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칙 가섭찰간迦葉刹竿
迦葉因阿難問云: “世尊傳金襴袈裟外, 別傳何物。” 葉喚云: “阿難!” 難應諾。葉云: “倒却門前刹竿1著。”
가섭에게 아난이 물었다.
“세존께서 금란가사金襴袈裟 외에 따로 전하신 물건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가섭이 “아난!”하고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예!”라고 대답하자 가섭이 말했다.
“문 앞의 깃발이나 거두시게!”
無門曰: “若向者裏下得一轉語親切,2 便見靈山一會嚴然未散。其或未然, 毘婆尸佛3早留心, 直至而今不得妙。”
무문이 말하기를,
만약 여기서 제대로 한 마디 이를 수 있다면, 옛날 영산회상의 집회가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이를 수 없다면, 과거 비바시불 때부터 마음을 다해 수행해 왔지만 아직까지 그 묘함은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頌曰, “問處何如答處親, 幾人於此眼生筋4。兄呼弟應揚家醜, 不屬陰陽別是春。”
노래하기를,
묻는 곳과 답한 곳이 어떻게 가까운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참구하였나.
형은 부르고 아우는 대답하여 집안의 추함이 드러났지만,
이것이 음양의 계절과는 다른 별세계의 봄이 아니런가.
I. 배경背景
중국 선종에서는 붓다가 가섭迦葉에게 말을 통한 가르침뿐 아니라 마음 또한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전심傳心”이라고 하였는데, 세 곳에서 전했다고 하여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한다. 그중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는데, 가섭만이 홀로 미소 지었다는 내용이다. 그 미소가 ‘염화미소拈華微笑’이고, 선가에서는 염화미소를 “전법傳法”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가섭은 석존으로부터 영축산에서 염화미소로 부처님의 정법을 부촉 받았지만 아난은 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후에도 정법의 부촉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난은 가섭존자에게 가서 질문한 것이다.「세존이 가섭존자에게 금란가사를 전하여 불법을 부촉한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가사 이외에 또 비밀리에 무슨 불법을 전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확인해 보는 것이다.
(중략)
이 공안은 영산회상에서 석존이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로 대답하여 당처에서 불법을 전해 받고, 세존이「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한 법문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라고 한 사실을 계승한 입장이다. 여기서 가섭이 <아난이여!> 부르고, 아난이「예!」라고 대답한 것은 영산에서 세존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와 같은 것이며, 가섭이「문전 찰간의 깃발을 내려라!」고 한 말은 가섭이 아난에게 부촉한 사자후(獅子吼)인 것이다. 즉 세존과 가섭의「염화미소(拈花微笑)」에 이은 가섭과 아난의 전법의 내용이「도각찰간(倒却刹竿)」인 것이다.5
『무문관無門關』「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에 나오는 영산회상의 일이 붓다에서 가섭으로의 전법傳法이라면, 본칙 <가섭찰간迦葉刹竿>은 가섭에서 아난阿難으로의 전법이야기다. 그리고 다음「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은 육조혜능에서 명상좌明上座로의 전법이야기이다. 즉, 이들 공안은 조사선祖師禪의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전통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그 전통의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목적으로 제시된 것 들이다. 교敎보다는 선禪을 강조하는 선종에서 마음을 전하는 전법은 중요한 테마 중에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제의 스승 황벽희운(黃檗希運, ?~850)도 그의 어록인『전심법요傳心法要』6에서 이 공안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조사의 표방이니라[此便是祖師之標榜也].”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공안을 조사선 전승의 모델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난이 가섭에게 묻기를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외에 따로 무슨 법을 전하셨습니까?’ 하니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대답하자 가섭이 말하기를 ‘문 앞의 깃대(刹竿)를 거꾸러뜨려 버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사의 표방(標榜)이니라. 몹시 총명한 아난이 30년 동안 시자(侍者)로 있으면서 많이 들어 얻은 지혜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천일 동안 닦은 너의 지혜는 하루 동안 도(道)를 닦느니만 못하다’고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렵다 하리라.7
그러나 시간적인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가섭과 아난의 전법이야기는 1252년 간행된『오등회원五燈會元』「아난阿難」장에 처음 등장한다. 부처님 시대부터 있었던 사건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이다. 내용을 봐도 두 사람의 문답이 다분히 선禪적이어서 대화의 무대인 불교 초기 상황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모티브가 선종에서 말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조사선祖師禪에 더 어울린다.
