 등이 체포되었으며, 고창 무장의 최여겸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 일가가 거의 멸족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죽거나 아니면 배교를 하였으며 일부는 신분을 숨기고 깊이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따라서 전라도 지역의 전주 교우 촌과 고산 저구리, 고창 무장 교우촌은 폐촌 되다시피 와해되었다. * 교회사는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유박해는 전라도 천주교회를 거의 전멸시켰다. 당시 전국에서 500여 명의 신자가 희생되었는데, 그중 전라도에서 2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중에는 경상북도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으로 이사한 사람들이었다.”
교회사는 이때를 “한국 교회를 거의 폐허로 만들었다.” 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조선 천주교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 지역으로 숨어들었고, 전라도 교우촌은 모두 폐쇄되었다. 이때 전라도 신앙은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았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전라도 교우 촌 형성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200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전라도 교회의 초기 교우촌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전주 초남리 신자들은 다 죽었고, 고산 저구리와 고창 무장 신자들은 체포되어 죽거나 일부는 경상도 청송 노래 산으로, 그리고 깊은 산속으로 피했다.
이후 전라도 천주교회는 힘을 잃었고 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신유 박해이후 조금 잠잠해진 시기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교세를 확장 시켰는데, 1836년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서울, 경기, 충청도를 담당하였고, 1837년에 입국한 샤스탕 신부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전라도는 신유박해 이후 더 이상 전교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 그때를 교회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선교사들 중 가장 어려움을 겪은 신부는 배교자가 많은 남쪽 지방 전라도를 전교 하던 샤스탕 신부였다.”
이는 박해 시대에 전라도의 천주교 실상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신도들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의 후유증이 너무 컸던 결과였다. 그러나 전라도는 끊임없이 신자들이 늘어났고 교우촌은 형성되어 갔다. 이를 교회사는 “박해시기에 전라도는 계속해서 전국 신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전라도는 전교는 되지 않았지만 박해를 피해 신도들이 전국에서 들어왔고, 특히 충청, 경기 지역의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내려왔던 것이다. * 이를 교회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교우촌이 가장 많이 형성된 곳은 전라도였다. 1801년 이후 비교적 평온 해진 틈을 타 많은 신자들이 전라도를 피난처로 하여 옮겨와 살았기 때문이다. 박해가 자연스럽게 신자 갈이를 해준 셈이다. 이후로 전라도는 계속해서 전국 신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처럼 정부가 천주교도의 씨를 말리겠다는 박해는 오히려 천주교 신자들을 전국으로 흩어지게 함으로써 천주교를 정부가 전교 한 격이 되었다. 그리고 박해는 전통적인 촌락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신앙의 수계 생활을 유지하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안전지대를 찾아 심산궁곡으로 들어 간 신자들은 거기서 교우 촌이라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였다.
그러면 박해시기에 심산궁곡으로 들어가 신앙 공동체를 이룬 교우촌은 어디였을까?
1839년 기해박해로 전라도에도 커다란 피해를 당하였으나 여전히 전라도는 신자들의 피난처였다. * 기해박해 이후 상황에 대해서 교회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기해박해 때는 처형되거나 유배되거나 배교한 수도 많았지만. 다른 곳으로 이주한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아 전라도 교회는 텅 비지 않았다. 신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고 해도 마땅하게 갈 만한 지역도 없었고, 전라도 내에서 장소를 옮기는 정도로도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도에서 전라도로 이주하는 신자들도 여전히 많았다. 1801년 이후 전국에 신자들이 전라도를 피난지로 삼아 모여들던 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지방관들 사이에 인식되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체포하겠다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청도 신자들의 전라도 교우촌 형성 과정
전라도에 충청도 신자들이 내려왔음을 전라도 순교자들의 출신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집안의 이주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1) 충청도 출신의 전라도 순교자들
전라도가 충청도 신자들의 피난지였음이 전라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살펴보면 대개 알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정황들이 이를 증명한다.
