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천로역정을 공예배에서 설교하는 교회를 대하며 -
에베소서 2장 1-10절 /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존 번연의 작품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 – 원제 : The Pilgrim’s Progress from :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이 세상에서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이르는 순례자의 여정) - 이란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A.D. 1678년에 출간한 기독교 우화소설로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스스로는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멸망의 도시에 사는 주인공 크리스챤이 장차 임할 멸망의 화를 손에 들고 있는 책(성경)을 통해 듣고 두려움에 있던 중 전도자를 만나 그가 안내한 좁은 문을 거쳐 천성을 향해 가는 중에 그의 진행을 막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며 중도 포기할 위태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게 되나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있어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죽음의 강을 넘어 영광의 나라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부는 크리스챤의 아내인 크리스티아나가 네 아이와 자비심이라는 젊은 처녀와 함께 남편 크리스챤이 간 뒤를 따라 천성으로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영국국교회(성공회)가 금지한 비국교도의 설교를 불법으로행하였다는 죄목으로 12년의 수감 생활을 하는 중에 쓴 17세기의 책으로 고전임에도 현대에서도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는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로역정이 작금에 교회 예배에서 설교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천로역정 설교, 천로역정 강해 등으로 1년여에 걸치는 긴 시간을 갖고 설교되고 있으며, 또한 천로역정 해설로도 출간되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는 교회들
천로역정이 예배에서 설교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과 비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천로역정을 예배에서 설교하는 교회들이 곳곳에서 있는 실정입니다. 그 설교에 있는 분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의 황제라 불리는 스펄전(C. H. Spurgeon)은 평생에 천로역정을 100번을 읽었으니 이 책은 영감의 근원이었으며,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인 사무엘 콜릿지(Samuel Coleridge)는 “천로역정보다 칼빈주의의 핵심과 그 목소리를 더 잘 드러내는 책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고, 개혁주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그레샴 메이쳔(J. Gresham Machen)이 천로역정을 극찬하였다는 것을 들면서 이 책은 구원의 책인 성경을 이야기식으로 압축해 놓은 것이며, 전개되는 이야기의 많은 곳에 성경구절들이 적혀있어 성경의 사상과 정신이 뼈와 살이 되어 농축되어 있는 것으로 제2의 성경이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장로교회의 삼대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과 같은 무게(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천로역정을 무슨 말로 표현하여 그 가치를 높이 사든 천로역정을 가지고 예배에서 설교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에서 말하여 알려주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인가?
천로역정은 기독교인 - 청교도 - 의 신앙을 다룬 소설입니다. 그것도 우화로 전개해 나간 소설입니다. 소설이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입니다. 그러한 소설을 예배 설교로 하다니요! 참으로 가당치 않습니다.
더욱이 그 설교에 문제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로역정에서의 장망성 – 장차 멸망의 화를 당할 성(도시)을 떠나 천성에 이르는 길에 오르면서 낙심의 늪 – 도덕(율법)의 언덕 – 좁은 문 - 해설자의 집 – 십자가 언덕 – 고난의 산 – 아름다운 집 – 겸손의 골짜기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 동굴 – 허영의 도시 – 물욕의 광산 언덕 – 곁길 초원 – 의심의 성 – 기쁨의 산 – 실족과 선명 봉우리 – 마법의 땅 – 쁄라 땅 – 죽음의 강을 건너 마침내 천성에 입성하는 자와 천성 문 앞까지는 이르렀지만 입성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몰락하는 과정(여정)을 내용으로 하여 성도의 인생 여정으로 보는 것과 함께 이를 죄의 각성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점진적인 성화 과정으로 이해하여 크리스챤이 역경의 난관을 헤치고 어렵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마침내 모든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천성에 입성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구원에 이르는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로역정은 의미를 지닌 장소에서 만나는 의미 있는 인물들을 만나는 것을 통해 천성에 가는 크리스챤을 교훈적으로 알려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장망성을 떠나 좁은 문을 통과하여 십자가의 언덕에서 무거운 죄의 짐을 벗기까지 거치는 과정과 만나는 인물에서 가로 막는 ‘자아’를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여러 경로에서 만나 상대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서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악마와의 싸움에 있으며, 죽음의 강을 건넘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천성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이를 글로써 그림 그리듯이 그려내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처한 역사적 배경에서입니다. 존 번연이 있던 당시의 영국은 헨리8세(A.D. 1509-1547)에서부터 종교의 변화에 있은 종교개혁기의 혼란을 겪습니다. 헨리8세는 케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영국교회는 로마로부터 분리되어 잉글랜드 국왕의 통치 아래 둔다는 수장령(A.D. 1534)을 내리면서 로마교황청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것이 영국국교회인 성공회입니다. 