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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트닝의 전성기와 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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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8 J형은 1943년 8월경부터 생산에 들어갔고 총 2970대가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지상공격기 성향이 강하던 라이트닝이 본격적인 탈바꿈 과정을 거쳐 진정한 전투기로 다시 태어난 것이 바로 이 J형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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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형까지는 엔진 냉각장치가 날개 안쪽에 설치되어 있어, 공중전시 손상에 취약했고, 또 냉각효과가 그리 높지 않았다. 이에 반해 J형은 냉각장치를 프로펠러 바로 아랫쪽으로 변경해, 마치 벌어진 입처럼 양쪽 엔진 아래에 커다란 공기 흡입구가 생겨 났다. 이것은 이전 버전과 외형적으로 구별되는 큰 변화일 뿐 아니라, 성능면에서도 엔진 냉각 기능이 월등히 향상되어, 결과적으로 기동성도 일취월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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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전투기로 탈바꿈해 태어난 P-38 J형의 모습.... 엔진 성능뿐 아니라 냉각장치의 위치, 에일러론, 급강하 플랩등, 기동을 향상시키는 많은 장치들이 새로이 고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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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J형의 후기버전 부터는 각 엔진 아래에 작은 급강하 플랩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공기역학적 성능향상을 가져와, 최고 970 kph(600 mph)에 달하는 급강하 능력과 빠른 급강하 회복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전투기로서는 최초로 동력을 끌어 들여, 유압장치로 에일러론을 움직이게끔 설계(power-boosted flight controls)하여, 빠른 속도에서도 롤속도가 향상되는 등, 점점 기동을 중시하는 전투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빠른 속도에서는 통상 에일러론을 움직이기가 어려워, 기동이 둔해지는데, 유압 에일러론을 장착한후, 라이트닝 조종사들은 이전 버전에 비교해 그 17% 정도의 힘만으로도 같은 기동이 가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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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oop snoot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진....
- 폭격용이나 폭격기 인도용으로 기수아래가 방탄 유리로 덮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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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J형과 L형은 조종석 아랫쪽에 넓은 방탄 유리를 장착하거나 레이더 장비를 설치해 폭격기들의 항로를 이끄는 "선두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고("droop snoot" bombing pathfinder), 일부는레이더를 장착하여 P-38 M형이라 불렸는데, 주로 야간용 전투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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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상의 어린 왕자 ..... 쌩떽쥐베리의 모습.... 그는 소설가이면서,
- 비행사였고, 마지막 실종되기전 P-38기를 몰았었다.... 그리고 마치 어린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간 것처럼 영영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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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8F형의 일부가 정찰기로 개조되어 P-38 F-4라는 명칭으로 쓰였던 것처럼, P-38 J형과 L형의 일부 역시 P-38 F-5 라는 명칭으로 정찰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자유 프랑스 비행대도 이기종을 사용했다고 한다. 소설 "어린 왕자"나 "야간비행" 등으로 유명한 작가 겸 비행사, 쌩떽쥐베리(Saint-Exupery)도 바로 이 자유 프랑스 비행대 소속 비행 대원이었고, 그 역시 P-38 F-5 정찰기를 주로 조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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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7월 31일, 정찰 비행임무 도중 쌩떽쥐베리는 자신의 라이트닝기와 함께 실종되어 버렸고, 이후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로부터 약 50년후인 2000년 여름, 프랑스의 한 스쿠버 다이버가 지중해 심해속에서 쌩떽쥐베리의 것으로 추정되는 P-38기 잔해를 발견해냈다고 전해지는데, 그것이 실제로 지상의 어린 왕자로 불리는 쌩떽쥐베리의 라이트닝 정찰기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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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이트닝의 칵크핏... 생각보다 매우 크고 넓은 것을 알 수 있다... Bf 109의 칵크핏에 비하면 완전히 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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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전선에서 P-38 J형과 L형이 폭격기 장거리 호위 전투기로 쓰였으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특히 유럽 전선의 P-38 대원들은 폭격기 호위 임무를 하나같이 꺼려했는데, 그 이유는 단일 엔진 전투기는 조종석이 바로 엔진 뒤에 위치해, 고공으로 올라가 기온이 떨어지더라도, 엔진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견딜만 하지만, 라이트닝의 경우 엔진이 조종석 좌우로 떨어져 있어, 이런 부수적이 온실효과(?)를 얻어 낼 수 없어, 폭격기 호위를 위해 고공으로 올라갈수록 캌크핏은 완전히 냉장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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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태평양 전선에서는 고공에서의 기온 강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열대에 가까운 환경이었으니, 태평양 전선의 P-38 조종사들은 오히려, 비행중 더위를 식히려고 반바지에 쌘달을 신고 비행하는 이가 많았을 정도였다. P-38기가 유럽전선보다는 태평양전선에 적합한 이유가 여럿 있는데, 이것 역시 그 중 하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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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트닝의 최고의 무대는 태평양이었다.....
