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기에서 그사람을 이해 하려고
노력하면 될것이며 글의 성분에 관해서
누구던지 어필 해서는 안될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다향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야 하기때문이다.
어필이란 그사람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생기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사람이 자기의 뜻과 생각을
맞추지 못함을 탓하는거와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울무지개 천사님들!!.
오늘 또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입니다.
오늘도 일의 홍수 속에서
다양한 분들과 만나고 부딪치며 일과를
보내야 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의 폭을 넓히고
넉넉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산내들 드림.
[남아있는 이야기]
번호:2261 글쓴이: 산내들
조회:27 날짜:2003/10/02 07:01
사법연수 과정을 마칠때 까지 뚜쟁이 들이 난리 부르스를 치더니
잠잠해졌다..그것은 형님과 형수님이 아들 빼앗긴다고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조카 뿐만 아니라 조카 고등학교 친구들 한 십여명이 무더기로
법조계로 진출했다고 한다. 춘천지법 연수 나갔을때 모검사가
법원지에 법의 모순에 대한 글 기고 했다가 그게 파장으로 이어져
최전선 고성이라는 데로 전보발령을 받은 사건을 목격한 우리
조카는 검사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검판사를 포기하고 조카가 선택한것은 변호사의 길이였다..
2.3년 변호사를 하면서 후에 외국으로 가서 국제 변호사 자격을
취득 한다는것이 조카의 목적이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형님의 사업실패로 인해 가장아닌 가장 역할을
하게 되니 여의치가 않았던 모양이다..형님은 나한테 모든성의를
다해주셨다..야외로 나들이를 할때도 꼭 우리식구들을 챙겨주시고
우리 아이들과도 손잡고 잘도 놀아주시고 조그만 일에도 늘 같이
하기를 원하셨었다..그러니 조카들도 부모님 못지않게 나에게도
잘했다. 형님은 내친구가 사업에 어려울때도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실정도로 나에게 깊은 애정을 쏟으셨다..나뿐만 아니고 형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다..그러시던 분이
어느 화창한 봄날에 다시 못올길을 선택하셨으니 남아있는 사람들의
애통한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형수님은 그때서야 남편의 빈자리를 느끼곤 하셨는데..
첫째 며느리 문제였다..큰조카 친구 하나가 결혼을 해서 부모님과
같이 한1년 살다가 독립해서 나가는걸 보시곤 더욱 장래 며느리에
심혈을 기울이신것 같았다..물론 오가는 중매등은 하나같이 상류층
이지만 우선 사람을 먼저 보셨고 조카는 자기 주장은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무조건 어머님 말씀에 동의를 한다고 하더란다..
얼마나 효자인줄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한번은 중매로 만나 몇번의 데이트도 하고 마음에 흡족해 하고
있을때 형수님은 또 어데가서 궁합을 보니 않좋다고 하더란다..
그얘기를 듣고는 어머님 뜻이 그러시다면 그만 두겠습니다..
이럴정도니 말하면 입만 아프다..
우리 형수님이 고뇌끝에 찾아낸 며느리는 그옛날 살던 옆집처녀다
어렸을때 자라는것을 항상 봐온터라 너무 잘아는 사이..
그며느리는 지금까지의 배경에 비해서는 뒤쳐지지만 그아버지가
국회의원 출마를 세번씩이나 한경력도 있는 집안이다..
그집에서는 두말하면 잔소리 하늘에서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고
할정도로 반겨 준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리라..
결혼식 혼주는 내앞으로 되어있었다..야외에서 전통혼례식을 성대히
치렀고..처갓집에서 마련해준 대형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물론 형수님도 옛집은 세를 놓고 같이 동거를 하셨는데..
큰조카는 가정에서도 얼마나 성실한지 집에 돌아오면 벗어부치고
설겆이 청소 등을 하니 형수님이 여간 불편한것이 아니였다고
한다..아이들이 울고 짜증을 부려도 한번도 화내는 일이 없으며
밖에 나가자고 애들이 졸으면 열번이고 나갔다고 형수님이
나한테 귀뜀해주시곤 하셨다..자기 자식이지만 세상에 이런 사람
처음봤다고..그것은 물론 동생들 한테도 적용되었다..
