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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이야기
Raniya 님 블로거에서 퍼옴
이 제하
순결성은 청년의 첫 번째 조건이다. 청년의 나이를 넘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 안락함, 사유재산에 매달린다. 그러면 순결성은 훼손되고 만다. 순결성이 훼손되면 더 이상 청년일 수가 없다. 시인이며 화가이고, 동시에 소설가인 이제하(李祭夏, 1937~ )는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청년의 으뜸 조건인 순결성을 오롯이 간직한 사람이다. 그는 ‘회색주의자’도 아니요, ‘물정 모르는 리버럴리스트’도 아니다. 그는 늙지 않는 청년이며, 기인일 수밖에 없는데도 끝내 기인이 아닌 기인이다.
그는 십대 때부터 이미 시인이다. 그는 ‘한국일보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중견작가다. 그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회화를 전공하고 벌써 개인전을 몇 번이나 가진 화가다. 그는 1천5백여 편의 영화테이프를 모은 영화광이며 두 권의 영화 시평집을 펴낸 영화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쓰고 부른 노래를 CD로 담아낸 가수다. 말상의 긴 얼굴, 잿빛에 가까운 낯빛, 나른한 표정, 함부로 흐트러진 반백의 머리카락…… 청바지에 벙거지를 눌러 쓴 그. 그의 비범함은 장르를 전방위적으로 넘나들며 아우르는 데서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그 비범함조차 나른한 표정 속에 녹여버리고 만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동숭동의 한 골목에 자신의 몸을 낮추고 겸허하게 자리한 「나무요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박한 카페가 있다. 실내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열댓 명 이상은 앉기 힘들 정도의 그 좁은 공간에 무려 80여 명이 촘촘히 끼어 앉아 한 가수의 노래를 경청하고 있다. 1998년 4월 5일 밤, ‘이제하 노래발표회’. / 모란동백의 원작자
어느덧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른 소설가가 그의 노래를 듣겠다고 찾아와 촘촘히 끼어 앉은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기타를 든다. 애초부터 미성과는 거리가 먼 거칠거칠한 탁성(濁聲), 그러나, 뜻밖에도 매우 힘 있는 목소리다. 그 힘찬 목소리의 결에는 삶에 대한 깊은 관조에서 우러난 애조와 회한이 묻어난다. 그의 탁성은 얼핏 1970년대 훌쩍 미국으로 사라져버린 히피가수 한대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의 노래솜씨는 아마추어 수준을 너머서 있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객석에서 요란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온다.
빈 들판으로 바람이 가네 아아 / 빈 하늘로 별이 지네 아아 /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 소리없이 나를 부르네 // 어쩌나 어쩌나 귀를 기울여도 / 마음 속의 님 떠날 줄 모르네 // 빈 바다로 달이 뜨네 아아 / 빈 산 위로 밤이 내리네 아아 /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 소리없이 나를 반기네
― 이제하, 「빈 들판」, 『빈 들판』(나무생각, 1998)
이제하는 1937년 음력으로 5월 20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위로 열 살과 일곱 살 연상의 누님 두 분이 있고, 그는 막내이자 외아들이었다. 본명이 성수(聖壽)였으나, 조부가 출생 신고할 때 제하(祭夏)로 고쳐 호적에 올렸다. 처녀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원초적 죄의식이 그의 내면에 새겨진다. 네 살 무렵 떼를 쓰며 울다가 아버지에 의해 개숫물 통에 처박힌 사건 뒤로 부친에 대한 반발 심리와 모친에 대한 심정적 친연성이 한데 엉켜 그의 내면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만들어진다.
김현이 살부본능(殺父本能,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운운하고 내 소설을 지적했을 때 허(虛)를 찔린 느낌이었다. 어릴 때의 콤플렉스도 있고 해서 나는 근본적으로 페미니스트다. 여성과 쉽게 친숙해지면서도 정작 정욕(情慾)을 가질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 남성의 입장에서라면 여성에게 일대일로 맞서서 우선 동물적인 본능을 지니는 것이 최선이고 그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도 되겠지만, 인간의 구조란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어 있지 않다.
