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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용 외
박몽구 시인
통영 가는 길에 윤이상 기념관에 들렀다 가을 끝자락 재촉하는 찬바람 몰아치는데 동백 잎 더욱 푸르다 40년을 훌쩍 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다가 먼 이국땅에서 윤이상이 영면한 다음에야 유해와 함께 돌아온 책상을 본다 검버섯 피듯 군데군데 패인 위에 빈 오선지 선명하게 그어진 악보와 늙은 만년필 한 자루 덩그러니 놓여 있다 조국은 하나다 음악으로 잇는 갈라진 땅 사악한 무기며 검은 손이 거머쥔 돈으로 결코 나눌 수 없다고 말해준다
윤이상이 생의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첼로, 그의 육성을 들려주는 듯하다 빈 첼로 줄에 통영 앞바다의 파도 소리를 실어본다
육탈한 뒤에도 오래 생생하게 남는 것이 있다고 흉상을 벗고 나온 윤이상이 어깨를 토닥여 준다
안양천 개미길
10월의 끝자락 안양천변을 걷는다 은행나무들이 가을의 수확을 널리 나누려는 듯 열매들을 발부리 아래 수북이 쌓아 놓지만 발품 곧잘 파는 사람들 한 부대씩 주워가고도 구두코 피해가기 어렵게 산책길에 나뒹군다 살 만큼 사는 비산동 사람들은 더 이상 은행을 줍지 않는다 며칠 안 되어 길바닥 곳곳에 산책 나온 사람들에게 짓밟힌 은행 열매들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드러누워 있다 청소부들마저 손이 바빠 버려두는데 문득 무언가 온힘을 다해 으깨어진 열매를 옮기고 있는 것을 본다 허리가 유난히 긴 일개미 한 마리, 제 몸집보다 백배는 됨직한 은행 과육을 두렵지도 않은 듯 천천히 등에 진 채 옮기고 있다 구두코로 무심코 밟으려다가 섬찟 놀라 일개미 길에서 발을 뗀다 겨울 채비를 하는 건 저렇게 힘들구나 뭉클한 생각이 저릿하게 가슴에 고압전류를 흘려 일개미가 풀숲 속 집으로 무사하게 갈 때까지 흐린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얼마 안 되는 퇴직금 제로 금리 가까운 은행에서 빼내어 외국계 무보장 선물상품에 투자했다가 한 푼도 못 견질 처지에 놓인 친구 그늘 짙은 얼굴을 겹쳐 본다 세상에 일하지 않고 거저 얻는 건 없다고 다시 겨울 준비에 나서는 일개미 곧고 가느다란 허리가 말해준다
박몽구|1977년 월간 《대화》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수종사 무료찻집』, 『칼국수 이어폰』, 『황학동 키드의 환생』 등이 있으며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계간 《시와문화》 편집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