자기 방에 TV를 사면 꼭같은걸 동생들 방에도 사줄정도 였으니..
그러시다 형수님은 스스로 옛집으로 돌아오시게 된다..
조카 장인은 전국에 좋다는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싯가로
000억대가 넘는다고 했다..하루는 그장인이 양수리 우리 산소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더란다..그래서 조카가 모시고 구경을
시켜드렸는데 그후 이틀만에 돌아가셨다..영종도에 오피스텔 완공도
못보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래서 사돈도 우리 산소에 같이 모시기로 했던것이다..
지금 큰질부는 모여사대 교수로 재직중에 있으며 우리 와이프
한테도 너무 잘하고 착하다..
우리무지개 천사님들!!..너무 재미 없었죠..
기교를 부려 재미있게 한번 써보려 했었는데..
글 내용상 우울한 부분도 있었고 하여..
좀 딱딱한 분위기로 흘러간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우리님들 너무 감사하구요..
앞으로는 좀더 재미있는 소재를 가지고 올려보겠습니다..
크크.. 고백쥔장님!!.삿갓여인님!!..그리고 우리님들!!..
제가 요즘 조금 바쁘다는 핑개로 꼬리글도 성실히
달아드리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울님들!!..
시월의 문턱에서 보람차고 희망이 꽉꽉 넘치는 가정을
이루시고 환절기에 건강 유의 하시길 빌겠습니다..
산내들 드림.
[유혹.. ]
번호:2245 글쓴이: 산내들
조회:28 날짜:2003/10/01 11:04
학생 회장도 그룹규수도 싫소..
J학사로 회사를 옮긴 사촌형님은 회사와 더불어 날로 일취월장 해갔다.
당시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종로땅에 일약 높은 빌딍군을 세우는
그때 멤버들이 회사의 일등 공신들이다.
형님 처남은 편집국장 형님은 광고 부장으로 J학사에 없어선
안될 인물들이었다..당시 각 대학에 진학하려는 신입생들의
길잡이 J학사라는 월간 책자도 발간 되기 시작 하였다..
당시 이후 대학에 진학했던 님들이라면 아마 한번쯤 접했을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원과 진학상담 진학에 대한 모든것
각대학의 신입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광고물들..그게 바로 형님손에서
이뤄진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형님은 정말 성격조차 호탕하셨다..늘 밝고 호탕한 웃음소리
나와 술한잔 할때면 형님은 지나간 과거를 회상 하시면서
내성적이었던 성격을 부단한 노력으로 외성적으로
스스로 개척해 나가셨다는 말씀을 하시곤했다..
형님은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켰고 언젠가 언급한바 있지만
조카들 중학교만 들어가면 한좌석에서 술을 가르키곤 했다.
기왕 술배울거라면 어른앞에서 배워야 한다는게 형님의 지론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외로움속에 살아오신것을 가족들을 통해서
많은 위안과 행복을 찾고 계셨던것 같다.
언젠가 행방불명이던 큰아버지의 소식을 접했다.
형수님과 둘이서 찾아갔다..지금은 어데인지 잘 기억할수 없지만
파주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한노파와 살고 계셨다.
그노파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군에 갔다고 했다.
어찌 어찌 해서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이제 형편이
나아 지면서 그렇게 매정한 큰아버지 소식을 접하게 된것이다
그후 그노파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큰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우린 할머니 그리고 조상님들의 불교를 이어받아 신앙을 불교로
하기로 했다..형님의 뜻에 따라 우리아버지 제사도 큰집에서
지냈고..형님은 그러셨다 "이세상에 친척이라곤 너와나 둘뿐인데
친형제 처럼 지내자" 그래서 오촌 조카들도 항상 나를 작은
아버지라고 불러 주었다.