- 독일기에 비해 성능이 쳐지고 장갑이 취약하던 일본기들은 한마디로 라이트닝의 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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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P-38기가 독일의 전투기보다는 일본 전투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이다. 비록 P-38이 제로센을 비롯한, 거의 모든 일본기에 비해 선회력이 딸리기는 했지만, 그외의 모든 성능 즉 속도, 상승력, 하강능력에 있어서는 한단계 앞섰고, 서로 조우했을때 싸울 것인지 달아날 것인지는 P-38 조종사의 결정에 달렸었다. 그리고 일본 조종사는 두말 없이 그 결정을 따라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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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일본기들은 독일 전투기에 비해, 자체 장갑이 극히 미약해 P-38의 화력이 집중될 경우, 예상치도 못한 짧은 시간내 승부가 나버리기도 했으니, 일본기들은 P-38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 무대에서 일본 조종사들은 고공에서는 P-38이, 저공에서는 P-40이 가장 두려운 상대였다고 한다. (콜세어기는 고도에 상관 없이 두려운 상대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의 에이스 중 한명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P-38에 대해 회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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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트닝의 독특한 쌍발엔진 소리는 남태평양의 일본 조종사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고 또한 두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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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모토 암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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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로쿠 야마모토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함대를 총괄 지휘하며,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미항모가 제외된 것으로 인해 성공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파죽지세의 일본 해군에게도 그 몰락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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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부터, 미국의 잠재된 생산력을 잘 알고 있는 터였고, 어떻게든 초반에 결정을 내지 못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패배는 기정 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초반 러쉬는 미드웨이에서 좌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미 일본의 암호 체계를 간파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것이 자신의 목숨마저 앗아갈 것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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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모토가 마지막 순시 도중 탑승했다가 라이트닝의 기습에 격추당한 G4M Betty 쌍발엔진 폭격기..... 베티 폭격기는 주익의 거의 전부가 연료탱크라, 장거리 비행에는 유리했지만, 넓은 주익 어디나 한곳 맞으면, 화염에 휩싸여 격추되었다. 그래서 미국 조종사들은 "지포 라이터 베티", "원샷 라이터 베티" 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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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야마모토는 꺽여버린 일본군의 사기를 다시금 부추겨 세울 목적으로, 각 섬들에 산개해 있는 일선 기지를 시찰하고 있었다. 이런 야마모토의 일정을 담은 전문들이 오갔고, 미국은 암호를 풀어 정말 특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실은 미국 대통령 로즈벨트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야마모토는 그만큼 미국으로서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만약 야마모토가 지나갈 비행항로에 미전투기를 급파해 그를 요격시킨다면, 일본해군은 최고의 우두머리를 잃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그들의 암호를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도 노출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이후 모든 정보는 다시 암흑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고 뻔히 지나갈 길이 보이는 야마모토를 놔둘 순 없다..... 루즈벨트의 최종결정은 암호와 야마모토를 맞바꾸는 것..... 즉 그를 암살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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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모토의 요격하기 위해서는 약 400 마일 이상을 날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장거리 비행을 완수할 수 있는 전투기로는 P-38 이 결정되었다. 1943년 4월 18일...... 미국 제 339 비행대의 존 미첼(John Mitchell) 소령은 세기적인 암살 계획을 위해, 총 16기의 라이트닝을 이끌고 핸더슨 비행장의 활주로를 박차고 출격에 나섰다. 일본의 초계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비행은 초저고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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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모토의 탑승기 G4M Betty의 격추장면을 그린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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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9시..... 구아덜캐널에서부터 부겐빌까지 약 425 마일이상을 숨을 죽이고 날아간 그들은 드디어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발견해 낸다. 야마모토는 G4M 일명 Betty 폭격기에 탑승하고 있었고, 6대의 제로기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라이트닝 16기 중 4기가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맡고, 나머지 12대는 제로기들의 발을 붙잡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폭격기 공격조 4대 중 2대가 외부연료탱크 문제로 공격에서 발을 뺐고, 남은 토마스 랜피어(Thomas Lanphier)와 렉스 바더(Rex Barder)가 공격의 최일선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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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모토 격추의 두 주인공 왼쪽은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렉스....
- 오른쪽은 토마스의 모습이다... 둘 모두 이차대전 기간동안 5기씩 격추기록을 보유한 에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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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스와 토마스는 거의 동시에 제로기 한대씩을 격추시켰고, 문제의 Betty를 명중시켰다. 야마모토를 실은 폭격기는 이내 중심을 잃고 화염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를 길게 뿜으며, 정글 속으로 추락했다. 이것은 야마모토 개인의 죽음이었지만, 다가오는 일본 해군의 몰락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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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야마모토 암살 작전에서 16기의 라이트닝을 이끌고 자신도 직접 탑승해 지휘한 미첼 소령이 훈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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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암살임무는 단 한대의 P-38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렉스와 토마스 중 과연 누가 야마모토를 격추했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당시 유일한 일본 제로기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Betty 폭격기의 6시 방향에 있던 라이트닝의 공격에 야마모토가 격추되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럴 경우, 렉스가 격추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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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어떤 일본의 보고서에는 Betty 폭격기가 측면공격을 받고 추락했다고 되어 있어, 이럴 경우 반대로 토마스의 확률이 커진다. 미지휘부는 두 사람의 손을 전부 들어주었다. 격추는 동시에 공동격추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가 자신이 Betty를 명중시켜 그 날개가 떨어져 나갔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야마모토의 잔해를 조사한 결과 Betty 폭격기의 날개는 동체에 고스란히 붙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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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홈지기 개인적인 생각에는 토마스의 증언이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추락하면 약한 내구성의 Betty의 날개가 부러질 것이 뻔하니, 미리 그렇게 말해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항공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렉스가 격추의 주인공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그날 G4M기가 두 대가 비행했다는 말도 있는데, 꽤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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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뭉친 16인의 암살단(?)의 노익장.... 9명만이 생존했나 보다....
