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惠)다. 앞으로도 촌(村)에 사는 사람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열심히 이 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묘사하리라'하는 마음에서 호를 혜촌(惠村)이라고 했다 는 풍속화가이자 역사화가인 김학수 화백(73)의 화실은 강남 논현동에 있다. 77년 지금의 강남구청 앞 주택가에 이사온 김 화백의 단층 양옥엔 화실이 따로 있을리 없다. 김 화백은 6?25이후 40여년 동안 이북에 두고온 처와 4남매를 못잊어 혼자 살고 있으며 오직 그림만 을 제작하고 있으니 집 전체가 ?미의 산실?인 셈이다. 작업은 주로 안방에서 하고 있다. 안방에는 여느 가정의 방처럼 어린아이의 사진에서부터 가족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모두 가 혜촌이 자식처럼 길러온 제자들, 그리고 그 손자들인 셈이다. 김 화백은 북에 두고온 부 인과의 약속과 아버지 없는 4남매를 생각하며 독신으로 지내오면서 30명의 고아 아닌 고아 들을 훌륭하게 길러 낸 것으로 잘 알려졌다. 30명중 6명만 빼고 대학까지 공부시켰고 모두 성가해 나갔다. 그 중에는 목사가 된 사람만도 이승만씨를 비롯 10명이나 되고 박사도 5명. 모두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됐다. 이들의 모임이 바로 '혜촌회'다. 혜촌회도 벌써 30회의 생일을 맞았으며 식구가 50여명에 이르고 미국에도 십여가정이 있다. 88년 혜촌이 고희기 념전을 동방화랑에서 가졌을 때 모두들 참가,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런 주위의 사랑, 그림 그리는 일, 또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 이 세가지 모두 즐거운 일이라 해서 응접 실 입구에 삼락당(三樂堂)이라는 옥호를 걸어놓기도 했다. 이렇듯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마 음가짐으로 일관하고 있는 김 화백의 건강비결은 아침에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다.산책이 끝나면 가정부가 차려주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동양난과 서양난을 비롯 매화, 석류등과 활짝 핀 동백꽃을 잠시 돌보고 바로 집념의 30여년이 걸린 <한강도>에 매달린다. 강원도 오대산을 출발해서 물을 따라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굽이 돌아서 서울, 김포를 거쳤다가 강화 앞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한강의 모습을 담는 작업이다. 이 <한강도>는 폭이 45㎝에 길이가 4백m나 되는 최대형 풍속화. 4백m를 다 연결할 수 없어서 하나 하나 따로 분리해 대작이 될 지역별로 분리, 20m 내외의 두루마리 20개가 한 작품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지난 58년 병상에서였죠. 틈틈이 한강유역을 답사하고 화폭에 옮겨 67년 개인전 때 길이 25m의 <양평유역>과 <단양유역>등 두점을 내놓았는데 어쩐지 미진한 생각이 들어 한강 1천 3백리를 담기로 결심하고 시작한 것이 73년이었습니다.' 김 화백은 그 때만해도 젊었기에, 한강을 빠짐없이 스케치해 완성해놨기 때문에 지금의 작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선, 영월, 여주, 양평, 김포 일대의 거의 스케치했다. 그러나 김 화백이 그리는 한강은 댐과 호수가 들어선 현재의 한강이 아니라 1백년쯤 거슬러 올라간 옛 시절의 한강이다. 그리고 강안에 펼쳐지는 계절도 오대산을 출발할 때는 잔설이 있는 이른 봄인가하면 점점 흘러오면서 여름ㆍ가을ㆍ겨울로 이어지다가 강화앞바다에 오면 이듬해 한여름으로 구성된 한강의 사계절이 모두 재현된다. 이제 2백여m 완성했으니까 앞으로 1~2년, 채색까지 3년이면 완성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동안 그려온 역사화만도 지난해 완성을 본 <세종대왕 일대기>를 비롯, 인물 1천여명이 그려진 <시장도>, 같은 규모의 <능행동>, 한국기독교선교 1백주년과 연세대 창립 1백주년을 기념해 <예수의 일생>을 그린 성화 36점 (연세대에 기증)등 수많은 역사화와 풍속화를 남겼다. 그의 화실은 이같은 역사ㆍ풍속화를 그리기 위해 수집된 책들과 자료로 가득찼다. 여타의 화가들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참고자료로서의 책들이라면 김 화백이 수집한 책들은 바로 작품을 엮어내는 직접자료인 셈이다.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증이 없는 풍속화란, 하나의 상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김 화백은 너무 꼼꼼하고 꼬장꼬장하다는 이유 때문에 작품의 회화성이 반감된다는 평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풍속화에는 단순 한 재현이 아니라 우리들 삶에 대한 훈훈한 인정이 곳곳에 내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조 혜원 신윤복이 기생들을 소재로 한 상류사회의 풍류에만 관심을 가졌는가 하면 단원 김홍도의 풍속은 일하는 것에 집착되었음을 볼 때. 김 화백의 풍속화는 우리들 삶 전체를 조명하고 그 속에 인정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9년 평양출생 이당 김은호와 소정 변관식 선생을 사사했으며, 미국?일본 등지서 개인전을 가져 호평을 받았다. 후소회와 백양회 회원이기도 했던 김 화백은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서 기독교 미술인협회전 등에 출품.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