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가 사라지다
이경애
대대적으로 집 안 정리가 한창일 때, 쓰레기양이 늘어 며칠간 부득이하게 현관 밖 상자에 모았다가 저녁에 한꺼번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버릴 때 보면 상자 안의 쓰레기가 몇 개씩 사라졌다. 처음엔 별 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지만, 쓰레기양이 줄어드니 편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 일이 반복되자 공포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듯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종이 수거하는 분이 가져갔나?
누군가 우리 집을 감시하나?
쓰레기를 뒤지면서 뭔가를 캐내고 있는 것일까?
이 해괴한 일은 도대체 누구의 짓일까?
살다가 별일도 다 겪는다. 쓰레기가, 그것도 조금씩 없어지다니. 그날 이후로 내 신경은 온통 현관 밖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현관문 걸쇠를 걸어둔 채로 문을 열었다.
"앗!"
현관문이 그의 엉덩이를 미는 바람에 그와 내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였다. 앞집 할머니.
그녀는 계단에 놓여있는 우리 집 쓰레기 상자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걸쇠를 열고 나가 인사했다.
"내 쓰레기가 몇 개 안 돼서 버리러 가는 김에 여기 있는 것도 좀 버리려고요."
친정엄마 연령대의 바싹 마른 할머니가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앞집 할머니는 1인 가구로 가끔 자녀들이 다녀간다. 작년에는 몇 달간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궁금했으나 다시 나타난 할머니에게서 골반에 금이 가 몇 달 치료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부지런해 쓰레기가 조금만 나와도 바로바로 밖의 수거장에 버리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나 밖에서 마주칠 땐 항상 빈 봉지 한, 두 개나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쓰레기를 핑계로 운동 삼아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온다고 했다.
이후로도 며칠간 그녀가 재활용품을 버려주는 것이 신경은 쓰였으나 정리를 마친 후 현관 밖 상자를 치움으로써 쓰레기 분실 사건은 깔끔하게 종결되었다.
얼마 후 저녁 시간에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날, 택배 온 것을 보았지만 시간이 없어 현관에 들여놓지 못하고 갔다.
수업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아까 도착해있던 택배 상자가 그 자리에 없었다. 놀라서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다.
계단 위에 신문지로 얌전히 싸여진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잘 감춘다고 한 것 같은데 너무나도 잘 보였다. 이것 또한 옆집 할머니의 손길임을 안다. 쓰레기 상자를 치운 것이 섭섭하셨는지 이젠 택배 물건을 챙겨 놓으신다.
'이 무거운 것을 어찌 들어 여기에 올려놓으셨을까.'
마르셨으나 힘은 장사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가슴이 따뜻한 분이라는 것도.
적적한 일상을 앞집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하는 그녀. 어떤 이에게는 이러한 관심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 서로에게 무심한 것이 일상이 된 요즘,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함이었다.
문을 닫고 산지 거의 십 년.
서로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정도 있지만 세상은 변했고 소통의 방법도 다양해졌다. 여러 갈래의 통로를 통해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다.
지난 주말에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되었다. 차에서 먹으려고 커피와 간식거리를 담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탔다. 그녀는 그것을 보더니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이 버려줄 테니 달라고 했다. 순간 나는 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반성했다. 담부터는 좀 더 멋진 봉지에 간식을 담아야겠다고. 이건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쓰레기로 착각했던 그녀는 조금은 서운한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집에 있는 것을 즐기는 나 덕분에 심심할 우리 현관문에 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여닫히는 앞집 문. 그 마찰음은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지팡이 없이 잘 다닌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저 문의 여닫는 빈도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다 또 언젠가는 조용해지는 순간도 올 것이다.
내일부터 다시 현관 밖에 상자를 놓아두어야겠다.
사라져가는 쓰레기를 보며 그녀가 전하는 안부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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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