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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교중미사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생명의 은인, 덕희씨>
저에겐 잊혀 지지 않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덕희”라는 이름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여자이름 같지만 실은 남자애
이름입니다. 나이도 저랑 똑같고 어린 시절 서울 상계동 같은 동네에서 자랐습니다만은 저는 그 아이의 이름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37년 전, 누구라 할 것 없이 지지리 가난했던 시절이야기 한 토막 들려드립니다. 상계동 태능 선수촌 옆 단칸방 앞집
뒷집으로 나란히 살던, 지금 제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살아도 바로 앞집이 뭐하는지도 모르고 충분히 살 수 있던 그
런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도 함께 기르고 먹는 것도 함께 나누며 그야말로 ‘이웃사촌’지간이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너무 마르고 아파
집에 있는 것 다 거덜 내고 일가친척들도 죄다 나 몰라라 할 때, 저의 부모는 마지막 변통을 해볼 도리도 없이 그저
자식 죽으면 내다 묻을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뒷집 사람이던 ‘덕희네’에게, 그냥 성당 신부님에게 가서 요한이 종부
성사나 줄 생각이라고 얘기를 하셨답니다.
성당도 안다니던 덕희 어머니가 그 소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지요.
“종부성사가 뭔교?”
“성당 다니면 그런 게 있다, 마. 사람 죽기 전에 받는 기도 같은 거다.” 했더니 덕희 어머니는 막 화를 내며, 그럼 ‘자
식 죽일라고 그런 기도를 하냐?’고 펄쩍펄쩍 야단을 치시더랍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그러면 못쓴다고, 어째든
동 자식 살릴 생각 안하고 그렇게 약해빠진 소리 해샀는다.”고 혼줄을 내시더니 횡하니 가버리시더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덕희 어머니는 신문지에 둘둘 말은 뭉치 하나를 우리 집에 툭 던지시더니, “이거 가지고 병원
가라. 죽일 생각 말고 새끼 살릴 생각하라.”고는 다시 횡하니 돌아서 가셨습니다. 그 신문지를 풀어보니 그 시절 대
단한 거금인 현금 30만원이 들어있었고, 워낙 급하고 경황이 없던 터라, 어머니는 그 돈으로 병원으로 달려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영영 이별 길인 줄 몰랐다고 어머니는 지금도 가슴을 치십니다. 병원 가자마자 더 큰 병원으로 옮기
고 곧 바로 수술을 받는 바람에 병원 생활이 길어진 것이지요. 그래도 꼭 덕희네에게 아이 수술 잘 받았다고 이야기
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버지 더러 찾아가 꼭 인사를 전하라, 했는데 아버지 말씀이, 덕희네가 이사를 가고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몇날며칠을 수소문해보니 우리에게 준 30만원은 덕희네 셋방 전세금이었고, 저나나나 없던 시절 돈 한 푼 없이 집을
나와 태능 경마장 옆에 거적대기 같은 걸로 집을 꾸려 움막 같은데에서 살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남의 집 아들 살리려고 자식 자식은 마굿간 거적대기를 걸치냐고, 내가 그 죄를 어떻게 다 갚냐.”고... 그러
나 그 길로 서울에서 이사 내려와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할 길도 없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니가 그 덕희네 때문에 죽
을 목숨이 살았으니, 행여나 나 죽거들랑 너랑 동갑내기 덕희라는 애를 만나거든 꼭 그 돈을 갚아주라.”는 말씀을 지
금도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얼굴도 모르고 이름 석 자 알뿐인 ‘덕희’라는 친구를 기다립니다.
그런 세월입니다. 못살고 가난한 것 맞습니다. 지독하게 서럽고 눈물 나던 세월 맞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만으
로 그 시절 그 세월이 불행했노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지금 맘껏 고기 먹고 흰쌀밥 먹는다고 그 이유
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이 한이 되고 없는 것이 죄가 되어 사는 일이 지난했던 시절, 함께 못 사니 그나마 사람이 사람으로는 보였습니
다. 니 자식 내 자식 할 것 없이 함께 기르고 함께 먹이며 담벼락 없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입니다.
