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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생사의 절망 끝에도 관음은 계셨습니다/신화규(가정주부)
출처: 월간 불광(www.bulkwang.org)
내소사에 들어서는 순간,
천여 년을 거슬러 올라온 것처럼 세상살이의 시끄러움은 없다.
일주문을 지남과 동시에 날려 보내지 않았나 싶다.
이 곳의 모든 것들은 기본이 몇 백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 않고 정다운 느낌,
오래 전에 와 봤던 곳에 다시 온 느낌이다.
혹시 전생에 이 곳에서 수행하는 복을 누리지는 않았었는지….
유명한 대웅전의 문살무늬,
천년된 나무의 웅장함,
그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하고 좋은 느낌,
이 자리가 바로 내 자리가 아닐까 싶다.
도량석 도시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잠을 깨어
상쾌한 공기와 천년가람의 숨결을 느끼며 들어선
빛바랜 대웅전의 새벽예불.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 나선 여행길이다.
1.극심한 두통…알고보니 뇌종양
포교사가 된 지 1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공부에
사람들 앞에서 포교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끝이 없기만 한 부처님 공부,
하지만 운명적인 이 길이기에 나는 기꺼이
이 일을 천직으로 알고 공부하고 싶다.
관세음보살님께서 다시 주신 나머지 인생은 회향하는 의미로
한 알의 의미 있는 씨앗의 역할을 하고 싶다.
6년 전 전철역 계단에서 갑자기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려
굴러 떨어진 후로 매일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심해서 한 움큼의 진통제로 생활하다가 그것도 안 되자
새벽이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술을 마시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병명을 몰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MRI를 찍고서야 뇌종양이라는 병으로 판명이 되었다.
급히 수술하지 않으면 혹이 너무 커서 죽는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 수술 한 번 하나요? 아니면 두 번 하나요?”
뇌수술은 성공해도 기본이 두 번이고 두 번 하고도 결국은
죽은 가까운 친구의 남편을 지켜보았었기 때문에
두 번의 수술이라면 하지 않고 그냥 전국에 있는
기도처에서 원 없이 기도나 하다 죽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당시의 상황은 혹이 너무 커서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모든 기능이 정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을 수도 없고 대소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됐었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도, 집안일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뒤집어 입거나 거꾸로 입어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단이 안 될 정도로 심한 상태였다.
그 때의 심정으로는 그냥 정확한 병명을 알았으니 됐고,
그냥 그대로 죽어도 이 고통만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이곳에서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노느니 염불한다고 108염주를 손에 들고 돌리기 시작했다.
‘관세음보살님 살려 주세요’라는 말도
‘아이들을 부탁해요’라는 원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무심의 마음으로 ‘저는 인연 따라 따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하는 마음으로 염주를 계속 돌렸다.
그 순간 가슴 속으로 치닫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가슴가득 차지한 그 무엇! 그 후로는 두려움도 고통도 없어졌다.
막연한 두려움에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가족들이 계속 설득하고 있던 중이었다.
제일 두려운 것은 수술 후 얼마일지 모르는 막연한 시간 동안
여러모로 나로 인해 고통 받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그냥 이대로 조용히 눈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면'하는 생각이었다.
염주를 돌리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관세음보살님께서 금빛 찬란하게 나타나셔서
땀을 흘리며 더워서 쩔쩔매는 나에게 시원한 냉기를 주시며,
“덥지? 내가 시원하게 해줄게 걱정하지 마라.”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 후론 아무 두려움이 없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관음보살님, 뜻대로 하세요”
아이들 선생님께도 전화해서 숙제나 준비물이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엄마가 없어서 그러니 이해 해달라는 부탁까지 해놓고
이것저것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빈 자리를
최대한 줄이려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위해 머리를 깎았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두상이 이쁘냐, 미우냐?”고 농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다니던 절의 스님과 신도들이 오셔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할지 몰라
쩔쩔매실 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살 거고
다시 살아나면 부처님 일을 할 거예요.”하고 말씀드렸더니,
“보살님은 앞으로 공부 많이 하실 거예요.”하신다.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그 때는 몰랐었다.
“신화규씨 정신이 드세요.
제 말을 알아 들으시겠으면 눈을 떠 보세요.”
그 말을 듣고 눈을 떴다.
여러 줄로 묶여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서있는 많은 사람들,
담당의사들과 간호사, 가족들이었다.
눈을 뜬 나에게 의사선생님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하는 판단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보았다.
‘이름이 뭐라든가,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자든가,
왼발을 들어 보라든가’라는 물음에 평상시와 같이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하고 하라는 대로 정확하게 하자
모두들 살았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그 때까지는 그냥 원래 예상 했던 대로 6시간의 수술 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곳은 신경외과 중환자실이었고 나는 20시간의 생사를 가르는
대수술 끝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로는 예상된 6시간이 지나고 12시간이 지나도
수술이 끝났다는 불은 안 꺼지고 아침 8시에
첫 번째로 들어간 사람이 저녁때가 되도 소식이 없더니
새벽이 되자 담당의사가 가족들을 소집해놓고
지혈이 안 되니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달리 방법이 없어 자기는 부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안 믿고 기도 할 데도 없어서 나에게,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할 수 있으니
당신의 의지로 꼭 일어나”라고 기도했단다.
