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은 마지막 패스”라는 말을 한 사람은 펠레다. 펠레의 ‘축구 황제’ 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다.
‘골은 마지막 패스’라는 말 앞에서 ‘결과 중심주의’와 ‘성적 지상주의’의 행색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유소년 축구 선수들에게 덕담 삼아 ‘제2의 박지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과 중심주의적 사고의 한 조각이다. 사실 오늘의 박지성을 있게 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와 함께 운동장을 뒹군 또래 선수들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수많은 평범한 선수들이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패스’의 또 다른 의미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 의미를 읽는 데 인색하거나 무지하다.
-
- ▲ 정승권(정승권등산학교 교장)씨로부터 인공암벽등반 교육을 받고 있는 신곡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
- 지난 9월 14일 오후 3시, 경기도 의정부 신곡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이 서울 강북구 수유리 노스페이스 실내 인공 암장에 모였다. 축구하는 아이들이 왜?
축구의 ‘패스’와 등반의 ‘한 걸음’
다논 네이션스컵이라는 세계유소년축구대회가 있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식품회사로 유제품 부분 세계 1위인 다논에서 주최하는 세계 최대의 어린이 축구 대회다.
42개 나라의 어린이 축구팀이 모이는 이 대회는 단순히 축구 기량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의 어린이들이 친구가 되어 꿈을 키우는 마당이다.
이번으로 11회를 맞는 다논 네이션스컵 월드 파이널은 처음으로 프랑스가 아닌 곳에서 개최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린다. 바로 이 대회에 신곡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이 한국 대표로 나간다. 프랑스 아트 사커의 지휘자인 지네딘 지단이 이번 대회의 개회 선언을 할 예정이다. 이 대회의 홍보 대사인 지단은 지난해 한국 대회에서 신곡초 축구부 아이들의 슈팅 연습 도우미를 자청하며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대회를 ‘지단 월드컵’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
- ▲ 암벽등반 교육의 클라이맥스. 역경사 벽을 오르고 있다.
- 애교 섞은 과장법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 축구 전국대회에서 신곡초 축구부를 만나는 팀은 월드컵 예선전에서 브라질 대표팀을 만나는 격이다. 지난해에는 소년체전 우승, 화랑대기 우승 등 여러 차례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올해 봄에는 제주도 칠십리배를 우승했다. 여름방학 때 열린 경주 화랑대기에서는 8강에서 탈락했다. 전승 행진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것도 소중한 교육 과정이다. 어쨌든 대단히 ‘센 녀석’들이다. 의정부라는 중소도시의 팀이지만 어디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다. 이런 아이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한국 어린이를 대표해 원정 경기를 떠난다. 부모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려 줄까,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떤 멋진 추억을 선물할까, 하는 고민이 일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실내 암벽 등반’을 제안했다.
암벽 등반이 요구하는 고도의 집중력과 판단력, 담력 등은 앞으로 이 아이들이 좋은 운동선수로 성장해 나가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모두들 찬성.
-
- ▲ 왼쪽) 가장 먼저 수직벽을 오르는 아이. 긴장감이 얼굴 가득이다(황대연). 오른쪽) 자상하게 안전장비를 챙겨주는 클라이머.
- 이왕 할 거라면 최고의 경험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정승권(정승권 등산학교 교장)씨를 찾았다. 정승권씨는 약간은 황당하고도 성가신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난생 처음 실내 인공 암장에 들어온 아이들의 표정에는 설렘과 긴장, 호기심, 두려움
이 가득하다. 언제 어디서나 떠들고 노는 데는 고수인 아이들도 12.5m 높이의 대형 클라이밍 짐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진 느낌이 역력하다. 암벽화를 신은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하다. 정승권씨의 강의가 시작된다. 빙벽, 암벽, 거벽, 고산, 스포츠 클라이밍 등 클라이밍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정승권씨의 카리스마는 부드럽게 빛난다. 나직한 목소리에는 특유의 미소가 묻어 있다. 3점 지지 등반 요령, 홀드 잡는 법, 발 딛는 법을 자상하게 일러준다.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마치 거벽을 오르려는 사람처럼 사뭇 진지하다.
