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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수필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를 밤새워 읽었습니다.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시골마을로 찾아가 자신의 황토집-언젠가 TV에서 그 시인이 사는 모습을 보았지요 - 을 짓고 홀로 살고 있는 홀아비 시인입니다. 『접시꽃 당신』으로 불리던 시인은 전교조활동으로 직장을 잃고 복직을 하지만 다시 그만두고 홀로 시골로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홀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숲과 산짐승과 교감하는 청안(淸安)한 삶을 강조하고 쉬지 않고 청안, 청안을 얘기합니다.
시인이 자주 끓여먹는다는 조미료 하나 들지 않은 배추된장국 같은 글이라 읽다가 언제 책장을 덮어도 그만이지요.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법정스님의 수필이나 임의진 목사의 『참꽃 피는 마을』의 산문들을 무척 닮았습니다.*1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둘의 어중간 쯤 될 듯합니다. 『참꽃 피는 마을』은 임목사가 살고 있는 남도사람들의 목가적인 모습을 그렸는데 등장인물이나 행동글이 많아 이 글보다 번잡스럽고 동적이라면 법정스님의 글은 하안거에 든 것처럼 가라앉아 있지요.
홀로 산다는 건 참 만만찮은 일입니다.
혼자 밥 짓고, 빨래하고 아프면 혼자 약 사먹고 혼자 병원에 가고 혼자 먹자고 차리는 밥상을 상상해보았습니까? 그러니 자연 참새와 까치와 생강나무와 다람쥐 고라니들과 교감하며 살게 됩니다. 겨울밤 듣는 바람소리 이른 봄 숲이 움트는 소리, 꽃과 잎새의 변화를 인디언처럼 더 잘 읽고 있겠지요.
나도 철저히 홀로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처럼 홀로 살 때가 자꾸 생각나더군요. 물론 똥폼잡으며 소설 쓰려고 그랬지요. 몇 달 독서실에서의 생활을 빼더라도 동화사 내원암에서, 하회마을에서, 그리고 지금 얘기하고픈 안동 지례창작예술촌에서의 생활이 그것이지요.
20여 년 전 임하댐이 생기기 전 여름 한철을 보낸 곳입니다. 그 땐 보조댐쪽으로 덜컹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몇 시간이나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랍니다. 안타깝게 지금은 수몰되었지만 그 강가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지요. 숱한 물고기와 바위와 산과 들 그리고 강가에 살고 있는 어진 사람들의 꿈. 그 아름다운 강변 수십 리가 사라지면서 예술촌은 물에 잠기는 고가들을 산중턱으로 옮겨 조성한 곳이랍니다. 그때의 전경, 그 마을의 모습은 쓰다만 장편소설 『미이라』*2 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 ♣ ♣
처음엔 조금은 비장하고 들뜬 열정으로 임동의 하찮은 풍광에 홀리고 도연의 물줄기와 선창의 물살에 깎인 부드러운 바위들에 감탄하며 왔던 길이었습니다. 물밑 어느 돌들을 가만히 들춰봐도 뭇 생명체가 꼬물거리듯 어느 산모퉁이 어느 산자락을 돌아도 밭을 일구며 키 작은 버섯처럼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볼수록 새롭습니다. 그러나 어느 스러져가는 종가의 역사처럼 하나 둘 도시로 떠난 자리는 한여름임에도 을씨년스럽고 보수 한 번 안한 길은 무슨 유배지의 길만큼이나 험난하고 처연했습니다.
미구에 물에 잠겨 아득한 시대의 전설로나 남을 반변천(半邊川)의 사람들은 먼저 떠난 이웃들을 따라 가을걷이가 끝나거나 혹은 내년이나 해서 풀씨처럼 하나 둘 어디론가 떠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끊겨진 잉카의 마추픽추나 피사크의 폐허로 남아 영원히 물에 잠겨 어느 초인의 예언대로 물이 다다른다는 임하(臨河)가 될 것입니다. 해서 몇 달여 머문 지례에서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애잔한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지나쳐 온 지례의 풍경을 추억함에 있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내가 머물고 있는 제실 대청에서 바라다 본 시린 하늘과 산등성이 위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평화롭고 한없이 아늑하게 느껴지던 뭉게구름일 것입니다. 순백의 고적운과 이 계절의 왕성한 푸르름, 가을 개여울같이 정갈한 아침 햇살과 나뭇잎에 부서지던 햇빛의 난반사며 대청 가득하던 하오의 무한정의 정적.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과 나무, 풀잎들의 하늘거림과 아쉬운 듯 계절이 시간이 가는 것을 소리쳐 항거하는 매미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있습니다.