이것이 송대 선종의 역사적인 이해이다. 송대 선종의 특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교학과는 별도로 전해지는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믿음 때문에 아난의 입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금란가사 이외에 또 무엇을 전하였습니까?”라고 질문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언어에 의해서 이루어진 교학보다는 깨달음이 더 중시하는 송대 선종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일단이다.8
다시 말해 원시불교 시대에는 이런 전법에 대한 문답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흡사 ‘염화미소’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 마하가섭을 아라한이면서 보살, 그리고 또 조사로 모순되게 설정한 것과 같다.9 조사선의 뛰어남을 설하기 위해 시대적으로 다른 아라한과 보살들을 무리하게 한 무대에 등장시킨 것이다. 가섭과 아난의 전법이야기는 이어 아난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최인호의『길 없는 길』은 <가섭찰간>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쨌든 사흘 동안 ‘절문 밖의 찰간을 넘어뜨려라’던 마하가섭의 말뜻을 간절히 생각하다 비로소 크게 깨달은 아난다는 기쁨에 넘쳐 그 길로 당장 경전을 결집하는 필발라 굴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이에 가섭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구냐?”
기쁨에 가득 찬 아난다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아난다입니다.”
그러자 가섭이 다시 물었다.
“이 깊은 밤중에 웬일인가?”
아난다는 소리쳐 말하였다.
“내가 방금 모든 번뇌를 여의었습니다. 그러니 입장을 허하여 주십시오.”
가섭은 반색하여 말하였다.
“그대가 드디어 깨쳤으니 이는 참으로 고마운 일일세. 어서 문안으로 들어오게. 그러나 때가 이미 깊은 밤중이라 문을 열어 줄 수 없으니 그대가 깨친 도력으로 문밖에서 문안으로 들어오시게.”
아난다는 깨친 도력으로 자물쇠 구멍을 통하여 방안으로 들어가 가섭에게 예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가섭을 껴안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 어느 때 부처님께오서 아무 곳에 계시면서 아무 것을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인간과 하늘이 받들어 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일이 내가 이렇게 들었다는 말로 시작되는 초기 경전이 아난다의 기억에 의해 기록되고 결집되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를 깨친 아난은 열쇠구멍으로 들어가 집회에 참석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결집이 열린 인도印度의 왕사성王舍城 칠협굴七葉窟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거기에는 문도 없고 열쇠 구멍도 없다. 이름대로 그냥 굴이다. 소설에서 인용한 대로 스토리 자체가 소설이고 허구이다. 그러므로 아난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나 가섭에서 아난으로 이어지는 전법이야기는 초기불교시대에는 없었던 것으로 선종 집단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그럼 무문은 이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몰랐을까? 무문은 왜 이 이야기를『무문관』에 넣었는가?
참고로, 자물쇠 구멍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는 선도회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에서 <문이 잠겨 있으니 열쇠 구멍으로 들어오라!>라는 화두로 참구하고 있다.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箸
아난의 질문에 가섭은 “아난!”이라고 부르고, 아난은 “예!”하고 대답한다. 부르고 답하는 선문답은『무문관無門關』「제10칙 淸稅孤貧」이나「제17칙 國師三喚」등에서 이미 보았다. 여기서는 부른 다음 “문 앞의 찰간을 넘어뜨려라!”라고 지시한다. 설법이 끝났음을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묻고 답하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몇 차례 짚어본 바 있다. 그것은 “네가 곧 부처”라는 돈오의 진실을 충격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아난이 이 물음의 의미를 올바로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아난은 가섭의 부름에 “예” 하고 대답을 했고, 이에 가섭은 문밖의 찰간을 넘어뜨리라고 말한다. 찰간을 넘어뜨리는 것은 법상 앞의 자리를 말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법이 끝났음을 알리는 의식(儀式)이다. 공연이 끝났으니 그만 무대를 걷으라는 말이다.10
앞에 다른 칙에서도 거론하였지만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가섭이 부르고 아난이 대답하는 순간 아난은 대답하는 외에 다른 생각이 없다. 아난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이 순간 사라진다. 집착 뿐 아니라 아집과 망상, 온갖 사심과 잡념이 일시에 멈추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르고 대답하는 순간 무심의 상태가 되어 본래의 빈 마음이 언뜻 드러나는 것이다. 생각의 파도가 멈추고 물까지 빠져나간 갯벌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숭산 스님이 말씀하신 “생각이 없으면 부처!”라고 한 바로 그 상황이다.