― 이제하, 『유자약전』, ‘작가의 말’(고려원, 1981)
1945년 해방되던 해엔 국민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마산으로 이사해 회원국민학교로 전학해 이곳을 졸업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에 마산동중학교에 입학한다. 중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을 떠나 피난지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친다. 1952년 중학교 3학년 때에 《학원》의 독자문단에 짧은 산문 「비오는 날」을 응모한 것이 우수작으로 뽑히자, 재미가 들려 계속 습작을 투고한다.
“당시 학생들에겐 《학원》이란 잡지가 대단히 인기 있었어요. 독자란에 글을 보내고 실리면 또 보내고 독자들끼리도 편지를 하게 됐죠. 그렇게 글 쓰는 데에서 대화의 벽이 뚫렸고 또 그 대화에 빠져들었죠. 그 무렵 비슷한 또래의 문학도를 비롯하여 몇몇 여학생과도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낯모르는 친구에게서 편지가 오면 얼마나 반가웠던지 뒷산에 올라가 편지를 읽고, 하늘 쳐다보며 누웠다가 책 읽고…… 소년기를 그렇게 지냈어요.”
이것은 1953년 마산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속되는데, 「청솔 그늘에 앉아」라는 시가 제1회 ‘학원문학상’에서 심사를 맡았던 박목월, 조지훈에 의해 우수작으로 뽑히고, 1960년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널리 읽혔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 안았다고 해도 좋다 // 혹은 / 하아얀 햇빛 깔린 / 어느 도서관 정원이라 해도 좋다 //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 노곤한 그리움이여 //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 다정한 얘기가 하고 싶다 / 아니 그냥 / 당신의 그 성그런 눈속을 들여다보며 /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다 //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 /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이제하, 『청솔 그늘에 앉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2년 마산동중학교에 다니던 까까머리 소년 이제하와 편지를 주고받던 서울친구는 경복중학교에 다니던 유경환이다. 내성적인 소년 이제하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그 서울친구를 그리며 시를 썼던 것이다. ‘학원문학상’을 수상했을 때는 매일 10여 통씩의 팬레터가 서너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황금기를 누린다. 이와 함께 모교에 은사로 있던 시인 김춘수, 김상옥, 김남조, 이원섭 등과 인근 학교에 재직한 시인 김수돈, 김세익, 화가 전혁림, 강신석 등으로 인해 풍부한 예술적 분위기에 휩싸여 학창시절을 보낸다.
1956년 그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가 학장으로 있다는 소리에 솔깃하여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때 다시 문학병이 도지기 시작해 가끔 박목월의 강의를 듣거나, 습작 조각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마냥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았다. 대학 2학년 때까지 ‘학점’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였다.
홍익대학교 조각과에 적을 두고 있던 1958년, 그는 《현대문학》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시인이 된다. 추천작품은 「설야」, 「바다」라는 작품이다. 미당은 그의 시에 대해 “칠칠허기가 신시(神市)쩍 나무와 같어, 이만하면 가뭄은 안타게 생겼다”고 평을 썼다. 그는 시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소설을 쓴다. 시가 추천완료하기 전인 1957년 《신태양》에 군대에서 성불구가 된 남자 주인공이 애인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후 방황하다가 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오히려 운전사를 죽게 만든다는 내용의 소설 「황색 강아지」1)를 응모하여 당선된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소설계》에 소설 「나팔산조」를 응모하여 준당선으로 뽑히면서, 시와 소설 장르를 구분 않고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이제하는 비슷한 또래의 서승해(徐丞海, 미당의 아들), 송상옥(宋相玉), 황동규(黃東奎), 그리고 손위인 승려시인 고은(高銀) 등과 어울리며 책방에서 화집을 훔치거나 남의 집 등을 돌을 던져 깨는 등의 다분히 과잉의 문청기질에서 빚어진 악동 짓에 탐닉하기도 한다.
