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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할리 세번째 외국인학교 설립 |
우리는 그 외국인을 어떻게 받아들여 야 할까. 국제변호사 하일(河一 36 미국이름 로버트 할리)씨는 여전히 한국사 회 주변을 맴도는 한 외국인의 초상을 본다.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며칠 있으면 한국사람들이 그토록 크게 여기는 설.지난해 8월 귀화해 추석 을 치렀고 투표를 했다.설까지 치르고 나면 한국사람으로서 치러야 할 `중요 의식'은 모두 마치는 셈이다. 98년 새해가 밝기 전 그는 부산시장과 함께 `제야의 종'을 쳤다. 부산 시민을 대표하는 자격이었다. 한국정부도 인정하고 부산시도 인정한다,그가 한국사람임을. 그런데 정작 한국사람들은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안다.귀화후 짐작 이상으로 매스컴의 관심이 쏟아졌지만 거기에는 호 기심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잘 생각했다"며 손을 덥석 부여잡아 왔지 만 그것이 모든 한국사람들이 내민 손은 아니었음을. 얼마전 방송 녹화 관계로 지리산의 한 사찰에 갔었다. 멀찍이서 한 한국사 람이 큰 소리로 "반갑심더"하며 아는 체를 해왔다. TV 덕분에 제법 얼굴이 알 려져 어딜 가나 알아보는 팬이 있다. 그런데 친구인 듯 싶은 한국사람이 방금 인사를 해온 사람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핀잔줬다. "니 왜 반갑다고 하노.비기(보기) 싫어하면서" 언젠가는 한 택시기사가 서울 마포의 사무실로 찾아와 "니네 나라가서 살 지,왜 귀화했느냐"며 노골적으로 언성을 높인 적도 있다. 이제는 이력이 날 만도 하건만, 매번 목울대가 꽉 막혀오는 분노는 어찌할 수가 없다.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민족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 겪는 한국인의 서러움에 대해 한국인들이 얼마나 성토하고 분 통을 터뜨렸습니까" 만약 미국 귀화 한국인들이 미국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도는 데도 "원래 미국인은 뿌리의식이 강하니까 이해하라고 한다면 한국사람들은 이해하겠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코믹 웃음 뒤에 감춰진 그의 생채기는 깊었다. 친절하되 결코 외국인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국인의 성정은, 미국인으 로 살았던 지난 10년간이나 한국인으로 산 최근 5개월간이나 그를 가장 못견 디게 했다. 정작 미국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다."왜 한국이냐"고 묻긴 해도 "왜 귀화했 느냐"고는 묻지 않는다. 물론 두 나라의 문화 차이는 그 중요한 이유다. 그러 나 세계가 하나로 가는 이즈음, 언제까지 `문화 차이' 뒤에 숨으려들 것인지 한국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고 제 자신이 완벽하게 한국사람이 됐다는 얘기는 아니라에. 여전히 김치보다는 햄버거에 더 먼저 손이 갑니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직 한국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심더. 다만 아,아직도 내게 미국인의 특성이 남아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지에" 인터뷰를 의식했음인지 처음엔 서울 표준말이던 그의 말투가 점점 경상도 억양 경상도 사투리로 옮겨갔다. 경상도의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진국 경상 도말"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공인받은 경상도 사투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묻게 된다. 왜 귀화했는가. 뜻밖의 대답. " 한국을 억수로 사랑해서는 아니라에. 물론 좋아합니더. 하지만 싫은 점도 많아 에" 그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79년.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고등학교 를 갓 졸업한 17살의 미소년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크라멘토시 조금 위쪽에 유바시티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그는 그 곳에서 태어났다. 9남매의 장남이었지만 아버지가 치과의사인 덕분에 집안은 넉넉했다.몰몬교 신자인 그에게 `한국으로 가라'는 지시가 떨 어졌다. "처음엔 억수로 오기 싫었어에.어려서 부모님이 가끔 중국요리를 시켜주곤 했는데 억수로 맛이 없었거든에.그때부터 중국뿐 아니라 동양을 싫어하게 됐 심더" 한국은 그가 겪은 최초의 동양권 국가였다. 선교 활동을 했던 18개월 동안 에도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사단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 생겼다. "부산의 자갈치시장도 눈앞에 어른거리고 신발벗고 들어가야 했던 부산집 도 생각나는 거라에.친구들도 무지 보고 싶고에" 묘한 일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의 집, 미국의 친구들이 그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 있으니까 한국의 집, 한국의 친구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미국 대학에 합격해 1년을 다녔지만 `한국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연세대 정외과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을 공부했다. 