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휘슬러 산(Whistler Mt·2182m)
휘슬러 빌리지~싱잉 패스~오보에 봉~피콜로 봉~리틀 휘슬러~라운드하우스 로지
바람 따라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길
글·사진 박소라 기자
캐나다 밴쿠버에서 북쪽으로 뻗은 99번 고속도로는 ‘시 투 스카이 하이웨이(Sea to Sky High-way)’라고 불린다. 한 쪽은 하우 해협(Howe Sound)이, 또 한 쪽으로는 크고 높은 산줄기가 올망졸망 이어져 말 그대로 ‘바다에서 하늘로 이르는 길’이다. 이 도로를 곧장 따라가면 휘슬러(Whistler)에 이르게 된다. 휘슬러라는 지명은 우리에게 스키와 평창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북미 최고의 스키장으로 손꼽히는 곳인 동시에 평창을 제치고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곳이기 때문이다.
휘슬러는 여름철에도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어 겨울철만큼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다. 특히 눈이 내리지 않는 7~9월에는 트레일이 개방돼 직접 두 발로 휘슬러 산을 오를 수 있다. 본지 캐나다 통신원 이남기씨는 휘슬러 산을 가보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에 단박 ‘뮤지컬 범프(Musical Bumps)’ 코스를 추천했다. 이 코스는 고개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노래처럼 들린다는 싱잉 패스(singing pass)에서 휘슬러 정상까지 이르는 9.5km의 산길을 가리킨다. 뮤지컬 범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코스는 악기 이름을 딴 오보에 봉(Oboe Summit)과 플루트 봉(Flute Summit), 피콜로 봉(Piccolo Summit)을 비롯해 하모니(harmony) 계곡, 멜로디(melody) 계곡 등 음악과 관련된 명칭이 많다. 마치 한 곡의 음악처럼 느껴지는 산 이름에 먼저 이끌린 기자에게 이남기씨는 “산에 오르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며 “기대해도 좋다”고 장담했다. 다만 그는 “휘슬러 빌리지에서 싱잉 패스까지 11.5km를 걸어 올라야 뮤지컬 범프 코스를 시작할 수 있다”며 “산길은 평탄하지만 휘슬러 산 정상까지 총 21km, 등반고도는 1400m로 쉽지 않은 길”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산행에는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는 권태성씨가 한국에서 여행 온 친구 김영환씨와 그의 부인 김정복씨를 이끌고 합류했다. 또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백두대간을 종주한 산력을 지닌 이남기씨의 아들 종인씨도 함께 따라 나섰다. 아침 일찍 밴쿠버를 출발한 취재팀은 차량 두 대로 나뉘어 ‘시 투 스카이 하이웨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바다와 산줄기가 양 옆으로 이어지기 시작하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올 만큼 멋진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남기씨가 앞서 운전하던 차량이 갑자기 한 바위산 아래에서 잠시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그는 “여기가 스쿼미시(Squamish)의 스타와무스 치프(Stawamus Chief])”라며 “밴쿠버에서 가장 유명한 암벽등반 대상지이니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말했다. 그는 눈앞의 수직암벽을 가리키며 “이 암벽의 높이는 450m로 약 300여개의 다양한 루트가 나 있다”고 설명했다. 1997년 주립공원으로 지정된 스타와무스 치프의 암벽은 어프로치가 짧고 편할 뿐 아니라 볼더링부터 멀티피치 등반까지 모두 가능해 전 세계 많은 클라이머들이 찾는 밴쿠버의 등반 메카라고 한다. 이렇게나 멋진 암벽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며 돌아서려니 아쉬울 따름이다.
정상까지 약 21km, 총 7~8시간 소요돼
밴쿠버를 출발한 지 2시간여, 마침내 휘슬러 빌리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산행 기점인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배낭을 꾸리는 사이, 이남기씨는 리프트 운행시간을 알아보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남은 일행들은 피부가 노출되는 부위마다 선크림을 듬뿍 바르기 시작했다. “싱잉 패스부터는 그늘이 없어 햇빛을 고스란히 받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한 이남기씨의 조언 때문이다.