1959년, 포크너, 까뮈 등 작가와,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깊이 빠져 있던 이제하는 갑작스런 좌골신경통의 발병으로 집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고 거의 두 달 동안을 누워 지낸다.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기를 쓰고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엉뚱함으로 다시 한번 주위를 놀라게 한다. 김해 공병학교 편찬과에서 군사학 교과서를 편집하며 1년 반가량을 보낸 뒤 의가사 제대를 한다.
1961년 제대할 무렵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손」을 응모해 가작 입선한다. 이제하는 곧 홍익대 서양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는데, 곧 연애사건을 핑계 삼아 학교를 그만 둔다. 같은 해 《신사조》에 표현주의 작풍의 단편 「축하회의 선생님」을 발표하고, 1964년 소설 「태평양」, 「기적」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펼친다. 그리고 성찬경, 박재삼, 박희진, 구자운 등이 만든 동인지 『60년대 사화집』에 강위석과 함께 합류하여 시작 활동 또한 계속하면서, 소설가 최정희와 그의 딸 지원, 채원 자매 등과 친밀하게 지낸다.
1965년에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니던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소경의 개안(開眼) 과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소설 「소경 눈뜨다」를, 1966년에는 소설 「불멸의 청자」, 「유원지의 거울」 등을 연이어 발표한다. 1967년에는 신문, 잡지에 삽화를 그려 생활비를 마련해가면서, 소설 「기차·기선·바다·하늘」, 「한양고무공업사」, 「조」, 「흰 제비의 여름」을 발표하고 1968년에는 「물의 기원」, 「바람의 추」 등을 발표한다. 그리고는 1969년, 동화 「느림보의 다섯 가지 수수께끼」를 비롯하여, 소설 「임금님의 귀」, 「스미스 씨의 약초」, 「비」 등과 문제의 소설 「유자약전(劉子略傳)」을 발표 한다.
「유자약전」은 이 타락한 세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문제적 특성을 지닌 부류라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 취하는 다양한 삶의 형태와, 그들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과 부딪치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무참히 마멸되어가는가를 그린 작품이다. 이루지 못할 허황된 그림의 꿈을 꾸면서도 일상과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화자인 ‘나’, 그리고 군대에서 구타를 당하면서도 마음만은 훨훨 날아다니지만 결국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병원에 갇혔다 나온 나의 친구, 그리고 이 작품의 중심인물 유자……. 유자가 이 감당키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은 출구는 잠이다. 그러나 그 잠 속에서조차 그녀는 완전히 안전할 수 없다. 이제 그녀를 억압하는 것은 의복류나 몸에 부착된 액세서리로까지 확대된다. 이것은 어느 날 그녀가 털어놓는 꿈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구두가 걸어다니는 것이 보여요…… 모자가 흔들흔들 가고…… 소매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내려왔어요…… 바지가 앞뒤로 왔다갔다…… 참 우스워요.
유자가 예술가이며 그녀가 갖고 있는 다양한 괴팍성을 고려할 때, 독자들 대부분은 그녀의 결말이 좌절이나 절망에서 오는 자살이나 그 비슷한 극적인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감한다. 그러나 유자는 위암이라는 병 때문에 죽는다. 이러한 면은 다소 소설의 긴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제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라고 수긍하게 된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지극히 평범하며 사실적 성향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제하 소설의 특징이다.
이 당시 이제하 소설의 작중 인물들은 거의 모두 크고 작은 광기에 빠져 있는데 김현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물화(物化) 경향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관습 - 금기에의 저항은 콤플렉스 없는 삶에의 동경과 표리관계를 이룬다. 콤플렉스는 금기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제도를 부숴버린다는 생각은 고전적 심리학자들에 의해 살부욕망이라는 명명을 받은 심리적 경향이다. 제도를 축약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아버지를 죽이고 쾌락본능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본능을 신장시키려는 욕망은 광기의 맨 밑바닥에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 욕망을 사회는 추잡한 것으로 규정하고 억압한다. 억압(refoulement)은 사회제도를 이루는 기본 요소이다. 이제하 소설의 주인공들의 모든 일탈은 억압과의 싸움이다. 어느날 갑자기 ‘조롱하는 모습’을 본 자들의 일상에서의 일탈, 그것이 이제하 소설 주인공들의 광기이다.