적어도 선종에서는 소위 그 짧은 순간만은 모든 망념이 사라졌고 그로인해 선의 종지가 가섭에서 아난에게 전해졌다고 본 것이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창작자는 가섭의 입을 통해 ‘문전에 있는 찰간을 치우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사자전승의 전법이 끝났음을 알림과 동시에 마음 법이 전해졌음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또 한 번의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가섭이 부르고 아난이 대답하므로 써 가섭과 아난의 본래면목이 서로 만났다고?
찰간刹竿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법요식이나 설법 등을 알리기 위해 사찰의 문전에 세운 깃발이다. 인도의 관습에 설법이나 논의를 하는 장소에 하나의 깃발을 세워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표시로 했다. 지금 가섭은 아난에게 찰간의 그 깃발을 내리라고 한 것은 설법은 이미 끝난 것이다. “설법할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가섭이 <아난이여!> 부르고 아난이 <예!>라고 대답한 그것으로 설법이 모두 끝난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전법이 이루어진 것이다.11
가섭이 부른 것은 ‘아난’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난의 본래면목이요. 임제가 말한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의 아난이었고, 무심히 그것에 응한 것에는 본래면목으로서의 아난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아난이 자기가 드러내고 있는 본래면목을 스스로 눈치 챘다면, 무엇 때문에 ‘찰간을 쓰러뜨리라’는 군말이 필요 했겠는가.12
티벳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를 뒤덮고 있는 룽다와 타르초.
'룽다'는 긴 장대에 매단 한 폭의 기다란 깃발이다. '바람'이란 뜻의 룽과 '말'이란 뜻인 '다'가 합쳐진
티베트 말이다. 진리가 바람을 타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타르초는 만국기처럼 긴 줄에 직사각형의 깃발을 달아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찰간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다람살라 Dharamshala가 있는 맥그로드 간즈 McLeod Ganj는
히말라야 다울라다르 Dhauladhar 산맥의 만년설이 원경으로 펼쳐지는데,
만년설에 이끌려 산을 오르다 우연히 발견한 인도식 성황당이다.
본칙의 찰간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내부 모습이다. 우리나라 성황당과 너무도 닮아 있다.
부르고 답하는 것으로 본래면목이 드러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무언가 달라졌고 그것을 “전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비밀스럽게 전해진 것이 무엇인지 계속 걸린다. 무언가 간 것은 확실한데 실재로 간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육조혜능은『무문관』「제23칙 不思善惡」에서 명 상좌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설한 것은 비밀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만약 자기 자신의 면목을 돌이켜 본다면 비밀은 도리어 그대에게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我今爲汝說者, 卽非密也. 汝若返照自己面目, 密却在汝邊.]
즉, 비밀스럽게 무언가가 간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가지고 있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는 내용이다. 간단히 말해 전한 바는 없지만 스스로 깨닫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을 깨뜨려주는 것을 두고 선종의 조사들은 마음을 전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본래의 자기를 확인하는 일일 뿐 다른 누구로부터 ‘무엇’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은밀히 부촉했다[密付]’라 함은 의원이나 무당이 세상 사람이 보지 못하게 비장의 기술을 너와 나 둘만이 전하는 것과는 달라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밝게 깨닫게 하는 것을 ‘은밀’이라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장경 헌(長慶獻) 스님은 ‘28대의 조사께서 모두 마음을 전한다[傳心] 하였지, 말을 전한다[傳語]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만 의심나는 마음[疑情]을 깨뜨려주었을 뿐, 결코 불심(佛心)의 체(體)에서 기연에 응수한 일은 없다’하였다.
