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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일본 건국 신화에 드리워진 가야 그림자
이영희 작가가 TV 프로그램에서 「일본서기」 에 대한 좌담회를 시청하다가, 어느 고명한 교수가 “남의 나라가 소중히 여기는 옛 문헌은 우리도 소중히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에 대노(大怒)하여 한 말을 옮겨 적는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책인 동시에 바로 우리의 고대사 문헌이다,
「일본서기」만이 아니라 「고사기」, 「풍토기」 등 8세기 초에 엮어져 나온 일본 고대사 책자는 모두 우리들 자신의 영광스럽고도 뼈아픈 과거사를 담은 또 하나의 「삼국사기」요 「삼국유사」라 할 수 있다.
노래책 「만엽집」도 마찬가지다.
왜 땅에서 백제계 조정을 엎어 왕위에 오른 천무왕은 자신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史書로 「일본서기」 편찬을 계획했다.
왕자를 비롯한 12명의 학식 높은 왕족과 귀족들을 모아 역대 왜왕의 행적과 상고 때의 얘기들을 모아 엮게 한 것이 681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또 하나의 史書를 다른 사람을 시켜 엮게 했는데 이것이 「고사기」로 우리의 「삼국유사」처럼 에피소드 중심의 역사서다.
왜 두 가지 역사책을 동시에 편찬케 했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서기」는 천무왕이 죽은 지 훨씬 뒷날인 712년에, 고사기는 720년에 간행되었다.
「일본서기」의 경우 편찬에 쓰인 자료는 역대 왜왕들의 약력 등을 기록한 「제기(帝記」와 왜왕에 관한 설화나 전설 그리고 신화들을 모은 「구사(舊辭)」를 비롯한 갖가지 문헌과 기록이 동원되었다.
그중에는 「백제기(白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紀)」 등 백제 관련 문헌도 있다.
6세기의 제26대 계체왕과 흠명(29대)왕 대목은 숫제 「백제본기(百濟本紀)」 를 밑책삼아 꼴깍 채워져 있다.
게다가 계체왕에 관한 기술은 「신라본기(新羅本紀)」 등 다른 한국 자료를 참고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가야에 관한 소상한 서술이 놀랄 만큼 자주 보인다.
아마도 일본이 가야사에 관한 자료집을 밑책 삼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국사는 그간 가야사를 누락시킨 채 엮어져 왔다.
최근에 고고학적 성과로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짤막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일본서기」는 가야 관련 기사의 보물창고와 다름없다.
황국사관적 왜곡 표현만 덜어내면 「일본서기」 속에서 지워진 우리의 가야사를 풍성하게 되살려낼 수 있다,
가야의 그림자는 일본의 개국 신화에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른바 황손 강림 신화는 곧 「가락국기」의 가락건국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러하다.
기원 42년 무렵 구지(龜旨;지금의 경남 김해)엔 아홉 추장이 100호 7만 5천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고 살았다.
삼월의 어느 날, 사람들이 물가에 모여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이곳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니, 너희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흙을 파고 춤추며 노래하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명령대로 모두 산 위에서 춤추는데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에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 상자가 매달려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장 집에 모셔두었더니 12시간이 지나자 황금알은 잘생긴 소년으로 바뀌었고 열흘 후엔 모두 9척의 장사가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대가락의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 왕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일본서기」 에서도 하늘의 신이 그의 자손을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낸다.
그가 당도한 곳 또한 ‘구지봉(龜旨峰)’과 같은 지명의 ‘쿠지후루노타케(槵觸;くじふるのたけ) 다.
「고사기」는 이것을 ’쿠지후루다케( くじふるたけ)‘라고 표기하고 있다.
‘쿠지’는 ‘구지’와 같은 말이다. 신이(新異)로움을 뜻한다.
‘후루’는 ‘벌’이라는 뜻의 우리 옛말 ‘부루’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리고 ‘타케’는 높이 다가서는 것 즉 산 등을 의미하는 옛말 ‘다게’와 같다.
‘쿠지후루노타케’는 ‘구지봉’의 일본식 이름이다.
우리 지명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셈이다.
이것은 ‘구지벌(김해평야)’에 살던 집단이 일본에 진출한 증거가 아닐까?
한국의 '구지'를 떠나 일본의 '구지'에 당도한 황손은 그 고장을 칭송한다.
“이곳은 가락국을 향한 아주 좋은 고장이다!”
