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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채학의 역사 (IRIDOLOGY HISTORY)
전 세계적으로 과학은 그 역사에 뿌리를 갖고 있는 가정, 분석, 규정, 결론의 체계로 간주되어지고 있고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이념을 설명하고 다른 과학자들의 실험을 반복적으로 증명하여 나오는 결과를 얻는 가능성도 있다.
홍채학을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홍채학이 역사적 배경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인도와 중국의 3천년 이전의 고대 자료에 따르면 질병 진단을 하는 동안 감각기관을 검사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었다고 나와 있다. 눈과 홍채의 변화를 검사하는 것은 이 검사에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이었다.
G. Carter는 1922년에 Tuthanchamon (1400-1392 B.C.)의 무덤에서 가치 있는 고대문화 유품을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홍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은 접시도 있었다. 유명한 파라오 사도인 El AX는 홍채학자뿐 아니라 대중에 널리 보급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공로로 인하여 안과 진단학은 이집트에서 바빌론, 티벳, 인도, 중국 그 외 다른 지역까지 퍼지게 되었다 (E. Velkhover).
바티칸 도서관과 하버드 대학 (A. Butenin)에 보관되어 있는 El Ax의 파피루스는 홍채학에 대해 글로 기록해 놓은 최초의 교육 자료이다. 그 당시 이집트의 사제들은 의학에 관해 상당히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300가지 이상의 질환, 그 진단 방법, 치료와 예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홍채 구조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요인 중 한 가지는 파라오와 사제들의 동상에 나타나 있다. 카이로 국립 박물관에 있는 동상의 대부분은 칼라 모자이크로 된 눈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비슷한 눈 두 개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예들은 알렉산더 마케도니아 의사의 비망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에 따르면 전사들을 선택할 때에는 그들의 홍채 상태를 고려하여 선택 했었다고 한다. 헬레니즘 이집트 (305~300 B.C.)의 가장 부흥했던 왕조 중 한 왕조의 창시자인 프톨레메우스이자 군지도자였던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측근들은 그런 사실을 계속 고수하고 이집트가 승리를 얻은 후 고대 로마로 그 사실들을 전파했을 지도 모른다.
11대 프톨레메우스인 Evergot는 눈의 구조와 움직이지 않는 지구 주변을 회전하는 우주사이의 유사물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였던 프톨레메우스 Klaudius (90~160 B.C.)의 주요 의사록인 “Almagest"에는 이런 자료가 나와 있지 않다.
티벳 의학에서는 환자의 외형, 즉 피부, 혀, 눈의 상태, 외이의 형태, 근육의 움직임 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눈은 그 유기체내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기관으로 간주되어졌다. 눈이 빛나고 생기 있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환자가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
“법학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저명한 티벳 의사들은 간 기능과 눈 검사 분야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눈은 “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채와 동공의 변화를 검사하면서 내부 기관에 생긴 명백한 손상에 관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동공을 신체 깊숙한 곳을 나타내주는 창이라고 했다.
공막에 나타난 황달과 동공의 아래 부분에 나타난 불규칙함은 혈액계통에 질환이 생긴 것을 나타내는 증세이고 공막에 나타난 황달과 동공의 윗부분에 나타난 불규칙함은 간 질환이 생긴 것을 나타내는 증세이다.
안구는 사람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신체의 심지로 종종 불리기도 한다. 맑은 눈은 신체의 건강한 상태를 나타내는 반면, 희미한 눈은 병에 걸린 상태를 나타낸다.(E. Velkohver).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헤락리투스는 홍채에 관해 흥미 있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의 유명한 자연학자인 “해부학의 아버지” A. Vesalius (1514-1564)는 인간의 신체 구조에 관해 저술해 놓은 책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홍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치료화학(약물과학)의 창시자이고 철학자이며 연금술사인 Paracelsus (Fillip Teopharast, 1493-1541)는 병에 걸린 사람들의 홍채에 관한 많은 묘사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는 홍채 구조에 관해 더 자세한 검사를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안과용 기구가 정말로 부족하여 홍채 구조와 그 색의 특징을 자세히 연구할 수 없었다. Antuan von Levenguk (1632-1723)이 곧 현미경을 발명하게 되어 홍채진단학 검사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670년에 생리학자인 Fillip Meyens는 그의 연구 작업에 확대경을 이용했다.
그는 눈과 눈썹에 관한 질환을 진단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그는 눈을 두 개의 수직선을 이용하여 네 영역으로 나누고 각각에 몇 개의 내부 기관을 투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의 Dr. Mac Leiden이 뇌와 폐에 관한 최초의 믿을만한 설명을 했다. 홍채학에 관한 최초의 매뉴얼을 1790년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된 Portu유럽 대학에서 출간했다.