같은 반 아이도 그냥 해맑은 아이로 못 봅니다. 그 ‘부모’를 보고 그 ‘능력’을 보고 그 ‘집안’을 봅니다. 이미 우리 눈은
갈라져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돈 되는 사람, 안 되는 사람, 기가 막히게 알아차립니다.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게 되
었다고 유세를 떠는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깊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도 부끄러운 줄을 모
르고 염치를 잃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가난을 이기는 힘을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가난을 이겨야지요. 그래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하며 신새벽부터 쓰레기차에서 퍼지는 ‘가난 퇴치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100M 달리기의 출발선에서 들어야 하는 총소리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한 경쟁으로 이 대한민국을
몰아넣었습니다. 출근전쟁에, 입시전쟁에, 장바구니 전쟁에, 고시전쟁에, 지금은 3만불 4만불 전쟁까지, 40년을 우
리는 ‘전쟁’처럼 잘 살기 위해 달렸습니다.
많은 성장이 있었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상 사람들 다 놀랄 만큼 단기간에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40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의 먹을 것과 재화를 생산하고 있습니다만, 아이러니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리는 여전히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옛날만큼 절대적인 가난은 아니지만 ‘상대적인 가난’이 더 우리 배를 곯게 하고 우리 배를 더 아프게 합니다. 식사하
라고 100만원짜리 수표를 그냥 나누어주는 부정부패 정치인 이야기를 하기도 싫고, 그저 있다는 강남 사람들 사는
이야기는 딴나라 이야기처럼만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아직도 못 먹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비극입니
다. 아직도 굶고 있고, 아직도 집 한 채가 없고, 아직도 더 못살게 되고 더 없이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증
가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빼앗는 경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부를 축척하는 과정이 그렇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성공과 출세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재벌은 하청업체를 착취합니다.
하청업체는 노동자를 착취합니다. 노동자는 비정규직을 착취합니다. 결국 이 사회의 생산 시스템이라는 것이 결국
힘없는 비정규직의 착취로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먹고 살만하니 이제 힘든 일은 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일은 누가 합니까? 제3세계 이주노동자들이 하루 13시
간을 근무하고 90만원도 안 되는 돈을 받습니다. 착취입니다. 농민들, 영세상인들, 택시 노동자들, 그래도 바르고 성
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제 더 뺏길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빼앗는 경제는, 그렇게 살찌우는 경제는, 그
래서 무섭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더 큰 재화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은 도덕성을 따
지지 않습니다. 돈에는 ‘양심’이 없으니까요. 결과만 묻고 효율성과 이윤창출만 따집니다. 그러면 선이 됩니다. 모든
것은 다 용서가 됩니다.
반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이 베풀어주는 떡고물과 부스러기를 받아
먹어라!” 합니다. 이것이 지금 경제 논리입니다. 그러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한 양심으로 자신이 착취한 것을 없는 사
람들에게 깨끗이 돌려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더 큰 돈을 벌어
야 하고 더 큰 성장과 발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없이 사는 ‘찌질이’들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빼앗는 경제”의 반대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누는 경제>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콧방귀를 뀔 경제관이지만 하느
님 나라의 질서에는 참으로 부합되는 경제논리입니다. 오늘 복음,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는 유
일한 경제관입니다.
나누는 경제의 출발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땅과 생명, 자연과 재화, 그것들을
통한 가치의 창조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베푸신 선물’로 모든 사람은 그 선물을 능력이 아니라 <존재에 따라 공평하
게 나눌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단언합니다. 이 땅에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
을 것이고, 이 지구상에 굶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이 지구는 지금도 65억 모든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쏟아 붓는 돈의 1/10만 들여도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대학까지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지요. 왜 그렇습니까?
빼앗는 경제, 독점하는 경제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억울하면 너희도 출세하라!” 합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가끔 용
도 나고 했지만, 이제 개천에서 용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교육부터 있는 사람들이 ‘시장논리’로 장악
을 했는데 학원하나 제대로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1년에 1,2천 만 원 하는 특목고를 다니고, 4,5천 만 원 하
는 조기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 터무니없는 일이지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운 “나누는 경제”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이 식사는 오늘 복음 바로 전에 등장하는 헤로데의 생일잔치의 식탁과 정면으로 비교됩니다.