순교 1839년 기해박해 때 전라도에서 순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청, 경기도 출신의 신자들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 경기도에서 신자들이 꾸준히 전라도로 내려 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사실 기해박해 때 순교자들의 출신은 거의가 다 충청, 경기도 출신의 신자들이었다.
그리고 병인년 전라도 지역의 순교자들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을 보면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충청도 임천, 손선지 베드로 성인은 부여군 충화면, 한재권 요셉 성인은 충청도 진잠, 이명서 베드로 성인은 충청도 공주, 조화서 베드로 성인은 수원 도마지, 정원지 베드로 성인은 충청도 진잠, 조윤호 요셉 성인은 충청도 신창이다. 그 외에 대부분 순교자들이 모두 충정도와 경기도 출신들이다.
오로지 전라도 출신인 윤지충과 권상현,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한 유항검 일가와 그 외에 순교자들은 아직 복자품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집안의 불무동(부안군 산내면 중계리) 이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집안의 전라도 이주 시기와 동기에 대해서 살펴보면 당시에 충청, 경기 지역 신자들이 전라도로 이주한 동기와 시기가 비슷하다. 즉 박해시기에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서 신자들과 함께 전라도로 이주하게 된다.
조선 정부가 선교사를 양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집안은 멸문을 당 할 수 있는 죄목이었다. 따라서 집안의 멸족을 피하기 위해서는 집안 가족들은 고향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나야 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배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언제 전라도로 이주해 왔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교회사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집안들이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전라도 부안군 변산 반도의 불무동에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변산 반도 불무동으로 이주해 온 시기가 김제준 이냐시오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훗날 김난식 프란치스코가 186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 옆에 안장하고,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가 더욱 심해지자 변산 반도 불무동으로 내려 와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와 함께 회문산 자락에 있는 먹구니로 들어가 살았던 것을 보면 더욱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이 분들은 당시에 충청도에서 내려 온 신자들과 함께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고
1801년 신유박해는 전주 지역 신앙 공동체를 와해 시켰고, 더욱이 1839년에 이루진 기해박해는 조선 천주교를 초토화 시켰으며, 충청. 경기. 전라 지역 신앙 공동체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양적으로, 그리고 중국의 황건적과 백련교로 취급한 상태에서 당시 조선 천주교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었다.
특히 정부가 배교한 밀고자들을 앞세워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함으로서 전라, 충청. 경기 지역의 신앙을 뿌리째 없애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교우촌은 모두 없어지고 신자들은 고향을 떠나 보다 안전한 깊은 산속으로 찾아들어 가게 되었다. 당시에 특히 타격이 심했던 충청. 경기 지역 일부 신자들은 충청, 경기 지역을 떠나 안전한 전라도로 내려와야 했다. 교회사가 당시에 “전라도가 보다 안전한 피난처였다” 고 언급한 것처럼 전라도는 전국 신자들의 피난처였다.
그렇다고 전라도에 박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정부의 박해가 있을 때마다 전라도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전주를 중심으로 고산, 진산 쪽에 살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거의 처형되었다. 아마도 기아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고 유랑민들처럼 전주근교와 고산 쪽에서 살다가 체포되어 순교를 당한 것이다.
전라도에 은밀히 형성된 충청도 신자들의 교우 촌
전라도 지역에 은밀히 형성된 교우 촌에 대해서는 교회사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박해시대에 서로가 신분을 숨기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는 한결같이 전라도로 많은 신자들이 내려와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1866년에 일어났던 길고도 가혹한 병인박해는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더욱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그 중에 전라도가 그 피난처였다고 교회사는 전하고 있다. 충청도와 경기 지역 신자들이 전라도로 내려오게 된 동기에 대해서 교회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라도 구 교우들의 구전에 의하면 자신들의 조상들이 전라도를 향하여 피난해 온 까닭은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으러 다니며 ‘남쪽으로 내려가면 살 수 있는데, 도망가지 않고 말썽을 부린다.’고 해서 남하하였다.”
