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누구인지 모르고 전두환 물러가라 외쳤던 시위대
증 언 자 : 이수범(남)
생년월일 : 1957.(당시 나이 24세)
직 업 : 대입재수생(현재 개인택시 운전)
조사일시 : 198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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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이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였다. 우리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시국이 불안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당한 답변을 원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 당시에는 미국에 대해서 별다른 말들이 없었다. 나중에야 그때 당시에 왜 가만있었느냐고 해서 반미감정이 확대된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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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누군지 모르면서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외친 폭도
증언자:최인영(남)
생년월일 : 1963 1. 5(당시 나이 17세)
직 업:용접공(현재 용접공)
조사일시 19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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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탄 가스차는 다른 차와는 달리 차 윗부분에 문이 달려 있었다.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차문으
로 고개를 내밀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차는 이미 남평지서에 당도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남평지서는 예상외로 텅 비어 있었다. 경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린 것 같았다. 우리를 본 남
평 주민들은 무기고를 열 수 있도록 도끼를 갖다주기 도 했다. 경찰서 건물 뒤에 무기고라 씌어진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도끼로 무기·고 문을 열고 가지런하게 세워진 카빈총 20여정과 탄알 박스
7,8개를 들고 나왔다. 카빈총 사이에는 Ml 몇 정이 끼여 있고 수류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
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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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지프차 한 대가 교도소를 습격하러 가기로 했다면서 차에 타라고 했다. 차에는 '전두환
이 찢어죽이자!'라고 씌어져 있었다. 지프차,버스,트럭 등이 준비되고 시민군 1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여 차에 올라탔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교도소를 향해 가던 중 서방 부근을 지날 무렵이었다. 내가 탄 차는 운전사가
차를. 약간 돌려서 몰고 갔다. 직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기 쉽게 차를 돌린 것이었다.
차가 동신전문대 앞에 왔을 때 몇몇 시민군들은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 동신전문대로 간다고 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과 아저씨 7, 8명이 차에서 내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 차에서 얼른 내렸다.
우리는 동신전문대 운동장으로 갔다. 우리는 제각기 카빈을 들고 축구 골대를 향해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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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던 청소년 무장폭도
증 언 자 : 김행주(남)
생년월일 : 1964. 4. 12(당시 나이 17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도로공사 매표원)
조사일시 : 198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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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낮에는 신문 돌리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달리 사회경험도 많았고 자립심도 강했다. 1980년에는 광주상고 2학년으로 '코리아 헤럴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광주시내 전역을 다니며 수금을 하는 것이었는데, 마침 사무실이 충장로에 있었기 때문에 5·18 기간에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목격했다.
나는 1979년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5·18 당시도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었다. 그저 내가 다니는 신문사와 학교, 그리고 휴게실 같은 곳에서 소일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연일 계속되는 시위는 단조로운 내 생활에 변화를 주었다. 시내는 연일 엄청난 시민들로 들끓었고, 나는 시내 수금을 다니면서 가끔 시내의 시위대열에 호기심으로 끼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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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니 가로등이 환하게 켜졌다. 옆사람이 카빈을 주며 가로등 때문에 헬기에 우리가 노출이 된다며 가로등을 쏴버리라고 했다. 광주공원에서 서현교회 쪽의 길가 가로등 2개를 총으로 쏘아 깨트렸다. 처음 쏴보는 총이었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조를 짜기 시작했다. 기동타격대는 아니었고 그 시초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우리는 질서를 지켰다. 각 조에 차와 총이 배당되었다. 내가 있던 조에는 버스가 배당되었다. 우리 조에게는 일신방직에 가서 거수자 색출을 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우리는 일신, 전남방직을 살피러 갔다.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더니 수위가 나왔다. 그렇게 정찰을 하러 천변도로로, 라이트를 끄고 서행으로 운전을 하며 카빈을 들고 창밖으로 바깥을 살피며 갔다. 그때 나는 군중심리로 그렇게 총을 들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본 시체와 도청 앞에서의 그 상황은 나의 행동에 자부심과 의무감까지 갖게 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화정동에도 내려갔다. 그때 통합병원에서는 시민군들이 계엄군과 대치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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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누구인지 수사관에게 되물은 폭도
증 언 자 : 김용균 (남)
생년월일 : 1959. 12. 21(당시 나이 21세)
직 업 : 용접공(현재 농업)
조사일시 : 198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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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친구와 함께 지원동으로 갔다. 숭의실고 맞은편 건물 2층 옥상에서 다른 시민군 2명과 함께 외곽경비를 섰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쪽으로 빛이 스쳤다. 사방을 둘러보니 건너편 산밑의 딸기밭에서 5, 6명의 계엄군들이 딸기를 훔쳐 먹고 있었다. 우리는 계엄군들을 놀려줄 생각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보았다. 그중 한 명이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그들은 꽁지빠진 닭처럼 부상당한 동료를 데리고 급히 달아나버렸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해서 보초를 선 우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마침 담배가 떨어져 우리 건물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장갑차 안의 사람들에게 담배를 얻으러 가려는 참이었다. 건너편 숭의실고 건물 지하실에서 머리가 짧은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느낌이 스쳤다. 나는 옥상에서 그에게 "이리와 보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는 조금 걸어오다가 갑자기 담벼락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급히 옥상에서 내려가 총을 들이대며 "이리 나오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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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수사관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사관은 전두환의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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