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에는 잇달아 명장이 나타났다. 조사(趙奢)와 염파(廉頗), 이목(李牧) 등이 그들이다. 이들 모두 당시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던 서쪽 진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가운데 이목은 대공을 세웠음에도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서쪽 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가 대공을 세우고도 참소로 인해 유배지로 가던 중 목숨을 끊었던 것과 사뭇 닮았다.
원래 이목의 발탁은 연나라의 침공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기원전 251년 연왕 희(喜)는 진나라 진소양왕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조나라와 합세해 진나라의 위세를 꺾고자 했던 것이다. 연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조나라는 일종의 병풍과 같은 구실을 하는 나라였다. 연왕 희가 상국 율복(栗腹)을 조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이같이 당부했다.
“경은 조나라로 가 조왕에게 500금을 바치면서 좋은 음식이라도 장만해 드시라는 나의 간곡한 뜻을 전하도록 하시오. 부디 두 나라가 서로 형제지국의 의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주시오.”
율복이 조나라로 가 조효성왕에게 500금을 바치면서 연왕 희의 말을 전했다. 율복은 조효성왕으로부터 무슨 선물이라도 받을까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조효성왕은 아무런 선물도 내리지 않은 채 통상적인 예로써 그를 대접했다. 율복이 사흘 만에 연나라로 돌아와 이같이 보고했다.
“조나라의 장정은 모두 장평 싸움에서 죽었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장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가히 조나라를 칠 때입니다. 틀림없이 조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연왕 희가 솔깃해했다. 곧 율복에게 명해 대군을 이끌고 가 조나라를 치게 했다. 조효성왕이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군신들과 상의했다. 상국 염파가 말했다.
“연나라는 우리가 지난번 장평 싸움에서 진나라에 패해 많은 군사를 잃은 것을 기화로 우리를 얕잡아보고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대왕은 15세 이상 되는 사람을 모두 동원하십시오. 율복은 공로만 탐할 뿐 장수의 지략이 없고, 부장 경진(慶秦)은 전투 경험이 없는 자입니다. 지금 안문(雁門)에 있는 이목은 훌륭한 장수가 될 만한 인물입니다. 이번에 신은 그와 함께 출전하고자 합니다.”
조효성왕이 염파에게 명하여 군사 8만 명을 이끌고 가 율복을 상대하고, 이목에게도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가 경진을 영격하게 했다. 연나라 군사가 지금의 하북성 조현 동북쪽의 송자(宋子) 땅에 이르자 염파가 정예병을 숨긴 채 노약한 병사만 골라 여러 곳에다 진을 치게 했다. 율복이 척후의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내가 원래부터 조나라 군사에 씩씩한 장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급히 조나라 영채를 치도록 하라!”
노약한 조나라 군사가 연나라 군사를 당하지 못하고 이내 도주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연나라 군사가 조나라 군사를 급히 뒤쫓았다. 연나라 군사가 6, 7리쯤 추격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조나라 정예병이 일시에 뛰쳐나왔다. 연나라 군사가 사방으로 어지러이 달아나다 무수히 죽었다. 염파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대(代) 땅으로 가 이목과 합세해 경진의 군사를 대파했다. 이후 여세를 몰아 북쪽으로 500여 리나 올라가 지금의 북경시 외곽 서남쪽에 위치한 연나라 수도 계성(薊城)을 포위했다. 새 상국이 된 장거가 염파를 찾아가 백배사죄하자 염파가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조효성왕이 염파를 성대히 영접한 뒤 이목을 대 땅의 유수로 삼았다.
대 땅은 흉노의 침공을 방비하는 요충지였다. 이목은 시장에서 거둔 조세를 모두 막부(幕府)의 수입으로 잡은 뒤 병사들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매일 몇 마리의 소를 잡아 병사들을 호궤했다. 또 기사(騎射)와 봉화 훈련을 엄히 시행하고 많은 첩자를 보내 적정을 탐문하면서 병사들 앞에서 이같이 약속했다.
“흉노가 경내로 들어와 노략질을 하려 들면 속히 가축들을 영루 안으로 몰아넣은 뒤 지키도록 하라. 만일 감히 흉노를 잡으려 하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참할 것이다.”
흉노가 침공할 때마다 봉화의 경계신호를 좇아 군사들이 재빨리 가축을 거두고 영루 안으로 들어와 굳게 지키며 교전하지 않았다. 이같이 하자 몇 년이 지나도록 가축을 한 마리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흉노는 말할 것도 없고 조나라 군사조차 이목을 겁쟁이로 여겼다. 조효성왕의 뒤를 이은 조도양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사람을 보내 여러 번 힐책했으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로한 조도양왕이 그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조나라 군사는 약 1년 동안 여러 차례 교전했으나 흉노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농사짓고 목축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다시 이목을 불렀으나 이번에는 이목이 병을 칭한 채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도양왕이 이목을 찾아와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하자 이목이 말했다.
