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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2017. 6 커버스토리 『강인한 시인론』
-자유로운 시의 정부(政府)
고성만 (시인 )
1. 시력(詩歷) 50년의 위엄
내가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나는 열심히 습작을 하는 시인 지망생이었고, 시인은 고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시인의 시에 이유 없이 끌렸다. 깨끗하고 가지런한 시 세계가 좋았고, 특히 그 무렵 출간한 제3시집 『전라도 시인』은 드물게 신선한 감각의 시집이었다. 장석주의 해설, 카피라이터 이만재의 발문도 새로웠을 뿐 아니라, 시인과 시인 가족 주변의 풍경이 아주 잘 어우러진 책이었다. 그 시집에서 「슬라브 지붕에서 바라본 지중해」, 「대문에 태극기를 달고 싶은 날」, 「냉장고를 노래함」과 같은 시를 본 기억이 나는데, 시인 가족이 힘들여 마련한 집과 관련된 시편들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소박하고도 따뜻했다. 일간지에도 여러 번 광고가 실렸던 기억이 나고, 독자들의 호응도 좋았던 듯하다. 그 무렵 광주는 죽음의 냄새로 뒤덮인 음울한 도시였다. 비극의 땅에 새로 돋아나는 씨앗처럼, 강인한은 시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집에는 「팬지꽃」이 실려 있다.
허공에 높이 떠 있습니다
내려갈 길도, 빠져 나갈 길도
흔적 없이 사라진 뒤
소문에 갇힌 섬입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한 주일 만에 나선 오후의 외출에서
꽃상자 속에 담긴 꽃들을 만났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키 작은 꽃들
가혹한 슬픔을 향하여
벌거벗은 울음빛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 시늉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팬지꽃」전문
어떤 독자가 이 시를 ‘좋은 시’ 난에 올려놓은 블로그를 보았는데, 이 시를 단지 아름다운 서경시로 보고 있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시 안의 ‘가혹한 슬픔’이라는 구절은 팬지꽃을 화분이라는 작은 상자에 가두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 것을 보고 그럴듯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팬지꽃’은 사실상 5월의 광주를 상징하는 말이다. 80년대 초에 나는 차마 이 시를 읽을 수가 없었다. 시인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이 작은 꽃에다가 ‘벌거벗은 울음빛’, ‘벙어리 시늉’을 담았겠는가. 그때 마침 대학교 교지 편집을 맡고 있던 나는 강인한의 시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평소 존경하던 시인이 근무하는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찾아갔다. 몇 권의 교과서와 참고 서적이 있는 학기말? 학기초?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의 나무책상이 있는 교무실에서 짧으나마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40대의 시인은 생각보다 훨씬 수수한 옷차림, 말수도 많지 않았으며, 무척 친절한 분이었고, 선량한 눈빛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와의 첫 번째 짧은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가 얼마 안 있어 군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강인한은 1944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정읍은 「정읍사」와 같은 문학작품의 산실이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의 땅이기도 하다. 붉은 황토를 보고 자란 시인의 저항적 기질은 이런 바탕에서 체득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본명은 동길(東吉), 정읍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전주고등학교에서 신석정 시인에게 시를 배웠다. 신석정 시인은 이 소년 문사들에게 <맥랑시대(麥浪時代)>라는 명칭을 붙여주었고, 오하근, 오홍근 등 선후배들과 함께 창작활동을 하였다.
강인한은 1965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1965」의 당선 통보를 받고, 다시 나흘 뒤 당선취소 통보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12월 15일자 전북대학신문에 발표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고 연보에 밝히고 있다. 이듬해부터 동아일보는 ‘기발표 작품은 당선을 취소한다’라는 규정을 명문화했다고 하니 시인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1967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문공부의 신인예술상 문학부문 시조「임진강」이 거푸 당선되었으니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난 셈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현재까지를 계산해볼 때 선생의 문단 등단은 2017년 올해로 50년이 된다. 과연 한 가지 일을 50년 동안 수행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달인’의 경지에 올라, 분석해보지 않고도 사물의 속성이 환히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이후 강인한은 장래 문단에 등단하여 활동하게 되는 사모님 김명규 수필가와 결혼하여 첫딸을 낳았는데, ‘율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율리는 「율리의 초상」, 「율리, 율리」 등의 시에 여러 번 등장한다.
