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김희숙
꿀쩍
“요새는 돌팍에서 꿀 까는 사람이 있간디요? 어쩌다 굴을 찾는 손님이 있응께 동네 아짐이 가져오는 것을 받아두었다가 몇 상 내놓지라. 근디 칼칼이 시쳤는디도 째깐흔 꿀쩍이 씹힐수도 있응께 놀라지마쇼잉.”
식당 주인장이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상을 차린다. 꿀쩍을 혀끝으로 살살 골라내라는 당부의 말도 굴 접시에 얹는다. 탁자 중앙을 차지한 생굴은 천장 등빛을 반사할 만큼 윤기가 흐른다.
보리누름에는 정어리 쌈을 싸고 나락 놀짱할 때는 전어를 구워야 하듯 어디선가 눈발이 날리면 습관처럼 생굴비빔밥이 간절해진다. 어려운 시절에 먹었던 추억이 깃들었든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기만 해도 입안에 침부터 고인다. 그것을 먹으면 까끌하던 입맛에 생기가 돌아올 것만 같다. 기억 속 음식일수록 제철 먹거리 나는 고장에서 먹어야 제격일 것이다. 조리 과정이 다르고 손맛이 달라서이다. 칠산 바닷가 어촌 마을로 석화비빔밥을 찾아왔다.
‘꿀쩍’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환청처럼 딱딱 굴 껍데기 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라도에서는 굴을 ‘꿀’로, 굴 알갱이에 달라붙은 껍질 조각을 ‘꿀쩍’이라 부른다. 소리를 찾아 눈으로 창밖을 더듬는다. 파도는 수평선에서 으르렁대고 물 빠진 갯골은 휑하다. 해안가는 갈매기 한 마리 얼씬대지 않고 마을 고샅길은 오가는 기척마저 뜸하다. 인가가 몇 안 되는 시골에선 겨울 햇살도 하루의 바통을 일찌감치 어둠에게 물려준다.
갯벌 돌에 붙어 자라는 굴은 비도 맞고 햇빛도 본다. 밀물 때는 물속에 떠다니는 먹이를 먹고 몸집을 불리지만 썰물 때는 덩그러니 온몸을 내놓는다. 습濕을 지키려 웅크리느라 살을 찌울 겨를이 없다. 애써 자연산이라 말하지 않아도 동전 크기 씨알이 알려준다. 어쩌다 오백 원짜리 굵기라도 집는다면 심 봤다며 속으로 외칠 지경이다. 심지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편하다. 그러나 모양이 작다고 무시하면 오산이다. 향은 은근한 듯 여운이 남으며 맛은 개운하고 웅숭깊다. 바위를 수없이 겅중거려야 겨우 한 대접을 얻을 수 있다. 물때 시간에 맞춰 돼지 저금통에 한 푼 두 푼 동전 모으듯 소쿠리에 채웠을 노고가 작은 알갱이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석화는 알음알음 나눠 먹는다. 자식들 먼저 챙기고 형제간이며 사돈네까지 보내주는 재미가 쏠쏠하여 조새를 놓지 못한다.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무치고 전도 부친다. 그리고도 남으면 젓갈로 만들어 밥상 단골로 올린다. 영광 사는 외할머니께서 부산을 찾아오던 날, 양손 무겁게 가져온 스티로폼 상자에는 당신이 까서 모은 굴도 들어 있었다.
“꿀이 한창 게미져라. 도시 사람들은 꿀쩍이 있으면 기겁을 하는디 암시랑토 안 헝께 빼내고 드시소잉. 촌에선 다 그렇게 먹지라.”
“꿀을 짝으로 가져 왔는교? 무거워서 상그라웠을낀데. 사돈은 벌도 키우는교?”
시어머니 답변에 순간, 외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곁에서 통역을 하고서야 대화는 이어졌다.
생물이라 빨리 먹어야 한다는 외할머니 재촉에 조리부터 찾았다. 석화 알갱이는 조리로 일어가며 씻어야 한다. 워낙에 작고 연해서 손이 여러 번 닿으면 으깨지기 일쑤다.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넣어 무친 후 잘게 썬 실파까지 뿌려 내어놓았다. 고소한 내음에 끌려 그만 크게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던 시어머니는 입안에 걸리적거리는 꿀쩍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통통하고 반드레한 굴만 봐왔던 경상도 분이라 쩍 있는 굴은 처음이었고 가려낼 요령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며느리 고향 음식을 타박하지 않았고 먼 길 가져오려고 몇 날 며칠을 준비한 정성을 알기에 뱉지도 씹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오물거렸다.