2.수술대 위의 기적
수혈이 40봉 이상은 위험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서
계속 70봉 정도의 수혈을 하고 있을 때 지혈이 되었고,
의사선생님은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서 기다렸을 뿐
말로만 듣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놀라워하셨다.
내가 부처님을 믿는 것을 모르니까 남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게 정말 있나 보다고 해서, 나는 조용히 자신 있게
“이건 신의 기적이 아니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천주교를 믿는 시어머님께도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라고….
3.관세음보살님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
나는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뇌수술 후의 중환자실은 마치 아비지옥을 연상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의가 혼수상태의 환자들로 소리소리 지르고 심지어는 욕을 하고
몸부림 칠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의가 진통제로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다.
수술실에서 옮겨진 뒤로 진통제 한 대 맞지 않고
삼매에 든 것 같은 편안한 마음과 표정으로 있었다.
4.아비규환의 중환자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은 시작됐고 그 곳에서
산소호흡기와 여러 개의 줄로 이어진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새벽예불과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하루에 적어도 두 명씩은 죽어나가고,
새로 수술하고 와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몇 달째 정신이 안 들어 울면서 하소연하는 보호자들,
나는 지옥을 미리 와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도 금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 법만 미리 알았다면 이토록 고통도 느끼지 않고
편안하고 환희심 속에서 병원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신경외과의 중환자실은 24시간 긴장상태이기 때문에
불을 끄지 않는다. 달리 잠자는 시간이 없다.
잠을 잘 수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아 새벽 4시쯤 되면
물을 놓고 기억나는 대로 예불문과 천수경 반야심경을 하고
관음정근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
간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혼자 모든 걸 해내려고 애썼다.
수술결과는 아무 것도 보장 받을 수 없었다.
팔다리의 마비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될지 수술 후에도
중풍환자처럼 팔다리 마비상태로 그냥 지내야 될지
어떤 후유증이 올지 다시 재수술을 해야 할지 모든 게 미지수였다.
하지만 나는 매일 매일이 즐겁고 감사했다.
며칠 만에 멀겋게 나오는 미음에도 감사하고
친절한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면회 와서 걱정해주는 가족 친구들 남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신 관세음보살님 모두가 감사했다.
아직은 어린 둘째딸이 어린 나이 때문에 면회가 되지 않자
울다, 울다 그냥 갔다고 친정엄마가 전했다.
갑자기 엄마가 걷지도 못하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엄마 옆에서 심부름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너무나 급하다고 해서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얼굴도 못 보고 당부도 못 하고 갑자기 와버렸다.
아이들 때문에 나는 내 힘과 의지로 일주일 만에 나가리라 작정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기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했다.
그 결과 너무도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는 여러 개의 침대가 굉장히 넓게 분포돼 있는데,
나의 가장 가까운 쪽의 침대에 있는 50대 초반 정도의
아주머니 환자는 8개월째 혼수상태로 있었다.
하루 종일 엄마를 찾으며 부른다.
아마 무의식 중에도 엄마만 있으면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리라는 생각에서인가 보다.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산소호흡기와 뇌로 연결된 여러 줄 중 하나라도 빠지면
위험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온몸을 꽁꽁 묶어 놨다.
그러니 면회시간에 온 열 몇 살짜리 아들과 스물이 갓 넘은 듯한 딸은
엄마를 붙들고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라며 울다, 울다 간다.
그 어린것들이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 못해
의사선생님께 그냥 퇴원 시켜달라고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울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했다.
‘관세음보살님 차라리 저분 대신에 저를 데려가세요.
저는 부처님 법 속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고 또 죽는다 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부처님 법 속에서 살 테니까
저분 대신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순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그 아주머니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워서 꼼짝할 수는 없으니 천장을 본 채로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 제 말 잘 들으세요.
제 말 잘 들으면 엄마한테 가실 수 있어요.
지금처럼 밥도 안 드시고 약도 안 드시고
간호사선생님 말씀 안 들으시면 절대로 낫지 않아서
엄마한테 갈 수 없으니 꼭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50대 무의식 환자의 “엄마, 엄마”
그 아주머니께서 듣든지 못 듣든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아주머니께서 그 때부터
식사도 하고 약도 고분고분 드신다는 것이었다.
그 후 갑자기 일반 병실로 옮겨도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중환자실에서 6일 만에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 후 그 아주머니의 상태를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잘 치료가 됐으리라고 생각한다.
일반병실에 와서 재수술 들어가며 불안해하는 여대생에게
팔에 있던 합장주를 껴주며 기도해 주었고,
치매로 불안해하는 할머니께는 10년간 지닌 108염주를 쥐어주며
돌리는 법을 알려드렸을 때 편안해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런 인연들을 맺게 해주신 것에 대해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하지만 나의 너무나 부족한 공부를 절감하였고
여기서 퇴원하면 부처님 공부를 제대로 해보리라 결심했다.
그 이후로 2년간의 불교대학공부,
그 후에 다시 승가대학부설 김포불교대학에 재입학하여 포교사가 되었다.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며 지금은 제대로 된
포교사가 되어보려고 연수와 기도, 군법회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그 때 만난 관세음보살님은 지금도 매월 초하룻날이면
홍련암의 파도소리에 어우러지는 비구니스님의 간절한
염불소리와 함께 만난다.