잠시 후 돌아온 이씨는 “정상의 슬로프는 오후 4시 30분까지, 그 밑의 곤돌라는 주말이라 오후 6시까지 운행한다”며 “만약 정상에 늦게 도착할 경우 곤돌라를 타는 곳까지 긴 슬로프를 따라 내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여름은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하산길 8km를 단축하기 위해서는 서두르는 수밖에 없다.
만약을 대비해 베어 건을 소지한 이남기씨가 선두에 섰다. 흑곰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휘슬러와 블랙콤은 산행 도중 곰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하려면 피치먼스(Fitzsimmons) 계곡을 따라 4km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본격적인 산길에 들어서면 하늘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로 자꾸만 고개가 위로 향한다. 뮤지컬 범프가 시작되는 싱잉 패스까지 이런 길을 3시간 정도 올라야 한다. 오르내림 없이 길이 평탄하고 숲이 울창해 그늘 속에서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조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금세 지루해지는 구간이다.
앞서 걷던 이남기씨가 뒤돌아보며 “자전거가 지나갈 수 있으니 오른쪽으로 걸어라”고 지시했다. 캐나다는 우리와 달리 우측통행이기 때문이다. 휘슬러는 여름철이면 MTB를 즐기는 마니아들이 몰려드는 곳으로 산 정상까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자전거로 내려오는 이들이 많다. 리프트에 주렁주렁 자전거가 매달려 있는 진풍경도 쉽게 볼 수 있다.
하모니·플루트·오보에 계곡을 지나 멜로디 계곡을 따라 오르니 드디어 싱잉 패스다. 피치먼스 연봉과 스피어헤드 연봉(Spearhead Ranges)의 경계가 되는 이곳부터는 가리발디 주립공원에 속한다. 이남기씨는 “가리발디는 이태리 가리발디 장군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며 “가장 인기 있는 산행코스는 크게 다섯 개로 나뉘는데 그 중 하나가 싱잉 패스에서 시작되는 뮤지컬 범프”라고 설명했다.
싱잉 패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취재팀은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숲을 빠져나오니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 옆으로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이 우뚝 서 있다. 그러나 감탄하기엔 아직 이르다. 언덕에 올라서자 눈앞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초원과 푸른 하늘, 그리고 장쾌하게 늘어선 설산들. 이곳까지 올라온 발품에 비한다면 너무나 후한 풍경이다.
싱잉 패스는 여름철이면 온갖 야생화가 만발해 산상화원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아직 이르긴 했지만 산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있었다. 김정복씨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는 것 같아요”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앞으로 봉우리 3개를 더 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했지만 취재팀의 발걸음은 자꾸만 늦춰지고 있었다.

고개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노래처럼 들린다는 싱잉 패스의 초입. 여름철이면 온갖 야생화가 만발해 산상화원으로도 유명하다.
오보에 봉 이후부터 곳곳에 눈길 이어져
“이번에는 어떤 풍경이 나올까 기대 돼요.”
야트막한 언덕을 넘을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 때문인지 김정복씨는 오르막길도 전혀 힘들지 않다는 표정이다. 실제로 싱잉 패스에서 오보에 봉을 넘어 피콜로 봉까지 가는 길은 오르내리막이 적어 전혀 어렵지 않다. 산길이 거의 외길로 나 있어 길을 헤맬 염려도 없다. 하늘에서 쨍쨍 쏟아지는 땡볕도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신기하게도 땀으로 옷이 흥건히 젖을 만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캐나다의 여름은 시원하면서도 건조하기 때문에 땀이 나도 금방 증발되는 탓이다. 덕분에 그늘 없는 산길이 길게 이어져도 쉽게 지치지 않는 느낌이다.
