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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지산동(池山洞), 농기구 키를 닮은 마을
개관
본래 달성군 수동면 지산동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달성군 수성면 지산동이 됐다. 1938년 대구부 지산동, 1963년 대구시 동구 지산동을 거쳐 1980년 수성구 지산동이 됐다. 1992년 지산1·2동으로 분동됐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대구광역시경찰청, 대구광역시 보건환경연구원, 대구교통연수원, 능인중고등학교, 지산중학교, 대구두산초등학교, 대구지봉초등학교, 대구지산초등학교, 대구남양학교, 수성아트피아, 지산근린공원, 지산어린이공원, 현대공원, 화성공원 등이 있다. 주요 유적과 유물로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초기 철기시대 분묘와 유물, 삼국시대 유물 등이 있으며, 느티나무 보호수 세 그루가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신덕리, 덕골, 못안골, 잣밭골, 약시걸, 조일골, 죽리 등이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비룡폭포, 효자하잠동지려비 등이 있다.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으로 학산재, 효자각 등이 있다.
지명 유래
지산동은 각종 대구부읍지에는 치산리(雉山里)로 기록되어 있다. 지산은 마을 뒷산 모양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뒷산 모양이 곡식을 고르는 농기구 ‘키’를 닮아 ‘치산’, 산 아랫마을을 ‘치산리’라 불렀다고 한다. 한자로는 ‘꿩 치(雉)’ 자를 썼다. 각종 대구부읍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대구부 장적에 의하면 치산리(雉山里)와 지산리(池山里)를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183) 지산리는 지내리와 이산리가 통합된 동명으로, 지내리(池內里)의 ‘지(池)’와 이산리(梨山里)의 ‘산(山)’을 한 글자씩 따온 것으로 보인다.
지산동에도 여러 지명유래설이 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근 범물동의 매봉과 관련된 유래설이다. 범물동 천주교 공원묘지 뒷산은 매의 주둥이를 닮아 '매봉'이라 불렸다. 그런데 매 앞에서는 꿩이 꼼짝 못 한다고 해서 치산동의 ‘꿩 치(雉)’ 자를 ‘못 지(池)’ 자로 바꿔 지산(池山)이 됐다는 이야기이다. 또 마을이 경사가 급한 산자락 끝부분, 즉 산 꽁지에 있어 ‘꽁지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치산리(雉山里)라는 설, 지역에 둔덕지·당외지·마산지·조일지 등의 못이 많아 지산동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184) 전설 같은 유래설도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마을에 못을 만들었는데 못에 물을 가둘만한 수원(水源)이 없었다. 못을 판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못 이름을 지산못으로 부르도록 부탁한 뒤, 자신이 판 못에서 죽어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한다. 이때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산허리 잘라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못 이름을 따라 지산동으로 불렀다고 한다.185) 지산동은 조선 후기 지촌(池村) 양달화(楊達和·1694-1756)가 정착해 학산(鶴山) 서당을 경영했으며 중화 양씨(中和楊氏)가 크게 번성했다. 중화 양씨 외에도 김해 허씨, 경주 김씨, 벽진 이씨, 영천 최씨, 포산 곽씨, 밀양 박씨 등이 많이 살았다.
183) 김미영, 18-19세기 지산리 서계(庶系) 동성촌락의 형성과정, 2020,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0쪽 주 참고.
184) 전일주·김용환, 학산재와 영모재, 중화양씨 지산문중, 2003. 14쪽.
185) 지리연구소, 지명조사철, 1959.
당밖못·당외지·웃못·윗못
능인고등학교 서쪽 녹원맨션 자리에 있었던 둔덕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당밖못에 대해 “지산동 입구에 당산이 있었는데, 당산을 지나 못이 있어 당밖못이라 불러오다가, 한자로 당외지(堂外池)라고 하였고, 그 후 또 하나의 못이 생겨 웃못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산은 현재 무학삼거리에 있는 세 그루 느티나무 보호수를 말한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1970년대 지도에는 둔덕지를 윗못으로 표기하고 있다.(‘둔덕지’ 내용 참조)
덕골
덕골은 지금의 지산2동 목련 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옛날 이곳에 ‘덕걸’이라는 절이 있어서 덕골이라 한다.186) 1954년 항공사진에는 2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잣밭골’ 사진 참조)
186) 대구광역시, 『대구지명유래총람』, 택민국학연구원, 2009. 487쪽.