병실에서 혼자 물 한 잔을 놓고 올리던 새벽예불을 이제
홍련암을 비롯해 직지사, 법주사 등 전국에 있는 모든 절에서
삼라만상을 깨우는 범종소리, 목탁소리와 함께 올리고 있다.
5.불교대학 입학…보살행 서원
언제까지 이 행복한 시간이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시간동안 여러 방편으로 부처님법을 펴고 싶어
방송대 국문과에도 입학해서 하루를 48시간으로 쓰고 있다.
나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은 건강을 염려하지만,
아직은 재발의 위험도 없이,
물론 약간의 후유증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그 또한
기도정진을 게을리 말라는 뜻으로 알고 함께하련다.
어디 어느 곳을 가나 부처님 법음이 가득한 이 도리를
보다 많은 이들이 깨달아‘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진정한 불자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발원해본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조금은 절절히 느껴
형식적인 위로가 아닌 부처님 마음의 끝자락이라도
흉내 내며 가슴 아파할 수 있게 됐다.
이제 10월 첫째 주에는 매월 나가는 군법회의 창립법회행사,
둘째 주의 해인사 보살계 행사,
셋째 주의 적멸보궁 철야기도,
넷째 주의 선운사 문학기행 등 바쁜 일정이지만
만나는 사람 모두가 한 분 한 분 부처님이라 생각하며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린다.
단풍이 지고 있는 초겨울에 나는 다시 또
새로운 부처님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월간불광(www.bulkwang.org) 창간 30주년 기념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12.
오늘 또 다시 한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을 체험하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지난 2년간 거의 매일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할 때마다 제가 아는 언니 기도를 항상 같이 했었습니다...
9년전 직장에서 알게 된 언니인데 알면 알 수록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인품이 착해서 항상 마음이 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도 하지 않고, 전하는 말은 물론이요 거짓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나 한번도 저에게 교회가라고 강요하지 않고 제 종교인 불교를 인정해 주는 그런 언니입니다.
그런데 ?언니가 반려자 인연을 찾지 못해 항상 힘들어 하고 외로워 하던 중 재 작년 하나뿐인 어머니 마져 돌아가시니 앞이 망막하고 힘들었던지 샤워하던 중 본인의 배를 칼로 자해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가슴이 미어지던지....외국에 있어서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는데..그로부터 꼭 언니가 원하는 베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 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언니는 남자들을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하나같이 언니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어떤 사람은 언니돈 500 만원도 떼먹고 달아나더군요...그래도 전 언니에게 매일 말했습니다..내가 언니 기도 매일 하니까 언젠가는 내 기도 들어주실꺼야..언니는 말이라도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몇달전에 제가 그 언니 꿈을 꿨는데 언니가 꿈에서 너무나 서럽게 울면서 그 남자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냐면서 저에게 하소연을 하더라구요..그래서 바로 한국에 있는 언니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언니 지금 만나는 남자 있어? 있으면 그 남자 만나지마....언니가 또 상처 받을꺼 같애...그랬더니 언니는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그리도 5일이 지났습니다. 그 언니한테 이 메일이 왔는데 내용이 심상치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언니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더라고요....말을 듣고 보니 기도 안차더라고요,...그리곤 놀랐습니다..이렇게 꿈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구나...
그리곤 한동안 연락을 안하다가 방금전 언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는데...언니가 결혼을 한다는 겁니다...10월 정도인데 날짜는 아직 안 잡았고 결혼하자마자 신랑 따라서 일본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서류절차를 밟고 있다고 하더라고요...거기다가 언니가 임신 3개월 이라는 더 좋은 소식까지....언니가 나이가 마흔이 넘었기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고 아이도 포기 했었는데..게다가 남편될 사람이 아기를 갖기 아주 힘든 사람이라고 합니다...(무정자증은 아닌데 애들이 헤엄을 잘 못친다나?? 말이 좀 그렇긴 한데..)
두 사람다 너무 좋아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간다고 하더라고요..너무너무 축하한다고 말했습니다..그리고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을 계속 되뇌었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지난 2년동안 취직이 되질 않아서 기도하는 것에 많은 회의를 느끼지 시작했는데 다시한번 깨닫게 해 주신것 같습니다..이제 곧 제 기도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불자님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원각행 합장.
출처: 나무아미타불 카페 원각행님 글 (cafe.daum.net/amtb)
13.
관세음보살님과의 인연 | ||||
나의 인연 이야기
묘정스님 (통영 천음사 주지) 출처: 월간 불광 (www.bulkwang. org) 2004년 9월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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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으로 흔히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인연설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만나게 되었고 불법에 심취되어 결국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cafe.daum.net/buruna21 온누리님 글 관세음보살을 꿈속에서 친견하다. 태고종 총무원의 부원장을 맡아 종단의 재정 안정에 힘쓰고 있는 혜공 스님, 항상 온화하고 자상하게 주위 사람들을 살피고 배려하기 때문에 늘상 찾는 사람들로 바쁘다. 일에 있어서는 원칙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을 발휘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합리적인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태고종 종정을 역임하신 백암 스님이 속가의 아버지이자 불가의 스승이다. 승단 분규를 겪던 시절, 백암 스님은 대구로 내려와 살다가 동화사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팔공산을 다 뒤져서 갓바위 부처님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당시의 갓바위 부처님은 소나무와 칡넝쿨이 우거진 속에 숨어(?) 있었다. 때문에 수행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불기에 담아서 올라가면 다 식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주변을 정리하여 땅을 일부 파내고 움막을 지어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혜공 스님은 연세가 드신 백암 스님보다는 자신이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래 절에는 내려오지도 않고 열심히 기도 정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뒤가 묵직하고 힘이 빠지더니 하혈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경북대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였더니 직장암이라는 것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다른 병원을 몇 군데 더 가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요즘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치료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암에 걸렸다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천형으로 여기던 터라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터여서 경북대학교 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았다.
