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한(申維翰)은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지파인 청천파(靑泉派) -장절공 신숭겸의 25세손
-죽계(竹溪) 성오(省吾)의 孫
태시(泰始)의 子
-부사공파(영덕 남정면 회리)에서 분파됨
신유한 주백(申維翰周伯)은 영남 출신으로 도성에까지 명성을 떨쳤는데 나이 서른셋에 장원 급제하였다. 숙종(肅宗) 기해년(1719)에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가던 길에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상공을 방문하여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당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설악산에서 서울로 들어와 그의 형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삼연은 평소 신유한의 명성을 잘 알고 있어서 처음 만났지만 구면인 듯하였다. 그의 시권(詩卷)을 보자고 요청하고는 일본으로 가는 배가 떠나기 전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사신 일행이 부산에 머무르며 바람을 기다리다가 배가 출발하려는 참이었는데 홀연 설악산에서 온 승려가 삼연이 빌려갔던 시권과 삼연의 시찰(詩札)을 신유한에게 전해 주니, 삼연이 과연 약속을 어기지 않은 것이었다. 삼연의 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청라동 남긴 글’이란 바로 신유한의 시축(詩軸)으로 청라동에서 지은 것들이다. 신유한이 삼연의 시를 보고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공이 내가 사부(辭賦)에 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신유한의 시 역시 청신하고 생동감 있었으니 그는 왕세정(王世貞)과 이반룡(李攀龍)을 배워 그들의 묘리를 터득한 자이다. 그가 충주에 갔을 때 절구(絶句) 두 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충원이라 고을에 이르러 보니 / 行至忠原縣
저 아래 탄금강 흘러가는데 / 下有彈琴江
거문고 가락인가 여울물 소리 / 灘聲似琴調
구름 피는 창가에 기댄 나그네 / 征客倚雲牕
이른 새벽 새재에 올라와서는 / 明發上鳥嶺
낙동강 물줄기 굽어본다오 / 俯瞰洛東江
저기 저 강 오른편 내 집 창가에 / 儂家在江右
매화나무 버드나무 우거졌겠지 / 梅柳掩前牕
일본에 갔을 때 물무경(物茂卿)이란 자가 있었는데 문장을 잘하는 선비였다. 그 역시 왕세정과 이반룡을 좋아하였고 스스로 문장을 통해 도를 깨쳤다고 여겼는데, 신유한의 시를 보고는 당시(唐詩)의 풍격에 아주 가깝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유한은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해서 시를 빨리 짓지 못했으므로 일본인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허나 그의 《해유록(海遊錄)》은 문장이 매우 뛰어나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무릇 남쪽 땅의 일개 선비로 30년 동안이나 도성의 문단을 주도하였는데 어찌 아무런 까닭이 없겠는가.
신유한과 동시대에 영남에는 그 밖에도 시에 능한 자가 많아서 김시빈(金始鑌), 권만(權萬) 같은 자가 모두 문장을 잘한다고 자부했지만 모두 신유한을 떠받들어 그와 시재를 다투려 하지 않았다. 김시빈이 평해 군수(平海郡守)로 있던 신유한에게 보낸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학과 같은 그대 모습 깃 없어 유감이니 / 君姿如鶴恨無翎
아득한
봉래(蓬萊) 영주(瀛洲) 무슨 수로 날아가랴 / 其奈蓬瀛隔杳冥
《황정경(黃庭經)》 읽을 곳 곰곰이 따져 보니 / 細算黃庭堪讀處
세간엔 오직 하나 월송정이 있으렷다 / 世間惟有月松亭
권만이 신유한을 위해 지은 만사(挽詞)에,
그 누가 그대들을 해동에 나게 했나 / 誰遣若曹生左海
한가로이 벗들 함께 영주로 올라갔네 / 等閒流輩上瀛洲
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유한을 위해서만 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영남 사람들은 김시빈이나 권만보다 신유한의 시를 더욱 애송하였다. 이미(李瀰)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너무 많이 인출하는 바람에 얼마 안 되어 목판이 닳아 훼손되었다. 그러나 그 판본에는 좋은 글이 많이 누락되었는데 충주에서 지은 절구 두 편과 평해 군수 재직 시의 여러 작품들이 모두 빠져 있다. 그의 조부의 무덤이 영덕(盈德)에 있는데 문필봉(文筆峯)이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주D-001]천지는 동남쪽이 기울어졌고 : 중국의 전통적인 지리 관념에 의하면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아서 모든 강물이 동남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여기서는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신유한(申維翰)이 동남쪽 영남 출신임을 비유한 것이다.[주D-002]돛 …… 목현허(木玄虛)로다 : 사 강락(謝康樂)은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으로 강락은 그의 세습 봉호이다. 사영운의 시는 강남의 뛰어난 산수를 유람하면서 경치를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목현허는 서진(西晉) 시대의 시인으로 현허는 그의 자이고, 이름은 화(華)이다.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고 유일하게 해부(海賦) 한 편이 《문선(文選)》에 전한다. 여기서는 통신사의 일행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는 신유한을, 배를 타고 강남의 뛰어난 경치를 유람하며 많은 산수시를 남긴 사영운과 대해(大海)의 광대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탁월하게 묘사한 목화에 비유한 것이다.[주D-003]왕세정(王世貞) : 명나라의 문인으로 자는 원미(元美), 호는 봉주(鳳州) 또는 엄주산인(弇州山人)이다. 젊을 때부터 문명(文名)이 높아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고, 이반룡(李攀龍)과 함께 이왕(李王)이라 불리며 명대 후기 시단을 주도하였다.[주D-004]이반룡(李攀龍) : 명나라의 문인으로 자는 우린(于鱗), 호는 창명(滄溟)이다.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을 중심으로 하는 홍치칠자(弘治七子)의 복고설을 계승, 왕세정 등과 고문사설(古文辭說)을 제창하여 진한(秦漢)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고 한(漢)ㆍ위(魏)ㆍ성당(盛唐) 시의 격조를 중시하였다.[주D-005]봉래(蓬萊) 영주(瀛州) : 모두 전설상의 신산(神山) 이름으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주D-006]황정경(黃庭經) :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도교 경전이다. 왕희지(王羲之)가 산음(山陰)에서 만난 도인에게 이 경전을 써 주고 대가로 거위를 받아 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