또한 리우빌 약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1866년 박해 때 전라도는 상당히 관대하게 이 사건을 다루었고, 다른 지방처럼 그렇게 포악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신자들은 다른 지방에서보다 쉽게 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연히 비신자들과 격리되어 산속에 무리지어 살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전라도 교우 촌 형성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전라도 지역에 전국에서 신자들이 피해 들어 왔으며 본격적으로 교우 촌이 확산 되었다. 교회사는 그 곳이 어디었다라고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전라도 남부 지역인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의 깊숙한 곳에 대단위로 신앙 공동체인 교우 촌이 있었음을 역사적인 사료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특히 1886년 신앙 자유 이후 교세 통계표에 의한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의 공소 분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의 체포령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3월 30일까지 불과 35일 만에 충청. 경기 지역에서 주요 인물들이 거의 다 처형된, 참으로 엄청난 교난이었다. 성직자 12명중 9명이 처형되었고, 남종삼, 홍봉주 등 신자 8,000여 명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병인박해 때 전라도에도 큰 타격을 입었는데 정문호등 전라도 신자들 대부분이 체 포되어 처형되었다. 특히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전라 감영에서 파악하고 있던 천주교도들은 전부 처형되었다. 그리고 고산 쪽으로 박해가 옮겨지는데 1868년 무진년에는 진산, 고산 지역 신자들을 대상으로 여산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에 여산의 후진영은 진산, 고산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고, 정읍, 무장, 장성 지역은 나주 우진영 관할 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7년 동안의 박해는 전주 인근 지역과 고산과 진산, 그리고 정읍, 무장, 장성 등 지역의 교우 촌을 모두 와해 시켰고, 신자들은 흩어져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신자들은 엄청난 박해를 피하여 보다 안전한 곳인 산속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갔던 것이다.
교회사의 기록을 보면 “전라도 지방에 교우 촌이 가장 흥성하였던 시기는 1860년 전 후였다. 전라도 지방의 어느 곳이든지 피난지가 될 만한 곳이면 교우 촌이 없는 데가 없었다.” 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보다 안전한 곳이 전라도 남부 지역이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많았는데 전라도 남부 지역인 태인, 순창, 정읍, 부안지역이 비교적 피해가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증거로 1866년 가혹한 박해로 인하여 신자들이 대거 회문산과 순창 고당산 자락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유일한 증거가 역사적인 사료로 회문산 자락에 묻혀 있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친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의 전라도 이주와 현존하고 있는 이분들의 묘이다.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의 회문산 이주
교회사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가 1866년 병인박해 중에 전라도로 내려와 회문산 자락의 먹구니(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음)에서 살았음을 전하고 있다.
김난식 프란치스코 (1827년 - 1873년)
김난식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교회사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김난식은 1827년 정해 박해 때 피난을 다니던 중에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5세의 나이로 중국 마카오로 신학 공부를 위해 떠나자 어려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와 함께 9살 나이로 피난을 다니면서 살았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할 때는 불과 12살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어머니 고 우술라와 함께 고향을 떠나 길거리에서 걸인 모양으로 친척들과 신자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겨우 지내야 했다. 그리고 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서 고향에 돌아 왔지만 불과 1년 만에 순교를 당하자 그는 가정의 어려움과 함께 어머니 고 우술라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아마도 형 김대건 안드레아 시신이 묻혀 있는 미리내에서 살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가 언제 혼인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동 김씨와 혼인하여 살다가 일찍 사별하였고, 또한 1864년에 어머니 고 우술라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형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무덤 옆에 묻는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전라도로 내려와 회문산 자락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먹구니(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음)로 들어가서, 병인박해를 피해 먼저 부안 변산 반도 불무동에 와 있던 큰집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와 피난 온 신자들과 함께 살았다.
