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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에서 세 명이나 부상당해
증 언 자 : 김종명(남)
생년월일 : 1930. 12. 13(당시 나이 50세)
직 업 : 조각연구소 운영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5
개 요
가족 중 세 명이나 부상을 당한 집안의 가구주 김종명 씨와 큰아들 김재신 씨의 증언이다. 장남과 막둥이 아들은 부상을 당하고 다른 두 아들마저 행방불명되자, 아들을 찾아나선 아버지가 26일밤 통금에 걸려 순찰대에 의해 도청으로 인계되었다. 아버지 김종명 씨는 27일 새벽 도청 진압 때 계엄군에게 붙잡혀 한 달 이상 영창생활을 하고 풀려났다.
큰아들의 부상
"어느덧 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큰 아들과 막내 아들이 공수대의 잔인한 진압봉과 워커발에 머리가 터지고 온몸에 멍이 드는 부상을 당하고 거기다가 둘째, 셋째 아들을 찾아나섰다가 늙은 나까지 상무대로 끌려가 한 달이 넘게 고생하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둘째와 셋째는 무사했지만 날벼락도 유분수지 한 가정에서 3명씩이나 이럴 수가 있겠어요? 5·18로 인해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된 셈이지요."
김종명 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김씨는 1930년 광주시 학동에서 태어나 서석국민학교와 광주서중을 졸업하였다. 일생을 서예, 화가로 보내신 아버지의 손재주를 물려받아 '목공예'를 해오다 1980년 무렵엔 남동성당 옆에서 '방촌조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큰아들 김재신 씨도 아버지를 도와 방림동 조각 창고에서 일했다. 김재신 씨는 5월 19일 오후 광주공원 앞 '호남철물상회'로 목공예에 사용되는 물품을 사러 갔다가 공원 앞에 있던 공수부대에게 잡혀 부상을 당했다.
"호남철물상회에서 물건을 산 후 상회에서 나와보니 광주공원 다리 양옆으로 30여 명의 공수부대가 늘어서 있는 게 보이더군요. 순간 저는 어리둥절했어요. 그동안 방림동 작업장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거든요. 그때 마침 부근에서 사는 친구를 만났어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었죠. 그는 사태가 심각한 것 같다며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겁이 나고 괜히 나왔다 싶었어요. 빨리 작업장으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기다렸어요. 마침 앞에서 빈 택시 한 대가 오더군요. 오른손을 들어 반원을 그리며 방림동 방향으로 돌리려는데 그때 갑자기 공원다리에 서 있던 공수부대 1명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무슨 신호냐고 묻고는 대답도 하기 전에 곤봉으로 제 머리를 내리쳤어요. 저는 정신이 아득하여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쓰러져 있는 나를 공수대 4명이 뒤척이는 사이에 상의 주머니에서 라디오가 빠져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렸어요."
그때 재신씨의 호주머니에는 라디오뿐만 아니라 상의 왼쪽 주머니에 3만 원, 바지 주머니에 15만 원이 있었다. 가뜩이나 '손짓' 때문에 의심을 받고 있는데 호주머니에서 라디오가 떨어지자 그는 더욱 불리했다.
"라디오를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이 자식 간첩이지?'하면서 온몸을 짓밟았어요.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당하고만 있자니 너무나 억울하고 미치겠더군요. 그 자리에서 까무라쳤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공원 광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공원 광장에서 왜 내가 이렇게 맞아야 하는지 물었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반항한다고 또 한 차례 사정없이 얻어터졌지요. 정말 끔찍했어요. 아무 죄도 없이 끌려온 것이 기가 막혀 '전 아무 죄도 없으니까 제발 보내주십시 오' 하며 사정했더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때리더군요."
그는 한참 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공원 계단으로 끌려갔다. 계단 중간에 있는 계단참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엎드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팬티만 남기고 발가 벗은 채였고 주위에는 피가 낭자해 있었다.
김재신 씨가 거의 실신상태에 빠지자 공수들은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겼다. 그때 재신씨는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처럼 혹은 죽은 듯이 계단에 엎드려 있은 지 2-3시간이나 지났을 때였다.