둔덕지(屯德池)·둔동제(屯洞堤)·둔덕못
둔덕지는 1980년대까지 지금의 녹원맨션 자리에 있었던 못이다. 둔덕지는 임진왜란 직후 경상 감사(1598)와 대구도호부사(1607)를 지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조성했다. 과거 모산골(茅山谷)이라 불렸던 이곳에 정경세가 둔덕못을 축조하고 ‘영파정(迎波亭)’을 지어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둔덕못에 물이 잘 들어오지 않자 정경세가 산허리를 가로질러 물길을 확보해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 같은 공로로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그가 죽어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1670년(현종 11), 지역민들은 둔덕제를 축조해 농업용수 문제를 해결해 준 정경세의 공을 기리기 위해 ‘대구도호부사우복정선생영세불망비’를 세우고, 봄·가을로 향사를 지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980년대 후반, 도시계획으로 둔덕못은 메워졌고, 불망비는 두 동강으로 부러진 채 못 둑에 방치됐다. 1985년 여름 정경세의 후손에 의해 방치됐던 비가 경북대학교로 옮겨졌다. 1992년 옛 비와 똑같이 만든 또 하나의 비가 현재 경상감영공원 내에 있다.
둔덕지는 서쪽에 둑이 있었다. 1983년 지도를 참고하면 둔덕지 북동쪽에 등골(능인고), 남동쪽에 비룡골과 죽리(竹里), 모산골(대구경찰청), 서쪽에 감나무정, 남서쪽에 묵넘어(두산오거리)가 있었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는 “둔동제는 수동에 있다. 둘레가 1,429척(433m)이고 수심이 7척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영파정과 우복 선생 공덕비는 둔덕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지금의 수성아트피아 동쪽 산자락에 있었다. 지역에서는 이 산 이름을 영파정 또는 영파대(影波臺)라 불렀다.187)
187) 전일주·김용환, 학산재와 영모재, 중화양씨 지산문중, 2003, 14쪽
등골
옛 둔덕지 북동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의 능인고등학교 건물이 자리한 위치쯤 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5-6호 정도 민가가 보인다. 등골과 둔덕지 사이는 논농사를 지었고, 등골 동쪽은 밭농사를 지었다.
마산지(馬山池)
옛 지산동과 범물동 사이에 있었던 못이다. 1990년대 초에 매립되어 지금은 중앙어린이공원(범물동 1348)이 들어서 있다. 옛 지도를 참고하면 마산지에서 지산동과 범물동으로 이어지는 들은 대부분 논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옛 마산지 남쪽 범안로 너머에 범일초등학교가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마산지에 대해 “전설에 의하면 말무덤 산골에 못이 있어 마산지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산골·못안골
모산골은 ‘못안골’ 또는 모산골 남쪽 큰 마을 이름을 빌려 ‘죽리·중리’로 부르기도 했다. 현재 대구경찰청이 위치한 곳이다. 조선시대 대구에서 가장 큰 못으로 알려진 둔덕지 남동쪽 너머에 위치한 마을이라 못안골이라 했다. 이후 발음이 변해 모산골이 됐다. 일설에는 이 골짜기에 나무보다 잔디가 많아 모산골(茅山谷)이라는 설도 있다.188) 1954년 항공사진에는 모산골에 민가 1호만 보이고, 1980년대 지도에는 10호 규모 마을로 나타난다. 모산골 쪽은 밭농사가 많았고, 모산골 남쪽 비룡골에는 논농사가 많았다.
모산골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벽진 이씨 성을 가진 부자가 모산골에 살았는데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그 집 안주인은 너무 많은 손님에 집안 살림살이가 걱정이었다. 어느 날 시주 온 스님에게 자신 집에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스님은 모산골 물길을 북에서 남으로 돌리면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안주인은 스님의 조언대로 물길을 돌렸고,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손님이 오지 않게 됐다고 한다.189)(‘둔덕지’ 사진 참조)
188) 하종성, 『역사 속의 달구벌을 찾아서』, 삼일출판사, 2008. 190쪽.
189)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5쪽. 이 전설은 성동 ‘모산골’ 전설과 일치한다. ‘모산골’이란 지명은 수성구에만 여러 곳이 있다. 모산골 전설은 동일한 지명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룡폭포 이야기
지산동은 옛날부터 부자가 많은 곳으로 300여 호가 살았다고 전해온다. 처음 지산동이 생길 당시에는 동네가 가난하고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 파계승이 마을에 동냥을 왔다가 이 사연을 듣고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마을 서쪽 비룡폭포 인근에 돌담을 쌓고 나무를 심어 잘 가꾸면 가난과 재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190) 마을사람들은 파계승의 조언에 따라 농사일이 한가한 음력 1월 15일 마을제사를 모신 후 돌담을 쌓고, 나무를 심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부터 지산동은 잘 사는 마을이 됐다고 한다.191) 비룡폭포 위치는 지금의 무학삼거리 일대로 동아메디병원과 무학삼거리 사이 도로 가운데 있었다.(‘둔덕지’ 사진 참조)
190) 이때 심은 나무가 나중에 지산동 당산나무가 됐다. 현재 무학삼거리 인근에 보호수로 지정된 두 그루 느티나무다.
