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3. 고산서당과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
글·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2021년 12월 20일 새벽 3시 경, 대구 수성구 성동 고산서당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강당이 전소됐다. 1868년(고종 5) 훼철된 고산서원 사당을 지난 2020년 7월, 153년 만에 복원한 지 1년여 만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다. 다행히 사당 숭현사는 화마를 피했지만 대구시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고산서당 강당은 잿더미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구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고산서당이 걸어온 그간의 역사를 고산서원·서당 소장 ‘기문’ 자료를 통해 한 번 정리해본다.
고산서재→고산서원→고산서당
고산(孤山)서원은 수성구 성동 산 22번지에 있다. 뒤는 고산이요, 앞은 넓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남천과 금호강이 흐르고, 멀리로는 초례산이 한 눈에 조망되는 명당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 전인 1500년대 중·후반. 당시 경산현령이었던 윤희렴이 이 터에 ‘고산서재’를 처음 세웠다. 고산이란 이름은 윤희렴이 퇴계 선생께 부탁해 받은 것인데, 퇴계는 이름 외에 친필로 ‘구도(求道)’라는 문 이름도 써주었다. 친필 구도는 편액으로 제작해 서재 문에 걸었는데 임란 때 소실됐다. 이후 퇴계 글씨를 모각한 구도 편액을 다시 걸었는데 이번 화재로 한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1605년(선조 38) 임란으로 소실된 서재를 중건하고, 1690년(숙종 16) 서재를 ‘고산서원’으로 승격시키고, 1697년(숙종 23) 퇴계와 우복 양 선생 위패를 봉안했다. 하지만 1868년(고종 5) 고산서원은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됐다.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879년(고종 16), 지역 사림이 중심이 되어 옛 터에 건물 한 동을 짓고 ‘고산서당’이라 이름 했다. 1984년 대구시문화재자료가 됐고, 2020년 7월 사당 숭현사를 복원하고 선현의 위패를 다시 봉안했다. 이때 봉안한 위패는 3위로 기존 퇴계·우복 양 선생 외에 동고 선생이 추가됐다.
조선 중기 경산현 큰 스승, 동고 서사선
서사선(徐思選·1579-1651)은 본관이 달성, 자는 정보(精甫), 호는 동고(東皐)다. 달성서씨 세거지인 대구부 남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26세 때 처가가 있는 경산현 동산(東山) 아래로 이거했다. 동고라는 호는 그가 거처했던 동산 아래 동고정사(東皐精舍)에서 유래된 것.
그는 조선 중기 대구 큰 선비였던 낙재 서사원의 사촌동생이자 제자였다. 서사원보다 29세 아래였던 그는 7세 때부터 서사원이 세상을 떠난 37세까지 서사원에게 수학했다. 이후에는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모당 손처눌 등을 종유하며 그들의 뒤를 잇는 걸출한 선비가 됐다. 특히 그는 조선 중기 경산현의 유풍(儒風)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가 활동한 강학공간 중 대표적인 곳이 고산서재다. 그는 고산서재 교칙에 해당하는 학규를 제정했고, 오랫동안 고산서재 강학을 주도했다.
고산서원에 퇴계와 우복 양 선생의 위패를 모신 것은 양 선생이 고산서재에서 강학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숭현사에 양 선생과 함께 동고 서사선을 추향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선생의 위패가 퇴계와 우복 양 선생 곁에 놓이는 데는 369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기문에 나타난 고산서원·서당 내력
현재 고산서당에는 ‘서재→서원→서당’으로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고산서당이 지나온 내력을 한 번 살펴보자.
구도문기(求道門記)
1789년(정조 13) 당시 경산현령 김재구가 지은 글이다.
내가 일찍이 고산서원을 방문해 ‘구도’ 편액을 보고 한 선비에게 물었더니 “퇴계 선생께서 서재 이름을 고산, 문 이름은 구도라 짓고 글을 써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부임할 당시 서원에는 문이 없었다. 그래서 정도권이 주도해서 문을 다시 세우고 퇴계 선생의 글자를 모각한 구도 편액을 매달았다.
묘우중건기(廟宇重建記)
1818년(순조 18) 고산서원 묘우 중건 때 그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서종간(徐宗幹)이 지었다.
고산서원은 퇴계·우복 양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했다. 묘우는 1644년 발의, 1690년 창건, 1697년 위패를 봉안했다. 1737년 중건, 1776년에 중수했다. 1818년 3월, 다시 중수했는데 이때 대들보 안에서 1690년 묘우 창건 때와 1737년 중건 때 임원 명단이 나왔다.
동서재중수기(東西齋重修記)
1843년(헌종 9) 고산서원 동·서재 중수 때 퇴계 후손인 경산현령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가 지은 글이다.