"뭣인가 온몸에 차갑게 와닿는 느낌을 받고 눈을 떠보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순간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있는 힘을 다해 '장교님! 장교님!' 하고 부르니까 장교인 듯한 공수부대 한 명이 다가오더군요. 무죄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제가 학생으로 오인받은 것 같은데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뜻밖에도 일어설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얼른 그렇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옆에 있는 공수대원을 시켜 옷을 입혀주고 공원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부축해 줬어요. 실내체육관 쪽에서 오는 1톤 트럭을 잡아주는 친절까지 베풀더군요.
장교는 트럭을 세우고 운전수에게 저를 태워주도록 말했습니다. 운전수는 통금 시간인 9시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어렵다고 거절했어요. 그러자 공수 장교는 운전수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고, 겁에 질린 운전수는 얼른 저를 트럭에 태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어요. 운전수는 양림다리에서 트럭을 세웠어요. 그는 나를 보며 '9시가 넘은 것 같으니 더 이상 데려다줄 수 없다, 내려라' 했어요. 하지만 그런 몸으로는 방림동 집에까지 걸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매달렸지요. 그 러다가 퍼뜩 호주머니에 있는 돈이 생각나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바지 주머니에 담은 15만 원이 온데간데 없고 웃옷에 3만 원만 남아 있었어요. 우선 있는 돈 3만 원을 운전수 손에 쥐어주며 집까지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집 앞까지 데려다주더군요."
재신 씨는 차에서 내려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내와 방 한 칸을 세내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내는 친정에 가고 아무도 없었다. 재신씨는 그날 밤 혼자서 끙끙 앓았다.
다음날 아침 인기척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아주머니는 재신씨의 아버지 김종명 씨 댁으로 급히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가보니 재선이가 방바닥에 피투성이로 나자빠져 있었어요. 연락을 받으면서부터 뛰던 가슴은 더욱 요동을 치고, 머리가 터지고 왼쪽 가슴이 찢어진 것을 보니까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을까 싶드만요. 일단 집으로 옮기고 보자고 지나가는 차를 잡아 집으로 갔지요."
김종명 씨는 그날의 상처가 되살아나는 듯 힘겹게 말했다.
둘째와 셋째 아들을 찾아 헤매
김종명 씨가 큰아들 재신씨를 집에서 치료하고 있던 21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막내 아들 명수가 다쳐서 왔다.
"명수가 그날 오전에 금남로에 구경을 갔던 모양이에요. 공수대에게 붙잡혀 군화발에 채였다며 온몸에 멍이들어 울면서 들어오는데, 분노보다는 공포가 엄습하고 한편으로는 애들 단속을 허술한 것이 잘못이다 싶기도 했지요.
21일 오후엔 시위대 차량이 집 앞으로 지나 다니고 학동 오거리에선 청년 몇이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주는 것이 보였어요. 그런 것을 보니까 사태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마음이 더욱 불안해지더군요. 그런데 얼마 있자 둘째 며느리가 집으로 오더니 애 아빠와 삼촌이 없다는 거예요. 그때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셋째와 시내에서 함께 술집을 하고 있었는데, 전날 집을 나간 후로 소식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 말을 듣고 또 무슨 일이 터질까봐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 감히 찾아나설 엄두를 못 냈지요."
김종명 씨는 그날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밀려나고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또 시체를 확인하려면 도청과 상무관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그 소문을 듣고 김종명 씨도 둘째와 셋째 아들을 찾기 위해 상무관으로 갔다.
"상무관 앞은 나처럼 시체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반쯤 열려진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체들의 모습이 어떻게나 참혹하던지 말로는 다 못 합니다. 눈, 코, 입에 썩은 물이 고여 있는가 하면,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일그러진 것도 있고……. 참말로 못 보겠습디다. 혹시나 우리 애들이 있을까봐 설마설마 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도청에도 시체가 있다고 해 그리로 갔지요. 도청 바닥에 20-30구의 시체들이 있습디다. 관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있고, 그냥 바닥에 있는 것도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아들들은 없었어요.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 답답했지요."