또 하나.
아직은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으로 남아 있는 이 곳 아이들과 들꽃을 꺾고 나무 이름과 꽃들의 전설을 외며 좁다란 산길을 걷던 일입니다. 내가 이곳을 떠나고 다시 아이들이 도회로 떠나도 이들의 눈망울과 잠자리 날개 같은 투명한 몸짓들은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한낮의 폭염이 가라앉고 마을 아래로부터 산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이면 아이들은 하나 둘 내가 기거하는 제실 근처로 모여듭니다. 이젠 많은 동무들이 대처로 떠나가 사다리나 오징어놀이하기에도 짝이 모자라는 아이들에겐 긴 여름날이 무척 무료했을 것입니다. 아직 댐에 물을 가두진 않았지만 하루라도 먼저 새 삶을 찾아 황망히 떠난 마을은 헹뎅그렁했고 윤기나던 떠난 이웃의 마당은 두더지가 파헤치고 명아주 애기똥풀 바랭이 따위가 보기에도 민망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마을은 더 이상 놀이터가 못되었고 아이들은 사람이 그리웠을 겁니다. 그들에겐 이제 풀 뜯길 소도 없습니다. 소를 키우지 않거나 있어도 사료를 주어 아이들에게 남은 건 곧 떠나야할 산하를 둘러보고 떠난 동무들과의 지난 추억을 반추하는 일일 것입니다.
--피감자 삶은 건 없니? 나는 그걸 좋아하는데.
말없이 옥수수 한 자루를 건네주는 여자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했을 때 그 아이는 덧니를 내보이며 그저 생긋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장 길을 떠납니다. 무슨 순례자처럼 익숙하게 산길을 오르면 이리저리 풀무치가 튀어 오르고 비단벌레가 우리가 걸어야 할 오솔길은 인도합니다. 아이들은 신이 납니다. 고상받기 하던 곳이며, 어디어디에 머루나무가 있고 산복숭아가 있는 지를 앞서가던 아이가 일러줍니다. 풀꽃을 꺾고 쓰르라미를 잡으려 아이들은 발소리를 죽입니다.
--순식이 알아요?
느닷없이 한 아이가 내게 묻습니다.
--순식이?
--예. 순식이요.
--모르겠는데, 누군데?
--여기 살다가 전번에 이사 간 내 친구거든요. 걘 감자묻이도 잘하고 말똥구리도 참 잘 잡아요. 아저씬 말똥구리 잘 잡아요?
까만 눈망울로 다시 내게 묻습니다. 손끝을 스치며 날아간 쓰르라미를 바라보는 그런 눈길로 아이는 먼데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얀 뭉게구름이 그 하늘을 메우고 있습니다.
내게도 그런 유년의 동산이 왜 없겠습니까. 밤새도록 나누어도 못다 할 아름답고 소중한 그런 추억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황홀한 몸뚱이의 사슴벌레를 어느 참나무에서 잡을 수 있는지. 어느 산골짜기에 산나리가 자라고 비 피하기 좋은 아늑한 바위굴이 있으며 또 어디에 자수정과 돌비늘이 자라고 찰흙이 있는지. 어느 여울목에 찬란한 비늘의 피라미가 물살을 따라 오르고 발에 밟힌 모래무지는 어떻게 잡는지.