(김수로왕도 일찍이 ‘구지벌’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칭송했었다.)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서는 이 장면, 가야와 왜의 개국 신화에서 추려지는 동질성은 상고시대의 왜를 가야계 사람들이 지배했음을 암시하는 서술이 아니겠는가.
또한 왜의 건국 설화에는 고구려 건국 설화의 체취가 흠씬 배어 있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인데 그의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이다.
일본의 시조 신무왕의 어머니도 해신(海神)의 딸로 되어있다.
주몽이 동부여왕 금와 일당에게 쫓겨 달아나던 중 물가에 이른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몽을 도와준다.
이 동부여는 훗날 고구려에 의해 정복된다.
신무왕도 동쪽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떠나는 첫 출발길에 물가에 당도한다.
이때 한 어부가 배 타고 와 물길을 안내해 준다.
「고사기」에는 낚시질하며 다가온 어부가 신무의 물길을 안내했다고 적혀있다.
천무왕은 고구려계이면서 가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가야계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왕후였던 지통여왕도 친가야 세력의 후손이다.
따라서 일본 개국에 얽히는 신화나 설화가 가야와 고구려의 신화나 설화와 흡사한 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닐 듯하다.
의도적으로 가야와 고구려 관련사를 일본서기 안에 누벼놓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는 거대한 팩션(팩트 + 픽션)이다.
사실과 허구를 반죽하여 버무린 고대의 대하드라마다.
뛰어난 그 소설적 기법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송두리째 찾아내는 날은 언제일까?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일요데이트: <경서>보다 성숙한 여자 될래요
고소영 배우가 한창 잘나가던 그 무렵에 대학 3학년이었단다.
주말 전국 극장가 상영 영화
지방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지금은 다 없어진 극장이다.
대한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기억이 새롭다.
<취권>, <투캅스>, <미세스 다웃파이어>... 이것 또한 추억의 영화 제목이다.
소니 워크맨
학생, 젊은이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했던, 그리고 가졌던 워크맨.
그때만 해도 전자제품은 밥솥까지 일제가 최고였는데, MP3 플레이어부터 국산이 비슷해졌던가?
어쨌든 그 모든 전자 기능은 이제 스마트폰 하나로 다 해결되고 일본은 그 경쟁에 뒤쳐져 있다.
(24) 일본 건국 신화에 드리워진 가야 그림자
이영희 작가가 TV 프로그램에서 「일본서기」 에 대한 좌담회를 시청하다가, 어느 고명한 교수가 “남의 나라가 소중히 여기는 옛 문헌은 우리도 소중히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에 대노(大怒)하여 한 말을 옮겨 적는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책인 동시에 바로 우리의 고대사 문헌이다,
「일본서기」만이 아니라 「고사기」, 「풍토기」 등 8세기 초에 엮어져 나온 일본 고대사 책자는 모두 우리들 자신의 영광스럽고도 뼈아픈 과거사를 담은 또 하나의 「삼국사기」요 「삼국유사」라 할 수 있다.
노래책 「만엽집」도 마찬가지다.
왜 땅에서 백제계 조정을 엎어 왕위에 오른 천무왕은 자신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史書로 「일본서기」 편찬을 계획했다.
왕자를 비롯한 12명의 학식 높은 왕족과 귀족들을 모아 역대 왜왕의 행적과 상고 때의 얘기들을 모아 엮게 한 것이 681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또 하나의 史書를 다른 사람을 시켜 엮게 했는데 이것이 「고사기」로 우리의 「삼국유사」처럼 에피소드 중심의 역사서다.
왜 두 가지 역사책을 동시에 편찬케 했는지 이유는 알려지지 않지만, 「일본서기」는 천무왕이 죽은 지 훨씬 뒷날인 712년에, 고사기는 720년에 간행되었다.
「일본서기」의 경우 편찬에 쓰인 자료는 역대 왜왕들의 약력 등을 기록한 「제기(帝記」와 왜왕에 관한 설화나 전설 그리고 신화들을 모은 「구사(舊辭)」를 비롯한 갖가지 문헌과 기록이 동원되었다.
그중에는 「백제기(白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紀)」 등 백제 관련 문헌도 있다.
6세기의 제26대 계체왕과 흠명(29대)왕 대목은 숫제 「백제본기(百濟本紀)」를 밑책삼아 꼴깍 채워져 있다.
게다가 계체왕에 관한 기술은「 신라본기(新羅本紀)」 등 다른 한국 자료를 참고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가야에 관한 소상한 서술이 놀랄 만큼 자주 보인다.