우리 큰조카는 중학교 3학년때 학교장이 추천하는 특수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J재단에서 설립한 당시 최고의 특수
W고등학교다..학생 전체를 기숙사에 수용하는 학교였는데
사감이 전원을 내리지 않으면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그런기숙사
였다니 얼마나 학구파들만 모여있는 학교 였다는것을 알수가
있을것이다..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섣불리 말조차 할수도
없었다고 한다. 고2때 이미 서울대학교에 입시 시험을 소화해
낼 정도였다니..내 짧은 머리로 더 언급해서 무엇하리..
고3때 조카는 수석은 못했어도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큰조카 다수의 학우들과 함께..
그무렵 형님 회사에는 겪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노회장의 양아들 젊은회장으로 교체 되었고 경영방식 마져
바꾸는 바람에 J학사을 일약 최고로 성장시켰던 일등공신들은 모두
물러 나야만 했다..그다음 형님은 교과서 출판 사업을 하기에
이른다..당시 문교부 장관과도 골프 등으로 친분을 쌓았고
어께를 나란히 할정도였는데 무슨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첫사업에 실패를 하게 된다..그다음 연이여 이어지는 실패의 연속..
큰조카는 서울법대 2학년때 사법 1차 합격을 했고.
3학년때 2차에서 낙방을 하게 된다. 4학년때는 수석을 다툴수
있다는 자신을 보이기도 했으며 서울대학교 학생 회장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형님과 형수님의 적극 만류로 출마를 포기 해야만 했다.
당시 사복 경찰관이 늘 감시하고 다녔고 조카 멤버들은 그좋은 머리로
형사들을 골탕먹이기가 일수였다고 한다..
드디어 4학년때 수석은 못했지만 2.3차를 모두 통과 했다.
그러고 나니 유명한 뚜쟁이들이 교섭에 나섰는데 우리나라 몇째
안가는그룹의 규수들도 거론되기도 했었다. 인물 성격 체격
모든면에서 월등했으니 누구든지 군침을 삼킬만한 인물이었다.
거기다 부모님 말씀이라면 죽음도 불사할수있는 효자였으니..
내가 작은 아버지라도 조카앞에서는 머리가 숙여질 정도였다.
이번에 끝맺음을 하려했는데 서론이 길어져서
한편 더 추가해야 할것 같습니다.
재미없는글 읽어주시는 님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우리 무지개 천사님들!!..
오늘은 시월의 첫날입니다
아!!. 이러는 사이에 가을은 깊어가고 있네요..
이가을 여행이라도 한번쯤 가보고 싶습니다.
우리 님들도 얼마 남지않은 가을 을 보람있고 뜻있는
시간들로 채워가시길 빌겠습니다..
~~~~산내들 드림~~~~
[몰락.. ]
번호:2235 글쓴이: 산내들
조회:34 날짜:2003/09/30 13:26
기왕 고모님을 등장시켰으니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우리 고모님은 마음이 부처님 같으셨다..인자하시고 온화하신 성품이
우리 할머님의 영향을 받아 절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하셨다.
고숙부님의 괴팍한 성격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살아오셨다고도
볼수있다..대문 앞에는 늘 거지들이 줄지어 기다릴 정도였다니
고숙부 몰래 식모를 시켜 그렇게 선행을 실천하신 분이란다..
고모님 슬하에는 남매를 두셨다..
딸 그담에 귀하고 귀한 외동아들(영서)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난 누이 이름을 지금도 모른다..우리 어머님 하고
연세가 비슷했으니 그럴만도 한것인가..
그런데 이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되나 그누이가 태어나면서 재산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한다..그누이는 노래를 잘불렀으며 무주에서
콩쿨대회를 하면 일등을 하기도 했었다니까 인정을 해줘야 되겠다.
그러다 시집을 갔는데 그이름도 유명하고 희한한 매형(동초)이다..