수술하기 전날 백암 스님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수술해서 나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하노? 신도들에게는 늘 부처님께 매달려 기도하면 소원성취한다고 말해 놓고……”
스님의 뜻이 무엇인지 읽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그러한 마음이 있어서 대답했다. “저 수술 안 받으렵니다. 절에서 기도하겠습니다. 다만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우리 종단의 명찰인 선암사에 가서 기도 정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북대병원에 가서 포기각서를 쓰고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진 선암사 원통전으로 향했다. 당시 선암사 주지 용곡 스님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원통전에서의 기도를 허락 받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죽음을 무릅쓴 기도에 들어갔다. 빗자루와 깨끗한 걸레를 여러 개 준비해서 법당 바닥을 열심히 쓸고 닦았다. 어리석음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슈리판타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믿고 따른 것처럼 구석구석 닦고 또 닦았다.
별로 크지도 않은 법당이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상태여서 닦기만도 힘이 들었다. 법당을 닦고 나면 간절한 마음으로 관음경을 읽은 뒤에 관세음보살을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참회 정진을 하였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기도의 공덕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하였으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물러나지 않고 정진했다. 그러나 그것도 보름이 지나면서 아주 허망하게 느껴졌다. 만일 이 기도가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엎드렸던 몸이 다시 일어나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엎드려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참을 그러고 났더니 갑자기 그렇게 미워하며 죽이고 싶었던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
은사 스님과 자기를 쫓아내기 위해서 무리를 지어 찾아와서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욕설을 하면서 몽둥이질까지 하였다. 자신과 부딪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연세가 드신 은사 스님마저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필 그 순간에 생각이 났고, 묘하게도 그에게 찾아가서 용서하고 미워한 마음을 사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리저리 그가 살고 있을 곳들을 마음속으로 찾아내어 만나서는 무릎 꿇고 빌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오히려 계면쩍어 하면서 자기들이 한 일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내비쳤다. 그렇게 그 사람을 용서하고 나니 다시 기도하는데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잠자고 예불하고 공양하고 뒷간 가는 시간만 빼 놓고는 쉬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진하는 모습을 본 용곡 스님이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관세음보살님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혜공 사주寺主의 기도를 들어주시것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칠일 기도를 마치기 전날 밤 4분정진의 마지막 기도를 하고 나서 몸을 씻고 잠이 들었는데 신기한 꿈을 꾸었다. 공양 시간이 되어 대웅전 왼쪽 옆에 있는 설선당說禪堂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사찰에는 발우공양을 하므로 대중들이 청산, 백운으로 나뉘어 방안에 빙 둘러 앉았다. 수십 명의 대중이 발우를 펴고 공양을 하는데 갑자기 어간문이 활짝 열리더니 큰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다들 놀라서 쳐다보는데 자신은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주지 스님을 지나쳐 혜공 스님에게로 가서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제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하면서 품속에서 무슨 서류 봉투를 꺼내서 주었다.
관음경에 보면, 관세음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해 32응신을 나투실 때 국왕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음 날부터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고, 며칠 뒤 경북대병원에서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주치의가 깜짝 놀랐다. 암 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기도를 통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온몸으로 입은 것이다. 스님은 현재 백암 스님의 은법을 이어 관암사를 대구의 전법 사찰로 잘 지켜가고 있다. “웬만한 것은 다 양보하는 것이 좋아. 정말 바쁘게 해야 할 일은 마음공부야.” 하며 웃는 그는 정말 닮고 싶은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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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관음가피지묘력으로 강릉 성원사 대작불사 성취
<영험>불사금 든 손가방 휴게소에 ‘깜빡’
사람 눈엔 쓰레기봉지로…2시간만에 찾아
강원도 오대산 자락에 대가람 성원사를 개창하고, 선원을 열어 참선수행지도를 하고 있는 주경 스님이 경험한 관세음보살 가피 이야기다.
생전 생불로 추앙받았던 (강)청화 큰스님의 제자 주경 스님은 홍련암에서 기도를 하던 시절부터 남다른 기도정진력으로 정평이 난 스님이었다. 스님의 기도모습에 감동한 재가불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님을 부처님처럼 존경하며 따르는 것을 보면 스님의 여법한 기도정진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주경 스님은 백두대간을 따라 새로운 수행처를 물색하던 중 지금의 성원사 터를 발견하고 대작불사의 원력을 세웠다.
스님의 원력과 정진력을 알고 있던 여러 불자들의 도움으로 스님은 불사를 시작할 수 있는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상도 어느 지역에서 거금을 받아 손가방에 넣고 직접 운전을 하면서 강릉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소중한 불사금이었기에 손가방을 늘 손에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한 휴게실에 들렀다. 그런데, 그만 화장실 옷걸이에 손가방을 걸어놓은 것을 까맣게 잊은 채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강릉방향으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한 두 시간쯤 운전을 했을까. 강릉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스님은 요기를 하기 위해 휴게소를 찾아, 국수 한 그릇을 먹고는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찾다가 그만 손가방을 먼저 들렀던 휴게소 화장실 벽에 걸어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혼비백산! 스님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은 두근대고 조바심이 나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던 스님은 차를 돌려 먼저 들렀던 휴게소를 향했다.