김난식 프란치스코는 1873년까지 회문산에서 화전을 이루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리고 토종벌을 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구전에 의하면 50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게 처와 자녀도 없이 수도자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73년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김난식 프란치스코가 멀리 전라도로 내려와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와 함께 살았던 회문산 자락의 먹구니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나이 많은 분들은 그 곳이 사람이 살았던 터였음을 바로 알아 볼 수 있듯이 오래된 감나무들과 흔적들이 있다. 그리고 남부 지역에 일찍부터 충청도 신자들에 의해서 교우 촌이 형성되었음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회문산 자락 깊숙한 곳에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의 묘가 지금 현재 자리하고 있다.
김현채 토마스(1825년 - 1888년)
김현채 토마스는 김진후(운조) 비오의 직계 5대 손으로 큰집 김종현(종연)이 그의 증조부이다. 그는 1825년 고향 충청도 면천 고을 솔뫼에서 아버지 김경식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현채 토마스는 두 살 때부터 정해 박해(1827년)를 만나 부모와 함께 피난을 다녔고, 14살 때에는 기해박해(1839년)를 만나 조부모와 부모와 함께 피난을 다니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할머니는 1839년 홍주에서 피난 중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역시 피난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박해를 피해 떠돌아다니다가 1865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향 선산에 어머니 시신을 묻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1865년 그의 나이 40이었다. 그러자 그 이듬해인 1866년 병인년 대원군의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를 떠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불무동으로 내려 왔다. 불무동에는 이미 5촌 숙모와 6촌 동생인 김현윤이 살고 있었다. 이분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살고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박해를 피해 먼저 이곳에 와 있었다.
이렇듯 김현채 토마스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박해를 피해 거지와 다름없는 떠돌이 생활(박해 당시에 천주교 신자들은 다 그러하였지만)을 하였고, 피난 중에 조부모와 아버지 어머니를 다 여의고 단신이 되자 유일하게 친척이 살고 있던 전라도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는 부안군 변산 반도 불무동에 잠시 머물다가 작은 집 7촌 숙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1827년생. 조카 김현채 보다 2살 아래)가 전라도로 내려오자 함께 회문산 자락인 먹구니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가 살았던 집터
회문산 자락에는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 그리고 신자들이 살았던 터(교우촌) 가 있다. 박해 시대에는 이곳을 “먹구니” 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 골짜기에서 먹을 만들어 팔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회문산 골짜기인 먹구니에는 지금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고 무성한 나무들과 풀들로 덮여 있다. 그런데 그 곳에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 그리고 신자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산세를 잘 아는 사람이면 이곳이 사람들이 살았다는 곳임을 바로 알아보는 그러한 곳이다. 지금도 100년이 넘는 감나무들이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지켜보듯이 서 있다. 겨우 몇 세대만이 살 수 있었던 조그마한 터를 보고 있으면,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가난한 삶의 체취와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
신자들이 살았던 먹구니 집터는 산내면 능교에서 임실군 강진면 방면으로 가는 도중에 운암 댐이 있고, 그 운암 댐에서 강진 쪽으로 약 2Km 지점에 삼거리가 있다. 그 곳에서 우측으로 1.2km가면 가리점 마을이 나온다. 그곳 가리점에서 약 1Km 거리의 회문산 중턱에 있다. 다소 험하고 길이 나 있지 않아 처음 가는 초행자는 찾아가기가 힘들다.
김난식 프란치스코의 묘와 김현채 토마스의 묘
남부 지역에 일찍부터 충청도 신자들로 하여금 교우촌인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회문산 자락 깊숙한 곳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7촌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의 묘가 지금 현재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두 분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회문산 자락의 먹구니(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음)에서 살다가 생을 다하여 그곳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분들의 묘는 생전에 두 분이 살았던 곧 먹구니 터에서 200m 정도 가파른 회문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 있다.