간단한 반복 연습 후 90도의 수직 벽을 오를 순서다. 누구도 선뜻 먼저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첫 번째 도전자는 주장을 맡고 있는 황대연 어린이로 정해진다. 상기된 표정 위에 멋쩍은 웃음이 포개진다. 침착하게 완등. 이어서 모든 아이들이 맨 꼭대기의 홀드를 잡는다. 이것이 신곡초 축구부의 저력이다. 신곡초 축구부 아이들은 포지션에 관계없이 누구나 골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축구는 11명이 하는 단체 경기다. 암벽 등반은 확보자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행위다. 하지만 한손, 한발씩 움직여 등반을 완성한다. 그 하나하나의 동작은 축구로 치자면 ‘패스’와 같은 것이다. 그것의 중요성을 오늘 등반을 통해 몸이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 ▲ 왼쪽) 신곡초등학교 강영숙 교장 선생님. 오른쪽) 신곡초등학교 축구부 김상석 감독.
- 110도 정도의 역경사 벽을 오를 순서다. 이번에는 서로 먼저 하겠다고 손을 든다. 자신감을 넘어 만만히 본 아이들은 몇 동작을 이어가지 못하고 추락한다. (얘들아, 인생이 그런 거란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대롱대롱 매달리는 걸 즐긴다. (얘들아, 바로 그것이란다. 난관을 즐기고 다시 도전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너희들이 좋은 축구 선수로 성장해 나갈 길이란다.)
정승권씨는 아이들이 힘에 겨워 버둥거릴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있어. 겁먹지 말고, 너 자신을 믿어.”
체험을 마친 아이들에게 소감을 묻자, ‘무서웠어요’라는 대답과 ‘재미있었어요’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와 뒤섞인다. 상기된 표정에는 뿌듯함과 공포감이 교직된다. 한 아이에게 조금 구체적으로 속내를 물었다.
-
- ▲ 유일하게 역경사벽을 오른 김연수 어린이(골키퍼). 정승권씨가 흐믓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 ‘공부하면서 즐기는 축구!’ 2009년부터 시행하는 공부하는 학원 축구의 모토다. 학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주말 리그 제도가 도입되었다. 학기 중에는 전국 대회를 하지 않고 권역별로 8~12개 팀으로 나누어 3~6월, 9~10월 동안 매 주말 리그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단기 토너먼트에서 예선 탈락 후 보따리를 싸는 일 같은 건 없다. 이런 경기 방식에서는 5:0으로 지다가도 1골 넣고는 결승골을 넣은 것처럼 즐거워할 수 있다.
Play·Study·Enjoy
신곡초 아이들은 경기 북동 리그에서 무패로 지역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연말에 열릴 지역 리그 우승자들끼리 우열을 가리는 왕중왕전에서 우승을 하면 진정한 승자가 된다. 하지만 아니면 또 어떤가. 지금 즐겁게 공부하고 운동하면 그것이야말로 성공이 아닐까. 이를 위해 신곡초등학교 강영숙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일정 수준의 학력을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못 올라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됐고요. 하지만 끝까지 올라가고 나서는 기분이 좋았어요. 열심히 도전하면 어떤 일이든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정성욱)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아이들을 지켜본 김상석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오늘 체험을 계기로 축구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아이들에게 도전 의식을 키워 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
- ▲ 신곡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뒷줄 왼쪽부터) 정성욱, 김동현, 강의빈, 김연수, 조성욱, 한준희, 신현, 오승택, 윤현빈, 김진호, 정창용, 황대연, 배묵한, 한찬, 김현우, 김창기(모두 6학년).
- 유지하도록 정규 수업 외에도 특별 지도를 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배려는 방학 중 경기가 열리는 지역에까지 찾아가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다.
며칠 후 추석이 지나면 신곡초 아이들은 남아공에서 세계의 어린이들과 살벌한 경쟁이 아닌 우애의 한마당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것은 좀 더 큰 형태의 ‘패스’다.
얘들아, 누구나 박지성이 될 수는 없단다. 그것이 유일한 성공도 아니란다. 너희들이
즐겁게 공부하고 공을 차며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란다. 그것이 너희들의 ‘마지막 패스’여야 한단다.
월간 산/ 글 윤제학 동화작가 사진 이경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