가속페달을 밟으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입에서는 저절로 관세음보살 정근이 터져나왔다. 늘 정근을 하던 터라 관세음보살 염불을 했겠지만, 스님은 이때처럼 간절하게 염불정근을 했던 기억이 드물었다고 술회했다.
정신없이 달려가 화장실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침 청소를 하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스님은 숨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여기 화장실 옷걸이에 걸어놓은 손가방을 보지 못했소?”
“아, 손가방은 보지 못했고, 누가 비닐 쓰레기봉지를 걸어 놓았던데 그것은 그 안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비닐봉지요? 아니, 손가방이 아니고요?”
“네, 스님. 비닐봉지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누가 쓰레기봉지를 저기에다 걸어놓았나 싶어 이제 막 치워버리려던 참이었어요.”
주경 스님은 부리나케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옷걸이를 살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손가방이 걸어놓을 때의 모습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가방을 내려 급하게 열어보았다. 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스님은 땅이 꺼지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방이 그대로 걸려 있군요. 고맙소. 아저씨.”
주경 스님은 청소부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돈 몇 만원을 꺼내 감사의 표시로 전했다. 생각지도 않은 돈을 받은 아저씨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돈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스님. 그게 손가방이었습니까? 이상하네. 금새 보았을 때도 분명히 비닐봉지였는데. 내가 잘못보지는 않았을 것인데. 참 희한한 일입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아저씨. 어쨌든 고맙습니다.”
주경 스님은 청소부 아저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스님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스님은 이 모든 것이 관세음보살님께서 가피를 내린 것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그 화장실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에게도 이 손가방은 가방이 아닌 쓰레기를 담아놓은 비닐봉지로 보였다는 말이 아닌가. 가방으로 보였다면 손을 탔을 것이 분명할 터. 스님은 부지불식간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관세음보살님께서 가피지묘력으로 사람들의 눈에 이 손가방을 쓰레기 봉지로 보이게 위신력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일이 있은 후 주경 스님은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대작불사를 해낼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호가 함께하는 불사인데, 두려울 것이 없었다.
맨손으로 강원도 산골 산꼭대기에 오늘날과 같은 큰 도량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경 스님의 깊은 신심과 초인적인 기도정진력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내려주신 가피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경 스님은 지금도 도량을 돌아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곤 한다. 간절한 기도가 있다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는 주경 스님. 스님은 어려울 때일수록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불자들에게 당부했다.
출처: www.mediabuddha .net
16.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혜인 스님
기도는 절하면 참회기도라 하고 관음보살을 부르면 관음기도,
지장보살을 부르면 지장기도 입니다.
또는 성현의 명호나 경을 쓰면 사경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해 무념무상의 상태로 계속 정진하다보면 탁한물이
고요해져 삼라만상이 비춰지듯 기도로 인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관되게 계속해야 힘이 생기며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가피력을 얻게 됩니다.
가피력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몽중가피는 꿈 가운데 어떠한 선몽을 얻는 것이고,
명훈가피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점점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증가피는 갑작스런 통찰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중요한것으로 저도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습니다.
저는 전생에 술을 많이 마셨나봅니다.
그 과보로 어려서 학교다닐때 항상 30등 미만이었습니다.
절에 들어와서도 다른 도반하고 차이가 있었습니다.
천수경을 외워야하는데 외워지지가 않는것입니다.
도량송을 하다가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면 끝이 안나와요.
비슷한 말이 많다보니 끝없이 반복하는것입니다.
그래서 불공이 들어오면 먼저 신도에게 천수경을 할줄아냐고 물었습니다.
천수경을 모르는 보살들 앞에서는 경을 서로 모르니
요령껏 불공을 했지만 경을 외우는 보살들은 겁이 난것이지요.
그래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천수경에보면 …만월보살 마하살 수월보살 마하살 군다리보살마하살…
이란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보살이름이 생각이 나지않아 …
목탁보살 마하살 요령보살마하살….했습니다.
그런데도 보살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별탈없이 불공을 잘했습니다.
제주도 양진사 주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양진선원을 건립하고 주지로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피력을 얻지 못해 사람 다섯명만 모여도
가슴이 달달달 떨리고 얼굴이 발개져버리고
앞이 탁막혀 말을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그래도 낙성식이 두달정도남았는데 인사말은 한마디 해야하겠고
걱정이었습니다. 미리 준비를 해야하겠다하고
문자하나를 찾아 외운것이 원근각처였습니다.
멀고 가까운곳에서 오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이지요.
이말을 중심으로 말을 풀어야겠다 하고서 낙성식날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낙성식이 시작되고 사람들 앞에 서고보니
아니나다를까 앞이 탁 막혀버려요. 가슴은 떨리는 중에
다행히 미리 외웠던 원근각처라는 말은 생각이 났습니다.
원근각처에서 많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원근각처에서…., 원근각처에서….
법회가 끝나고 어느 비구니스님이 인사말을 하는동안 원근각처를
8번 했다며 그말밖에는 할말이 그렇게도 없었냐며 웃었습니다.
