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차이콥스키가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볼쇼이 극장의 베기체프에게 새로운 발레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발레 음악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승낙했다고 나와 있다. 이 발레의 주제를 누가 제안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차이콥스키 자신이 발레의 제재를 내놓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의 작곡 의뢰를 받기 4년 전에 우크라이나 카멘카에 살고 있는 조카들, 자세히 말해 동생 알렉산드라의 아이들을 위해 백조 목각 장난감을 만들어 미니 공연을 해 주었다 한다. 거기에 쓴 음악은 독일 작가 무제우스의 메르헨(동화)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이 소품의 내용은 3막과 비슷한데 자신의 [교향곡 3번]을 완성한 직후였던 차이콥스키는 이 구상을 토대로 살을 붙였다. 즉 이 소품에서 몇 곡을 차용해 2막을 2주 만에 완성하고 1876년 4월20일 49곡 전곡을 탈고했다. 대본은 볼쇼이 극장의 총감독 겔체르와 베기체프가 공동으로 집필해 전4막의 대규모 낭만 발레로 발전시켰다.
형편없는 안무와 무대로 대실패한 초연
[백조의 호수] 초연은 1877년 2월20일 벤젤 라인징거의 안무로 볼쇼이 극장에서 펼쳐졌다. 안나 소베슈찬스카야가 주역을 맡은 이 공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형편없는 안무, 형편없는 무대 배경과 무대 의상, 오케스트라의 보잘 것 없는 연주를 고려하면 당연했다. 게다가 1880년 벨기에 안무가 조셉 한센의 안무로 볼쇼이에서 공연한 버전은 초연보다 더욱 참담한 실패로 기록됐다. 앞서 언급했듯 절대음악적인 분위기, 빈약한 의상과 무대 장치가 한 몫 했다. 오데트를 춤춘 발레리나 소베슈찬스카야 역시 전성기가 지난 발레리나였다.
요즘 공연되는 [백조의 호수] 버전은 따로 있다. 1895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된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주연하고 프티파가 안무를 담당한 악보다. 프티파는 차이콥스키가 1893년 사망한 뒤 볼쇼이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발견했다. 그는 총보를 검토한 뒤 음악과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 임을 발견하고 마린스키 극장 지배인에게 이 발레를 차이콥스키 추도공연의 레퍼토리로 공연할 계획을 세웠다. 일은 진행되어 차이콥스키의 막내 동생인 모데스트가 대본의 일부를 수정하고 작곡가 드리고가 곡의 일부를 변경했으며 차이콥스키 만년의 피아노곡과 18개의 소품집에서 3곡을 선곡해 관현악으로 편곡해 넣었다. 처음에는 1894년 이바노프의 협력으로 추도공연으로 2막만을 공연했는데, 큰 호응을 얻었고 거기에 힘입어 다음해 1895년 1월 27일 무대에 올라갔는데, 레냐니가 주역을 맡은 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공연에서 프티파는 1막과 3막, 이바노프는 2막과 4막을 안무했지만 건강이 나빠진 프티파가 백조의 호수에 거의 과거와 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이바노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오데트와 왕자가 마법을 깨고 결혼에 이르는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백조의 호수는 이들이 안무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물론 남자 백조들이 나오는 매튜 본은 예외로 해 두자.
달빛이 비치는 호수, 백조와 인간의 신비한 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