기억합니다. 노오란 꾀꼴버섯이 어디서 자라는지를, 눈 부비며 달려가 줍던 감꽃의 차갑고 잇몸이 다 간지러운 보드라운 촉감까지도. 아직 손에 잡힐 듯 선연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3 이제 소용없고 어쩜 영원히 누구에게도 설명할 길 없는 것들을 간직한 채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혹은 기억할 것입니다. 어느 도심의 속셈학원에서, 혹은 더 자라 어느 바람불고 비 오는 날 따뜻한 다방의 창가에서 그들의 연인과 마주앉아 찻잔을 젓다가, 아니면 캐럴이 울리는 도심 그 인파의 거리를 걷다가 무심히 안개가 내리던 이 고향의 동구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물이 마을 어디까지 잠긴다던가.
우린 산정에 올라 조용히 마을을 내려다봅니다. 한때는 현란한 추억과 아름답고도 슬픈 애증의 자리였으나 이제는 오직 가슴으로만 간직해야할 땅을 봅니다. 모두 말이 없습니다. 비행기 하나가 소리도 없이 파란 하늘 저쪽으로 날아갑니다. 하얀 비행운을 피우며 높이높이 고적운 저쪽으로 날아갑니다. 파아란 하늘과 반짝이는 비행기에서 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던 막연한 동경과 그리움……. 이 아이들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서 여길 떠났으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이들 중 누구는 고향의 가장 소중한 기억과 추억을 빈 콜라병에라도 담아 이제 물밑이 될 그들의 놀이터와 집 어디에 묻어둘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아무도 알지 못할 그만의 비밀 한 조각을 남겨둔 채 이곳을 추억할 것입니다.
바람 한줄기가 이윽고 들판을 지납니다. 곡식들은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내맡겨 뒤척입니다. 그 바람결에 곡식은 더 단단히 익어갈 것입니다…….
소설『미이라』의 -편지- 중에서
이제는 물속에 잠겨버렸지만 의성김씨 집성촌인 박곡리*4 마을은 참 아름답고 모든 것이 풍성하였지요. 지금은 영덕방면으로 가다가 가랫재휴게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그 이정표가 있고 그 길을 따라 30분쯤 달려야 나옵니다. 숱한 얘깃거리와 밤새워도 다 말 못할 추억이 있는 곳이지요. 나는 그곳에서 시인들을 만나고 작가를 만나고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 자연은 사람을 그립게 하고 그래서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제 눈 스스로 멀게 했는지 모릅니다. 외로움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아내와 덜컹 가까워졌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즈음 듭니다.
아래 시는 그때 함께 기거하던 여류시인에게서 얻은 것이랍니다. 아내가 적어와 결혼기념패에 깊이깊이 새겨두었지요.
두고두고 사랑아
山菊 무더기로 핀
평화로운 오솔길 우리 걸으며
이리 맑은 하늘
이리 참한 풀
이리 고운 새
이리 순한 꽃들을
정답게 나누고 싶구나
다래넝쿨 칡넝쿨 꺾어주며
아무 말 없고 싶구나
그냥 보고만 웃고 싶구나
너랑 나랑 그냥 보고 그냥 손잡고
이대로 착한 짐승이고 싶구나
두고두고 사랑아
도종환의 수필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읽으며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건 그 시절의 내 모습이었습니다. 이 시인처럼 혼자 의식주를 해결하거나 사람들이 옆에 없지는 않았지만 고독한 정신은 철저히 백척간두에 걸려 있었던 때- 그러나 오직 소설에 몰두한다며 책상 앞에 멀쩡한 육신을 가둬놓고 고뇌한다고 소설이 써지진 않지요. 위의 편지글처럼 하루 종일 대청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과 푸른 산을 보는 날도 있었고 지는 석양을 보며 눈물 흘린 날도 있었으며, 삶은 감자 같은 자갈이 깔린 강변을 헤맨 적도 있습니다. 때론 고기 잡는 사람들을 따라 소중한 한나절을 보낸 적도 있었으며 비 오는 날 선창에 나가 종일 물에 몸을 담근 날도 있었습니다.
시인처럼 그렇게 자연 속에서 홀로 살았던 그 때가 정말 청안했던 삶일까 자문해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새벽 별을 보며 일어나 반변천을 나서도 정신은 아직 안개 자욱한 미명일 뿐이었습니다. 홀로 들길을 걷고 꽃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의 행렬을 보며 정말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옳을까, 친구들은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는데 이 형체도 없는 추상의 글로 과연 일가를 이루며 한평생 살아 갈 수 있을까 회의하곤 하였지요. 별 재능도 없이 소중한 세월을 죽이는 게 사치는 아닌지 한없이 절망하며 불안한 삶을 살았던 그 젊은 날은, 청안하진 않았지만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볼수록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1 법정스님과 임의진 님의 수필집은 과분하게 모두 선물로 받았지요.