이렇게 사람 다섯사람만 있어도 떨었던 이가
여기에 있는 혜인스님이었습니다.
또한 복이 없고 덕이 없어 출가한지 15년이 되어도
양말하나 러닝셔츠하나 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구에서 해인사를 가는데 차비가 없어 많은 괄세도 받았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루는 원주에서 강릉 보현사를 가는데 차비가 53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진 것은 130원 밖에 없어 안내양에게 사정을 말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있던 운전기사가
130원 거리만큼만 태워주고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중간에 내려 인근의 비구니스님 절에가서 사람들앞에서
노래하듯 초파일 연등만드는 비구니 스님 앞에서
초발심자경문을 외우고 차비를 얻어 보현사를 갔습니다.
해인사 강원에 있을때도 남들은 신도들이나 도반들이 책을 사주는데
저는 복이 없어 책한권 사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쩔수 없이 먼저 출가한 누이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
다른비구니 스님이 쓰던 책으로 강원공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머리가 우둔하고 잠이 많고 가슴이 떨리고
복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저는 관세음보살 주력염불을 하고
해인사 장경각에서 부처님전에 하루 5천배씩
이백일 동안 백만배를 하니 구름이 걷히니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거울의 먼지를 닦으니
환한 모습이 보이듯이 자신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의 가피력을 받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후로 지금은 수만명을 앞에 두고 법문을 해도 떨리는 것이 없고
마음먹었다 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하겠다고 마음먹어서 안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주도 약천사 대웅전을 짓는데 돈이 백억원 이상이 들어갔습니다.
공부하는 승려가 돈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한후 마음먹는대로 일이 되기에 부처님집을
최고로 지어야겠다 생각하고 시작한것입니다.
이제 제주도 중문단지에는 동양최대의 대웅전이
웅장하게 자리해 있습니다. 무사히 불사를 회향한 것입니다.
또한 백만배 절을 했으니 백만이란 숫자와 인연이 있어
백만평의 땅에 부처님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충북단양에 철쭉 백만그루를 심고있습니다.
현재 80만평을 이루었습니다.
사주와 관상이 나쁘더라도 운명적으로 이렇게 밖에 살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관상학적 이야기입니다.
길이 아니라도 불도저가 지나가면 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불교는 내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과 팔자는 바뀔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마음을 찾는 종교요,마음을 보는 종교요,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달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한마음이 청정하면 일신이 청정하고
일신이 청정하면 중생이 모두 청정해집니다.
마음이 달라지면 모습이 달라지고 관상이 바뀌면
내 운명과 팔자가 바뀝니다.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니면 저는 오늘의 여기에 있을수 없습니다.
소나무를 의지해 칡넝굴이 소나무를 타고 끝까지 올라갈수 있지만
잔디밭에 깔린풀은 석자도 올라가지 못합니다.
부처님과 부처님말씀 그리고 가피력에 의지하면
얼마든지 행운과 훌륭한 운명을 개척할수있는것입니다.
지난 과거를 회고해 보면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그리고 남 법문하던 것을 부러워하던 시절,
나도 언젠가는 내생에 가서라도 저런사람이 되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기도를 하고나니 내생까지 갈것도 없더군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늘의 법회를 계기로 해서 기도 정진하는데 게으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세음 보살기도에 대해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보면
「무진의 보살은 잘 들어라. 관세음 보살을 부르는 자는
물에 들어가도 빠져죽지 않을 것이며,
불에 들어가도 타죽지 않을 것이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악한자에게 밀려 낭떨어지에 떨어 진다해도
다치지 않으리라. 죄가 있거나 없거나 수갑을 채우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살이를 해도 관세음 보살을 부르는 사람은
해탈을 얻으리라. 악한짐승 나쁜 귀신들이 혹은
태풍에 밀려도 결코 거기서 다치지 않고 살아가리라.
아들을 원하는 자여 관세음 보살을 부르라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
딸을 구하는 자여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 보살을 부르라
생각생각에 마음을 항상 관세음 보살에게 두어라.
우는아이에게 젖을 주듯이 관세음보살은 그대의 음성속에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서른두가지 몸을 나퉈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중생의 고통을 나누고 가지가지 방법으로 의사가 천만가지 약이 있어도
명의가 환자의 아픔아픔을 알아서 치료하듯이
관세음보살은 큰 의사이니 중생의 고통과 모든
근심걱정을 다 해결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관세음보살 가피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습니다.
일제때 청일전쟁당시 만해 한용운스님이 서울 작은 토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학도병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끌려갔었습니다.
어느 보살이 삼대독자인 아들을 전쟁터에 보냈놓고 걱정을 하니
주위에서 만해 큰스님을 찾아보라하여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만해스님은 생각생각 언제든지 관세음보살을 찾으라 했습니다.
좋은일이 있거나 나쁜일이 있거나 자나깨나
관세음보살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아들에게도 편지에 관세음보살을 염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아들이 죽었다고 부고가 오고 유골이 왔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보살은 낙심하여 관세음보살이고 부처님이고 필요없구나 했습니다.
49제를 지내고 자기팔자를 생각하며 실컷울고
자기도 죽으리라 식음을 전폐했는데 갑자기 밖에서
어머니 어머니 하며 아들의 목소리가 났습니다.