191)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 대구』, 1988, 344쪽.
약시걸
약시걸은 현 지산1동행정복지센터 앞을 흐르던 작은 시내를 말한다. 지금은 매립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약시걸이란 이름은 ‘바위 사이에서 약물이 나는 거랑’(개울의 사투리)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약시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92)
192)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5쪽.
자박골·잣밭골·백전골(栢田谷)
상인동과 범물동을 잇는 앞산터널로 구간 중 범물터널 동쪽 출입구 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의 지산호반맨션 일대다. 잣밭골은 잣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처음에는 잣밭골·백전골(栢田谷)로 부르다가 나중에 ‘자박골’이 됐다. 잣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나중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잣나무는 사라졌다.193)
193)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6쪽.
조일골(朝日谷·照日谷)·죄일골
조일골은 대구경찰청에서 무학터널을 지나 무학네거리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다. 골짜기가 남쪽으로 길게 트여 있어 해가 뜨면 햇빛이 가장 먼저 비치는 곳이라 하여 조일골이라고 부른다.194) 한자로는 ‘아침 조(朝)’를 쓰기도 하고, ‘비출 조(照)’를 쓰기도 했다. 한편 조일골은 마을이 좁은 골짜기에 있어 붙은 이름으로도 풀이한다. 조일은 우리말 ‘좁다’의 ‘조’와 마을의 준말인 ‘말’에서 유래됐다. ‘조’의 음을 표기하기 위해 조(朝)·조(照) 등의 한자가 사용됐고, 일은 ‘말’과 비슷한 ‘날’의 한자 표기인 ‘일(日)’을 취해 조일골이 됐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조일골에서 이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에는 아침 조(朝)로 표기되어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 3호 정도 민가가 보이며, 골짜기 안에 조일지를 포함해 작은 못 2개가 보이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조곡제(照谷堤)는 수동에 있다. 둘레가 600척(182m)이고 수심이 5척이다”고 기술되어 있다.
194) 김광순, 한국구비문학Ⅰ, 국학자료원, 2001, 174쪽.
죽리(竹里)·중리(中里)
죽리는 지금의 무학삼거리에서 동서무학 아파트 일대까지 무학산 남쪽 산자락에 있었던 마을이다. 옛 지산동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로 80호 이상의 큰 마을이었다. 죽리라는 지명은 마을 뒤편에 대나무가 무성해 대나무 마을이란 뜻에서 얻은 지명이다. 나중에 '중리(中里)'로 명칭이 바꿨다.195) 죽리 남쪽에 넓은 들이 있었는데 ‘아래들’이라 불렀다. 지산동 지역은 마을을 관통하는 범어천이 있어 대부분 논농사를 지었다. ‘중리’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에 등장한다. 1954년 항공사진에 약 25호 규모의 죽리 마을과 마을 뒤 대나무숲이 보인다.
195) 대구광역시, 『대구지명유래총람』, 택민국학연구원, 2009, 489쪽.
지산동 느티나무 보호수
지산동에는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 그루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196) 세 그루 느티나무는 1982년 대구시 보호수 ‘6-3, 6-4, 6-5’로 각각 지정됐다. 1990년대 초 주택 200만호 사업으로 지산동 일대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때 많은 나무가 베어졌다. 하지만 오랜 세월 주민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온 세 그루 지산동 느티나무는 베어지지 않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6-4, 6-5’ 느티나무 사이에는 전설이 깃든 비룡폭포가 있었는데 우기에는 제법 큰 폭포였다고 한다.
6-3 느티나무(지산동 1735)
지산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수령 400년 이상, 높이 17m, 둘레 4.5m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는 조선 초기 효자로 정려를 받은 하잠동을 기리는 ‘효자하잠동지려비’가 있다.
6-4 느티나무(지산동 1719-9)
대구경찰청과 무학터널 사이에 있는 무학삼거리 남쪽 교통섬 내에 있다. 수령 400년 이상, 높이 14m, 둘레 4.6m다. 이 느티나무는 옛날 이 지역에서 집성촌을 이뤘던 중화 양씨들이 심었다고 전한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 주는 당산나무로 모셔지며, 정월대보름에는 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가 열렸다. 당산나무 잎이 무성하면 그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6-5 느티나무(지산동 718-1)
무학삼거리에서 무학터널 방향 도로변에 있다. ‘6-4 느티나무’로부터 북쪽으로 약 40m 거리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 200년 이상, 높이 15m, 둘레 2.7m다.