― 김현, 「일탈과 콤플렉스에서의 해방」, 『사회와윤리』, 일지사, 1974
1970년 「환상지」, 「군화」, 「고인의 사진」, 1971년 「행인」, 1972년 「초식」 등을 연이어 발표하고, 마침내 1973년 그는 첫 창작집 『초식』을 <민음사>에서 펴낸다. 표제작인 「초식」과 「유자약전」, 「유원지의 거울」, 「태평양」, 「황색의 개」와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던 그 매혹적인 책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초식」은 4·19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날 즈음을 배경으로, 국회의원 출마벽을 가진 한 남자에 얽힌 이야기를 작가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풀어낸다. 주인공 서광삼이 선거철만 되면 시도하는 채식, 후미지고 음습한 도살장에서의 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선거유세, 그리고 4·19 뒤에 그 도살장을 다시 찾아가서 손까지 깨물어가며 풀 ‘초(草)’자를 써 보이는 주인공의 행위 등 비현실적인 풍경을 통해 전하려는 의미는 또렷하지 않다.
푸르고 담백한 식물 이미지의 암시성을 품에 안고 있는 주인공의 채식주의에 고기를 아귀아귀 먹어 해치우는 듯한 부정선거의 육식성, 그리고 소가 도살되며 뿜어내는 피의 동물 이미지 등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겹쳐진다. 채식의 순결성을 협잡·굴용·중상모략·테러로 얼룩진 현실의 조야함이 뒤덮는다. 이즈음에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것이 현실에 대한 풍자이며 희극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채식’이라는 상징적 행위에 빠진 한 인물의 하염없는 식물성 지향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그 뒤를 잇는 5·16 군사정권의 광태가 보여주는 동물적 수성(獸性)을 극적으로 대비해 이 시대를 지배하는 광기와 폭력성, 그리고 우울과 황폐함을 증언한다.
이제하는 「초식」뿐 아니라 「스미스씨의 약초」, 「임금님의 귀」, 「환상지」 등 상당히 정치와 현실에 대한 풍자의 골격을 갖춘 소설을 많이 내놓지만, 그것들은 정치 부패상이나 부조리 비판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니다. 작가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들의 교묘한 심리, 행동, 본능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꼼꼼하게 그려낸다. 그는 숨 막히는 군사독재에 대해 엉뚱하게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감히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응전했다. 이제하의 소설의 밑바닥에는 “상투적인 삶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조야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증오”(김병익)가 깔려 있다. 그러나, 무식한 독재자와 그에 빌붙어 있는 검열관들은 이제하의 일상을 비트는, 그 초현실적으로 ‘일그러진 그림들’(소설들)이 위선적 권위, 상투적 인습, 조야한 정치를 향한 얼마나 날카로운 비판이며 조롱인가를 미처 ‘읽지’ 못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듯 소설을 쓴다.
“내 소설은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그림에서의 구도, 색채 및 주제형상화 과정이 그 형식만 다르게 나타날 뿐이지 글쓰기와 아주 닮아 있다고 봅니다. 나는 외형적 사회의식보다는 개인의 무의식세계, 그들의 꿈과 악몽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들은 합리적 사고로 해명이 안 되는 세계인만큼 자연히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지요. 내 소설이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 위주인 것은 이 때문이며 나는 독자와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상상력에 더 많은 여지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유신독재를 비판했듯이 1970년대의 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와 관련하여 추악한 행태를 보인 문단정치꾼들과 1980년대의 한국문단을 휩쓴 독선적 민중주의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한다. 「초식」을 내고 얼마 되지 않아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이 주관하는 《현대문학》에서 그에게 ‘현대문학 신인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는 “나눠먹기식 문학상의 행태와 이 잡지 주간이었던 조연현이나 문단 어른들의 문협선거 감투싸움에 환멸”을 느껴 단호하게 그 상을 거부한다. 그 거부는 문단의 타락과 추악함을 향한 그의 분노와 항의의 한 표현방식이었다. 그것은 한국문단에서는 드문 사건으로 적지 않은 파문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80년대 중반 민중주의가 지배적인 흐름일 때 그는 ‘이상문학상’ 수상연설 중에 감히 “민중이라는 것이 어느 일부 계층의 전유물일 수는 없고, 콤플렉스 때문이건 실제 노동이 하기 싫어서건, 민중을 전담해서 떠드는 특수계층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개체로서의 한 민중이기 때문에 그들의 등에 업힐 수는 없다”고 일갈한다. 그는 속된 것, 뻔뻔한 것, 위선적인 것, 상투적인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개 관습과 제도의 형태로 우리 의식을 억누르며 규제하고 재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와 예술혼이 들끓는 그의 의식은 그 억압 앞에서 폭발하고 만다.