박해 시대의 교우 촌 규모
박해 당시에 신자들에 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신자들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비망기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 기록도 없다. 가혹한 박해 시기는 신자들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해 시대에 남부 지역인 회문산 자락과 쌍치면 고당산 자락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들어가 살았는지 알 수 가 없다. 서로 신분을 숨기면서 인적이 없는 산속 깊숙한 곳에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박해 이후에 있었던 신자 통계이다. 박해 후에 깊은 산속에서 내려와 교우 촌(지금의 공소들)을 형성했던 공소 신자들의 성사 집행 통계와 연말 보고서를 보고 그 수를 짐작 할 뿐이다.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1886년 한.불 수교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 남부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교우촌 (오늘날 공소라고 부르는 신자들의 마을)들의 통계 보고서(주교에게 보고하는 공소 현황)는 남부 지역,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에 얼마나 신자들이 그 곳에 살았는지 그 수를 대략 짐작하게 한다.
박해 이후 남부지역 공소에 대한 교세 보고서 통계 자료
전라도에 신자들의 분포를 밝힐 수 있는 것은 1880년 대부터였다. 선교사들이 통일된 양식으로 주교에게 교세 보고서를 제출하기 시작한 것이 1882년부터였고, 이때부터 신앙 공동체인 교우 촌(지금의 공소)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사에 나오는 교세 통계표상의 공소 현황 (1882년-1911년)을 보면 고부 지방 6곳, 고산 지방 56곳, 고창 지방 6곳, 금구. 금산. 구이. 봉남 지방 23곳, 용지. 백산 지방 3곳, 장수 지방 45곳, 부안 지방 13곳, 무장 지방 1곳, 순창 지방 36곳, 여산. 함열 지방 9곳, 용담 지방 9곳, 용안 지방 12곳, 익산 지방 14곳, 임실 지방 12곳, 임피 지방 15곳, 소양. 삼례. 구이 등 40곳, 이리 지방 3곳, 정읍 지방 26곳, 진산 지방 16곳, 진안 지방 50곳, 태인 지방 40곳, 함열 지방 11곳, 흥덕 지방 4곳 등의 교우 촌(일명 공소. 신자들의 마을)이 있었다.
여기에서 회문산 자락과 고당산 자락에 직접 관계되는 지역으로 태인 지방 40곳, 순창 지방 36곳, 정읍 지방 26곳, 부안 지방 13곳을 들 수 있다. 모두를 합치면 115곳의 공소이다.
이 지역에 115곳의 공소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박해 당시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회문산 자락과 고당산 자락에 살았는지 헤아릴 수 있으며, 박해시기에 이 지역에 형성되었던 대단위 교우 촌을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사에 1888년 베르모렐 신부가 회문산 공소에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방문한 기록이 있다. 이는 회문산과 회문산 주변에 크고 작은 공소(교우 촌)들이 많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능교(능다리) 본당 설립 당시의 신자 수
또 하나 추측하는 것은 1929년 신태인 성당의 모체인 능교(능다리) 본당이 설립될 당시에 회문산와 고당산 자락 교우촌의 중심지였던 오룡촌 공소에서 성모 승천 축일을 지냈는데 600여명이 고백 성사를 보고, 300여명이 첫 영성체를 하였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1886년 종교 자유 이후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에서 살았던 많은 신자들이 전주와 수류, 부안 등지로 이주 한 것을 감안한다면 박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에 살았는지 생각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박해시기에 남부 지역인 회문산 과 고당산 자락에 대단위 교우 촌(2-3세대, 혹은 그 이상이 신자들이 살았던 곳)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박해의 역사를 종합해 볼 때 서두에서처럼 교회사가 “전라도 교회에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되어 왔지만 그 공소(교우촌)의 소재가 어디였는지 알려 주는 자료가 없다.”고 한 그 공소의 소재가 바로 전라북도 남부 지역인 “회문산” 자락과 쌍치면 “고당산” 자락이었음을 생각 할 수 있다.