*2 영화 [미이라]가 나오는 바람에 김이 새서 쓰다 말았음.
*3 얼마 전 예술촌 김원길 시인께 전화를 했는데 그 코흘리개 아이들이 서른이 넘어 장가가고 시집가고……소설 『내원암』의 이연스님의 泥蓮은 박곡리에서 만 난 여자 아이의 실제 이름. 그 아이 언니는 “보름”인데 걘 동네 조무래기를 모두 제 동생 돌보듯(햐! 자기도 아직 어린데 칭얼대면 알뜰히 조곤조곤 달래주고 코닦아 주고) 하는 정말 심성 곱고 마음씨 넓고 예쁜 아이였는데 난 지금도 그 아이가 탐이 날 지경이야.
*4 몇 가구 되지 않는 그 조그마한 산촌에 포항공대 초대총장이신 김호중 박사를 비롯하여 박사만 무려 30여 명 배출. 놀랍지 않은가? 그땐 중학생이 되면 안동에 나와 자취하며 공부를 했는데 주말마다 40리는 족히 넘을 안동까지 일주일 먹을 것 싸들고 걸어 다녔다는데.
첫댓글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는 두산 씨에게서 선물 받은 책인데… 어떻게 이 원수를 다 갚지?
도종환시인님도 교사출신 시인이라 하지요?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도 교사시구요. 샘께선 수학샘이신데 국어샘처럼 문장이 화려하시네요? 글을 읽을때 마다 놀라곤 합니다. 민턴에 감동 먹을라 햇는데 문장력에 감동을 먹게되네요 ㅎㅎ 오래전에 도종환 시인의 책을 좀 읽었지만 요즘은 워낙 게을러서 읽어보질 못하네요. 함 읽어보렵니다.
원하신다면 이 책 빌려 드리겠습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두산 씨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읽길 원할 겁니다. 두산 씨의 지적이고 따뜻한 마음에 거듭거듭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내게 있는 책 중에 혹 원하는게 있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드리거나 빌려드리겠습니다.
저희집 주소갈쳐드릴까요..
아니, 예천에 오셈.
오늘 오실때 그대 언제 이숲에 오... 첵관으로 가져오세요..아니 문자 보내는게 빠르겠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대학 국문과 합격을 취소한채 배낭 두짐 등에 매고 무작정 발길을 나섰는데...배낭 한짐은 생필품이었고 또, 한짐은 책 보따리였죠~~경상권, 강원권을 돌아다니며 어느 중소도시의 헌책방을 디지며 책을 사는 재미도 있었거니와, 한참을 걷다가 어느시골 버스 정거장에 앉아 책읽는 재미가 그때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는거 보니 감정이 매말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없는 전화를 받아보며 목적없이 여행을 하는건 무의미하다고 주위에서들 말하였는데 저는 4개월동안의 여행이 끝난뒤 목적이 생기덥디다. 강샘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 오롯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 살맨에게 술 한 잔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호~~~저야말로 오롯이 영광이죠~~ㅎㅎ근데, 두잔 사주시면 안될까요??키키키
언제 시정잡배 같은 껍데기들 물리치고 오롯이 둘만의 시간 가질 수 있을까요?
市井雜輩 같은 무리들을 물리치려면....음....저부터 펀둥펀둥 놀지 말아야겠어요...ㅎㅎ 요즘 중심을 잃었어요~항상 우유부단하고...민턴 치는것도 갈피가 안잡히고...ㅎ ㅑ~~좋은 방법 없을까요??^^
새 글 올려 주시와요. 기다립니다.
맞어~~새글 올려주시아요~~ㅎㅎ
차라리 민턴을 한판...
오~~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조회수 120회 리플 14개...인기가 가장 좋은데요...ㅎㅎ 달려~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