보살은 귀를 의심하고 혹 귀신이 온것아닌가 하며 문을 여니
군복입은 아들이 서있었습니다. 아니 귀신도 꼭 사람과 같네 하며
나가보니 귀신이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 중국에 왔었지요하며 묻는데 사연을 듣고보니
이러했습니다. 중국으로 끌려가 총알이 콩복듯 하는중에 하루는
보초를 서는데 산너머에서 재명아 재명아하면서 어머니가 부르더랍니다.
그래서 어차피 죽을목숨 중국까지 찾아온 어머니나 만나고
죽자라며 개울밑으로 도망쳐 어머니에게 가는데
어머니목소리는 계속멀어져 갔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못찾고 날이새 다시 부대로 돌아와보니
전우가 한명도 남지않고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래 혼자서 49일간을 걸어서 돌아온 것입니다.
보살과 아들은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으로 살아났음을 알고
감사의 뜻으로 살던집을
관음암으로 바꾸어 평생 기도하면서 살았습니다.
관세음 보살을 부르던지 지장보살을 염하든지
지극정성을 보이면 이렇듯 가피력은 반드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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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관세음보살의 가피력
기도 정진중 꿈에서 약병 받고…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부산 삼광사에 다녔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기도정진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집안의 이런 분위기 탓에 친정 오빠들도 일부러 사찰을 찾아가 절을 올릴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하지만 내가 불가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친정 어머니의 병환이었다. 어머니는 5년전부터 병명도 모르는 상태로 몸져 눕게 되었다. 여기저기 이름있는 병원들을 다 찾아다녔지만 조금도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온 집안식구들이 어머니 때문에 근심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구인사로 보내 요양을 시키고 온 가족이 정성을 다해 기도해 볼 것을 적극 권했다.
처음에 가족들은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를 먼거리의 구인사로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현대의학으로는 별다른 처방이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한 번 매달려 보기로 했다. 오빠들은 생업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구인사로 갔다. 구인사에서 방을 하나 얻어 어머니를 눕혀 놓고 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1080 염주를 돌려가며 어머니 병이 낫게 해달라고 매일 5시간씩 기도를 올렸다.
구슬땀이 흘러 방석을 흠뻑 적실 정도로 정성껏 절을 했다. ‘부처님,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 병들어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데려 가시고 어머니를 낫게 해주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희구하며 염주를 굴렸다.
어머니에게도 누워서나마 부처님께 의지해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권했다. 이 동안에는 가정일 등 모든일을 제쳐두고 오로지 어머니를 살려야 겠다는 일념으로 기도에만 집중했다. 절에서의 기도 정진은 한달 넘게 계속됐다.
한달이 지난 어느날,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관세음보살님이 어머니에게 먹이라고 약을 하나 주고는 미소를 머금고 하늘로 올라갔다. 소스라 치게 놀라 깨니 꿈이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자 오빠들에게 연락이 왔다. 노인들의 병에 유명한 한의사를 아는 사람한테 소개받았다며 부산으로 급히 내려 오라고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동래구쪽에 있는 한의원으로 갔다. 진맥을 본 한의사는 기가 몹시 약해져서 온 풍일 가능성이 많다며 침을 놓고 한약을 지어주었다. 한의사는 정성껏 치료를 할테니 한 번 믿어보고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1주일에 두 번씩 통원치료를 받았다.
나는 집에서 <천수경>을 독송하며 계속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3개월을 치료받더니 어머니는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걸어다니면서 식사도 정상적으로 하는 등 기력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어머니의 병회복을 위해 부처님께 지극 정성을 드린 것이지만 이것이 계기가 돼 이제는 새벽과 밤에 집에서 예불을 모실 정도로 불교에 깊이 몰입해 있고, 참다운 불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머니께서도 항상 염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시며 부처님께 의지하고 계시다. 병명조차 모르고 앓으시던 어머니에게 의사를 만나는 인연을 맺어 주셨으니 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한다.
김연숙(부산시 진구 범천동)
출처: 현대불교신문(www.buddhapia.com)
18.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드립니다.●
-출처/나무아미타불카페(cafe.daum.net/amtb)
안녕하세요.
저는 양양 낙산사에 다니는 불자입니다.
제가 이번에 기도하여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과거 숙생의 죄업이
산과 같이 많은 것을 느끼고 저로 인해 고통 받은
영가들을 위해 3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에서 천수경을 한 번 읽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한번씩 읽을 때마다
관세음보살님께 영가들을 극락왕생하여 주십사 3번씩 기원하였습니다.
3일째 날 회향하고 잠을 잤는데 제가 어느 절터에 있었습니다.
한 비구 스님이 아이 3명을 데리고 계셨는데
석불상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거처하는 집은 시골의 허름한 집같이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일 작은 한 아이가 석불상을 들어서 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같이 불상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리면서 사탕을 줄터이니
불상을 깨트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그 주에 저는 관세음보살님께
아이들이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고 사탕을 한 봉지 사가지고 갔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 사탕을 올리면서 간절히
영가들을 돌보아 달라고 기원하였습니다.
눈물을 너무나 많이 흘렸습니다.
천수경을 독경하면서도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저는 영가들이 아직도 천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7일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밤에 자기 전 한 시간씩 대비주를 외우며 다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항상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를 기원하였습니다.
어제 기도회향을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 날 피곤한 일이 있어서 잠을 설쳤습니다.