- 이런 할아버지들에게 당시 공중전 이야기를 들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 단 영어를 알아들어야지.... 뭘하지...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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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최고의 라이트닝 에이스 2인방... 왼쪽이 미국 격추순위 1위 리차드 봉.... 오른쪽이 격추순위 2위 맥귀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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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P-38의 주무대는 역시 태평양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이것은 이차대전 미국의 에이스 중 격추 1, 2위 (통산 40기 격추로 1위에 랭크된 리차드 봉(Richard Bong)과 38기 격추로 2위인 맥귀어(McGuire)......)가 모두 P-38 기에 탑승했던 태평양의 에이스들이었다는 것만 봐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외 통산 27기 격추로 전체 미국 파일롯 중 7위에 랭크된 챨스 맥도널드 (Charles MacDonald) 역시 태평양 상공에서 활약한 P-38 에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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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차드 봉의 애기 P-38에 그려진 그의 노즈아트이자 그의 애인 마지(Marge)의 모습.... 참 봉은 특이한 인물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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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여기서 여담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리차드 봉과 맥귀어는 모두 전설적인 에이스들이었고 창공에서는 무적의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너무도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들이기도 했다. 즉 리차드 봉은 매우 내성적이고, 정중하며, 보기에 따라 약간 수줍음이 많은 타입이었고, 언제나 자신의 P-38기에 노즈아트로 그려진 애인 마지(Marge)의 사진을 한동안 바라 보고 있는 것을 좋아했고, 동료들과도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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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류 최초로 대서양 논스탑 횡단의 주인공 챨스 린드버그와 그 항공기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 린드버그는 맥귀어에게 서러움을 당한다...... ^.^ 어쨌든 린드버그는 시험비행사이며, 태평양전쟁 당시 격추도 달성한 전투 조종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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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반해 맥귀어는 좀 거만하고, 다가서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일예로 대서양 횡단을 최초로 성공시킨 전설적인 항공인 챨스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가 이차대전 당시 록히드 항공사의 시험 비행사로 맥귀어의 비행대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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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드버그는 맥귀어와 함께 막사를 썼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맥귀어는 자신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에이스이며 린드버그가 자신의 막사를 빌려 쓴다는 이유로, 안하무인격으로 하인 다루듯 린드버그를 대했다고 한다. 어쨌든 리차드 봉과 맥귀어는 태평양 상공에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안타깝게도 종전에 임박해, 둘다 전사하고 만다. 리차드봉은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던 1945년 8월 6일, P-80기의 시험비행 도중, 엔진에 불이 붙어서, 또 맥귀어는 그보다 빠른 1945년 1월, 필리핀 상공에서 임무 비행도중 전사하고 만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승승장구하던 전설의 에이스들이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희생되고 만 것이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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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맥귀어(턱 길고 중간에 있는 사람)과 린드버그(비행모자를 쓴 오른쪽 인물)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영 린드버그의 표정이 안좋다... 선입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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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트닝은 이차대전 기간 동안 총 10000 대 가량이 생산되어 단일 기종으로는 가장 많은 일본기를 격추한 항공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을 때는 이미 제트 전투기 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군용기로서의 값어치가 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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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남아 있는 1000 대 중 약 50대는 다른 나라(이탈리아)에 매각되었고 나머지는 한대당 1200 달러(물론 그당시 액수의 값어치를 정확히는 모르지만)라는 헐값에 일반 수집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라이트닝에 대해서는 의견이 매우 분분하다.... 성공한 전투기라는 말에서부터, 기동이 형편없는 실패한 기종이라는 이야기까지, 그러나 그 결과는 전과가 말해주고 있으며, 실제 맞싸웠던 일본 조종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역시 뛰어난 전투기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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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8의 디자인은 클래식한 전통적인 전투기의 모델에서 탈피한 새로운 혁신적인 것이었고 P-38이 항공기 분야에서 첫 스타트를 끊은 기록이 많다. 그럼 마지막으로 P-38이 전투기 분야에서 처음 시도된 점들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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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초로 3개의 착륙용 랜딩기어 채택
- 이전의 전투기들은 두개의 랜딩기어에 꼬리 부분에 고정식 바퀴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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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북대서양을 횡단해 미국에서 유럽까지 날아갈 수 있는 장거리 비행성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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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개의 어뢰를 장착할 수 있는 최초의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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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논스톱으로 3000 마일 비행을 해낸 최초의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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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전중 단좌 쌍발 전투기로 대량생산된 최초이며 유일의 연합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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