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여름 들어 제일 더운 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동차의 행렬이 그치질 않고 꼬리를 문다. 모처럼 얻은 짧은 휴가를 며칠간 기분전환이라도 할까하고 언제나처럼 남편을 기사로 두고 난 뒷자리에 앉아서 무작정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자고 했다. 목포에 도착하면 이곳저곳 갈 곳이 많고 거제도 해금강과 외도도 가보고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그야말로 자유롭게 소요하다가 서울로 올라오자고 했다. 그런데 중간에 부안 쪽으로 빠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석의 힘같은 것이 작용했나 보다.
일단 변산해수욕장 근처에서 숙소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적어도 보름 전에는 예약을 했어야지 지금 갑작스런 방문객에게 내줄만한 방이 없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한 달 전에 행안면장이 우편으로 보내준 부안 관광지 안내도가 매우 소중한 것이었는데 그냥 버려두고 온 것이 후회스럽다.
그래도 무색무취의 물좋은 변산 온천에 들려서 소문난 변산온천산장의 바지락죽집도 찾아갔다.
다시 차를 돌려 부안읍에서 5분 거리에 아직은 작은 오라버니가 지키고 있는 고향집으로 갔다. 마을 어귀에는 몇 년 전에 마을 표석으로 세워진 대리석에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졌다기에 들여다보니 최균희란 이름이 부끄럽게 적혀 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덜어볼까하고 마을회관에 들여놓을 냉장고 한 대를 사주고 나서 부모님 산소엘랑 항상 그렇듯이 잠시 머물러 형식적인 예만 갖추고 바로 돌아나왔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도 영원한 나의 보호자이니까 내 모든 허물일랑 다 덮어주겠지-. 하는 건방진 마음으로.
다음 날 오빠네 내외와 합세하여 격포채석강에서 배를 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위도를 찾았다,
그런데 부안읍에서 느꼈던 데모대원들의 떠들썩함(김종규 군수는 자진 사퇴하라. 핵폐기물 처리장 절대 반대, 면장,이장들 집단 사퇴 등)은 막상 본거지인 위도 사람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닷가에서 우럭 낚시를 하고 있는 아저씨들이나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고 있는 아주머니들, 파닥거리는 광어를 그물채로 건져내는 아가씨나 영업택시도 아니면서 승용차를 가지고 몰래몰래 관광안내를 하고 있는 총각들이나 모두가 다 아무일도 없는 듯 편안한 얼굴들이었다.
요즈음 핵폐기물처리장 문제로 시끄럽던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리야 제대로 내용도 모르고 찬성하는 쪽에 사인을 한 사람들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보상이나 많이 해주면 섬에서 나가 살아야지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 듯 대답하는 주민들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의 깊은 속마음을 어찌 구경꾼들이 헤아릴 수 있을까. 그 동안 대대로 지켜온 고향 땅을 남들에게 넘기고 떠나간다는 말을 쉽게 내뱉고 있는 그들의 마음이 편안할 리 있겠는가?
가슴이 아리고 찢어질 것같은 고통을 안으로 숨기고 있는 그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속아서 살았고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또 속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포기와 단념어린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천진스럽게 조개껍데기를 가지고 가위바위보를 하며 길가장자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서 행복해 보였다.
언젠가 위도 앞바다에서 커단 배가 뒤짚여진 뒤에 세웠다는 위령탑이 제법 관광객의 발길을 끌게 했고, 그래서 닦아놓았다는 2차선 해안도로가 고슴도치 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무척 깨끗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물이 얼마나 맑으면 저렇게도 파랗다 못해 검정색 빛깔을 띠고 있는지 해안 곳곳에 펼쳐진 모래사장은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곳곳에 산장과 모텔 그리고 이름모를 별장들이 제법 많이 들어서 있다. 이미 위도 사람들은 자기네 땅을 외지의 돈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넘겨주고 겨우 자급자족하기 위한 마늘이나 채소 몇 가지를 심을만한 텃밭 몇뙈기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멸치가 잘 잡혀서 아직은 바다를 바라보며 그런대로 생계 유지는 할 수 있다는 그들이 보상금 얼마를 받고 고향을 등진다면 그곳 위도는 어떻게 변할까?
하룻밤이나 자고 나가야지 했던 생각을 접고 다시 격포로 나오는 배를 타고 나왔다.
오는 길에 새만금 공사가 잠깐 중단되었다가 이어지고 있는 방파제를 들렸다. 구경꾼들이 생각보다 많이 몰려왔다. 새만금 사업 완공을 바란다는 서명 운동에 박명록처럼 이름 석자를 써넣었다.
그래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먼 장래를 내다보며 계획을 세웠다면 하다가 중지하는 일 또한 함부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고보니 왜 이렇게 요사인 무언가 가다가 중지하는 일이 그리도 많은지 왜들 그렇게 번복하는 걸 좋아하는 지. 범인들은 모를일이다.참 모를 일이 너무도 많다.
아침 일찍 부안읍을 벗어나올 때 찻속에서 또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다. 재별의 아들(정몽헌)이 투신 자살을 했다고-. 그럼 금강산 사업은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그리고 남북사업은? 재계에는 별 흔들림이 없을런지,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