율리, 오늘 밤 그 누구 죄 없는 사람의 영혼이 이처럼 마알갛게 풀리어 내 더운 사념의 머리칼을 정하게 빗겨주는 것입
니까. 좁은 방에서 아무렇게나 궁글던 나의 꿈도 오늘 밤만은 어느 산여울에 흐르며 구르는 남모르는 유리구슬, 끼리끼리
흘러내리다가 맞부딪쳐 은실의 소리를 울려내는 그 투명한 유리구슬의 꿈이라도 될 듯합니다.
—「겨울 나라의 달」부분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율리’는 연인이었다. 그 여인을 위해 시인이 붙여준 별명이었다(아쉽게도 ‘플라토닉러브’라고 밝혔다.). ‘ㄹ’음과 모음이 어울려 흐르는 듯한 어감을 느끼게 하는 이 이름은 유미주의자로서의 강인한의 면모를 잘 나타낸다. ‘마알갛게’, ‘궁글던’ 이런 시어도 청년시절 시어의 조탁에 많은 시간을 바쳤던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야간 버스의 흐려진 유리창에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썼’던, 말하자면 ‘율리’는 강인한에게 구원의 여성이었다. 애틋하게 사모하였으나 결국 맺어지지 못한 이 여인은 비극적 시대의 꿈을 상징한다. 자신이 못 다 이룬 사랑의 대상을 자신의 딸에게 투사한 것이다. 이 이름을 받은 ‘율리’는 천부적으로 글을 잘 쓸 수밖에 없었을 텐데, 글쓰기보다 공부를 잘해서 사법고시에 합격, 현재 유명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부부와 함께 사는 효녀이자 동거가족이기도 하다.
이 무렵 동양방송의 ‘신가요 박람회’에 본명 강동길로 응모한 노래 가사 「하얀 조가비」(노래, 박인희), 「등불」(노래, 영 사운드) 등이 작곡되어, 작년 KBS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 박인희가 작사가를 찾았다는데, 박인희 귀국 환영 팬클럽 모임에서 잠깐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40대 초반까지 강인한은 ‘서정시인’의 면모를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시인은 공들여 시의 탑을 쌓았고, 누구보다도 현란한 언어 기교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2. 가혹한 시대에 복무하다
강인한은 1977년부터 2006년까지 약 30년 간 광주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78년부터 <원탁시> 동인에 참여하였고, 1979년에 <목요시> 동인을 창립, 고정희, 국효문, 김종, 허형만 다섯 시인과 함께 목요시 1집을 간행하였고, 김준태, 송수권 등을 2집부터 동인으로 영입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원탁시>는 국내 최장수 동인지일 뿐만 아니라, <목요시>는 광주의 자존심이자 자랑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무크지 <반시>, <자유시>, <시와경제> 등과 함께 시대정신을 올곧게 구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 편의 시가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한 편의 시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시인은 그런 존재가 아니므로 우리는 그렇게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 처한 인간의 현재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 시는 여타의 문학 언어보다 강한 명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시가 민족이나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단 한 줄기의 가느다란 각성의 빛줄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를 세우고자 한다.