(중략)
아난존자 또한 일찍이 크게 깨우치고 하마터면 ‘여래가 나에게 삼매(三昧)를 내리셨다고 생각할 뻔하였다’고 하였다.13
예로부터 전법을 ‘부전不傳의 전傳’이라고 한다. 전한 바 없이 전한다는 뜻이다. 혜암 선사도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着의 의지意旨를 묻는 질문에 “안불견眼不見 이불문耳不聞,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법에 대한 견해를 밝히신 것이다.
20년 전 병술년(1945)에 나 혜암이 범어사 대성암(大聖庵)에 갔더니, 만성(萬性) 비구니가 내게 와서 묻기를 “도각문전찰간착(倒却門前刹竿着)의 의지(意旨)가 어떠합니까?” 하였다.
그때 마침 나는 전강(田岡) 스님이, 누구의 물음에 대한 답에 ‘두 번 범하지 않겠노라.’고 한 말이 생각나기에 얼른 “두 번 범하지 않겠노라.” 하였다. 그러자 만성 비구니는, “그렇다면 전자에 제가 스님께 졌던 빚을 이 한 마디로 다 갚았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내가 답을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시 ‘전에는 만성 비구니가 내게 와서 묻고 공부를 했는데, 이제 와서는 내가 그 물음에 답을 잘못하다니……’ 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 뒤 나는 그 말을 생각하고 용맹정진을 계속한 끝에 비로소 찰간대의 의지(意旨)를 밝히게 되었다. 만일 그때 내가 만성 비구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 의심을 그냥 끌고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믿고 그 의심을 끌고 왔기 때문에 오늘에 그 경우를 깨닫게 된 것이다.
만일 나에게 찰간에 대한 의지(意旨)를 묻는다면, 나는
“안불견 이불문(眼不見耳不聞),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하리라.
찰간대를 꺾어 버린 소식은 결국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났다 하더라도, 그 근본 자체는 감히 이를 수 없는 것임도 알아야 하느니라.14
그럼 안불견眼不見 이불문耳不聞인 전법의 결과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소위 깨닫게 해 주었다는데 그 깨달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무문은 그것을 ‘부속음양별시춘不屬陰陽別是春’이라고 노래한다. 풀어서 말하면 깨달음의 세계는 우리가 접하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그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느끼는 계절의 봄과는 다른 또 다른 봄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다.
진리는 내가 나의 본질을 파지하여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송의 마지막 구절에서 혜개는 그곳의 풍경을 잠깐 보여준다. “음양(陰陽)에 속하지 않은 별도의 봄.” 음양은 시간적 순서, 계절의 교대(消息)를 가리킨다. 그것은 일상적 의식에 투영된 시공의 질서를 암시하고 있다. 절대는 그러나 이 인식론적 제약과 한계 너머에서 일어나는 초시간적 사건이다.
우리는 그 곳을 일종의 박제된 공간으로 연상하는데 익숙하다. 그러나 선은 그런 오해에 빠지지 말라고 늘 경계한다. 그곳은 회색빛의 어둠이나 파리한 영혼들의 세계가 아니다. 그 곳은 별세계 아닌 별세계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꽃이 진다.”15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선은 죽음과 무기력을 무엇보다 타기唾棄한다.’ 타기는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여겨 돌아보지 않고 버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말한다. ‘초기불교는 열반을 의지의 완전한 소멸에서 찾는, 어느 면에서는 음울한 색조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은 이와는 다르게 생명의 약동과 축복을 고무 찬양해 마지않는다.” “선은 삶을 위한 기술이지 죽음을 위한 조곡이 아니다.” 그렇다! 선은 약동하는 봄과 같은 존재다. 그것도 별세계의.
선도회 간화선 수행에 비유하자면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끝내고 나서의 봄과『무문관』과정을 끝내고 나서의 봄이 다르고,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지난 봄이 다르고『벽암록』을 지난 이후의 봄이 다른 것이다. 요지는 전법에 있지 않고 “별도의 봄”에 있었던 것이다.
조사들의 야바위와 그럴 듯한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별도의 봄의 향기를 맡게 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금도 선각자들은 후학들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지 않은가!