순창군 쌍치면 오룡촌 공소
쌍치는 삼국 시대 도실 군에 속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상치동방, 하치동방으로 편제를 정비하였고, 조선시대 와서는 상치동방, 하치동방을 상치면, 하치 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14년에 쌍치면으로 통합되었다.
오룡촌은 학선리의 자연부락으로 산세가 마치 용 다섯 마리가 모여드는 것과 같다고 하여 오룡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룡촌 마을은 6.25 동란 때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폐허가 되었으나 1954년 수복과 함께 주민들이 다시 돌아와 마을을 건설하였다.
쌍치면의 행정 구역은 1974년 개편에 따라 33개 리 54개 반으로 구성되었고, 면적은 79.99㎢(군 전체 16%)로서 호당 평균 경지면적이 1.48㏊이며, 972호의 가구에 2,422명이 살고 있다. 순창에서 서북방 2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장산과 옥정호를 낀 관광 구역에 속해 있다. 쌍치면 학선리에 속해 있는 오룡촌 마을은 면 소재지로부터 북서쪽으로 9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총가구 수 22호, 인구 77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오룡촌에 신자가 살게 된 동기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러 경기, 충청도에서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내려오면서 부터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언제부터 오룡촌 공소에 신자들이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오룡촌 공소가 1876년 조선에 문호가 개방되고, 1886년 종교 자유가 주어지면서 회문산 일대와 고당산 일대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내려와 신자들끼리 함께 살았던 교우촌이었으며, 주변 공소 신자들의 중심 공소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오룡촌 공소는 박해 시기와 그 후에도 전라도 남부지역,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의 공소들 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교우 촌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공소가 설립(본당 신부의 판공 시점)된 것은 1889년 베르모렐 신부가 담당하면서 부터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1905년 개운리 공소와 함께 뮈텔 주교의 방문이 있었고, 1924년 드망즈 주교가 오룡촌 공소를 방문하여 견진 성사를 베풀었다.
1929년 남부 지역 본당이 설립 될 당시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1929년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일에 오룡촌 공소에서 축일을 지내는데 600명이 고백성사를 보고, 300명이 첫 영성체를 하였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1929년에 본당 설립은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 능교(능다리)에 설립되지만 당시에 오룡촌 공소에 신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능교(능다리) 공소
산내면 능교(능다리) 공소는 해발 250m인 산간벽지로 1866년 병인박해 때 박해를 피해 정읍군 회문산과 순창군 고당산 등 산간오지로 피신한 신자들이 박해 후에 산에서 내려와 형성된 공소이다. 새터(신기) 마을이라고도 불리우는 능교(능다리) 공소는 산내면 파출소 근처, 정산 중학교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능교(능다리) 공소(본당 신부가 와서 판공성사를 준 시기부터 부르는 교우촌)는 1899년에 세워졌고, 능교(능다리) 본당은 1929년에 설립되었다. 본당이 된 능교(능다리)는 당시에 산내면, 산외면, 칠보면과 순창군 쌍치면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이어서 인지 1905년 11월 24일 뮈텔 주교의 방문이 있었다. 뮈텔 주교는 능교(능다리) 공소를 방문하여 37명에게 견진 성사를 주고 신자들을 독려하여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1924년 10월 28일에는 드망즈 주교가 방문하여 공소 건물을 축성하고 수호성인을 호수 천신으로 정하였다. 공소 건물은 50여 평의 목조 건물에 초가지붕으로 아담하고 우아하게 지어 졌었다.
1929년 당시에 능교(능다리) 본당의 교세를 보면 신성리 본당이었던 산내면과 산외면과 칠보면에 있는 공소들과, 수류 본당 소속이었던 순창군 쌍치면 종암 공소. 오룡촌 공소. 내동 공소. 아천리 공소가 능교(능다리) 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당시 산내면에는 새터(신기). 새보안(용암). 문수동. 평내. 백필리. 매대. 옥천동. 불당골. 사적골. 이화동 용굴. 회문산 등 지역에 신자들이 살고 있었고, 산외면과 칠보면에는 원바실, 동막골, 청당이 등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사적굴 마을에는 현재 천주교 신자가 없으나 당시 5가구가 살고 있었다.