—《木曜詩》 동인지 제3집, 1981년 여름
‘한 편의 시가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한 편의 시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니다’를 강요받던 시대. 문학은 문화의 꽃이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는 고뇌. ‘한 줄기의 가느다란 각성의 빛줄기’를 마련하기 위해 시인들은 고군분투하였다. 이즈음의 문학은 ‘효용론적’ 차원에서 접근해야할 것 같다. 작품이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를 중시하여 그것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논리,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독자들을 자신들의 방향으로 끌’어 가려 노력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위해 시인들은 광야에서 외쳤다. 몇몇 정치군인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살인행위를 규탄하고, 야만의 시대를 빨리 종식시키고자 다른 어떤 종류의 문학보다 시인들은 시인의 사명에 충실했고, 독자들은 거기에 호응했다. 시인들 아니었으면 그 삭막한 시대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강인한의 시들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을 시화하면서도 ‘허황되게 흥분하거나, 거칠게 휘몰아가는 일 없이 사건을 냉철하게 전개하여 자신이 의도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민영,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소망」, 『창작과 비평』, 1992, 여름호, 188쪽)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시인의 발언은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시대는 훨씬 그악스러웠다. 암흑기였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목소리 큰’ 시들과 대결하여 그들에게 묻히는 문단활동, 고도성장에 매몰된 정서 등등의 이유로 강인한의 시는 빛을 잃었다. 그러나 강인한은 시의 위력을 믿는 ‘천성’이 시인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초래케 한 무리들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그 결과로 생산된 시집이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이었다. ‘1980년 오월의 광주, 그때를 광주에서 겪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칼레의 시민들’이 당한 비통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고 오월 광주의 시편들을 중심으로 묶은 시집임을 밝히고 있다.
3. 광주의 여러 시인들
치열하게 습작을 하고도, 신춘문예와 문예지 최종심에서 번번이 미끄러진 나는 입대하였다가 제대하여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동안 중단하였던 시 작업을 재개했는데, 어떨 때는 1주일에 한 편, 어떨 때는 2~3일에 한 편 시가 씌어졌다. 쏟아지는 시에 대한 평을 듣고 싶어 하던 차에 강인한 시인이 근처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인이 근무하던 고등학교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간간이 선생의 시를 읽었던 터라 학교로 안부전화를 걸었다. 옛날 찾아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시를 가지고 “다시 뵙고 싶다”는 말엔 흔쾌히 허락하셨고, 자주 시간을 내주셨다.
그로부터 나는 시의 ‘과외교사’ 한 분을 모시게 되었다. 덜 된 부분, 좋은 부분을 일일이 지적해주 주셨는데, 1998년 초여름 “이제 등단하겠다”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섬, 검은 옷의 수도자」외 4편의 시로 『동서문학』 신인상을 받게 되어 문단에 나서게 되었다. 광주에는 여러 좋은 시인들이 많았지만 <원탁시>에 열정적인 시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분들에게는 자신들의 삶과 시에 대한 염결성이 있었다. 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듯하다.
1965년 시집 『흑인 고수 루이의 북』이라는 시집으로 등단하고, 1997년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 범대순 선생이 활동 중이던 <원탁시>에 들어가게 되었다. 허형만, 김종 시인께서 특히 잘 보살펴주었지만,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한계도 있고, 체질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오래지 않아 동인활동을 접게 되었다. 비록 동인활동은 접었지만, 범대순 시인과 강인한 시인과 나, 이렇게 셋이서 가끔씩 만나게 되었다.
범대순 시인은 무등산에 천 번 이상 올랐고, 『무등산』 등의 시집을 내었는데,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강 시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두 분을 뵙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고, 내 판단으로 학자적인 범대순 시인은 강인한 시인의 명징한 시 세계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존경하는 시인을 두 분이나 모시게 되어 몹시 행복했고, 시인으로 산다는 것의 ‘존엄’을 깨닫게 되었다. 몇 년 전 타계하신 범대순 시인이 지금 바로 앞에 앉아계시는 것처럼 선연하다.