보물 제256호 계룡산 갑사 철당간鐵幢竿 및 지주支柱. 갑사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으로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30년(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문화재청자료에서 인용) 덧붙일 것은 당간과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 본칙의 찰간과는 거리가 있다. ‘倒却門前刹竿箸’을
‘찰간의 깃발을 내리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II. 사설辭說 I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가섭에게 세 곳에서 심법을 전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그리고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로 정리 되어 ‘삼처전심’이라고 부른다. 그중 <靈山會上擧拈花>는「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에 이미 나왔다.16 <多子塔前分半座>은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는 이야기이고, <沙羅雙樹槨示雙趺>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가섭이 오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미셨다는 내용이다.
붓다의 제자들
삼처전심의 주인공인 마하가섭摩訶迦葉은 붓다의 10대 제자17 가운데에서 가장 엄격하게 수행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란 칭호를 받은 제자이다. 폐의를 걸치고 더러운 고행자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그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이 없고 검소하며 간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수도정신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는 모르지만, 가섭은 그리 뛰어난 제자는 아니었다.
당시 붓다의 수제자는 ‘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불舍利弗과 ‘신통제일神通第一’ 목건련目犍連이었다. 사리불은 그 이름에 이미 ‘불’자가 들어갈 정도로 이미 부처로 추앙 받던 인물이다. 경전 중에는 석가를 대신하여 설법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자이나교의 성전인『성선聖仙의 말씀』에는 불교 자체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리불의 가르침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다. 지혜는 깨달음의 상징이며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지혜제일이라는 칭호는 곧 그가 수제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리불의 친구이자『목련경目連經』의 주인공인 목건련 또한 그에 필적하는 인물이다. 그의 지옥순례기인『목련경』은 무거운 업장으로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신통력으로 구하는 내용이다. 아들인 목련 존자의 효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악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가르치는 경전으로 유명한데, 그의 신통력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한편 불가에서 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 날 행하는 우란분재 또한 그로부터 유래하였다고『우란분경盂蘭盆經』은 전하고 있다.
금강경에 등장하는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須菩提도 공空에 대한 설법으로 유명하였고, 25년간 석가를 모셨던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은 만년에 부처님 곁을 지켰던 중요한 제자였다. 수보리는 무쟁삼매無諍三昧의 법을 깨쳐 모든 제자들 가운데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아난은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 결집結集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대부분의 불교 경전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데, 이 ‘나’가 바로 아난인 것이다. 경전이 후대에 전한 데는 아난의 공이 컸다고 하겠다.
부처님의 후계자
고대 인도의 철학서이자 바라문교의 성전인『우파니샤드』는 전통적으로 장자長子 혹은 신뢰할 수 있는 제자에게만 전해졌다.『우파니샤드』의 원래의 뜻도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 혹은 사제 간에 은밀히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당시 불교의 진리는 공개된 것으로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이 행해졌다. 특별히 후계자를 정하거나 선택된 사람에게만 비밀히 법을 전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파격破格이고 혁명革命이었다.
원시 교단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못가라나가 “부처님은 입멸 전에 누구(특정한 사람)를 멸후에 있어서의 의거할 곳, 즉 교단의 우두머리(上首)로서 정하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한데 대해서, 석존의 시자였던 아난다는 “세존께서 ‘이 사람이야 말로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의거할 곳이 되리라’고 추천한 수행승이 한 사람도 없으니 너희들이 오늘날 귀이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거할 곳이 없는데 모두가 협력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아난다는 “우리가 의거 할 곳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거 할 곳이 있습니다. 즉 ‘법을 의거할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18” 라고 단언하고 있다. 즉 특정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도는 석존의 입멸에 의하여 의거할 곳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법’이야말로 우리들의 의거 할 곳이라는 것이다. “법에 의하라. 사람에 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귀착한다.19
아난다는 의거依據 할 수 있는 부처님의 후계자, 즉 교단의 우두머리를 묻는 목건련(못가라나)에게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依法不依人]’고 말하고 있다. 부처님 시대, 원시 불교 시대에는 교단도 형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두머리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부처님은 임종하면서 ‘자신에 귀의하고 진리에 귀의하라,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고 하였을 뿐이다.
