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를 처음 배우고자 한다면 구양순 구성궁예천명으로 입문할 것을 권한다.
중국은 90%가 해서로 시작하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隸書 篆書나 北魏楷書로
시작하는 書派가 의외로 많다.
나의 系譜는 안진경 書脈이다. 추사선생은 스승 박제가로부터 안진경서를 배웠고
중국 스승 옹방강 또한 소동파, 구양수로 이어지는 안진경 서맥이다. 정동영 선생도 소전 손재형 선생으로부터 안진경서를 먼저 공부하였다. 이것이 정동영 선생 代에 와서 학습 순서가 바뀌게 되는데 정동영 선생은 제자들에게 구양순서를 먼저
가르쳤다. 그 이유는 구양순서가 안진경서보다 한 수 위라는 것과 구양순서를
먼저 배우고 안진경서로 넘어가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서 한불문화원에서는 구양순체로 입문하여 안진경, 왕희지,
추사를 위시한 손과정, 황산곡 등을 섭렵하고 난 후에 예서, 전서로 넘어가는
서예 교육을 하고 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書家에는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안진경, 유공권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구양순서를 먼저 쓰기를 권장하는 이유는 구양순서에는 다른 글씨에
없는 다양한 운필과 함께 구성의 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운필의 묘가 다양하므로 구양순서를 먼저 익히면 다른 서체 쓰기가 용이하다. 구양순체는 한 획의 시작,
접힘 부분, 당기는 운필이 신속하게 작동한다. 그러면서도 굵기 변화가 자연스럽다 할 것인데 이는 고도의 筆力에서 나올 수 있다. 그 숨은 운필의 묘를 모르고 쓰기
때문에 구양순체를 다분히 초보자용 내지는 기초 학습으로 낮게 치부한다.
그러면서 실제 운필하는 걸 보면 구양순체에 50%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양순체의 시원은 八分書다.
중국에서는 한 시대에서조차 한쪽에서는 북위서를, 다른 한쪽에서는 해서를
썼는데 대개 북위서는 이민족이, 해서는 한족이 써왔다.
해서는 80%~90%가 晉代에 형성되어 구양순에 와서 나머지 10%가 더해져서
완성되었다. 그래서 唐楷를 해서의 盛觀이라고 일컫는 것이고 정제미의 극치라고
하는 것이다.
같은 해서이면서도 구양순서와 안진경서를 비교하면 안진경서는 구양순서보다
한 박자 내지는 반 박자가 느리다. 그만큼 자연스러움이나 기교면에서 구양순서가 앞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안진경서는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조실록
태종편에 양녕대군이 안평대군에게 안진경서를 쓰도록 권유하는 장면처럼
우리나라는 國難時期에 안진경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나라에 충성을 유도했던 측면이 없지 않다.
이 안진경 書風은 18C~19C 碑文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대구 영남학파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중국 역대 書家들의 書論에는 10명 가운데 8명은 해서를 우선으로 학습해야 함을
주장하고 2명 정도가 전서를 먼저 학습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전서를 먼저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서예 발달사에서 가장 먼저 생겼다는 이유를 드는데
그렇다면 篆書에서 隸書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 또 해서가 나오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되었는지를 가늠할 때 전서를 먼저 학습할 경우 해서의 고난도 운필은 어느 세월에 극복할 수 있을까? 入筆 裹鋒 收筆 垂露法이라는 단순한 운필에
직선과 곡선을 살린 間架 맞춤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篆書다.
그렇다고 할 때 전서에서 ‘예술의 극치’라는 표현은 온당치 않다.
宋 高宗은 “글씨를 배우려면 해서부터 배워야한다. 萬法이 다 들어있고 실제
사용하는 글자이므로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다.”고 하였다.
隸篆書, 北魏楷書를 위주로 할 경우에는 行草書가 약해진다. 그 이유는 筆意와
힘의 按配 때문인데 예서의 조형미에는 필의가 없다. 藏鋒法에는 100% 필의가
내재하며 필의는 정제미와 함께 장봉법의 생명이다. 필의가 없는 글씨를 먼저
쓸 경우 필의가 생명인 행초서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겠는가? 예전서 전공자들이 행초서에 약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힘의 안배에 있어서 전서는 일정하다. 楷, 行, 草는 힘의 안배를 조절해야 한다.
당해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예전서를 쓸 경우 처음에는 속도가 조금 더딜지라도
정확도에서는 예전서 전공자들보다 앞선다. 이는 북위해서와 견주더라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정제미요 발전 과정상 당연한 이치다.
서예 발달 과정이라는 것이 문자 기능인 빠른 의사소통과 예술성(정제미)의 결합
임을 생각할 때 해서를 차원 높게 승화시키는 것이 서법서예 발전상 바람직하다고 보는데 무엇보다 중국 서예사상 3大家 모두 해서를 잘 썼다는 점, 그리고 서성
왕희지는 鍾繇의 碑文을 代筆한 해서 전문가이고, 해서의 大家 구양순이 쓴 정무난정서가 왕 난정서 학습 교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해서를 우선하여 학습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하겠다.
石鼓文까지는 문자로서의 역할이지 서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 서 예술은 석고문
이후부터 발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북위해서를 공부하는 類派가 많이 있다. 북위해서는 자획과 결구 면에서 미완성의 서체다. 북위해서가 완성된 해서라면 그 뒤 唐楷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해는 북위서의 미완성에서 등장하였으며 또 당해 이후에 새로운 그 이상의 서
체가 등장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다.
“서예를 하려면 唐書를 먼저 하라. 당서를 모르면서 어찌 晋, 隋, 魏, 六朝의
글씨를 넘보는가. 당서를 모르면서 晋書를 쓰려고 한다면 그것은 虛氣다.”
이는 추사 선생이 귀양 중에 김 석준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안진경서를 먼저 공부한 추사선생은 옹방강으로부터 구양순체 공부를 권유받아
10년 동안 구양순서를 썼고 그 결과 구양순서가 예서에서 원류된 탁월한
글씨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서예가들 중에는 추사의 예서론을 거론하면서 마치 추사선생이 예서를 써야한다고 주창한 것처럼 말한다. 추사선생이 漢隸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要는 한예의 점진적 발전이 없었다면 이후의 해행초가 분파되어 나오지 않았을 것이므로 예서가 모든
書의 祖家라는 측면에서 한예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뿐 예서를 먼저 써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예는 좁은 의미로 東漢隸요 학문적으로는 東漢隸, 西漢隸 모두를 지칭한다.
예기비, 을령비, 사신비등의 동한예는 조형적인 글씨다. 한 획 한 획을 만드는데
치중한다. 이에 반해 해, 행, 초는 앞서 말했듯이 필의에 따른 정제된 글씨로서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조형미보다는 정제미가 우위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리 서력이 많은 사람도 해서의 기초 운필법인 藏鋒13筆法을 써보라고 하면
몹시 어려워한다. 이는 부정확한 장봉필법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전서 운필법이나 예서 운필법으로는 해서의 정확한 운필을 묘사하기 어렵다.
1970년대 중반부터 예전서, 북위해서를 서예 입문으로 하는 교습이 유행하여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서예의 튼튼한 기본기는 楷書(唐楷)에서 나온다.
첫댓글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