ㅋㅋ..이렇게 거명하다 욕먹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며 그부근 지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매형은 우리 고숙부님 밑에서 많은 천대를 받으며 일을 배우셨고
그영향을 많이 받으신듯 하다..
반면에 고종사촌 형님은 완전히 고삐풀린 망아지 처럼 자랐다.
대전으로 학교를 보냈고 하숙을 했었는데 무슨 무슨 고지서들을
가짜로 만들어 집으로 보내 돈을 물쓰듯 쓰고 다니고
하루는 고모님이 하숙집을 방문했는데 책상위에 먼지만 쌓여있드란다.
고숙부님의 고단위 처방으로 해병대로 군대를 보냈으나
또 안스러운 마음에 돈을 들여 곧바로 제대를 시켰으니 얼마나
귀한 자식이였든가..
형님은 점점 반거충이가 되어 기생집 술집등을 전전했으며
그래도 모지방 국회의원 따님 규수를 맞아 결혼을 하게된다..
그슬하에는 아들만 둘 태어났다..
그러는 사이 재산은 점점 몰락 되어가고 있었다..
대신에 누이네 집은 점점 재산이 불어났고 극장 목재소 영동여객
등 무주에 큰 사업은 모두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고숙부님은 지금에 당뇨병 그전에는 부자병으로도 일컬었던
조갈병이라고도 했다..그렇게 남아있는 재산을 다 고질병에다
쓸어가지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건달인 고종 사촌형은 남은게 없었으나 누이 덕택에 살았고
목재소 돼지 양돈장을 차려준들 다 말아먹기가 일수였으니..
지금도 기억난다 나를 만나면 그형은 어깨를 툭툭치면서..
"이놈아 무주에서는 어깨을 펴라!"..
그렇게 사시다가 그형은 일찍이 세상을 등졌다..귀하디 귀한 남에집
(규수)형수님과 아들 둘을 남겨놓고..우리 고모님으로서는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이였다. 나는 고종사촌 누이는 가끔 볼수가 있었으나
매형은 두세차례 밖에 못본것 같다..
고모님은 이제 손자둘과 함께 딸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보수!. 나하고는 오촌이 되는 큰조카 이름이다..
그넘 역시 건달이었다..결혼후에도 사냥을 일삼고 물고기나 잡으로
다니고 어데서 돈이 나는지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삼촌"하면서 날
찾아오기도 했었다..그런데 그넘도 어느날 진주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진주남강의 고깃밥이 되었다..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운명속에 남게된 우리고모님!.부처님 같으셨던 우리고모님!.
난 그동안 서울에 살면서 일년에 한번씩도 찾아 뵙지 못했었는데..
2년전 늦가을 난 공무원 콘도를 빌려 친구와 부부동반으로 백암온천을
향해 가고있을때 고모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백암온천으로 보내고 나와 처는 무주로 향했다..
가보니 상주도 없었고 고종사촌 누이와 그 큰아들이 상주를 하고
있었다..누이와 오랜만에 눈물을 같이 흘렸다..그때보니 누이도 많이
늙으셨다..그렇게 한많은 세상을 떠나가신 고모님..난 고모님 연세도
정확히 모르지만 90을 넘기신것 같다..
이제 매형은 뒷방에 나앉고 큰 아들이 사업을 이어받았늗데 더욱
번창해서 전북에서도 알아주는 건설업 종합상사 등을 하고 있다고
했다..그아버지 보다 인격이 훌륭한것 같았다..
고모님 장례식에 상주로서 소임을 맡아서 하는걸 보고 많이 느꼈었지만
나랑 만났을때 그조카가 명함을 주면서 "삼촌은 무주에도 안오세요"
오시면 연락 주시고 무주구천동에 리조트도 있고 한데 언제든지
필요하시면 쓰세요" 그렇게 말하는걸 보고 매형하고는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말이래도 고마웠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긴 전화통화를 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치례로
전화 했던것이다..
우리 무지개 천사님들!!..
오늘은 인삿 글이 좀 늦었군요..