김씨는 도청에서 나온 뒤로도 전남대학교 병원, 기독병원 등지를 돌아다녔지만 두 아들을 찾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 가슴을 태우고 있던 중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26일 오전 10시경 집을 나섰다.
"교도소로 가는데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들어 맨 정신으로는 걸을 수가 없더군요. 계림동파출소와 서방을 거쳐 교도소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소주를 마셨지요. 교도소 앞으로 가보니 계엄군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어요.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 인근 주민들에게 상황을 물어봤지요. 허나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총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겁이 나서 모두 나와보지 못했다는 것이에요. 그 소리를 듣고 다리에서 힘이 쏙 빠져나갑디다. 터벅터벅 돌아오면서도 또 술을 마셨습니다.
빨리 집으로 가려고 도청 옆 골목을 막 접어드는데 시민군 순찰대원이라면서 젊은이 2명이 앞을 가로막았어요. 통금시간이 이미 지났으니 도청으로 가자고 했어요. 바로 집이 옆이라고 해도 도청에 들어가 있다가 날이 새면 가라고 해 할 수 없이 따라갔지요.
젊은이들을 따라 도청 1층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언뜻 보니 조사계라고 씌어진 것 같았어요. 사무실 안에는 시민군으로 보이는 젊은이 10여 명이 있었고, 한쪽에는 통금위반으로 들어온 듯한 7, 8명이 앉아 있었어요. 나도 그 사람들 옆으로 갔지요. 말을 해보니까 그 사람들 중에는 데이트하다 들어온 젊은이 한쌍도 있었어요.
자정이 넘었을 때예요. 한기를 느끼며 스르르 잠이 들려고 하는데 시민군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우왕좌왕했어요. 한 시민군은 전화 수화기에 대고 무척 짜증스런 목소리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디다. 얼마 후 그 시민군이 전화를 끊자 시민군들은 각자 총을 들고 실탄을 넣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렇게 무장한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갑디다. 계엄군들이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떠돌기는 했지만 설마 하면서 나는 자리에 드러누웠어요. 아마 한참을 잤을 겁니다. 얼핏 총소리를 듣고 잠을 깼어요. 처음엔 희미했으나 갈수록 가까이 들립디다.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모두 사무실 구석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는데 잠시 후 바로 귓전에서 총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전투경찰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어요. 총에 맞았는지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더군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청년이 입고 있는 옷과 총이 불리할 것 같아서 빨리 군복을 벗고 총을 던져버리라고 했죠. 내 말에 따라 청년은 옷과 총을 벗어던지고 우리가 있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계엄군의 총격으로 여기저기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더군요. 그때마다 유리조각이 내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 한 순간 갑자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깜짝 놀라 떨고 있는데 우리 사무실 문이 덜컥 열리고 계엄군 몇 명이 들이닥쳤습니다.
나는 달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통금위반자요!' 하고 외쳤지요. 그러나 계엄군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총대로 내 양어깨를 찍어내렸어요. 사무실 안은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계엄군은 순식간에 우리들을 바닥에 쓰러뜨렸지요.
우리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지자 계엄군은 때리는 것을 멈추고 유탄에 맞을 위험이 있다며 유리창 바로 아래에 바짝 기대 엎드리라고 하더군요. 한참 후 총소리가 멈추니까 우리들을 밖으로 끌어내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수갑을 채웠는데, 나는 스무 살이나 먹었음직한 여자와 묶여졌지요. 그때는 몰랐지만 상무대에서 사람들 말하는 것을 보니까 도청에서 간호원으로 일한 아가씨라고 했어요.