하루 일을 마친 일터에서
피로한 날개를 쉬고 차 한 잔을 들다가
문득 그를 생각했다
아직 내 날개가 튼튼하고
날아야 할 하늘이 바다보다 넓은 시절
초여름 산에서였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
목련꽃 떨어진 목련 나무 아래서
스님이 된 제자가 웃고 있었다
세상 시름 모르고 연둣빛으로
마악 돋아난 이파리만 골라
정한 그늘에서 말린
작설차 한 잔을 건네주는데
차 따르는 소리에 옥빛 하늘이 고왔다
집 없는 새들이 무리 지어
이승의 하늘을 떠나갔다는 우울한 소식으로
어제는 종일 황사 바람 불고
오늘은 비가 내린다
어느 산을 그가 넘어가고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에
뜨락의 목련이 등을 끄고 있었다.
—「목련 회상」전문
이 시는 1992년에 간행된 『칼레의 시민들』에 실려 있고, 시점 상 80년대에 씌어졌을 확률이 높지만, 강인한 특유의 아름다운 서정의 결이 잘 살아있다. 초여름 산에서 제자를 만났는데, 그 제자가 스님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시인과 사제, 승려는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셋 다 외로운 존재이며,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꿰뚫어보는 예지력을 지닌 존재이다. ‘종일 황사 바람 부’는 세상에 목련의 등불 하나 밝히는, 그렇다. 강인한에게 교직은 안 어울리는 옷 같았으나(인문계고등학교의 힘든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에 40대에 이미 치아가 다 망가져 틀니를 해야만 했다.), 가장 안정된 시기이기도 했다(‘한 소쿠리 감자를 쪄 내온/ 아내 곁에/ 졸음이 나비처럼 곱다
-「보랏빛 남쪽」) .
4. ‘푸른 시의 방’ 개설, 서울 행
카페 ‘푸른 시의 방’은 회원 수 2,449명, 하루 방문객 대략 5백 명, 좋은 시 8천여 편 수록하고, 웬만한 시 잡지 못지않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2002년에 개설, 15년 동안 강인한 시인 혼자 운영해오고 있다. 광주에 거주하는 지인 분이 1호 회원, 내가 아마 2호 회원 쯤 될 것이다. 이 카페를 통해 많은 시들이 맛있게 읽혔으며, 많은 시인들이 좋은 시인으로 인식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시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시를 ‘팔아’ 이름을 얻으려는 이, 교묘하게 남의 시를 ‘베끼는’ 행위, 문학 지망생들에게 시를 ‘지도’한다는 핑계로 ‘삥 뜯는’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문인임을 빙자하여 ‘성폭력’ 등 숱한 잘못 저지르는 이들을 밝혀내었고, 독자들에게 감식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다. 시인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시를 읽으며, 신인과 원로 가리지 않고 좋은 시를 만나면 직접 ‘베껴서’ 올리기를 좋아한다.
나는 최근 서점가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는 필사 시집의 붐을 십여 년 전 ‘필사하는 과정 안에 시의 비밀이 들어 있다’면서 필사를 권한 시인의 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인의 서울생활은 활기찼다. 직장생활 할 때보다 활발하게 창작하였는데 2009년, 제 8시집 『입술』을 간행하였고 이 시집으로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여기에 실린 시들을 나는 메일을 통해 미리 보는 행운을 종종 얻었는데, 드물게 화려하고 관능적이었다. 나는 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듯 “이런 작품 더욱 많이 쓰시라”며 종용하곤 하였다.