특히 산내면에는 1987년 1월 1일자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임실군 강진면에 편입되었던 가리점 마을이 있다. 가리점에서 산길로 1.5km쯤 떨어진 회문산 자락인 먹구니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생인 김난식(프란치스코)과 조카인 김현채(토마스)의 묘가 있다.
회문산
회문산은 임실군과 순창군과 정읍군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780m의 높은 산으로 깊은 골짜기와 구림천과 옥정호에서 흘러내리는 섬진강이 회문산을 휘감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렇듯 웅장하고 화려한 경관을 가진 회문 산은 동학군의 항쟁 유적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듯이 과거 동학군들이 항쟁한 곳이었으며, 또한 한말에 국운이 기울어 일재 침략의 마수가 뻗치던 무렵에는 회문 산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무대였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여수, 순천 반란 때에는 반란군의 잔당들이 찾아들었던 곳이었으며,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10월에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와 충청도, 전라북도 남부군(빨치산) 도당 사령부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따라서 빨치산들이 괴멸될 때까지 넓은 지역 골짜기마다 인민군의 깃발이 휘날린 민족의 한이 서린 비운의 산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회문산이 이미 160년 전에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 하였던 곳이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다. 1839년 기해박해를 시작으로 해서 1866년 병인년 대원군의 대 박해 때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멀리 경기,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 까지 내려와 살았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김현채 토마스를 비롯해서 많은 신자들이 회문산 자락에 들어와 살았고, 이를 증언하듯이 지금 회문산 깊숙한 곳에 묻혀 있는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의 묘가 있다. 따라서 회문산은 박해시기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면서 박해를 피해 살았던 성지이다.
고당산
해발 639.7m로 정읍시와 칠보면과 순창군 쌍치면과 경계해 있는 고당산은 동진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며, 물줄기는 동쪽으로 추령천을 통하여 섬진강에 합류 되어 남해로 흘러들고 서쪽은 수청 저수지를 통하여 동진강에 합류 되어 서해로 흘러들고 있다. 호남 정맥과 지맥의 산줄기는 완주 주화 산에서 북으로 금남 정맥을 보내고, 남쪽으로 뻗어가며, 고당 산에 이르러 순창과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시작된 순창 지역의 산줄기는 호남 정맥에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용추봉, 강천산, 서성산, 광덕산 들을 일구어 놓고, 팔덕면 창덕리에 이르러 동쪽으로 24번 국도와 88고속도로를 지나 아미산 줄기를 나눈다. 그리고 서암산과 민치를 지나면 곧바로 동쪽에 설산 줄기를 나누어 놓고 전남 지역으로 뻗어 간다. 그리고 호남 정맥 용추봉에서 나눈 지맥 하나가 동으로 뻗어가며 세자봉, 여분산, 회문산을 일구어 놓는다.
이러한 고당산 자락에 박해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 들어가 살았다. 당시에 신자들이 살았던 터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산세가 험하고 깊어 들어가기가 위험하다.
이곳에서 살았던 신자들은 1876년 조선에 문호가 개방되면서 산속에서 내려와 사는데 그 중심지가 순창군 쌍치면 오룡촌 공소이다. 오룡촌 공소에 가면 웅장하고 깊은 고당산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의 가난한 삶
박해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의 삶은 한마디로 죽음을 목전에 둔 애환이 서린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당시에 포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 가 본들 축재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될 정도로 천주교 신자들은 가난 하였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천주교 신자들은 참으로 가난하였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고, 손바닥만한 터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화전민 생활을 하였던 천주교 신자들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빈자들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과 빈곤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은 산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였으며, 굶주림으로 죽어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출처:www.kimyohan47.com/bbs/view.php?id=boardWord&no=4
신자들의 삶을 표현한 선교사의 말은 이렇듯 신자들의 입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세상의 쾌락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초가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으로 마치 울안의 땅에 갇혀있는 듯이 둘러싸여 기도와 밭일로 일생을 보내는 이들은, 세속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수도자들과 비슷합니다. 이 황량하고 외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은둔 소는 마음이 곧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으니, 그들은 진리와 하늘의 길을 찾아 이리로 온 것입니다.”