일찍이 듣건대 퇴계 선생 행차가 이곳을 지날 때 서재를 고산이라 하고 구도 두 글자를 써서 선비들을 격려했다. 서재 일기에는 1690년에서 1818년까지 서원에 공이 있는 자의 성명이 모두 남아 있다. 1690년 처음 묘우를 세운 자는 진사 한홍익이요, 1737년 중수한 이는 서도기, 1776년 중수한 이는 서광렴, 1788년 문루를 세운 이는 정도권이다. 1804년 문루를 중수하고, 1818년 묘우를 중수했다. 1842년 여름에 불초가 이 고을 현령으로 부임하고, 1843년 봄 서일복 원장의 청으로 동·서재를 중수했다.
고산서원 훼철시장(毁撤時狀)
1868년(고종 5) 고산서원에 내려진 철폐령에 대해 경산 사림을 대신해 경산현령을 지낸 이휘재가 작성한 문서다.
고산서원은 경산현에 하나 있는 서원임에도 훼철의 명이 내렸다. 고산서원은 퇴계·우복 양 선생과 명나라 장수 이삼성이 강론한 곳이자, 임란 때 왜적의 이동로에 있었음에도 약탈당하지 않았다. 감히 천리 먼 길을 달려 죽음을 무릅쓰고 호소하니, 엄한 명령을 거두어주소서.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문(退陶李先生愚伏鄭先生講學遺墟碑文)
1872년(고종 9) 당시 경산현령 이헌소가 지은 비문이다.
고산서원은 퇴계·우복 양 선생께서 강학한 곳인데, 1868년 국령으로 철폐되고 위패는 서원 뒤에 묻었다. 풍수가들이 이 터를 넘겨다보는 일이 많아 지역 선비들의 청을 받아들여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유허비를 세웠다.
고산서당 상량문·창건기사·고산서당기
1879년(고종 16) 고산서당을 복원하고 그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상량문’과 ‘고산서당기’는 퇴계 후손이자 당시 경산현령인 이만승의 글이다.
○ 고산서당 상량문 : 고산은 퇴계 선생께서 왕래하신 유허지고 ‘구도’ 친필 현판이 걸린 곳이다. 하지만 서원철폐령으로 글 읽는 소리가 끊어졌다. 이후 관청의 도움과 서당계 결성으로 재원을 마련해 서당을 중건하게 되어 상량문을 쓴다.
○ 고산서당 창건기사 : 경산 현소 북쪽 십리쯤에 고산이 있으니 퇴계·우복 양 선생께서 머물렀던 곳인데 국령으로 훼철됐다. 이후 현령이 나서 서원 옛 터에 서당을 세웠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선비들이 의지할 정도는 되니 이를 이어가는 정성은 훗날 군자들의 책임이다.
○ 고산서당기 : 고산서원은 나의 선조 퇴계와 훌륭한 선비 이삼성 제독과 우복 선생이 강회를 연 곳이다. 현령 이헌소가 선생의 흔적이 없어질까 염려해 유허비를 세웠다. 경산은 산남(山南)의 조그만 현에 불과하지만 고산에 나의 선조 퇴계 선생이 오시면서 유명해졌다. 이름은 처음대로 고산이라 하고 재(齋)는 오산(吾山)이라 했다. 아들 중철(中喆)이 쓴 ‘고산서당’ 편액을 걸었다.
에필로그
이번 화재로 142년 된 강당 건물은 물론, 강당에 걸려 있던 여러 현판도 모두 사라졌다. 퇴계 친필을 모각한 ‘구도’, 경산현령 이만승의 아들 이중철이 쓴 ‘고산서당’, ‘고산서당창건기사’, ‘고산유허서당기’, ‘구도문기’ 등이다. 현재 고산서당은 ‘고산서원·서당 유림회’를 중심으로 서원 승격을 추진 중에 있었으며, 조만간 인근에 가칭 ‘고산서당 전통문화교육관’이 건립될 예정이었다. 앞서 소개한 ‘동서재중수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고 선생의 후손인 달성서씨 문중이 고산서원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밝힌 글이다.
··· 서일복 원장의 6대조인 동고공은 한강의 문하로서 이름이 서원 기록에 남은 것이 여러 번이다. (중략) 그 뒤를 이어 여러 차례 중수하여 한결같이 서원을 지킨 것이 그 가문의 사람이니 어찌 선배의 교훈이 여태껏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지금보니 원고를 잘 못 올렸네요.
원고 작업 중에 고산서당에 화재가 나서 조금 수정했었는데,
그 원고가 아닌 처음 원고네요.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