돌아가 웨스트버지니아주립대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국제변호사 자격증까 지 딴 뒤 주저없이 한국으로 다시 왔다. 이 때가 87년초. 그는 한국의 문화가 좋았다.영문판으로 된 `삼국유사'를 읽고 난 뒤에는 한국의 역사에도 깊이 빠져 들었다. "왕비인" 부산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 이도 셋이나 낳았다.한국에서 맛본 또하나의 기쁨.바로 "장모님 사랑"이다. 이 때부터 한국인 친구들이 슬슬 묻기 시작했다. "왜 귀화하지 않느냐"고. 그때마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해 5월 독일인 이한우씨가 귀화했을 때는 "씰데없는 짓 했다"며 냉소했었다. "귀화하 면 한국사람들이 우리-이한우씨를 포함해 자신-를 한국인으로 생각하겠습니 까. 귀화한다 해도 한국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다시 돌아온 표준말. 그런데 어느날 문득 자신은 한국을 결코 떠나 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 새삼 퍼뜩 들었다고 한다. 한 국사람들이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어차피 그가 살 땅은 한국이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적을 포 기함으로써 발생할 상황들이 마음을 흩뜨렸다. 한국인이 미국 방문비자 얻기 란 쉽지 않다.더욱이 `생긴 것도 미국인이고 부모도 미국에 있는' 그는 더욱 불리하다. 그는 변호사였다.미 대사관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들어 비자 발급을 거부했을 때 뾰족한 대응논리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부모가 귀화를 만류했던 까닭도 바로 이때문이었다.귀화하고 얼마 안돼 마침 내 그는 미대사관에 방문비자를 신청하러 가게 됐다.당시의 심경을 그는 모 일간지에 이렇게 썼다. [면접하러 가기 전날부터 떨리기 시작했다.변호사로 일하면서 미국 비자를 얻지 못한 분들을 도와준 사건이 많이 있었다. `이젠 나도 이런 분들처럼 미 국비자가 안나오면 어짜노? 부모님을 보러 가야 되는데…'.걱정을 억수로 많 이 했다.…비자는 문제없이 나왔다] 요즘 그는 주말부부 신세다. 부산의 모 한국 로펌에 근무하다가 지난해 10 월 지금의 `인터뱅크'사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인터뱅크'는 미국에 본 사를 둔 투자이민자문회사.서울 마포에 한국연락사무소가 있다.IMF한파로 투 자이민이 급감해 마음이 썩 편치 않다. 설이 다가오면서 방송 스케줄이 다시 바빠졌다.전속 매니저도 있다. 방송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겠다고 하자 그는 "어데에,방송 출연료 억수로 짜데에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마 모 회사의 이동통신 CF로 받은 1천만원 이 `방송으로 번' 가장 큰 목돈이라고. 별명은 `걸리버'.`걸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에'라는 코믹 CF멘트가 히트하면 서 붙은 별명이다.법률회사에 다닐 때의 일이다.출근하자마자 사장이 부르더 니 "도대체 변호사 체면에 어떻게 그런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느냐"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전날의 TV에서 `억수로 웃기는 그'를 본 것이다.그는 한치도 지지 않고 같이 소리질렀다. "변호사는 웃기면 왜 안되는 데에" 예나 지금이나 그로서는 한국사람들의 `체면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전대통령이다. 클린턴대 통령도 가끔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와 억수로 웃기지 않는가. 한국사람들이 자신을 변호사가 아닌 코미디언으로 생각해도 상관없다.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니가 한국에 왔으니까 유명해졌지 미국이었으면 어디 (지 금처럼)출세했겠느냐"던 모 코미디언의 말처럼 한국사람들의 속내가 읽혀질 때다.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많다.하지만 그 외국인들이 다 방송에 나오고 다 유명해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방송에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부산의 스타였다. `경상도 사투리 쓰는 외국인 시숍'으로 컴퓨터통신 공간에서 먼저 유명해지기 시작해 95년 여름 부산의 지역방송을 `석권'했다. 그리고 지방방송 6개월만에 `중앙방송'에 진 출했다. 그는 `영도 하씨' 시조다. 처음 발을 디뎌 지금까지 살고 있는 부산 영도에 서 따왔다. 할리라는 미국인 성과 발음이 비슷한 데다 최초의 영도하씨라는 뜻에서 이름은 일(一)이라고 지었다.영도 하씨 시조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제발 외국인으로 보지 마이소" [시간으로 본 로버트 할리] △196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유바시티 출생 6남3녀중 장남 | ||
중앙일보 2001년 03월 29일