새벽에 잠이 어렴풋이 들었는데 바닷가였습니다.
백의관세음님이 아주 장대한 몸으로 동자 3명을 데리고 계셨습니다.
동자들을 모두 금신으로 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윽고 관세음보살님이 금색초롱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동자들도 그 뒤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며 환희스런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번 주에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에
감사하는 뜻으로 꽃을 회향하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함에 감사드리며
무릅끊고 지심귀명례합니다.
불자님들도 항상 대우주의 자비이신
관세음보살님을 칭명하시고 염불정진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19. 출처: 일타큰스님의 '기도' (도서출판 효림)
1960년대 초까지 가야산 해인사에는 인격을 구비한 강사요, 법사인 장보해(張寶海) 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출가하여 해인사 백련암에서 노 스님을 시봉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5세가량이 되자 배가 불룩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위궤양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밥을 잘 먹지 못하다 보니 기운이 크게 떨어졌고, 기운이 떨어지다 보니 자주 드러눕게 되었으며,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수행은커녕 시봉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노 스님은 이러한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보해 스님을 불렀습니다.
"이놈아! 세상 사람들에게는 쌀이 양식이지만, 중에게는 신심이 양식이다. 중이 아픈 것은 신심이라는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이야. 그렇게 신심 없이 빌빌거리며 살 바에는 마을로 내려가서 거지가 되어 살아라."
노 스님은 주장자로 때리면서 보해 스님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스님 네는 요즘 승려들과 달랐습니다. 교통이 불편하여 집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지만, 일단 절에서 쫓겨나면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겼습니다.
보해 스님은 멀리 가지 못하고 백련암 조금 아래쪽의 가운데가 푹 파인 동구나무 속에 들어가 가마니를 덮고 누워 생각했습니다.
'노 스님께서 어찌 그릇된 말씀을 하셨으랴? 나의 병은 신심이 부족한 데서 온 것이 분명하리라. 지금부터라도 신심을 기르자. 일찍이 스님께서는 위급하고 어려운 일에 다다랐을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신심도 생겨나고, 나의 병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기원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저는 지금 위급합니다.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꾸준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면 자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허기가 지면 노 스님의 눈을 피하여 백련암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찾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부르고…….
약 7일이 지났을 무렵,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영천 은해사(銀海寺)에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가득하고, 바위가 좋은 계곡에는 시퍼런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 참 좋구나. 해인사 계곡만 좋은 줄 알았더니 여기 계곡도 참 좋구나. 이 은해사는 처음 가는 절이니 옷을 단정히 입고 정신을 차려서 부처님께 절을 해야지.'
스님이 법당 앞의 배례석(拜禮石)에 이르러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순간, 법당 안에서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왔느냐?"
그리고는 법당 안으로부터 흰 가운을 걸치고 청진기를 건 스님, 주사기를 든 스님, 왕진가방을 든 스님들이 여러 명 나왔고,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스님이 말했습니다.
"여기, 이 침대 위에 누워라. 먼 길을 왔으니 수술을 해주어야지."
그 의사 스님은 배를 만져 보더니 부엌칼처럼 생긴 칼을 꺼내어 배를 쫙 가르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창자들이 나오자 칼로 창자를 잘라내어 큰 시루에 옮겨 담았고, 금방 시루 하나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의사 스님이 옆에 있던 뚱뚱한 간호사에게 눈짓을 하자, 간호사는 시루를 이고 계곡으로 가서 콸콸 흐르는 물에 창자를 넣어 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창자 속에서 돌도 나오고, 모래도 나오고, 가시도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간호사는 창자를 모두 씻은 다음 비틀어 짜더니, 깨끗이 닦은 시루에 담아 가지고 와서 배에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그 감촉이 너무나 차서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앗! 차가. 으 차가워."
이렇게 창자를 모두 집어넣고 나서 바늘로 이불을 꿰매듯 배를 꿰매 주더니, 의사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이제 됐다.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거라!"
보해 스님은 깨어났고,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조금도 아픔이 없었던 은해사 의사 스님들의 대수술……. 스님은 꿈속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배를 만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렀던 배가 푹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배의 이곳저곳을 만져보았지만 조금도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날이 새자 보해 스님은 백련암으로 올라가 노 스님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 스님, 배가 아프지 않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이제 신심이 조금 생긴 것 같구나.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닦아라."
그 뒤 보해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약 10년이 지나 평소 꼭 가보고 싶었던 은해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묘하게도 은해사는 꿈속에서 수술을 받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전생에 은해사 중이었던가 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꿈속에서나마 전생 인연이 있는 이 절에 와서 병을 치료받게 된 것이 틀림없다."
보해 스님은 은해사로 승적(僧籍)을 옮겨 은해사에 살고 싶었지만, 노 님을 생각하여 해인사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욱 열심히 도를 닦다가 약 20년 전에 입적하였습니다.
20. 나무아미타불 카페 지혜월64님글
100일기도중 관세음보살 정근과 천수경,108를 했는데 70일쯤에 관세음보살불상이 안방문을 통해 제가 기도하고 있는 자리로 붕붕떠서 들어오시는것을 봤습니다.
물론 기도중이였기때문에 너무 놀란가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생시같은 느낌입니다... 그 후로 모든일이 술술풀렸습니다...
출처: 네이버 상방대광명 블로그(blog.naver.com/lawand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