능소화였다
먼저 키를 늘이는 담쟁이를 보고
봄부터 여름까지의 거리를 능소화는 헤아려 보았다
담쟁이가 가녀린 허리를 가만히 내주었다
능소화는 담쟁이 허리를 껴안고 기어올라
한 덩어리 파아란 불길이 되어 그들은 타올랐다
사나운 비바람이 담쟁이를 흔들자
능소화도 담쟁이도 함께 흔들렸다
담쟁이는 제 가슴에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지열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여름날
목을 꺾고 꽃이 떨어졌다
안아주고 몸을 빌려준 마음을 알았으므로
능소화는 한두 송이 꽃이 져도, 꽃이 져도 좋았다.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부분
담쟁이와 능소화를 ‘파아란 불길’이 되어 타오르는 남녀로 가정한다. 제 가슴에 켜진 붉은 꽃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담쟁이, 꽃으로 피어오르는 기쁨을 누리는 능소화, ‘사나운 비바람’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파국을 예비한다. 결국 ‘목을 꺾고’ 떨어지는 순간 능소화는 ‘안아주고 몸을 빌려준 마음’을 알았다고. 탁월한 미적 조형화의 실체에 도달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 시집으로 강인한은 초기 시들이 가졌던 풍부하고도 아름다운 시 정신을 되찾는다.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 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 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 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빈손의 기억」부분
생물체(‘달걀’)를 객관화하여 무생물화(‘돌’)하고, 그것을 다시 동적인 이미지로 바꿔서 공간화(‘힘껏 내 쏘’)한다. 차가움과 부드러움이 만나는 그 순간, 강물과 돌이 하나(‘입맞춤’)가 된다. 젊은 시절 못지않은 열정으로 ‘사랑시’의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두 번째 시집 『슬픔을 사육하다』를 출간할 무렵이었기 때문에 가끔 서울에 갔고 강남터미널 등지에서 선생을 만났다. 그때마다 나에게 전과 다른 사랑 이야기나 미술, 영화의 이야기를 건네곤 하셨다. 그 중 하나가 네덜란드 화가 ‘에셔’이다. 그의 「그리는 손」이라는 작품을 소재로 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예술가의 창작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선생 또한 어릴 적에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니 남다른 미적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5. 고통스러운 현실, 비판적 수용
2006년 서울로 이주, 서울에서의 두 번째 시집이자, 제9시집 『강변북로』를 간행하였는데, 강인한의 시세계는 약간의 변모가 엿보인다. 대학 시절 이래 “지금도 신석정, 김수영 두 분 시인을 내 시정신의 스승으로 흠모하는 동시에, 김종길 시인을 시론의 은사님으로 마음속에 깊이 모시고 있다”(강인한, 「끝없는 도전의 시절」, 『시와 시학』, 1999, 가을호, 253쪽)는 고백도 있거니와, 등단 이후 일관되게 ‘기록’보다는 ‘표현’에 중점을 두는 시작 태도를 견지해왔(최명표, 「안으로 열하고 겉으로 서늘하옵기」,『현대시』, 2001, 7, 116-127쪽 참조)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저당 잡힌 무리들에 대한 증오를 50년 동안 간직하고, 날카로운 감성으로 비판한다.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강변북로」부분
70년대의 독재, 80년 오월 광주를 거쳐, 민주화의 열망을 경험한 시인의 정신은 서울에서의 생활로 깊어지고 넓어진다. 시인의 집은 한강 가에 있다. 몇 년 전 『시와사람』 ‘시인을 찾아서’ 코너에 인터뷰 차 시인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조망이 아주 멋있었다. 그 풍경 앞에서도 시인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깡마른 군인’을 떠올린다. 심장이 떨리는 말들을 찾아낸다. ‘헬리콥터가 날아온다,/ 한 대, 두 대./ 두 줄 가득 털 난 굉음을/ 풀어놓는다.(「봄날」)’. 이상하게 광주가 떠오른다. 살인마들은 일관되게 발포명령을 부인하지만 실제로 광주에서는 헬기에서 기총사격이 자행되었고, 필자를 비롯하여 그 당시 광주에 살았던 사람들은 코브라헬기의 무서운 굉음을 지금도 환청으로 듣고 있으므로, ‘헬리콥터’는 폭력적 권력을 상징한다. 모두들 광주를 잊었을지라도, 시인은 잊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분노로 현실을 고발한다.