쓰다보니 너무 가정사 얘기라서 재미도 없고 두서도 없고 글이
좀 이상하네요..이해 하여 읽어주시기 바라며..
님들..한낮의 열기가 따사롭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울님들 점심식사 맛있게 잡수시고 즐거운 오후 되시길
빌겠습니다..
산내들 드림.
[천둥 벌거숭이]
번호:2208 글쓴이: 산내들
조회:34 날짜:2003/09/29 08:19
어찌된건지 625 전쟁이 끝나고 이세상에 남겨진 친인척이라곤
사촌형님과 나 그렇게 둘뿐이였다..
우리 고모님이 그러셨다 그넘에 전쟁이 우리 하씨집안만 망쳐놨다고..
아버지 형제분들이 4남매셨따..제일 큰아버지 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나보다..사촌형님이 그집에 양자로 되어있었다 하니 그다음
둘째 아버지 슬하에 4남매 우리아버지 한테는 달랑 나하나..
둘째 아버지에게서 제일 사촌들이 많았지만 그나마 다 행방불명
되었고 사촌형님 4남매중 막내만 남아있었으니 우리 고모님 참말
기가 막힐노릇 친정 하씨 집안만 쓰리고에 피박 광박 몽땅
썻다고 해도 누가 따질넘 하나두 없었을것이다..
행방 불명된 삼남매 사촌 큰형님..너무 똑똑하고 인물이
출중했으며 사촌누이 둘 그누이들이 무주에 들어오면 무주 시내가
오밤중 헤드라이트 켜놓것 처럼 훤해졌땅게 미모 등 모든면에서
조금 쓸만했던가벼 아그런디 고것들이 인물값 한다꼬 아님 운명의
뼈다군지 뭔지 그사촌들은 일찍이 레닌주의 사상이라나 뭐라나
고렇게 빨갛게 물들어 가꼬 6.25와 동반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것여 아마도 그 인물들이 북으로 갔다고 생각할수 밖에 없따..
와중에 둘째 큰아버지 자기가 할일이 뭔지 의무가 뭔지 부양이 뭔지
도 모르고 무책임하게 떠돌다가 행방불명 돼부리고.
남아있는 사촌형님은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로 하늘에서 툭 떨어져
버린것처럼 집도 절도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이세상에
던져저 버렸던 것이었따..
한때 우리어머니 그리고 사촌형님 어린나 이렇게 무주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나보다..당시 고모님은 무주읍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제일가는 부호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당깨
부끄러운 야그지만 당시 고모부님은 산판발매업 (산을사서 나무를 베어냄)
또 광산을 경영해서 떼돈을 버셨는지 그돈으로 가난한 사람들
핏줄을 빨아묵는 고리대금 업도 하셨고
지금으로 말하면 만물상인지 잡화상인지를 하고있었는데 형님이
거기에서 점원으로 있었다는 것이다.그래도 공부는 시켜야 쓸것아녀
잘살믄 다여.. 그어린 나이에 공부가 하고 싶어서리 무작정 무주를
떠나 아는 사람 하나없는 서울로 올라 오신것이었따.
서울에 와서 거지처럼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고 어느 눈오는 겨울날
춥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다시 무주로 내려 갔었는디 아 그 고모분지
뭣인지 몰인정하게 문전 박대 했다는거 아녀.자기 자식들은 고슴도치
마냥 아끼면서 그 불쌍한 조카 하나있는거 그렇코롬 내쫒아야 쓰겄어
하긴 그곳에 있었따면 성공도 못했을 것여.. 고모님의 눈물 콧물을
뒤로한채 발길을 돌아나오면서 남긴 한마디 십년후엔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올테니 그때 보자는 뼈에
사무치는 소리를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서울로 올라온 형님은 잠자리는 물론 배도 고프고 하여
중량교 부근에 있는 기와공장에 들어가 허락도 없이 무작정 일을
했답니다. 기와공장 일이란 상일꾼들만이 할수있는 힘든 작업이다.