1977년에 이제하는 《소설문예》(《소설문학》의 전신)의 창간에 이청준, 송영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참가하면서 단편 「근조」와 중편 「자매일기」 등을 발표하고, <수문서관>에서 콩트 스케치집 『새』를 출간한다. 1978년에는 월간 《수상(隨想)》(《월간에세이》의 전신)의 주간으로 근무하면서 <홍성사>에서 창작집 『기차·기선·바다·하늘』2)을 간행한다. 얼마 후 화랑협회의 계간미술지인 《미술춘추》로 자리를 옮겨 일하는데, 이때 잡지 만드는 즐거움과 경험은 나중에 장편소설 「광화사(狂畵師)」의 소재가 되었다. 1979년 《한국문학》에 장편 「용안(容顔)」을 연재하다가 4회 만에 중단한 이후, 한동안 소설보다 시 쓰기에 더 몰두한다.
1980년, 세 차례의 유류파동의 여파로 아내가 경영하는 양장점이 문을 닫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바람에 화곡동 집을 팔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 이때부터 이제하는 줄곧 혼자 화실을 얻어 지내게 된다. 1981년 <고려원>에서 중편 문고집 『유자약전』을 출간하고, 1982년에는 단편 「굴절」, 「양말」, 「밤의 창변」 등을 발표하며 그동안 틈틈이 그렸던 그림으로 첫 개인전을 갖는다. 이 개인전을 기념해서 시인으로 문단에 나온 지 스물세 해만에 첫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를 <청하>에서 펴낸다. 1983년에는 단편 『눈(眼) 이야기』를 발표하고 일러스트집 『사라의 눈물』을 <우석사>에서 출간하며 1984년에는 가출한 노인들 둘이서 소년을 상대로 야바위꾼 노릇을 하는 내용의 단편 「권투」 등을 발표한다.
또 <나남출판사>에서 문학선집 『밤의 수첩』을 펴내고, ‘낙산공방’에서 서양화 10인 소품전에 참가한다. 1985년 「소렌토에서」, 「용」, 「풀밭 위의 식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 1월호에 실린 중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이상문학상’을 받는다. 이제하는 수상소감을 통해 “전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우선 한발 물러서서”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해오던 ‘환상적 리얼리즘’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실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상당히 일관성 있고 정통적인 소설의 틀에 근접하고 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분단과 이산이라는 우리 사회의 민감한 현실적 주제 위에 삶과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겹쳐놓은 작품이다. 현실적인 주제를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사건과 사건 사이의 틈에 끼어드는 환영과 상념들, 그것들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 그리고 회화적 묘사, 시적인 수법들은 여전하다. 불가사의한 사건과 우연의 연속으로 소설을 끌어나가는데, 이 우연성들은 불교적 회귀·인연이라든가 혹은 샤머니즘 성격을 띤 업·운명 등의 요소와 연결되며, 도리어 ‘필연성’으로 귀착되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 이른다. 이것은 필연과 우연이라는 개념의 경계를 무너뜨려 그 의미 자체를 무화시켜 버리려는 계획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이렇게 샤머니즘과 전혀 이질적인 분단 문제를 버무려 작품을 갈무리해낸 이제하의 소설방식에 대해 평론가 김윤식은 “분단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소설적인 돌파구”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낙관적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3)
1986년에 「강설」 등을 발표하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창작집 『용』을, <샘터사>에서 동화집 『노래하는 돌』을 출간하고, <한국일보>에 장편 「광화사」를 연재한다. 1987년에는 <문학사상사>에서 『광화사』 1·2부를 출간하며, 이 「광화사」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다. 이어 《문학사상》에 「소녀유자」를 연재하고 1988년에는 「어느 낯선 별에서」 등을 발표한다. 1990년 ‘청맥’에서 「시습의 아내」를 개제한 장편집 『진눈깨비 결혼』을, <강천>에서 문학선집 『풀밭 위의 식사』를 출간한다. 1991년에는 <동화문학사>에서 콩트집 『모래와 모래 사이에 바다가 있다』를 출간하고, 안정효, 김지원과 함께 3인 중편집 『혼선』을 <경향신문사>에서 내놓는다.