오늘 복음 앞, 14장 1절에서 12절, 헤로데는 자기의 생일을 맞아 고관대작을 불러놓고 한 판 떠들썩한 잔치를 벌입니
다. 무희가 춤을 추고 백성들을 착취해 벌어놓은 산해진미가 넘쳐납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그 잔치판에서 세례
자 요한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저네들끼리 히히낙낙거립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다음에 배치되어있습니다. 아주 교묘한 편집이지요. 여기에는 산해진미도 없고 요란한 춤판도
없습니다. 다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면, 예수의 <측은지심>, 가엾고 불쌍
히 여기는 마음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이 사람들을 풀어 헤쳐,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 먹게 하시라.”(마태 14,15) 청을 합니다. ‘각자 능력껏 먹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반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하
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리고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꺼내놓습니다. 이 이후
의 복음은 불친절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그 정도의 터무니 없는 양으로 5천명이 넘는 이들이 먹을 수 있었는지
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건너뜁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4, 20)로 끝을 맺습
니다.
그 중간, 그 ‘자간(字間)’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의 측은지심을 사람들은 봅니다. 능력이나 자격을 묻지 않고 누구라도 먹이기 위해 이 수천 명 앞에서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저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그 ‘측은지심’, 가엾고 불쌍히 여
길 줄 아는 그 마음은 어느새 사람들 사이를 번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자기만 불행하다고 자기만 불쌍하고 자기만 없이 산다고 불만을 가졌던 이들이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옆을 봅니
다. 자기 보다 더 불행한 이들, 자기 보다 더 우는 이들, 자기 보다 더 서러운 이들의 얼굴을 봅니다. 뭐라도 꺼내게
됩니다. 뭐라도 나누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라도 더 있는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하나라도 더 받은 인생이기 때문입
니다.
있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없어도 나눕니다. 그렇게 이 잔치는 서서히 감동으로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사람이 있을 것이고, 누구는 있는 그것을 내어놓음으로써 더 큰 은총을 누린 이도 있을 것이고, 누구
는 그 빵 한 조각을 물고 눈물을 흘리던 이들도 있었겠지요.
그리고서도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잔치이고 이것이 나누
는 경제의 표본입니다. 헤로데는 ‘빼앗는 잔치’를 벌이고 이 세상은 그 잔치판을 이어가고자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들은 빼앗는 잔치가 아니라 ‘나누는 잔치’, ‘살리는 잔치’를 매일같이 벌이는 사람들입니다.
성체성사가 그렇고 또 이 성체성사를 받아 모시는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성체성사를 내가 무엇을 빼앗으려는 마
음으로 영한다면 그것은 성체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성체성사는 나누기 위함이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나도 그런 생
명이 되기 위함입니다. 자기는 비록 거적대기 허름한 마굿간에 살더라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앞집 아이 하나 살리고
자 온 가족이 전세금을 빼내 한 생명 살려주신 그 덕택에 저는 이렇게 사제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살리는 마음, 나누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일찍이 세상 접었을 이 목숨이 그 크신 덕을 입었기에 사제가 되고, 또 신
자들에게 좀 세상과는 달리 보고, 달리 생각하고, 달리 살라고 큰 소리 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덕을 입었으니 저도 그만큼의 덕을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할진데, 여전히 제 욕심만 먼저 챙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됩니다.
비단 저만 그럴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미 우리 인생에 누군가의 덕,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베푸심과
나누심을 입지 않았는지요? ‘나는 그런 것 없다.’ 하시는 분은 그야말로 불쌍한 분이요, 불행한 인생이요, 사기꾼 심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복음(福音), 기쁜 소식입니다. 나도 누군가에게서 받은 덕을 기억하게 하고 나도 누
군가를 향한 베품과 나눔, 예수 그리스도의 측은지심을 실천하게 합니다. 그 자체로 커다란 은총입니다. 나누고 베푸
는 자리, 그곳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이요, 하느님 나라의 실천입니다. 부디 그 나라를 사시기 바랍니다. 그 복을 미
리 이 땅에서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여나 70년대 초반 서울 상계동 경마장 근처에서 자란 ‘신덕희’라는 사람을 알고 계신 분, 연락 주십
시오. 이렇게 살게 해주심에 꼭 감사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멘.
첫댓글 우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덕분에 한 분의 신부님이 계실 수 있었군요!
덕희씨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