“꼭 저를 쓰고자 하면 전처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감히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조도양왕이 이를 허락했다. 이목이 접전을 피하자 흉노는 이목을 더욱 더 겁쟁이로 여겼다. 조나라 병사들은 매일 푸짐하게 먹으면서 후한 포상까지 받는 상황에서 교전이 벌어지지 않자 흉노와 일전을 벌이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이목이 마침내 병거 1,300승을 정비한 뒤 말 1만 3,000필을 엄선했다. 이어 100금의 포상을 받을 만한 군사 5만 명과 활을 잘 쏘는 궁사 10만 명을 선발해 훈련을 시켰다. 마지막으로 가축을 넓게 풀어놓은 뒤 사람들을 들판에 널리 퍼져 있게 했다.
얼마 후 흉노의 소부대가 쳐들어오자 짐짓 패한 체하며 군민 수십 명을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흉노 선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수많은 부중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목이 유인전술을 구사해 흉노의 10여만 기(騎)를 궤멸시켰다. 흉노의 선우가 급히 도주한 뒤 이후 10여 년 동안 감히 조나라 변경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기원전 236년,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환기(桓齮) 등이 조나라를 쳐 업성(鄴城) 등을 공격해 9개 성읍을 취했다. 이때 조도양왕이 죽고 아들 천(遷)이 그 뒤를 이어 조유목왕이 되었다. 그의 모친은 원래 창기였다. 그녀는 조도양왕을 부추겨 적자 가(嘉)를 폐하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게 해 마침내 태후가 되었던 것이다.
2년 뒤인 기원전 234년, 진나라 장수 환기가 조나라 장수 호첩이 이끄는 조나라 군사를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쪽에 있는 평양(平陽)에서 대파했다. 호첩을 포함해 10만 명의 목을 베었다. 군신들이 입을 모아 조유목왕에게 건의했다.
“어찌하여 대 땅의 이목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조유목왕이 급히 이목을 불러 대장군으로 삼은 뒤 대 땅의 군사를 이끌고 가 진나라 군사를 영격하게 했다. 이목이 정병 5만 명 가운데 1만 명만 대 땅에 남겨둔 뒤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급히 영격에 나섰다. 그는 지금의 하북성 고성현 서남쪽에 있는 의안(宜安)과 인근의 비하(肥下)를 지키며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진나라 군사는 잇단 승리로 사기가 충천했다. 조나라 군사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목은 보루를 높게 쌓고 싸움을 피했다. 이목은 날마다 소를 잡아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활쏘기 연습만 시켰다. 군사들이 진나라 군사와 싸우게 해달라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조나라 군사가 의안의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싸움에 응하지 않자 환기가 조바심을 냈다. 이미 먼 길을 온 까닭에 지구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속전속결로 싸움을 매듭지어야 했다. 그는 비하 땅을 공격해 조나라 군사가 구원에 나서도록 유인한 뒤 영채를 급습하는 방안을 구사했다.
이목은 환기의 속셈을 훤히 꿰고 있었다. 비하 땅의 급보를 받았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았던 이유다. 당시 조총을 비롯한 조나라 장수들이 크게 흥분하며 속히 비하로 구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적이 의도적으로 요충지를 공격할 때 구원에 나서는 것은 적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이는 병법에서 크게 꺼리는 바다!”
당시 환기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비하를 공격하면서 일부 군사를 보내 의안과 비하의 통로를 차단했다. 주력부대를 이끌고 출정한 까닭에 본채의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나라 군사가 굳게 수비만 한 까닭에 이에 익숙해진 나머지 방비도 소홀했다. 이목은 이를 노렸다. 야음을 이용해 급습을 가했을 때 거의 무인지경(無人之境)이나 다름없었다.
비하에 맹공을 퍼붓던 환기는 본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했다.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다. 이목은 일부 병사를 시켜 정면에서 이를 막도록 하고, 주력부대를 양쪽으로 나누어 협공을 가하게 했다. 몇 차례의 접전 끝에 환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사는 대패하고 말았다. 사상자만 모두 10만 명에 달했다. 환기는 벌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연나라로 도주했다. 비하의 싸움은 전국시대 말기 천하통일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싸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로부터 13년 뒤 천하통일이 이루어졌다. 비하전투는 당시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진나라 군사가 일격을 당한 충격적인 전투에 해당한다.
당시 이목은 조나라가 패망하기 일보 직전에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패색이 완연한 상황에서 시종 침착하게 대응했다. 보루를 높이 쌓고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 것이 요체였다. 이는 〈군형〉의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충실히 좇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옛날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조치한 뒤 내가 적을 이길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내가 적을 이기는 여건이 마련될지 여부는 적에게 달려 있다.”
당시 조유목왕은 승전보를 접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교외까지 나가 이목을 영접했다.
“지난날 진나라에 무안군 백기 장군이 있었소. 경은 바로 우리 조나라의 백기 장군이오!”
그러고는 곧 이목에게 무안군(武安君)에 봉한 뒤 식읍 1만 호를 내렸다. 무안군은 종횡가 소진과 진나라 장수 백기의 군호(君號)이기도 했다. 이목이 무안군 백기와 똑같은 군호를 받게 된 것은 지금의 하북성 무안현을 식읍으로 받은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소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무안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목은 소진의 식읍을 봉지로 받았던 셈이다.
진나라 장수 백기의 군호는 땅 이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는 백기가 뛰어난 무공을 세워 사방을 평안히 만들었다는 취지로 작명했던 군호다. 이목은 같은 무안군이었던 백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당대의 명장이었다. 이런 명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조나라가 흉노와 접경하고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상무(尙武)의 기풍이 일찍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