물론 기와공장 사람들은 일을 못하게 말리는건 당연 했으리라
아 쬐그만것이 느닷없이 와서는 벗어부치고 말도없이 일만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노릇 아닌가벼.그러나 너무 절실한 처지였으니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일만 했더랍니다.
한나절 정도 일하니 밥을 주면서 이제 넌 힘들어서 할수가
없는일이니 다른데로 가보라고 하더란다. 크크 그렇게 쉽게 갈바엔
요기 오지도 않았다는 듯 점심을 먹고도 계속 일을 했는데
제법 일도 야무지게 잘하니 사장이 허락해주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자고 먹고 일하면서 틈틈히 독학을 시작했고..
사장님의 베려로 당시 균명(환일)야간고등학교에 입학을 한것이다.
고등학교 삼년 과정을 마칠 무렵 기와공장 사장님은 이제
사무직으로 일할것을 권유했지만 형님은 영업사원을 자원했다고
합니다. 기와 몇장을 자전거에 실고 집짓는 곳이면 어데든지
찾아 다니면서 영업을 하러 다녔답니다.
그 기와공장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다 친구 또는 형님처럼 평생
잊지못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마음이 동하는
세사람이 있었는데 그렇게 삼총사가 조용히 탄생했던 것이었따.
형님은 그곳에서의 그힘들고 어려웠던 과정을 청산하고 직장을
옮긴곳이 j학사에 진출을 하게되었 답니다.
j학사에 재직하면서 직원분의 소개로 지금의 형수님을 만났고.
그이야기는 지금도 모르지만 결혼도 하기전에 살림을 차렸던지
하여간 면목동 근처 허름한 창고 방 하나에서 울 조카들
삼형제가 태어났다..그렇게 십여년이 흘렀고 낙원동 회사
부근에서 고향사람을 만났단다..그리하여 고모님 하고 연락이
닿았고 나도 그때 사촌형과의 상봉이 이뤄진 것이었따..
크크크 이러다 울족보 다 나오게 생겼네..
모자란건지 넘치는건지 아님 푼수인지 다 떠벌리다니
참 나도 한심한 넘여..욕하지덜 마셔잉~~
울 무지개 천사님들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부터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이랍니다..
즐겁게 일하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들은 미쳐 몰랐을것이다..세 사나이가 결의형제를 맺음과 동시에
악연의 씨가 태동하고 있었음을..
너무나 어려운 시기였기에 너무나 초라한 인생들이였기에
서로 의지하고 서로 의기 소통하여 삼총사의 연을 맺은것이리라..
그들이 만난곳은 중량교 부근 기와 공장에서였다..
기와공장의 일이란 최상의 중노동을 요하는 상일꾼만이 할수있는것이다.
우리 사촌형님의 이야기를 여기에 올려보고자 합니다..
지금으로 부터 15년전 삼총사와 그외 세사람은(잘모름)
삼총사들의 구성.. 우리사촌형님..그리고 중계동에서
기와공장을 하고 있던 p사장 그리고 한사람 L씨 이렇게 삼총사와
그외 세사람 6사람은 진달래 개나리 활짝피어 아름답던 화창한
어느 일요일 봄날 홍천에 사는 옛동료의 회갑에 다녀오는길
용문 이란곳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다..마주오던 택시와 충돌하게
되었는데..그때 운전자는 삼총사의 일원이고 형님의 손아래 동서인
p사장이였다. 그런데 어인일인고 6명중 울사촌형님만 운명을 달리
하셨으니 나머지 분들은 대수롭지 않은 부상으로 잠간동안의
병원신세로 끝났지만..
여기서 악연이란 표현을 쓴것은 형님 돌아가시기 일이년전 울형님
생신에 참석하기 위해 손녀의 손을잡고 내려 오시다가
비탈길 세워둔 화물차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뒤에서 부터 오는
죽음의 그림자 조차 느끼지 못하고 불가사의한 죽음을 당하셔서
생일 잔치가 상갓집으로 변하는 그런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그손녀는 어데 한군데 다친곳이
없었으니 그또한 범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렇게 생일날로 이어지는 세번의 사고는 악연이라 말하고 싶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십여년이 흘렀을까..