체험은 이론보다 생생하다. 수십 권 책의 설명으로는 부족하지만, 육성이 담긴 한 편의 시로는 보여줄 수 있다. 아무리 현대가 편리해졌다 한들 우리들 마음속의 황폐를 다 가리지 못할진대 욕망의 찌꺼기들이 어떻게 부패하는지, 자본주의는 어떻게 타락하는지 '세월호 참사'를 본 시인은 소년소녀의 눈을 빌려 일갈한다.
별 하나, 별 둘,
가만히 있어요, 가만히 있어요.
눈 감고 가만히 기다리는 다영이, 수찬이, 차웅이
손 내밀어 봐, 별 모양 귀여운 불가사릴 줄게.
오라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볼우물 예쁜 최샘,
집게발 높이 들고 옆걸음 치는 꽃게들, 뽀글뽀글 피워 올리는
물방울 카네이션은 엄마한테 우리가 띄워 보내는 사랑이에요.
아, 우릴 부르는 저녁 종소리……
엄마 이제는 가셔요, 울지 말고 이제는 집에 가셔요.
—「가라앉은 성당」부분
비극을 공유하면서 뒤를 돌아보게 한다. 문단생활 50년, 열 번째 기념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에 이르러 시인은 민주주의의 왜곡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한다. 『튤립이 보내온 것들』이라는 부드러운 제목 안에 부정의 정신이 가득 차 있다. 시인은 현대사 중 가장 아픈 부분부터 짚고 있다.
이 시집은 뒤에서부터 읽어야한다. ‘청계천은 분수대다 짝퉁이다 소가 웃는 실용주의다(「청계천의 민간어원적 의미」)’, ‘280 토막 살을 가르고 뼈를 잘랐다. 비닐봉지 14개에 20 조각씩, 해체된 돼지고기처럼(「인공위성이 빛나는 밤」)’, ‘없는 죄 뒤집어씌우려 증거서류를 위조하는 정보기관(「분노는 파도처럼」)’, ‘1박 2일로 숭례문이 불타고, 완벽하게 불탈 때까지 바라만 보고(「태어나지 않은 이름은 슬프다」)’, ‘웅장한 핵미사일 로켓이 워밍업을 하는 아침(「젊은 베르테르를 위하여」)’, ‘캡틴의 방패처럼 사드로 막아내야 한다고(「창조적인 서커스 1」)’, ‘유원지를 빠져나간 샛길 끝 작은 승용차 안에서 비밀요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스벵갈리 앞에 선 여인」)’. ‘조작조작조작(「저글링」)’, ‘치렁치렁 거먕빛 드레스 자락에 아홉 가닥 붉은 꼬리가 살랑(「저글링」)’.
아아, 우리는 완벽하게 속아왔다. 두 마리 마녀의 꼬리는 밟혔다. 시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했더니, 저희들끼리 교도소에서 단합대회를 한다는 후문! 알레고리는 표면적으로는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다른 의미를 숨기고 있는, 또 다른 완결된 이야기가 있는 시를 말한다. 하나하나 보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연결해 놓고 보니 치부가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가 끝내 외면했던 진실이 밝혀졌다. 시인은 악의 근원에 대해서 증언하였고, 비극적인 미래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시인은 교사시절 ‘전교조’에도 ‘교총’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작가회의’에도 ‘문협’에도 소속되기를 원치 않고, 유독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인정받기 바랐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믿지 않고 오직 시라는 ‘종교’를 섬기며, 시라는 명분으로 내세우는 어떤 권위도 부정하고, 자유로운 ‘시의 정부’에서 시인의 이름으로 살고 싶어 한다. 시인의 몸무게는 가볍고, 약간의 사투리가 섞인 어조로 말한다. “고 선생, 이거 알아요?” 항상 내가 잘 몰랐던 사실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화를 내지 않는데 무섭고, 폭소를 터트리는 법 없지만 시인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
—《현대시》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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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만, 시인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햇살 바이러스』,『마네킹과 퀵서비스맨』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