성공회는 정치적인 면에서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반카톨릭성향을 띕니다만, 그렇다고 종교적인 성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헨리8세 자신이 카톨릭 성향의 사람인데다가 제도와 예전을 비롯한 로마카톨릭교회 신앙의 형태는 대체적으로 그대로 가져나갔습니다. 그러나 헨리8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는 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6세 되는 이른 나이에 일찍 죽음으로 케서린의 딸 메리가 영국국왕이 되어서는 영국을 이전의 카톨릭국가로 되돌려 놓으며 반발하는 자들을 죽여 피의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메리 또한 6년 만에 후사가 없이 죽으므로, 그 뒤를 이어 앤 볼린의 딸인 엘리자베스(Ⅰ세)가 국왕에 오르며 성공회를 다시 영국국교회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인 성향에 의한 것으로 성공회와 로마카톨릭교회와의 극단적 대립을 막고자 하는 중용에 의한 정책이었습니다. 영국이 계속해서 카톨릭국가로 있으면 영국은 이미 비록 정치적인 목적의 성향이 강하였을지라도 개혁교회의 종교개혁 영향을 겪어왔던터라 영국국교회도와 청교도들에 의해서 끊임없는 반카톨릭운동에 직면하여 영국은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공회를 다시 영국국교회로 하되 자신을 교회의 수장으로 하여 영국국교회를 국왕의 통치아래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징적일 뿐 영국국교회는 영국 왕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교회)들로 존재하였으며, 영국의 민주주의 발달과 함께 수장령은 실질적으로는 사문화되었습니다.
영국국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은 찰스Ⅰ세가 성공회 신자였기에 계속해서 지속되었으나 교파 간의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찰스Ⅱ세가 뒤를 이어 통치하였는데, 부왕 찰스 1세 때인 A.D. 1642년에 시작된 청교도 혁명 - 청교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혁명 - 때 부왕이 처형당한 것을 겪으며 크롬웰 공화정 이후 영국의 왕정복고시대인 A.D. 1660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 그는 영국국교회만을 인정하였으며 영국국교회 성직자가 아닌 비국교회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이는 영국국교회인 성공회를 비국교회인 청교도인들의 대립으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청교도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했기에 찰세Ⅱ세 때 영국의 기독교적 상황은 영국국교회가 권한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청교도인이 배척되고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이때의 인물로, 비국교회인 침례교도로서 회중교회에 있는 분리파 청교도 신앙에 있었습니다. 그가 이 신앙에 있은 것은 그와 결혼한 아내가 지니고 온 몇 권의 청교도 서적과 성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것을 읽고 갖게 된 깨달음으로 청교도 신앙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존 번연은 영국국교회가 세운 성직자(주교)가 아닌 비국교회인이요 그것도 교회가 임명하여 세우는 사역자가 아닌 신자이면서도 설교를 하였으며, 그가 설교한 외침은 많은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영국 정부는 존 번연을 국가가 인정하는 합법적 설교자 외에는 설교를 금지한 법을 위반한 불법을 저지르는 자로 체포하여 투옥하기에 이르렀으며, 그에게 다시는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의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며 3개월 만에 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존 번연이 이를 거부하고 서명하지 않으므로 다시 투옥되어 12년의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여러 장소와 이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런 당시의 시대적인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우화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찰스Ⅱ세의 청교도인 배척 속에서 청교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로마카톨릭교회와 이와 유사한 영국국교회인 성공회의 신앙을 반대에 있었던 그가 당시 영국 교회의 실정을 직시하고 청교도 신앙을 다룬 책이 천로역정입니다. 그러기에 등장 장소와 등장 인물은 주인공인 크리스챤(청교도인)과 대비되는 자들입니다. 크리스챤이 이들과 부딪히면서 겪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두루마리 성경에서 받는 말씀인 참된 생명인 영생하는 천성을 향하여 신실히 믿음으로 나아가는 청교도인들을 나서서 가로 막는 국가의 세력과 그 지배 아래서 종교개혁의 탈을 쓰고 외식의 위선에 있는 영국국교회, 그리고 사단의 노예인 로마카톨릭교회가 있습니다. 이 모두에 둘러싸여 당하는 싸움에서 바울이 표현한 바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 4:12)를 말하고자 함에 있은 것이 천로역정의 실상입니다. 천로역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인 영광스런 천성에 입성하는 이들 앞에서 두루마리 성경에서 주시는 말씀인 참된 생명인 영생 얻는 믿음에 있지 않은 실상은 악한 죄의 세력인 모든 자들 – 존 번연 당시 반청교도인 - 은 천성으로 들어가는 문과 다른 문인 지옥으로 들어갈 것임을 죽음의 강을 건넜으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의로운 자임을 확증하는 증서 - 천로역정을 번역한 어떤 번역자나 설교자는 이 증서를 '천국허가증' , '또는 신분보증서' 등으로 표현하나 적절하지 않다 - 가 없어 천성 문 앞에서 입성을 거부 당한 '무지'란 인물을 통해 의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참조, 마 3:12; 막 9:43, 48; 눅 3:17; 계 20:10, 14, 15)로 묘사되고 있는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에 있게 될 것에서 입니다(참조, 마 8:12; 13:42, 50; 22:13; 24:51; 25:30; 눅 13:28)
천로역정에서 표현하지 못한 것