1786년 Hettingen 대학에서는 “De Ocolo et Signo" (눈과 그 증세)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1813년에는 비엔나의 의사인 Y. Beer는 안과 질환에 대한 그의 책에서 유기체에 나타나는 신체 징후와 홍채진단학의 관계를 설명했다. 고대 홍채학에 대해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모든 결론은 그 스스로 내렸다는 것은 그의 작업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고대와 중세의 과학은 일반적인 눈 구조와 색깔에 관해서만 다루었다. 홍채- 동공에 나타는 증세를 체계화 시키는 방법에 관한 기초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국소해부학에 관한 검사에 관해 고려해 보지 않게 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근처의 도시 Egernar 출신의 lgnatz von Pevzely (1826-1907)라는 의사는 그 방법의 기초를 증명했고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다소 원시적이지만 어느 정도는 신빙성 있는 그 자신만의 홍채 투사 영역에 관한 차트를 만들어 제안했다.
과학자들의 전기 작가들은 현대 홍채학의 미래 창시자들이 해야 할 임무를 결정짓는 흥미로운 설명을 했다.
정원에서 일하던 11세된 소년이 사고로 올빼미의 다리를 부러뜨리게 되었다. 이때, 그는 올빼미의 아래 부분에 검은 수직선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는데, 이 선은 후일 올빼미의 다리가 회복되었을 때에는 사라졌다. 그는 평생 동안 왜 그런 선이 나타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욕조에서의 발견과 뉴톤의 사과나무 아래의 발견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원에 있던 Peczely에게도 비슷한 일이 왜 일어나지 않겠는가? 아마도 선견지명이 가장 가치 있는 사람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을 지도 모른다.
Ignatz von Pecczely (1826-1907)
비엔나 대학에서 연구도 하고 외과 병원에서 일하던 Peczely는 각기 다른 질병에 따라 나타나는 환자 홍채의 변화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관 뿐 아니라 신체의 각 부분이 홍채 분할 영역에 각각 상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현대 홍채학의 창시자인 그가 최초의 홍채 차트를 만들어 냈다. 1880년에 Peczely는 홍채를 이용하여 진단을 내리는 원리에 관해 저술해 놓은 책을 출간했다. 홍채 진단학적 증세가 나타나는 곳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 증세를 규정하는 작업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후에 그는 홍채 진단학에 관한 매뉴얼을 펴냈는데, 거기에서 그는 눈은 영혼의 거울일 뿐 아니라 신체의 거울이기도 하다는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그 시대에 이 작업은 냉대를 받았었다.
그러던 중, Peczely와 동시대에 살았던 스위스의 목사인 N. Liljequist가 홍채 진단학 역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덧붙이게 되었다 그는 그거 왜 홍채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그 눈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는 Peczely의 작업과는 무관한 독립된 연구를 하여 더 자세하고 더 믿을만한 홍채학 차트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모양체대의 영역에는 소화관을 나타내주는 부분이 있다고 결론 내렸고 기관 결손 시 눈에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했다. 홍채 색깔의 분석에 관해서는 안과 진단학의 기초에 관한 책(1897)에서 최초로 기술하고 있는데, 그 책을 통해 유기체에 나타나는 유독성, 유독 알러지성 변화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더 확대되었다. 이 목사는 전체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예방접종을 하는 것과 많은 양의 약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미래에 많은 알러지 질환을 유발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 유럽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시카고의 자연 치료학의 창시자인 A. Lindar는 홍채학에 관한 그의 책에서 홍채 진단학과 자연 치료학의 몇 가지 원리에 관해 입증하고 있다.
현대 홍채학의 시작에 관해서는 다른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역시 언급해야 한다. 바로 E. Felke E. Schlegel, P. Thiel, M. Madaus, H. Hense (E. Felke의 추종자들), K. Baumhauer, R. Schnabel (후일 1959년에 런던 과학협회로부터 홍채학에 관한 책을 두 권 출판한 것에 대해 상을 받았다). A. Maubach (E. Felke와 E.Schlegel의 추종자) 이다. H. hense와 R. Schnabel이라는 사람들은 20세기에 객관적인 방법을 홍채학에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H. Hense는 그의 책자에서 최초로 홍채학 사진을 수록했고 R. Schnabel은 확대경 대신에 현미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0년 M. Madaus가 창간한 저널인 “Iriscorrespondens"을 통해 당시의 홍채 진단학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 졌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무렵에 홍채학에 관한 많은 아티클들이 발간되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한 연구가의 기사가 연속되는 것이었다. 가끔은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의학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어 보이는 것도 있다. 그 당시 장비의 낮은 기술 수준과 관련되어 임상적 승인에 관한 문제가 생기고 연구실, 병원, 대학간의 상호 노력이 부족한 문제는 종종,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본 과학자들에게도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 내게 만들었다. 모순되는 결과와 투사 지점에 관한 해석, 가끔 나타나는 과학자들 간 의 개인적 반목 등이 홍채학에 사용되는 방법과 그것을 따르는 추종자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역사속에서 그런 방법들의 발달은 시작 시 몇 가지 불일치점을 이끌어내기는 했어도 투사 영역에 각각 연결되는 체계와 각기 다른 차트의 조합에 의해 증세를 분류하는 법을 만들어 낸 국립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B. Jensen (미국), J. Deck (독일), R. Bourdiol (프랑스), P. Dimkov (불가리아), E. Velkhover (러시아)가 국립 학교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다.