일찍이 고타마 부다의 시대에도 제자들과 그와는 떨어져서 따로 생활하고 행동했었는데, 저 광대한 지역에서 스승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란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의 사후에는 전 교단을 지배 통솔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했고, 그가 설파한 가르침과 계율이 의지처가 되고 길잡이가 된 것 같다. 최고 권위를 가진 전 교단의 통솔자가 차례로 대를 이어가는 현상은 인도 불교에서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20
원시불교에서는 교단의 우두머리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고 대를 이어가는 현상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계자를 정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덕이 높은 수행승에 대해서는 존자尊者라고 부르고, 교단의 연장자를 장로 또는 장로니長老尼라고 불렀다. 이는 불교 뿐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남방에는 아직도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
부연하면 불경이란 대부분 후세에 윤색되거나 필요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삼처전심의 이야기나 <가섭찰간>의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가섭이 삼처전심의 주인공이 된 데에는 사리불이 부처님 보다 먼저 입멸하여 전승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부파불교시대 가섭을 후계자로 세웠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가 오랫동안 교단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경전에 나타난 전법의 이야기는 선종이 발전하면서 더욱 더 강조되는데, 이는 선종에서 사자전승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아난이 교법을 상징한다면, 가섭은 교법의 핵심으로서 본질을 상징한다. 아난이 교(敎)라면 가섭은 선(禪)을 대표한다. 아난은 아직 깨닫지 못했고, 가섭은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아난은 부처님을 지근에서 시봉하면서 모든 설법을 잘 듣고 암기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설사 모든 경전을 다 암기하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다. 이 공안이 전하는 역사적인 의미는 교법에 대한 자기 체험적 실현이 없으면 여전히 부족하다는 송대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21
III. 사설辭說 II - 당간지주幢竿支柱와 괘불대掛佛臺에 대하여
보물 제86호 강릉 굴산사지崛山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847년(통일신라 문성왕 9)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 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소박하면서도 강경한 모습이 통일신라시대의 웅대한
조형미를 나타낸다. 너른 들판에 걸맞은 설계이다.
당幢과 당간지주幢竿支柱
‘찰간刹竿’ 즉 ‘당간幢竿’은 사찰 입구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으로 깃발인 ‘당幢’ 혹은 ‘번幡’을 거는 장대를 가리킨다. 당幢은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설법이나 논쟁이 있을 때 사람을 모으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이르러 군사용 깃발인 번과 결합하면서 급속히 번져 나갔다.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각 사찰에 조성되었는데, 높이 약 15미터 가량의 당간에 당을 달아 멀리서도 사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당간 아래에는 보통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이 있고 그 좌우에는 당간을 받치기 위한 높이 약 3미터 가량의 지주支柱가 있는데 이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보물 제505호 담양潭陽 읍내리邑內里 석당간石幢竿.
고려시대의 당간으로 높이 15m의 당간 위 끝부분에는 금속제의 보륜寶輪이
이중으로 장식되어있고 풍경風磬과 같은 장식이 달려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석비石碑에
‘대풍절이목대립大風折以木代立’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큰 바람에 넘어진 것을 1839년(헌종 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 쪽에 건립되어 그 주변지역이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도 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 당간지주가 인도 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는 보이지 않고 한국에만 유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불교 도입 이전의 소도蘇塗, 장승長丞사상에서 유래되어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사찰에 도입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신목神木사상의 일종인 솟대가 변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2 외형이 초기 원시 사상에서 유래된 선돌이나 남근의 형상을 띄고 있어 ‘남근숭배사상男根崇拜思想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형태는 두 기둥을 60~100cm 의 간격으로 세우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면은 평평하고 수직인데 반하여 뒷면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고 둥글다.
대관령국사녀성황사 내에 봉안된 신목. 신목이란 것은 대관령 동쪽 지방인
강릉, 명주 지역의 수호신인 범일 국사가 강림하는 나무를 말한다. 이 나무 위에
깃든 국사 성황신을 모시고 내려와야 강릉 최대의 축제이고 한국 3대 민속제의 하나인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 단오제가 시작된다.