아마도 일본이 가야사에 관한 자료집을 밑책 삼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국사는 그간 가야사를 누락시킨 채 엮어져 왔다.
최근에 고고학적 성과로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짤막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일본서기」는 가야 관련 기사의 보물창고와 다름없다.
황국사관적 왜곡 표현만 덜어내면 「일본서기」 속에서 지워진 우리의 가야사를 풍성하게 되살려낼 수 있다,
가야의 그림자는 일본의 개국 신화에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른바 황손 강림 신화는 곧 「가락국기」의 가락건국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러하다.
기원 42년 무렵 구지(龜旨;지금의 경남 김해)엔 아홉 추장이 100호 7만 5천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고 살았다.
삼월의 어느 날, 사람들이 물가에 모여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이곳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니, 너희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흙을 파고 춤추며 노래하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명령대로 모두 산 위에서 춤추는데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에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 상자가 매달려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장 집에 모셔두었더니 12시간이 지나자 황금알은 잘생긴 소년으로 바뀌었고 열흘 후엔 모두 9척의 장사가 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대가락의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 왕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일본서기」 에서도 하늘의 신이 그의 자손을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낸다.
그가 당도한 곳 또한 ‘구지봉(龜旨峰)’과 같은 지명의 ‘쿠지후루노타케(槵觸;くじふるのたけ) 다.
「고사기」는 이것을 ’쿠지후루다케(くじふるたけ)‘라고 표기하고 있다.
‘쿠지’는 ‘구지’와 같은 말이다. 신이(新異)로움을 뜻한다.
‘후루’는 ‘벌’이라는 뜻의 우리 옛말 ‘부루’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리고 ‘타케’는 높이 다가서는 것 즉 산 등을 의미하는 옛말 ‘다게’와 같다.
‘쿠지후루노타케’는 ‘구지봉’의 일본식 이름이다.
우리 지명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셈이다.
이것은 ‘구지벌(김해평야)’에 살던 집단이 일본에 진출한 증거가 아닐까?
한국의 구지를 떠나 일본의 구지에 당도한 황손은 그 고장을 칭송한다.
(김수로왕도 일찍이 ‘구지벌’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칭송했었다.)
“이곳은 가락국을 향한 아주 좋은 고장이다!”
떠나온 모국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좋은 땅이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서는 이 장면, 가야와 왜의 개국 신화에서 추려지는 동질성은 상고시대의 왜를 가야계 사람들이 지배했음을 암시하는 서술이 아니겠는가.
또한 왜의 건국 설화에는 고구려 건국 설화의 체취가 흠씬 배어 있다
「삼국유사」 <고구려조>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인데 그의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이다.
일본의 시조 신무왕의 어머니도 해신(海神)의 딸로 되어있다.
주몽이 동부여왕 금와 일당에게 쫓겨 달아나던 중 물가에 이른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몽을 도와준다.
이 동부여는 훗날 고구려에 의해 정복된다.
신무왕도 동쪽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떠나는 첫 출발길에 물가에 당도한다.
이때 한 어부가 배 타고 와 물길을 안내해 준다.
「고사기」에는 낚시질하며 다가온 어부가 신무의 물길을 안내했다고 적혀있다.
천무왕은 고구려계이면서 가야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는 가야계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왕후였던 지통여왕도 친가야 세력의 후손이다.
따라서 일본 개국에 얽히는 신화나 설화가 가야와 고구려의 신화나 설화와 흡사한 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닐 듯하다.
의도적으로 가야와 고구려 관련사를 「일본서기」 안에 누벼놓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는 거대한 팩션(팩트 + 픽션)이다.
사실과 허구를 반죽하여 버무린 고대의 대하드라마다.
뛰어난 그 소설적 기법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송두리째 찾아내는 날은 언제일까?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일요데이트: <경서>보다 성숙한 여자 될래요
고소영 배우가 한창 잘나가던 그 무렵에 대학 3학년이었단다.
주말 전국 극장가 상영 영화
지방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지금은 다 없어진 극장이다.
대한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기억이 새롭다.
<취권>, <투캅스>, <미세스 다웃파이어>... 이것 또한 추억의 영화 제목이다.
소니 워크맨
학생, 젊은이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했던, 그리고 가졌던 워크맨.
그때만 해도 전자제품은 밥솥까지 일제가 최고였는데, MP3 플레이어부터 국산이 비슷해졌던가?
어쨌든 그 모든 전자 기능은 이제 스마트폰 하나로 다 해결되고 일본은 그 경쟁에 뒤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