"한국 생활 14년여 동안 얻은 것을 외국인 자녀들에게 돌려 주고 싶어요. "
Robert Holley: Pusan's favorite son... KOREA HERALD 2001-03-23 2133 words
Robert Holley: Pusan's favorite son To foreigners, he's that guy on TV who can speak fluent Korean. To Koreans, he's that funny American who talks in the Pusan dialect. There are a handful of other foreign celebrities in the entertainment world here - France native Ida Daussy and Germany's Lee Han-woo among them - but no one is quite as visible as Robert Holley. 로버트 할리, 로버트 할리: 외국인의 시각에서 볼 때, 부산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한국말을 너무나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나이로 비치죠. 한국사람이 볼 때에는, 구수한 부산 사투리를 거침없이 말하는 재미있는 미국인으로 비치죠. 여기 연예계에선 몇 안되는 외국인 명사가 있죠. -프랑스인 이다도시와 독일인 이한우씨를 명사들 중에서 꼽을 수 있지만, 그 어떤 연예인도 로버트 할리 만큼 우리에게 친숙하지가 않아요. 그는 또한 10년이상동안 한국에 거주해오고 있으며, 최근 4년 간은 한국시민으로서 살았지요. 할리씨는 마치 여기 연예계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외국인이라기보다는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여느 명사처럼 보이기가지 하죠. 이만하면 더 긴말은 생략하기로 하죠.
새크라멘토 인근에서 태어난 할리씨는, 1979년에 몰몬 선교사로 한국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한국생활에 익숙치 않아 처음에는 향수병에 시달렸지만, 1982년 연세대 교환학생으로서 18개월을 한국에서 살면서 점차 한국생활에 익숙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웨스트버지니아 주립대 로스쿨 졸업학위를 갖추고서 1987년 귀국하였습니다.
코리아 헤럴드: 할리씨께서 TV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니까 이제 거의 한국에서는 할리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요소가 구수한 부산 사투리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로버트 할리: 전 명백히 다른 연예인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이한우씨를 보면서 말하기를,“ 참 잘생기고 신사처럼 말하는군” 또한 이다도시를 보면서 대뜸 얘기하기를 매우 귀엽고 재미있으며 외국인인데도 재치있게 말을 잘해서 마음을 잘 터놓고 얘기한다고말하지요. 반면에 한국사람들은 절 보며 얘기하기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것 마냥 행동하며 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하네”라고 말들을 해요. 이런 요소들로 인해서 한국사람들은 저를 매우 친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애요.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는 “헤이! 하일씨! 정말 오랜만이군요.”하고 인사를 한 적도 있답니다. 그리고는 나를 반갑게 치기도 하며 팔로 나를 껴안기도 했어요. 정말이지 이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은 이한우씨를 만약 길가에서 봤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테이지요. 그래서 전 생각했죠. 아마도 제가 아내를 전형적인 한국남자처럼 대하는 말씨와 행동에서 이 사람들은 마음 속에 저를 한국사람처럼 생각한다구요. 저는 또한 변호사인데도 이처럼 웃기게 행동하는 변호사를 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실제로 전 한 코미디 쇼에 나가서 우스꽝스럽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거의 쫓겨날 뻔 했죠. 헤럴드: 그 얘기는 저도 익히 들었죠. 사장님께서 할리씨가 처음 TV에 출연했을 때 노발대발하셨다지요. 로버트 할리: 맞아요. 제가 방송출연한 다음날 사무실에 가보니 사장님께서 매우 화가 나 계셨어요. “어제 밤에 당신이 출연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았다네” 하고 사장님이 말하셨지요. “그래요. 사장님,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세요?” 사장님께서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셨지요. “근엄한 변호사의 일을 맡고 있는 자네가 어쩜 이렇게 행동할 수가 있나?” “사장님, 그게 바로 저의 본 모습이예요. 하루 종일 사무실에 쳐박혀서 거드름이나 피우고 점잖은 체 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생각조차도 하기 싫어요.” 저의 말을 듣던 사장님께서는 체념한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바깥으로 나가셨어요. 헤럴드: 할리씨, 한국인들이 연예계이니까 외국인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할리: 그렇지 않은 것 같애요. 