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이후부터는 신문, 잡지에 영화 칼럼을 연재하며, 1992년 <우리 문학사>에서 영화칼럼집 『이제하의 시네마천국』을 출간한다. 1993년에는 <청아>에서 문학선집 『어느 낯선 별에서』와 소묘집 『바다』를 출간하고, ‘녹색갤러리’에서 ‘말과 바다와 여인’이라는 주제로 제2회 개인전을 갖는다. 1994년에는 ‘웅진’에서 두 번째 영화칼럼집 『괴짜들·짱구들·젊은 영화들』을 출간하며, 4월에 김채원, 송영, 서영은과 함께 한 달간 이라크, 지중해 연안도시 등을 여행하고 돌아와, <문학동네>에서 『사막…… 그리고 지중해에 바친다』를 출간한다.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로 팔아 연명하는 하릴없는 날품팔이”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에서 말한 하염없는 예인(藝人)과 같은 뜻일 것이다. 그는 하염없는 예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문학은 어떤 주의나 주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견디며 스며들고 녹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들과 떨어져 평창동의 한 집의 차고를 작업실로 개조해서 거기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를 따르는 후배들과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지낸다. 그는 애초부터 호구지책, 안락함, 사유재산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공명과 이익을 밝히는 현실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그는 대책 없는 보헤미안, 하염없는 예인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매우 희귀한 청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하 [李祭夏] - 기인 아닌 기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소설세계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
<dt>출처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2009. 9. 9., 나무이야기</dt>
2018 봄 정방폭포에서 이 제하와 초설ㅡ
수 년 전 샘이 갑자기 전화와서 제주도 놀러 갈래 하길래ㅡ바로 당근 ㅡ 샘과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우리 늙음 제주도에서 같이 살아요 했는데
작년 봄 샘이 성산포로 이사를 오셨다ㅡ그때 나는 서귀포에 있었고ㅡ
꿈이 현실이 됐는데 여름 날 나는 제주를 떠나 육지로 와 버렸다ㅡ
그리고 가을 ㅡ샘이 집을 하나 구했다고 빨리 오란다 비록 전세 몇 백에 년세 계약이지만 니 방도 있다고ㅡ그것도 샘의 작업실 바로 앞집
ㅡ가을이 저물 쯤 잠깐 갔다가 또 육지로 왔다 내 밥벌이를 찾아ㅡ어제 새해 인사겸 전화했더니 도시에서 고생하지 말고 먹고 자는 것은 해결되니까 같이 살자고 빨리 성산포로 오란다ㅡ참 나는 복에 겹다ㅡ샘이 그 누구에게도 같이 살게 오라고 하는 사람인가?ㅡ은둔과 고립을 병처럼 달고 사는 사람이라 작업실에서 거의 나오지도 않는데ㅡ마음이야 샘옆에서
깔작거리며 떨어지긴 싫지만 현실이 지금의 내 처지가ㅡ흑흑ㅡ샘!
가긴 갈거니까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ㅡ겨울만 되면 독감 달고 살지 마시고ㅡ
휴ㅡ성산포는 또 나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자 숙연인가?
첫댓글 두 기인들이 마주앉아 계시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