삼총사중 맞형격인 L씨 그분은 교회에 안수집사라는 직분까지
갖을정도로 교회에 헌신을 아끼지 않으셨고 매사에 성실했으며
술담배를 멀리하고 건강하시고 이세상 하나 불만없이 살아오신
분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여관 주인에게 두시간만 잘테니 두시간후 깨워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두시간 동안에 세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통은 자기 자녀들에게 한통은 삼총사중 막내격인 p사장에게
나머지 한통은 우리 큰조카에게..
형님에 사고로 받은 보상금으로 양수리 지나서 신원리라는 곳에
큰조카가 묘지자리를 사논것이 있었다..
울큰조카에게 보낸 유서에는 거기에 자기를 묻어달라는 것이였다.
그림까지 그려서 자기는 가운데 우측엔 울형님 좌측엔 남아있는
p사장 그리고 옆으로 통로까지 내달라는 유서를 남겼으니
누가 그뜻을 어길수가 있을까..
그래서 그분이 제일먼저 중앙에 자리를 잡았고 전곡에 모셔져 있던
형님도 날을 잡아서 대대적인 묘지조성도 하여 이장을 하기에
이르렀다..하는김에 여기저기 산발 되어있던 조상님들도 한곳에
모시기로 했다..전곡에 양지바른곳에 모셔져 있던 형님 십여년이
지났건만 묘지를 토파해 보니 미이라로 남아 있었던것이다..
이제 혼자 남아있는 p사장 중계동 근처에서 기와공장을 하셨다
그공장은 삼총사가 조금씩 거출하여 세운 공장인데 p사장이
운영을 하다가 삼총사 협의하에 모두 무상으로 넘겨주기로 한것이다..
사고 직후부터 p사장은 한동안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형님을 자기가 운전하던 차에서 돌아가시게 했고.
나머지 또 친구한명마져 운명을 달리 했으니...
어느날밤 술한잔하고 갑자기 사라진날에는 그산속 두친구의
산소에서 술먹고 쓰러져 자기도 하였더란다..
지금은 심리적 안정을 찾아 살고 있다.. 그딸이 아시아나 항공사
최초의 모델이기도 했고 에스콰이아 화장품등 많은 모델과
탈렌트로 활약하다 지금은 모 회장 아들과 결혼하여 잘살고 있으며
그p사장 부인은 모교회 장로이고 목사과정을 꿈꾸기도 했는데
지금은 잘모르겠다..일년에 두세차례는 나와 부딪치기도 한다.
처음엔 원수 같고 말도 한동안 하지 않았었지만 그것이 그분의
잘못이련가 생각하였고 그분은 우리보다 몇갑절 더 정신적인 고통의
나날을 보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수가 있기에..
오늘은 여기에서 끝맺음 하려합니다..
울님들 아침부터 우울한 글 올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형님에 대한글 몇차례 올려볼까도 생각중이지만
별로 흥미가 없을것 같군요.
사랑하는 울 무지개 천사님들!!..
오늘 구월의 마지막 일요일 그리고 이좋은 가을를 뜻있고
보람찬 시간들이 되었으면 하는 산내들의 바램입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독감바이러스가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건소에서 예방접종을 한다하니 빠짐없이 접종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빌겠습니다..
산내들 드림.
[개념의 차이]
번호:2179 글쓴이: 산내들
조회:21 날짜:2003/09/27 07:18
우리 시골에서는 생일이란 그냥 기억만 할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어느날 문득 아침밥상에 미역국이 있으면
아 오늘은 누구의 생일 인가보다.. 그렇게 생일이란..
무미 건조했다..또 그럴수밖에 바쁜 일손에 생일 따지고
뭤따지고 할사이가 없는것이다..
그렇게 생일이란 개념은 무용지물 이였다..