B. Jensen (1908년 태생)은 현대 홍채학의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의학자이고 식이요법학자이며 척추지압 요법사이자 철학자이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홍채학, 과학과 실제”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기관의 기능을 차단시키지 않고도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홍채 진단학의 주요 이점중 하나는 실제적인 질환이나 기능 부전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체질적 특징의 징후, 유전적 원인에 의한 결손, 구조적 손상이 홍채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조기 진단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구가들이 임상적 징후와 홍채학의 관계에 관한 그들의 결론을 확인하거나 부인할 만한 연구를 더 이상 하지 않고도 환자의 증세와 호소에 의해서 홍채에 나타나는 사실을 확증하려고 노력할 때 홍채 증상학에서 나온 내용으로 인해 B. Jensen은 홍채에 나타나는 “하얀 점”에 관해 더 자세히, 많은 내용을 입증하고 정의할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건강의 집” Ben Lomoud에서 시작한 B. Jensen은 Escondido(CA)의 Alta Denae 요양소를 홍채학과 자연 의학의 전 세계적인 중심지이고 유명한 기관으로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350,000 명의 환자를 50년 간 연구했다고 했다. B. Jensen이 발달시킨 홍채 차트는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퍼진 차트 중 하나이다. 홍채 구조, 그 밀도, 홍채의 분할, 색소, 다른 요소에 관한 접근 방법은 독창적이고 실험에 의해 확증된 방법이다. 홍채 유전학적 유전의 원리에 관한 그의 이론은 홍채 진단적 예후를 현대적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그는 전 세계의 홍채학자들을 단결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1년, 그는 홍채학자와 자연 의학자 국제 협회(FIA)를 창설하고 오래 동안 그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했었다.
미국의 현대 홍채학 학교의 저명한 대표인 Mr. Harry Wolf는 전 세계적으로 홍채 정신 신체학 분야에서 주요한 인물이다. 시애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국립 과학 연구소 홍채학 협회를 그가 이끌고 있으며 홍채에 나타나는 정신 신체적 증상에 대한 이해를 새로운 과학-실제적 방법으로 입증했다.
J. Deck (독일)는 홍채학의 기초 작업에만 40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했다. “홍채 진단학의 기초”(1965)와 “감별 홍채 진단학” (1980)이라는 두 권의 책자는 홍채검사를 형태학적, 유전적, 임상적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로 나왔다. 그가 창설한 기초연구 협회 (Ettlingen, 독일)는 유럽에 있는 주요한 홍채 교육 및 연구 센터 중 하나이다. J. Deck는 다른 학자들과 함께 체질 형태를 분류, 발전시켜 유기체의 보정(상쇄) 능력을 평가하고 어떤 질환에 걸릴 소지가 있는 지를 평가해 보는 작업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위에 나온 분류의 제한된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Deck이 홍채 색깔이 밝고 색소 포화도도 낮은 갈색 홍채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독일의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모든 연구를 진행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들 대부분이 색소 포화도가 높은 진한 갈색 눈을 갖고 있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 Deck의 분류에는 이런 특징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R. Bourdiol (배아가 홍채의 투사 형태의 저자)은 프랑스 홍채학 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명이다. 국소 배아기적 관점(아직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지는 않다. Jausas와 스페인과 포르투갈 학계의 몇몇 대표적 학자들이 이것을 사용한다)의 중요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색소, 홍채의 치료, 홍채학의 윤리학과 도의적 측면에 관해 그가 기여한 것에 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가리아의 P. Dimkov (1886-1979)는 Trakian 치료 체계 분야의 대표적 인물 중 한명이다. 전 생애동안 전통 의학의 전문가였던 그는 질병보다는 사람을 치료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원리를 따랐고 증상보다는 질병의 원인을 찾겠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홍채는 유기체 내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검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질병이 근접한 기관에 퍼지게 될 때 홍채에 그 계통의 증세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음을 입증했다. 그의 저서 “안과 진단학” (1977)과 1991년 그가 사망한 후 출간된 제 3권 “자연 의학과 자연 법칙에서의 생명”은 의사들에게는 필수적인 책이다.