<서울교구 연보>(1). 1878-1903. 1893년도 보고서. 138쪽
한국 천주교회사적 의의
1791년 신해 박해를 시작으로 1876년 조선 정부가 문호를 개방하면서 박해를 중지 할 때까지 85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길고도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박해로 인해 “조선의 천주교회는 씨가 말렸다.”는 표현대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많은 분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배교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신분을 숨기면서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면서 굶주림과 질병과도 싸워야 했다.
교회 역사는 “남은 신자들이 손바닥만한 터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에 굶주림과 빈곤으로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라고 전하고 있다. 1900년 뮈텔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박해 동안에 희생당한 신자들의 수(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은 제외)를 1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실로 엄청난 수였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는 이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존망이 걸려 있는 어려운 시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굶주림과 기아를 무릅쓰고 사나운 짐승들과 험한 도둑들이 들 끌었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출신 지역을 초월해서 신자들끼리 교우 촌을 이루면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한국 교회 역사에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분들과 그 후손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 역사에 초석이 되었고, 한국 교회 발전에 맥을 이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한국 교회를 섭리하신 계시의 산 역사라고 본다. 따라서 박해 시대에 신앙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곳 “회문산” 자락과 “고당산” 자락은 성스러운 곳이라 할 수 있으며, 곧 성지이다. 특히 이곳은 전라도 땅이지만 전국에서 순교자들의 가족들과 후손들이 내려와 신앙을 지키면서 살았던 거룩한 곳이다. 또한 이곳은 신자들이 지역을 떠나 함께 교우 촌을 이루면서 살았던, 하나 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라북도 남부 지역인 회문산과 고당산 자락의 교우촌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전주 교구사적 의의
1791년 신해 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전주 교구는 초기부터 신앙의 싹이 꺾어지는 큰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하여 교우촌인 신앙 공동체는 큰 타격을 입었고, 전라도 교우촌은 거의 폐쇄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큰 박해를 받으면서 많은 순교자들과 배교자들로 인하여 전라도 교회 역사는 그 맥이 끊기는 위기에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충청. 경기 지역에서 신자들이 끊이지 않고 내려 와 남부 지역에 신앙을 일으켜 세우면서 그 맥을 이어 주었다. 따라서 전라도 남부 지역인 회문산과 고당산의 신앙 공동체인 교우 촌은 전주 교구사가 다시 소생한 교구 역사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남부 지역 교우촌은 박해시기에 신앙인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애환이 서린 곳으로서 전주 교구 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뿌리이며 맥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남부 지역인 회문산과 고당산은 박해 시대에 전라, 충청, 경기 지역 신앙인들의 고통과 애절한 삶과 죽음이 묻어 있는 성지로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소고
교회는 피로서 신앙을 증거 한 분들을 공식적으로 순교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분 들을 성인품에 올리고 신앙인들의 모범으로 추앙한다. 숭고한 이분들의 신앙 정신은 곧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생 동안 죽음을 목전에 둔 고통스러운 삶을 통하여 신앙을 증거한 신앙인들의 신앙 정신도 순교자들의 신앙 정신과 함께 소중하고 소중한 순교 정신이다. 공식적으로 순교자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이분들을 순교자라고 부르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분들의 순교 정신을 간직하면서 이 분들이 살았던 삶과 죽음의 자리를 잘 가꾸어 성지로서 거룩하게 보존하고 보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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