조새 짓이다. 소슬바람이 나뭇잎을 떨구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조새가 바다로 내려앉는다. 한여름에는 하릴없이 붉은 녹에게 몸뚱이를 내어주다가 찬기만 일면 숫돌을 닥달해 감춰둔 살기를 드러낸다. 살생을 노리는 사냥꾼으로 변한다. 칼끝을 쑤셔 넣어 잽싸게 관자를 도려내는 굴 까기에 비해 조새의 사냥은 두툼한 나무머리에 달린 큰 쇠고리로 굴 껍질을 두어 번 때려 힘껏 젖힌다. 피도 눈물도 없이 여린 속살에게도 쇠끝을 멈추지 않는다. 미처 놀랠 틈도 주지 않고 가늘고 예리한 쇠날로 손톱만 한 알맹이를 긁어 냅다 소쿠리로 던진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은 사냥 고수인 양 조새의 양날에서 저절로 우러나온다. 엉겁결에 굴의 온 생이 끌려 나왔으니 살을 감싸던 거죽도 따라나서는 것은 당연지사. 아무리 떼어낸다고 한몸이던 운명을 쉽게 가를 수 있을까. 꿀쩍이 따라붙는 이유다. 동백꽃이 툭툭 낙화할 즈음이면 텃밭가로 허연 패총의 봉분이 높아간다.
굴은 여전히 밥상에 오르나 바다 꿀은 만나기 어려워져간다. 굴의 뿌리는 하나일 텐데 지역이나 갯가 사정에 따라 자라는 모습도 불리는 이름도 먹는 풍습도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사람들은 이왕이면 새롭고 빠르며 간편한 것을 선호한다. 씻은 듯 매끈한 알굴에 비하면 꿀쩍까지 달고 다니는 서해 석화는 얼핏 촌스러워 보인다. 이파리에 제멋대로 구멍 뚫린 열무나 꼬부라져 볼품없는 풋고추도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기 십상이다. 촌스럽다는 것에는 낡고 불편하거나 시대에 뒤쳐졌다는 오해가 숨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촌스러움에서 벗어나려 힙함을 추구하고 오픈런에 줄을 서며 숨 가쁘게 유행을 갈아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꿀쩍을 가려내는 동안 눈앞에 놓인 먹거리가 한때는 숨 쉬는 생명이었음을 깨닫는다. 느리게 먹어야 하는 성가심 때문에 구석구석 감춰진 맛을 느낀다. 촌스러움이 오히려 다행일 때다.
넓적한 그릇에 김 나는 밥을 붓는다. 비빔밥에는 밥이 뜨끈해야 들어가는 재료가 고루 어우러진다. 간간하면서 달금한 생굴 맛을 놓치면 안 되기에 접시에서 절반만 덜어 쓸어 넣는다. 굴과 궁합이 맞는 무채도 넉넉히 담고 양념장까지 끼얹는다. 대기 중이던 숟가락이 위로 아래로 오른쪽 왼쪽 노를 젓는다. 목적지는 어디인가. 손놀림 따라 코는 벌써 싱싱한 내음을 맡았는지 고개가 점점 그릇 쪽으로 내려간다. 꼬스름한 맛이 혀끝에 닿자 침샘에선 침이 뿜어 나오고 목젖도 빨리 넘기라며 대롱대롱 재촉한다. 간혹 잇새에 꿀쩍이 걸려도 인이 배어서 호들갑스럽지 않게 들어낼 텐데 그릇이 비워질 때까지 티끌 하나 건져내지 못했다. 오지랖 부릴 뭔가를 놓친 듯 입안이 허전하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 은은한 바다 맛을 만날 수 있을지. 촌스러움을 타박하는 세상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는지. ‘꿀쩍’이 사전에 박제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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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2021년 《수필과비평》로 등단하였으며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이 당선됐다.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현대수필 작품상 등을 받았으며 수필집 《쪽 항아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