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 太極風水연구會 踏山案內(전북 * 익산.6월12일)
태극풍수학회는 每月 2주째 일요일 定期 踏山일로 定하여 계속하는 동안 금번31회 踏山일을 맞이하였읍니다.
이번 踏山地域은 회원님들의 議思에따라 전북 익산지역으로 決定하였읍니다.
바쁘시리라 생각되오나 많이 參席하여 우리의 傳統文化를 이해하고 ,조상들의 遺産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意味를 찾는데 함께 同參하여 주시길바람니다.
< 문의사항> : 모든 문제는 총무님과 열락 의논하여 결정하시길 바람니다.
가. 답산일자 : 2005년 6월 12일(일요일)
가. 출발장소 및 시간 : E마트앞, 아침07시.
나. 답산지역 : 답산지역의 순서는 변경될수도 있으니 양해바람니다.
1. 明 朱之蕃의 所點 , 송영구(宋英耉1556 ㅡ1620)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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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 ). 호는 표옹(瓢翁)·일표(一瓢)·백련거사(白蓮居士)이며, 시호는 충숙(忠肅).
(명나라 사신 朱之蕃이 소점함.고려초기 묘 형태)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4년(선조 17)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지평(持平) 때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600년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이어 청풍군수(淸風郡守) 등을 지내고, 1607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으나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사 파직당했다.
1610년(광해군 2) 사간(司諫)에 이어 필선(弼善)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1611년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613년 사신으로 명나라에가 일본과의 수호 사실이 없음을 밝혔다. 1616년 병조참판이 되어 1618년 폐모론(廢母論)을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고 파직당했다. 전주(全州) 서산사(西山祠)에 배향되었다.
2. 양관 대재학 소세양(蘇世讓 1486 ㅡ1562)墓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탄곡 용화산 동쪽기슭)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에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다.
그후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기용되었다.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때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형조 ·호조병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고,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 봉안했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내다가 사직, 익산(益山)에 은퇴했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3. 호남 8대명당. 여산송씨(礪山宋氏) 시조 송유익(宋惟翊) 묘
익산시 여산면 문주동(구봉산下)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산들이 수려하고 아름답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저쯤에는 뭔가 한자리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곳에 여산 송씨 시조 묘가 있다. 흔히 호남8대명당 중 하나라고 부르는 곳이다.
태조산인 대둔산에서 내려온 용이 주산인 천호산을 만들고 그 중심맥으로 내려온 용에 자리하고 있다.
대단한 국세를 가지고 있으며 혈은 높은 곳에 위치한다.
4.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 지방기념물 제6호(1973. 6. 23 지정)
크지는 않으나 옹색하지도 않은 집으로 조촐한 선비의 가옥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집은 수우제(守愚齊)라고 하는데 마루에 걸터 않아 한가롭고 따스한 햇볕을 쪼이면서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고 싶거나,
모정에 마주 앉아 동동주라도 마시고 싶은 친밀감을 주는 집이다.
가람선생은 현대시조 중흥의 기틀을 다진 분이다. .
가람 이병기 선생은 1891년 이 집에서 태어나 1968년 77세를 일기로 역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관향(貫鄕)은 연안(延安)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공신(功臣)인 이귀(李貴)의 11대 후손이다.
7대조인 이사한(李思漢) 때 공주(公州)에서 연산(連山)으로 옮겨와 살다가 고조(高祖)인 이도술(李度術) 때 여산 원수리의 참수골(守愚齊 윗동네)이라는 마을로 이사했다.
금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논산 쪽으로 가다보면 여산면 소재지 못 미쳐 원수리 정류장이 있고, 정류장 옆, 작은 시멘트길을 따라 가면 生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