196) 保護樹. 풍치 보존과 학술 참고 및 번식을 위해 보호하는 나무.
효자하잠동지려비(孝子河潛同之閭碑)
효자하잠동지려비(지산동 1735)는 지산초등학교 정문 앞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에 있는 효자 정려비다. 조선 초 대구부 수성현에 하잠동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양(진주) 하씨인 하잠동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남다른 효심으로 주변에 칭송이 자자했다. 하잠동은 성인이 되어 창녕 조씨 부인과 혼인해 외아들 하용선(河龍先)을 두었다. 하잠동은 어머니가 지병으로 오랫동안 병중에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떡을 먹고 싶다고 했다. 가난했던 하잠동은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수십 리 떨어진 장터에 나가 팔았다. 나무를 판 돈으로 떡을 산 하잠동은 떡을 지게에 얹고 해 저문 밤길을 걸어오다가, 고갯마루에 이르러 허기에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까지도 떡을 먹지 않고 어머니께 드리고자 했던 하잠동의 효행은 고을을 넘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에 조정에서 효자로 정려를 내리고 효자비를 세웠다. 예전에는 정려각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현재 지산초등학교 정문 앞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에 서 있는 비는 1853년(철종 4) 후손들이 다시 세운 비다. 비 크기는 가로 34cm, 세로 83cm, 두께 12cm다.
학산재(鶴山齋)와 중화 양씨(中和楊氏)
학산재(지산동 358)는 옛날 지산동에서 번성했던 중화 양씨 문중의 재실이자 강학소로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학산재는 지촌(池村) 양달화(楊達和·1694-1756)가 지었는데, 처음에는 ‘학산서당’이라 불렸다. 이후 양달화 사후 그의 학덕을 기리고 문중 자제들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1890년(고종 27) 후손들이 ‘학산재’로 중건했다. 지금의 학산재는 1997년 중수한 건물이다. 솟을대문을 갖춘 학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1칸 방, 2칸 대청, 2칸 방이다. 건물 안팎에는 구한말 저명한 인물들의 귀한 필적이 담긴 현판이 많이 걸려 있다. 학산재란 이름은 뒷산 무학산에서 유래됐다. 무학산은 산 모양이 날개를 펼친 학을 닮았다거나, 또는 학이 많이 날아와 앉았던 산에서 유래된 산 이름이다.
지산동에는 중화 양씨와 관련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대덕산하활만인(大德山下活萬人), 대덕산 아래에 만 인이 산다.”
지금으로부터 360년 전쯤 중화 양씨 14세 양시진과 그의 아들 양달화는 후손의 번영을 기약하며 지금의 지산동 옆 동네인 범물동에 집터를 잡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금강산 유정사에서 왔다는 ‘일이’(一耳·귀가 한쪽만 있어 일이라 했다) 스님이 집터를 살펴보고는 “대덕산하활만인이라. 여기보다 지산동이 낫다”고 말했다. 이 말에 양씨 부자는 다시 집터를 옮겨 지금의 무학산 남쪽 지산동에 터를 잡게 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의 변두리였던 지산동은 현재 일이 스님의 예언대로 신도시가 됐다.
○ “이곳에 묘를 쓰면 12대 후에 황후가 나온다”
중화 양씨와 일이 스님의 인연은 양달화의 묏자리까지 이어졌다. 현재 황금네거리 인근 영모재 뒤쪽에 있는 양달화 묘소는 본래 다른 성씨의 묏자리였다.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장한 파묘 터였던 것. 하지만 “그 파묘 터에 예전 위치와 방위 그대로 묘를 쓰면 12대 후에 황후가 난다”는 일이 스님의 예언이 있었고, 양달화 부부는 지금까지 그 자리에 묻혀있다.
효자각(孝子閣)
중화 양씨 효자각(지산동 1280)은 학산(鶴山) 양해일(楊亥一·1797-1873)과 그의 아들 우산(又山) 양헌방(楊憲邦·1826-1878)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말 고종의 명으로 내려진 효자 정려각이다. 양해일은 아버지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그어 피를 드림으로써 아버지를 13년간 더 살게 했으며, 양헌방은 부모의 병에 엄동설한임에도 얼음을 깨 잉어를 구해 드리는 효행을 실천했다.
효자각은 낮은 흙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 홑처마 맞배지붕 양식으로 전면만 붉은 살대를 꽃은 홍살벽이고 나머지 3면은 흙벽이다. 앞에서 마주 보았을 때 왼쪽 칸이 양해일, 오른쪽 칸이 양헌방 정려각이다. 정려각 내부에는 고종의 명으로 내린 정려 현판이 있고, 정려각 바깥에 정려 내력을 기록한 정려비가 있다. 현재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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