P. Dimkov의 추종자인 Dr. A. Kaiadjiev (불가리아의 Plovdiv)는 “In-Jan"원리와 홍채 신체학과의 관계 통합의 기초를 마련해 놓았다.
신경 병리학자이며 의학교수인 E. Velkhover (러시아)는 현대 연구 방법에 의해 클리닉에서 얻은 결과를 시험해 보는 것이 불가능할 때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연구의 특성과 제한점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홍채-임상학적, 임상-홍채학적 방법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을 조합할 수 있게 되었다. 홍채학자들이 발견한 모든 것을 클리닉에서 시험해 봐야하고 임상 자료들을 홍채학자들이 조사해 봐야 한다는 조건은 대단이 중요하다.
Velkhover 교수가 이끄는 1977년 연구소에서 창설된 인민 우정 대학은 큰 병원과 과학 의학 및 스포츠 연구 센터의 기초적 작업을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이로 인해 의학 분야의 현대 업적을 이용하여 복잡하고 광범위한 범위의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초적 연구 지침은 소화기계 질환, 말초 및 중추 신경계의 질환, 신장 및 심장 질환과 홍채 신체학, 홍채 유전학, 홍채 심리학, 홍채 염색체치료학과의 연관 관계였다. 위, 십이지장, 간질환시 증상이 투사되는 기관, 간문맥 고혈압, 척추 질환, 전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에서 알려진 대혈관의 폐색성 손상 분야에 관해 연구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12개의 책자가 발간되었는데, 그 중 “임상 홍채학” (1990)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전문 책자가 되었다. Velkhover 교수가 이끄는 교육 센터는 세계 25개국에서 일하는 2000명 이상의 홍채학자들을 예비해 놓고 있다.
현대 홍채학은 TV와 컴퓨터 기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80년 대 초부터 홍채의 이미지를 얻는 컴퓨터 기술이 러시아, 미국,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에서 발달되었다. 다른 아날로그와 비교해 볼 때,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홍채학 소프트웨어와 그 장비를 선호한다.
홍채학자들을 결속하려는 노력이 20세기초반부터 이루어졌다. 전문 저널 “Iriscorrespondent", (M. Madaus), "국제 홍채학자” (B. Jensen), “홍채학자” (E. Velkhover), "Iridologia a naturopatia" (B. Giuriati)와 그 외 저널들은 과학적 통합 노력을 위한 상태를 단계적으로 형성해 갔다. 체코슬로바키아 (1980)와 모나코 (1985)의 국제 의회에서는 연구 작업을 조정했고 미래 연구의 지침을 마련해 놓았다. 1992년 이래로 연례 국제 심포지움을 이탈리아의 Dorimo와 그리스의 Salonics에서 개회하고 있다.
홍채 반사학의 최첨단 방법을 분석할 때에는 기술적 지원의 증가와 많은 발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플래시와 확대경은 이미 과거의 기술이되 버렸다. 장면 포착기의 질이 아직은 높지 않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믿을만한 이미지 분석과 축적된 자료의 분석이 불가능하다.
요즈음 가장 진보된 국립 학회는 다음과 같다:
■미국 - H. Wolf, K. Melloni 및 그 외 다수. 주된 연구 방향은 다음과 같다 ; 홍 채 심리 신체학, 공복 식이요법 치료, 홍채진단학
■러시아 - E. Velkhover 및 다수. 주된 연구 방향은 다음과 같다 : 주제 선정 홍 채유전학
■이탈리아 - "Dorimo" 학회, 회장은 B. Giuriati. 회원들은 V. Di Spatio, M. Melelliroia, D. Mitropulos 및 다수. 주된 연구 방향은 다음과 같 다 : 홍채 영양학, 파종성경화증, 공복 식이요법 치료, 홍채학적 모 니터링
■그리스 - M. Dailakis 및 다수. 주된 연구 방향은 다음과 같다 : 심혈관계 질환
■불가리아 - A. Kaiadjiev 및 다수. 주된 연구 방향은 다음과 같다 : 홍채 영양학 과 각막 경선과의 관계
이미 알고 있듯이 홍채 진단학자들의 발전이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다. 고대의 학문적 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채학은 다른 학문에 비해 다소 역사가 짧은 분야이다. 홍채학에는 많은 하얀 점들이 나타나는데, 가끔 과소평과 또는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단학적 방법의 선상에서 적절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