서울 이라는 데에 와보니 참 생일 또는 기념일을 많이도 따진다..
우린 습성에 젖어 생일 이라는것을 잊고 지나가는 날도 많았는데..
우리 사촌형님 생신때면 형님 처갓집 친구들 등 온 친척들이
다 모여 잔칫날을 방불케 했었다..
어느날 사촌형님이 물었다 자네 생일은 언제인가?.
"전 생일 같은것 안합니다." 어머님 또는 형제들 생일도
못챙기는데 제생일 이라고 어떻게 하느냐구..
그럼 형님은 그러셨다.. "내 모든것 준비해가지고 감세..
그렇게 한잔 하면 될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한두번 먹은 기억이 있을뿐이다..
우리 고향친구들은 나와 거의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내 친한친구.. 나는 늘 그친구 생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친구도 생일 날이라고 해도 특별히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건 우리 사촌 형님처럼..그친구 집 근처 횟집에서
회 한사라 사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곤 했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해마다 그친구 생일을 내가 마련해 주는것이
의무처럼 되어버렸다..횟집에 가서 한 십여명 불러서 생일상을
차려주곤 했었는데..엊그제 그친구 한테 전화가 왔다..
생일날이 다가오는것 같은데 날자를 기억못하니 언제냐구..
그래서 이번엔 그친구에 의해 친구 몇명과 생일을 보내게 된것이다..
내생에 처음 요란스럽게 생일을 보내게 된것인데.
내가 잘아는 횟집에서..적당히 기분좋게 마셨다..
아마 친구들 권주에 내가 술을 더 마셨을 것이다..
끝맺음 하고 노래방 코스가 남아 있을 찰나에 횟집주인이
양주를 가지고 들어와선 생일 선물을 한단다..
그래서 한잔 더한것이 과음하게 되었나 보다..
그리곤 노래방까지 안내하고 같이와서 놀아준 횟집주인..
난 노래방에서 노래 한곡도 부를수 조차 없는 상태었다..
어제 아침 일어나보니 술이 덜껜 싱테였다 아마 술을
섞어마신 탓인지..백세주 소주 양주 노래방에서 맥주까지
마셨으니 그상태에서 컴앞에 앉았다. 갑자기 안경 생각이 났다..
평소에 안경을 착용하지 않지만 컴앞에서만 사용하는 안경이다.
서너달 전에 맞춘 안경.. 컴앞에 작은글씨들 대할때마다 인상이
찌풀어 지기에 거금 40만원이나 주고 맞춘것인데..
아무래도 잃어 버린것 같았다..티셔츠 윗주머니에 넣어다녔는데
어데서 흘렸을것이다..식구들 한테 물어보니 윗통은 벗은체
알몸이였고 티셔츠는 손에 들고 왔다하니
안빠졌다면 더 이상할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안났다..지금이라도 어제 온길을
더듬어 봐야겠다 생각하고 집을 나서서 밖으로 나왔는데
밑에층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그친구 하는말 혹시 안경 잃어버리지 않았냐구 묻는 것이었다..
잠깐동안 걱정했던것이 눈녹듯 사라졌다..
그친구 아침에 어데 다녀 오는길에 주워 왔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일도 있다니..너무나 반갑고 고마웠다..
그친구는 이상하리 만큼 어데 길가다 뭐던 잘줍는 사람이다.
이제 그친구 한테 술한잔 사야겠다..
그제(25) 제생일을 기억해주고 축하를 아끼지 않으셨던..
울카페 어머니 같으신분 삿갓여인님!.쥔장 고백님!..
하얀미소..그리고 내 사랑하는 울카페 식구님들!!.
메일 보내주신분과 전화까지 해주신분들 모두 너무 너무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내생애 잊지못할 생일이었 습니다..
울무지개 천사님들!!.
벌써 또 한주 오늘도 토요일 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산이라도 다녀오세요..
가족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죠..
울님들!!. 항상 건강하시고 밝은 모습으로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