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보는 역사 이야기]
‘술’과 ‘이태백’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李白: 이태백)의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일화 한 토막과 명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백은 젊은 시절 공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때 마을 입구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그녀는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었지요.
"무엇을 만들고 있나요?"
노파가 답했습니다.
"바늘을 만들고 있다네."
이백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노파는 정색을 하며 일갈했습니다.
"그만두지 않으면 가능하다네!"
이백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다시 산으로 돌아가 학문에 정진했다고 합니다.
"마부작침(磨斧作針)"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매달리면 마침내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이지요.
'이태백'과 '두보'는 중국에서 항상 대조되는 문인, 시인으로 이태백은 '시선'이라 불리었고, 두보는 '시성'이라 불리었는데 이태백은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라 즉흥적으로 지은 시들이 명작이 되었고 그는 수정이란 개념을 몰랐고, 반면에 두보는 열심히 자기가 지은 시를 몇 번이고 고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퇴고'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예술이란, 계획적이고 수정적이면 그 참맛이 상쇄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 본연의 감성과 본능이 시, 음악, 미술의 색감 등으로 표현되어야 참다운 예(藝)가 되지 않을까요.
계속 고치고 이성적으로 수정해 나가는 그 무엇은 예술이라기보다 논작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술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애주가였던 이태백의 "권주가"는 이런 면에서 훌륭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던들 하늘에 주성이란 별이 없었으리.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던들 땅에 주천이란 샘이 없었으리.
옛 말에 일러오네 청주는 현인에 통하고, 탁주는 성인에 통한다고.
내 이미 청주와 탁주를 마셨으니 내가 바로 현인이고 성인이 아니던가.
한 말 술 마시고 동산에 누우니 하늘이 이불인 것을.
- '권주가' 전문 -
한 말 술 마시고 하늘을 덮고 동산에 누웠으니 이것이 바로 호연지기가 아닐까요?
'이태백'이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늘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 '주태백'이라고 하니 과연 애주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풍류를 즐긴다고 하면 한량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요즘 같은 팍팍한 세상에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멋진 삶이 아닐는지요.
*이태백(李太白), 李白(701~762)
방랑생활을 하며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겨 두보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그가 지은 1,000여 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시의 소재로는 주로 여행, 이별, 음주, 달빛, 신선 등이 있으며, 시의 형식으로는 7언절구의 비중이 높다.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창밍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설,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20세 무렵에는 임협(任俠)의 무리와 사귀었으며, 칼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익주(益州:지금의 쓰촨 성에 있음)의 자사(刺史) 소정(蘇頲)에게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와 함께 민산[岷山]의 남쪽에 은거하는 등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20대 중반에 고향인 촉을 떠나 약 10년간은 안릉(安陵: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에 있음)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27세경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했다. 맹호연(孟浩然:689~740)과의 교제도 이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35세 무렵에는 산둥[山東]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 후 40세 무렵 공소부(孔巢父)·배정(裵政) 등 은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산둥의 추라이 산[徂徠山] 기슭 죽계(竹溪)에 모여, 술에 취해 생활했다. 당시 이를 '죽계의 육일'(六逸)이라 했다.
742년(天寶 1) 가을 처음 장안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친하게 지낸 도사 오균(吳筠)이 조정에 입조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된 듯하다. 장안에서는 우선 자극궁(紫極宮:도교사원)에서 당시 저명한 태자빈객 하지장(賀知章:659~744)을 만나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에 퍼졌다. 그 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정규직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이백의 일생 중 관직에 몸담았던 것은 이 시기이며, 이한림·이공봉 등의 호칭이 이때 나왔다.
조정에 나가는 일은 누구보다도 이백 자신이 희망했던 것이기는 했지만, 궁정시인으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황제 측근들과의 마찰로 인해 744년 장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 법도와 체면을 중시하는 궁정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백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굴절된 고독감을 느꼈다.
이 3년간은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다수의 작품과 다양한 체험으로 수놓아진 중요한 시기였다.
744년 봄 장안에서 나온 이백은 동쪽으로 향했으며, 그해 여름 뤄양[洛陽]에서 두보(杜甫:712~770)를 만났다.
두 시인이 만남으로써 서로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가 탄생되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흥미가 깊은 시기이다. 다만 상호 영향관계에 있어서 두보가 이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관계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의 나이차와 그 시점에서의 명성과 역량의 차이라는 일반적인 원인 외에도 같은 시대의 시인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달랐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
이백은 동시대의 시인을 언급한 시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두보는 같은 시대의 시인을 읊조린 경우, 그 시인의 작시 기량과 자질을 칭찬한 작품이 많다. 두보 및 고적(高適:702경~765)과의 직접적인 교유는 6개월 내지 1년 반 정도로 끝나고, 이백은 양쯔강[揚子江] 하류지역에서부터 다시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완전한 방랑생활은 아니었으며, 양원(梁園: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있음)과 산동성에 생활의 근거지를 두었다. 장안에서 추방된 후 약 10년간의 이 시기가 제2차 방랑시기이다.
755년(天寶 14) 11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12월 뤄양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은 촉으로 피신했으며, 황태자[肅宗]가 영무(靈武: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즉위했다. 당시 이백은 양쯔 강을 따라 선성(宣城: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에 있음)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장안이 함락된 56세의 겨울, 루산 산[盧山]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수군에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백은 안녹산을 토벌하기 위해 참가했다. 그러나 황실 내부의 분쟁으로 영왕의 군대는 적군(賊軍)으로 간주되었고 영왕은 살해되었으며, 이백도 체포되어 심양(지금의 장시 성 주장 시)의 감옥에 갇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단 석방되었으나, 대역죄가 추가되어 결국 멀리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으로 유배되었다. 759년(乾元 2년) 3월 이백은 야랑으로 가던 도중 양쯔강 상류의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사면 통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자유를 얻은 이백은 양쯔강 중류의 둥팅호[洞庭湖] 부근에서 시인 가지(賈至:718~772)를 만난 뒤 강남의 온화한 풍토에서 지냈다.
762년(寶應 1) 62세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후이 성에 속함)의 현령이었던 족숙(族叔:일족의 숙부 세대에 속함) 이양빙(李陽冰)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