국사성황제와 산신제를 지내면서 대관령 신목베기 행사가 있고 신이 튼튼히
실려 있는 가를 확인하는 대내림 과정이 끝나면 신목을 앞세우고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대관령국사녀성황사로 내려온다. 합방의식을 베풀기
위해서다. 이러한 남신과 여신의 합방은 풍요의 상징이다.
(이원섭 지음,『한국의 무당』pp. 86~87 에서 인용)
소원이 적힌 천이나 깃발로 장신된 신목.
당은 내구성이 없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간 또한 대부분 목재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목재로 된 당간 또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철재나 석재로 된 것들이 몇 점 남아 전한다. 이에 비해 당간지주는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며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당간은 산지로 가람이 이전되면서 시각적인 효과가 줄어들었고, 개인의 정신 수양 및 내실이 중시되면서 당간의 조성 의미도 희미해져 고려 말 이후 점차 사라진다.
덧붙일 것은 그림 설명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본칙 공안에서 말하는 찰간(당간)은 우리가 보는 당간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당과 당간은 인도나 중국에는 없는 독특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倒却門前刹竿箸’을 “찰간의 깃발을 내려라!”라고 번역한 것을 보는데, 이는 공안에 등장하는 상황이 아닌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항주 영은사 당간. 근래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비슷한 형태의
당간과 당간지주가 사찰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우리나라 당간과 당간지주와 매우 흡사한 형태이다.
중국 북경北京 백탑사白塔寺 당간. 원래 이름은 묘응사妙应寺인데 하얀 탑이 있어서
백탑사라 불린다. 백탑사는 원나라 때인 1096년에 지어진 절로,
이 절의 상징인 백탑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라마탑이다.
중국 상해上海 옥불사玉佛寺 내의 당간과 당간지주. 옥불사玉佛寺는 상해 도심에 있는
1882년 창건된 고찰古刹이다. 괘불대는 아니지만 괘불대에 가까운 모습이다.
괘불掛佛과 괘불대掛佛臺
절에 가면 당간지주와 비슷한 것으로 괘불대掛佛臺를 볼 수 있다. 괘불대는 대웅전이 비좁아 신도들이 모두 들어가지 못할 때 대웅전 앞마당 등에 괘불掛佛을 걸기 위한 장치이다. 당간지주는 1쌍인데 반해 괘불대는 반드시 2쌍의 지주(모두 4개)로 이루어져 있다. 지주의 간격은 약 4~5미터로 두 쌍의 지주에 각각 당간을 꽂아 폭 약 6미터 내외의 두루마리 형태의 대형 괘불을 걸도록 하였다. 외형은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이나 당간지주에 비해 장식이 거의 없고 크기는 약 1미터 내외로 작다.
설악산 신흥사神興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괘불대
달마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보물 제947호인 해남 미황사
대웅전과 괘불대.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되었으나,
괘불 걸이용으로 만들어진 괘불대는 조선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범어사 괘불대와 당간
괘불掛佛은 탱화幀畵의 일종으로 많은 대중들이 모이는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 천도재遷度齋, 수륙재水陸齋, 기우재祈雨齋 등 야외법회를 행할 때 쓰는 의식용 불화佛畵이다. 법당 안의 부처를 대신해서 더 많은 신도들이 예불을 올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야단법석野檀法席의 한 형태라고 하겠다. 괘불은 보통 10미터 이상의 대형불화로 불전佛殿 불단佛壇 뒤에 있는 궤机에 보관하고 있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경우에만 불전 앞마당에 걸기 때문에 평소에는 볼 수가 없다.
국보 제290호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과 그 앞에 있는 괘불대.
통도사 야외법회 모습. 괘불대에 걸린 것은 보물 제1351호 통도사괘불탱通度寺掛佛幀.
연꽃가지를 든 보살형 입상의 모습이 단독으로 그려진 괘불이다. 이 괘불탱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정면을 향하여 서 있는 보살형의 모습을 화면에 가득 차게 그렸다.
몸 광배와 머리광배가 있으며, 화면 윗부분에는 옅은 황색과 녹색 구름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이 괘불탱은 조선 정조 16년(1792)에 비구 지연(指演)을
비롯 22명의 화승들이 참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