우리들은 도청 본관과 별관 사이에 나 있는 넓은 통로로 끌려나왔지요. 굴비 엮듯이 묶여 밖으로 나오니 통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있습디다. 바닥엔 군데군데 피가 낭자해 있었는데, 배를 땅에 대고 있는 것이 마치 죽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 같았어요. 나와 아가씨는 바닥에 엎드렸어요. 우리를 전부 죽여버리지나 않을까 가슴 조이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아가씨도 손을 바들바들 떨었기 때문에 수갑이 죄어들어 내 손목을 자극했지요. 아가씨도 손목이 아프니 까 자꾸만 움직이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얼마 후 계엄군은 통로에 있는 사람 모두를 일으켜세우고는 등뒤에 매직으로 '악질', '무기휴대' 등의 글자를 적었다. 김종명 씨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씨는 아무 죄도 없다며 계엄군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계엄군은 김씨의 등에 아무 것도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청 밖으로 끌려나왔다. 도청 앞에는 무장한 계엄군들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사람들은 계엄군 사이를 지나는 동안 걷어채이거나 총 개머리판으로 사정 없이 두들겨맞았다. 계엄군은 등에 씌어진 글자를 보며 때리기 일쑤였는데 김종명 씨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아서인지 그곳을 무사히 통과했다. 계엄군 사이를 벗어난 사람들은 대기해 있는 군용 버스, 관공서 통근버스, 일반버스 등에 타야했다. 김종명 씨도 정신없이 그중 한 버스에 올랐다.
상무대 영창생활
"버스에 오르자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으라고 엄포를 놓았어요.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참말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 었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 쥐도 새도 모르게 총살을 시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두려움에 떨면서 한참 엎드려 있으니까 버스가 멈췄어요. 계엄군이 내리라고 해서 한 사람씩 나오는데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를 내리쳤어요."
그들이 끌려간 곳은 상무대 헌병대 연병장이었다. 그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 2백여 명이었다. 계엄군은 이름 등을 적은 네모난 판을 목에 걸게 한 뒤 한 사람씩 사진을 찍었다. 그 후 연병장 입구에 마련된 책상 앞으로 불러 조사를 했다. 김종명 씨 차례가 되자 수사관은 "왜 잡혀왔냐?"고 물었고, 김씨는 통금위반으로 도청에 있다가 잡혀왔다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은 조사가 끝난 뒤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받았다. 자세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몽둥이로 내리쳤기 때문에 쥐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 했다. 무척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기합이 끝났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차례대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상무대 영창 6개중 김종명 씨는 3소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영창 안으로 들어가 앉고 보니 이젠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어요. 방은 직사각형으로 그리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1백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들어 차고 보니 몹시 비좁았어요. 그래도 비좁은 것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는데, 제일 고달픈 때는 조사와 기합을 받을 때였지요.
우리들은 한 사람씩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요. 2, 3일이 지나자 나를 불렀어요. 조사실에 들어갈 때는 누구든지 '폭도 000 조사받으러 왔습니다'라고 외쳐야 했어요. 그렇게 외치고 조사실로 들어가니까 몇 명의 청년들이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박봉철이라는 수사관 앞에 앉혀졌는지, 내 이름이 자기 친구 이름과 비슷하다며 사근사근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해줬어요. 원래 목사 출신이었는데도 학도병으로 참전한 후 지금은 헌병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도 하고, 충분히 진의를 가려내야 하기 때문에 수사기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행적을 묻길래 '통금위반자'였다고 했더니 믿지 않고 누구와 연결되었냐고 얼토당토 않은 질문을 계속했어요. 그래도 이름 덕분에 맞지는 않았지요.
다른 사람들은 조사를 받으며 많이 맞는 것 같더군요. 조사받을 때 옆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고……. 젊은이들 대부분이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많이 두들겨 맞았지요. 형이 무슨 대학 총학생 회장이라는 고등학생은 곡괭이 자루에 목덜미를 맞아 피를 토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고, 또 손톱을 벽에 갈아 자기 배를 갈라 자살을 기도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려왔어요.
헌병이 가끔씩 우리들을 놀리거나 기합을 주기도 했는데 어느 날 '기립', '앉아' 를 반복하는 기합을 받는데, 동작이 느리다는 이유로 70세 가량의 노인이 불려나갔어요. 변호사라는 그 노인은 우리들 보는 데서 많이 맞았습니다. 손을 쇠창살에 얹게 하고는 곤봉으로 내리쳤어요. '변호사는 모두 도둑놈 새끼들이다' 하고 욕설을 퍼붓으니까 그 말에 상처를 받아선지, 아파서 그런지 노인은 눈물을 흘리더군요."