전 아직도 한국인들이 우리를 볼 때 고정관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 같애요. 이다도시와 저의 경우에는, 어떤 고정적인 역할에만 머물지 않거든요. 우린 무엇이든 주어지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는 그런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출연했던 많은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가 어떤 역할이든 잘 소화해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지요. 반면에 그들은 태진아씨와 다른 트로트 가수들이 TV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거의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또한 코미디언들도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두요. 드라마 주인공들은 보통 코미디 프로에 출연을 삼가지요. 전 이런 연예계의 풍토에 잘 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외국인에게 문이 닫혀있는 셈이지요. 이민법과 그 외 다른 모든 한국정서는 비한국인들이 TV에 출연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헤럴드: 할리씨는 TV에서 배역을 정할 때 꼭 정해진 역할만을 한다거나 제한된 역할을 한다고 느끼지 않으세요? 작년에 브루노 브루나이씨를 인터뷰했었지요. 브루나이씨가 말한 것 중의 한가지는 한국인들은 마치 자기를 기분전환용으로만 평가한다고 했어요. 할리: 글쎄요, 브루노씨가 출연한 쇼는 하나의 드라마이었고 다분히 그 드라마에서 코믹적인 요소를 풍겼었지요. “ 세 남자, 세 여자”에 출연한 저의 경우는 실제로 코미디 프로그램이었었지요. 근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전 브루나이씨가 생각한 것같이 느끼고 있지 않아요. 전 실제로 웃기는 일들을 많이 했죠. 이다도시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을 웃기는 배역을 할 수 있었던 것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고 있어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기만 하면 되니까 편안하지요. 사람들이 절 무시한다고 생각을 안해요.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절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헤럴드: 이다도시와 함께 출연한 프로그램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습니까? 로버트 할리: 우리는 함께 “Eat Drink Man Woman."이라는 가짜 단막극에 출연한 적이 있지요. 전 토크쇼의 진행자인 이홍렬의 딸과 결혼하려는 남자로 나왔고 이다도시는 그의 딸과 함께 절 따라다니는 여자로 분장했었지요. 야외촬영이 있던 날 우리는 생낙지 전문점에 갔었지요. 그때 이다도시는 ”전 이런 것 절대로 먹을 줄 몰라요. 절대로 먹을 수가 없어요.“하고 말했지요. 그러나 제작진은 다가와서 ”힘내요. 조금만 먹어봐요. 제발!“ 그러자 이다도시는 아주 조그만 것 하나를 집어 먹었지요. (오, 내가 이걸 어떻게 먹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조금만 먹어보자) 그렇지만 그 장면은 썩 좋지가 못했지요. 제작진이 다시 다가와서는 저의 귀에 대고 속삭였지요. ”거기 있는 낙지중 에서 가장 큰 걸로 골라서 이다도시에게 주어봐요. 제일 꿈틀거리는 놈으로 말이요. 가장 큰 걸 먹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얘기하면 안돼요!“ 드디어 촬영을 시작했고 처음엔 조그만 조각을 계속 줬죠. 때가 무르익어 밤 11시가 되자 제작진은 ” 잘했어요. 우리 한 번만 더 찍읍시다.“ 그러자 이다도시는 ”다시는 절대 못해요. 더 이상 못 먹어요.“ 어쨌든 촬영은 재개됐고 전 제일 큰 낙지조각을 주었지요. 이다도시는 겁먹은 듯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울기 시작했지요. ”와앙앙앙앙“ 그 장면이 그 쇼의 가장 재미난 부분이었어요. 마침내 낙지조각을 삼켰었지요. 과연 그녀다운 면모가 아니겠어요? 헤럴드: 인기인이 될려면 톡톡한 유명세를 치러야 하지요? 길가에서 어떤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에게 괜한 말을 걸거나 하는 것 같은 괴로움을 당한 적이 있으신지요? 로버트 할리: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만 전 예를 들어서 이런 경우는 있지요. 당신이 어떤 일로 기분이 저조하다거나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산책을 조용히 하고 싶으면 그 어떤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을거예요. 단지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인데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를 않죠.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헤럴드: 한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할리씨는 한국문화의 장단점에 대해서 항상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해 왔지요? 외국의 유명인사로서 이같은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계십니까? 