오보에 봉을 넘어서면 이후부터 곳곳에 눈이 쌓여있는 구간을 지나게 된다. 김정복씨는 한여름 만난 흰 눈이 반가운지 “7월의 크리스마스 같다”며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도 힘든 기색 없이 연신 즐거운 표정이다.
플루트 봉에 올라서니 발 아래로 치카무스(Cheakamus) 호수가 에메랄드빛을 발하고 바로 눈앞에는 산 정상부의 뾰족한 검은 바위가 이색적인 블랙 터스크(Black Tusk·2315m)가 보인다. 이남기씨는 “블랙 더스크는 화산활동에 의해 생긴 산으로 정상부의 뾰족한 바위는 용암이 굳어 생긴 것”이라며 “눈에 보이는 모습처럼 산 이름은 ‘검은 엄니’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 검은 바위는 휘슬러 산 정상으로 가는 길 내내 볼 수 있다.
그때 어디선가 “휘익- 휘익-”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언뜻 ‘바람소리가 정말로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갈 만큼,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잘 어울리는 밝고 경쾌한 소리였다. 그러나 실상은 이 산에 많이 서식한다는 다람쥣과의 일종인 마멋(marmot)이 우는 소리였다. 이남기씨는 “사람이 지나갈 때면 다른 동족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신호를 보내는 소리”라며 “마치 휘슬을 부는 것 같은 마멋의 울음소리 때문에 산 이름도 휘슬러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휘슬러는 1860년대 영국 해군이 이 일대를 탐사하며 처음 발견한 산으로, 원래는 ‘런던(Lond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플루트 봉을 지나 휘슬러 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스패츠와 방수 등산화가 필요할 만큼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눈이 단단하게 굳어진데다 많게는 허벅지까지 쌓인 곳도 있어 좀처럼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 미처 선글라스를 준비해오지 못한 탓에 하얀 눈에 반사돼 더욱 눈부신 햇빛에 맞서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 어느 새 바지와 등산화는 푹 젖어 버렸고 발걸음도 물 먹은 솜처럼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티 하우스가 있는 리틀 휘슬러(Little Whistler)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휘슬러 산 정상으로 가려면 왼쪽 방향으로 약 30분쯤 더 올라야 한다. 그러나 이미 오후 4시가 넘은 탓에 정상에 오르면 슬로프 운행이 중단되므로 다시 이곳까지 되돌아와야 할 상황이었다. 취재팀은 의논 끝에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이곳에서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멀리 철탑이 세워진 휘슬러 정상을 바라보며 이남기씨는 “정상에 오르면 2010년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이눅슈크(Inukshuk)란 돌 조형물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마침 취재팀 앞에 조그만 동물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로만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던 마멋이었다. 마치 하산하려는 취재팀에게 이별인사라도 건네듯 잠시 눈앞에 머물던 마멋은 쪼르르 눈구덩이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비록 이눅슈크는 보지 못했지만 휘슬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마멋을 본 것으로 충분히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리틀 휘슬러에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눈이 양 옆으로 쌓인 슬로프를 따라 40분 정도 내려서면 라운드하우스 로지(Roundhouse Lodge)에서 곤돌라를 탈 수 있다. 정상에서 리프트를 타면 이곳에서 다시 곤돌라로 갈아타야 한다. 내려갈 때는 모두 무료로 탈 수 있다. 워낙 산이 높고 규모가 큰 탓에 곤돌라를 타고 휘슬러 빌리지까지 내려서는데도 약 20분이 걸린다. 고작해야 2~3분 남짓 탈 수 있는 한국의 로프웨이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뒤로 휘슬러가 점점 멀어진다. 2010년에는 TV를 통해 자주 만나게 될 산, 그때까지 모두 굿 바이…. m

블랙 더스크를 조망 중인 취재팀. 블랙 더스크는 화산활동에 의해 생긴 산으로 정상의 뾰족한 바위 때문에 ‘검은 엄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