집으로 돌아와
2-3주일 후 영창 안에 있던 사람들 중 김종명 씨를 포함한 1백50여 명이 상무대 공병대 교회로 옮겨갔다. 교회당 안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여전히 감금된 상태였다. 헌병 2명이 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체조, 훈련 등을 시켰다.
"헌병 비위를 맞추는 일은 영창에서나 교회당에서나 다를 바가 없었지요.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시키는 대로 신속하고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지요. 부대 안에 나 있는 잡초를 뽑거나 청소를 하러 나갈때가 유일한 낙이었는데, 몇 명씩 조로 나뉘어 목욕하러 갈 때나 가끔씩 담배를 피울 때도 좋았어요.
7월 2일이 되자 목욕을 끝낸 우리들에게 속옷을 주었어요. 얼마 있으니까 시교육감이란 사람이 와서 훈시를 했습니다. '전국소년체전에서 전남이 꼴등을 했는데, 그 이유는 광주사태를 일으킨 폭도들 때문이오. 광주가 불순분자들의 소행에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러한 낭패는 없었을 것이오. 앞으로 절대로 폭도들의 난동에 휘말리지 마시오.' 그날 밤을 거기서 보내고 나니 다음날 아침에 석방시켜줍디다. 상무대 앞에서는 미리 연락을 받은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이 시청 버스를 타고 상무대에서 벗어나자 '이젠 살았구나' 싶었어요."
당시에 김씨가 그렇게도 찾아헤맸던 둘째, 셋째 아들은 모두 무사했다. 둘째 아들은 서울에 있는 친구집에 갔으며, 셋째 아들은 광주 친구집에 있다 27일 이후에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직업을 잃고
김종명 씨는 석방된 이후 파골쇄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0년에는 5·18 부상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폭도로 몰리기 십상이었으므로 병원에도 맘놓고 갈 수 없었다.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탓에 김씨의 큰아들 김재신 씨도 두 달 후 왼쪽 가슴이 곪아 도청 옆 이남재외과에서 수술을 받았다. 막내 아들은 겉으로 보아 큰 상처가 없어 별다른 처방을 하지 않았으나 최근 신체검사 결과 왼쪽 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구타로 인해 생긴 멍이 계속 확대되어 결국 청각상실을 가져왔다고 한다.
김종명 씨는 뼈를 아물게 하는 데 효험이 있다는 상골, 구리 등을 갈아먹는 한방치료를 주로 했다.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인 양어깨는 물리치료를 했으나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진통제를 많이 먹었다.
"나와 큰아들이 일손을 놓게 되자 조각연구소 문을 닫고 세를 놓아 그 세로 먹고 살았어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치료비에 충당하기도 모자랐어요. 보다 못해 애들 엄마와 큰며느리가 생업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지요. 아내는 파출부로 일하고, 큰며느리는 식당에서 일하고, 그리고 치료비가 많아 빚을 내야 할 형편이었지요. 큰아들도 지금까지 뾰족이 하는 일이 없다 보니 형편이 어렵고, 나도 일손을 거의 놓은 채로 지내오다 보니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 지금은 1백20만 원에 사글셋방을 얻어 살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우리 집에 닥쳐온 비운으로 지금까지 통한의 세월을 살아오다 아버지는 1988년에 부상자로 신고를 하셨어요. 그때 저와 막내 동생 명수는 하지 못했어요. 저는 미국에 계시는 고모님이 초청을 했는데 5·18 부상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미국 가는 데 지장이 있을까봐 못 했어요. 막내 명수는 신고할 만한 증거가 부족해서 못 했죠.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저희들도 신고를 할 생각입니다.
벌써 9년이 흘렀군요. 그때 국민학생이던 명수가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었어요. 하지만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은 언제가 되려는지……. 억울한 죽음, 부상, 누명을 밝힐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빌 뿐이죠."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