로버트 할리: 공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알고있는 사람으로서, 전 한국인들이 제가 한국문화를 나쁘게 얘기하면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었지요. 이다도시도 항상 얘기하기를 “한국문화에 관해 이 점을 지적하고 싶고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단점에 대해서 한국사람에게 얘기해 주고 싶어요” 저는 사적인 좌석에서 대화할 때를 제외하곤 이다도시와 같은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국문화에 대해 정말 나쁜 요소가 있다면 말을 해야하는 것이 순리라고 봐요. 그래서 전 예전의 소심한 태도를 버리기로 했죠. 전 항상 제 의견을 말할 거예요. 제가 매주 방송하는 광주라디오 방송국에서 오분동안 계속해서 한국문화의 이상한 점을 불평했어요. 아마도 청취자들은 매우 듣기 싫었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점을 지적했으니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헤럴드: 1997년도에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이제 어엿한 한국인이 되셨는데, 그러게 된 뚜렷한 동기가 있습니까? 로버트 할리: 말하자면 길지요. 실제로 TV에서 이한우씨를 처음 봤을 때 제 아내는 그가 한국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말해주더군요.(아내어투를 흉내내며)“놀랍지 않으세요?” 하지만 전 이렇게 생각했죠, “어떤 미친 사내가 한국에 머물려고 시민권을 포기했단 말인가?!” 그 뒤 전 방송일을 시작했고 일을 하면서 생기는 각종 문제들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한국에 살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이렇게 말했어요. “시민권을 바꿀 의향이 없으세요?” 그래서 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이 문제를 의논해 보았지요. “시민권을 바꾸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보세요. 여기가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곳이잖아요. 우리가 피땀흘려 일하는 곳이기도 하구요. 당신이 살고있는 이 한국 땅에서 모든 권리를 누리고 싶지 않으세요? 이 곳이 바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잘 해내지 못할 거예요.” 시민권을 바꾸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제가 미국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었어요. 전 미국인으로 남기를 소망했어요. 시민권을 포기한 어떤 여자에 관해 너무 무서운 얘기를 들었어요. 그녀는 말하기를 제가 이 맹세에 서약을 해야하며 출입국 관리직원들은 제 패스포트를 가져가서는 구멍을 낸다고 들었어요. 또한 그들은 “당신 이렇게 하면 안되지요.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봐요. 다시는 미국으로 갈 수가 없을 거요. 우린 당신도 아시다시피 비자를 내어줄 규정이 없어요.” 전 이 말을 듣자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그러나 결국에는 전 알았죠. 시민권을 포기하고 나서야 미국 비자를 얻을 수 있었어요. 전 해냈고 이 과정에서 어떤 문제도 없었어요. 헤럴드: 한국언론으로부터 늘 받게되는 질문인데요. 한국어를 배우는 데 혹시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로버트 할리: 한국어를 배우는 데 비법이라면 그냥 들리는 대로 따라하는 것이지요. 이 원리는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요. 그저 열심히 들으세요. 하지만 한국인들은 들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한국인들은 영어학원에 맨날 다니면서도 결코 들으려고 하지를 않지요. 그들은 그저 편안히 앉아서 계속 들으면서도 초등학교 때에 배운 똑같은 발음을 내고 있어요. 가령 “당신을 법(law)을 공부합니까(practice)?”라고 말할 때 한국인들은 이렇게 얘기하지요. "당신은 법(low)을 공부합니까(prectice)?" 그들은 계속해서 "low"라는 발음을 내지요. 바로 이 점을 얘기하고 싶어요. 듣고 반복해서 따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외국인에게 말할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결국 배움이란 없는 것이지요. 똑같은 이치가 미국인에게도 적용되지요. 만약 당신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한다면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말을 걸고 같이 어울려야 하지요. 전 아직도 매일 배우고 있어요. 매일 조금씩 되풀이해야 하는 과정이지요. 기고가: Ross Wal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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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산에 있을때 초대한 적이 있어요.
우리와드에도 한번 초대하면 좋겠는데.. 언제 기회가 될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