그런데 천로역정이 표현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영생하는 천성에 들어가는 여정에 있는 이것이 창세전에 품으신 그리스도의 피에 두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그 피 공로를 입은 자가 그분 안에서 이미 천성에 들어가 있어 천성을 소유한 복에 있음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은 이 관점에서 저술해 나가고 있지 않음으로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관점인 영생하는 생명을 얻은 구원과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크리스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의의 고난에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평강의 즐거움에 있는 믿음이 펼쳐져 전개되는 삶에 의도가 있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천로역정에서 보는 것은 단지 영생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주인공 크리스챤이 하나하나의 위태한 과정에서 위기를 넘기며 다행스럽게 잘 헤쳐 나가 마침내 영생하는 천성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를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의 삶으로 적용하게 하는데, 천성을 바라보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인생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유혹을 뿌리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며 세상의 욕망을 좇지 않고 사악한 마귀와의 싸움을 이겨나가고 죽음을 각오하고 목숨을 바쳐 자신을 희생하면 마침내 천성에 이르고 주님의 영접을 받아 주님과 함께 들어가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신실한 믿음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 표현하지 못한 또 하나가 있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로마카톨릭교회를 답습하고 있으며 개혁주의는 단지 이름만 취하여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일 뿐인 영국국교회를 개혁하고자 함에 있은 청교도의 신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당시 유럽에 물결치고 있었던 개혁교회가 지니고 오는 신앙을 말해주고는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청교도인이 칼빈주의의 신앙에 있는 사람들로 말해집니다만, 이는 칼빈주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인 것에서 이며, 정통 또는 순전한 칼빈주의자인 것에서는 아닙니다. 이는 청교도인이 추구하는 교회정치가 칼빈주의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성경관을 비롯하여 교리적이고도 신학적인 여러 면에서도 차이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로역정에서 나타나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로역정이 교회 예배에서 설교되어지며, 그 근거로 성경 구절을 본문으로 삼고서는 정작 설교 내용은 천로역정의 내용을 성경과 접목하여 풀어 설명하며 여기에서 진리의 교훈을 받게 한다는 것이 실상은 진리의 본의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으로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아 인식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로운 삶에 있는 그리스도인 이해
구원 얻는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영생하는 천성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그에 따른 여정은 천로역정을 통해서 혹자가 해설하고 이를 설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인 에베소서 2:1-10에서 보게 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다보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던 죄에서 헤어나지 못해 영원한 파멸을 코앞에 두고 살던 사람들로, 세속적인 풍조에 젖어 살았고, 마음에는 죄악만이 가득 차 공중을 다스리는 세력자인 사단에게 붙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할뿐이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지 못할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생활은 곧 우리가 품고 있는 악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우리의 욕망은 악한 생각이 이끌어 가는 대로 악한 일만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없이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처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히셨듯이 우리를 무덤 속에서 일으켜 영광가운데로 인도하였고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풍성함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에게만 아니라 오는 모든 세대에게 알리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처럼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일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여 댓가로 받은 보수가 아니므로 그 누구도 자신의 선행을 내세워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로 나오게 하여 구원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하셨으며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삶을 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이 일은 이미 오래 전인 계획하신 것의 실행에 계신 것이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한 실현이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히브리서 11:8-10, 13-16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멀고 먼 유업으로 받을 땅 가나안으로의 여정과 거류에 있은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며, 또한 약속하시고 나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비로소 약속을 실현할 일을 준비해 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창세전에 계획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의 실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현재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인 영원부터 정하시고 그 실현에 있어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하나님의 약속인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믿음으로 바라봄에 있은 것은 그렇게 되어질 것을 마음에 기대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지상 너머 하늘의 세계에 우뚝 선 영원한 성을 보고 있는 것에서입니다. 그 아브라함 때에 오늘의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 있다면 이 찬송을 부르지 않나 싶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 하여도
하늘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 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
*2021. 10.3. 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