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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째날(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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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를 생각한다
날짜는 바뀌었으나 인고(忍苦)의 시간이 지나기는 2시간여가 되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편한 몸이 되어 스르르 잠이 들다니?
회복의 빠름이 가히 천부적임은 이미 공인되어 있지만 우려된 것은 나이와 수술이라는
핸디캡인데 모두 기우였음이 확인됨으로서 쉬이 잠든 것이리라.
또한 염려되었던 두 달간의 공백도 전혀 문제거리가 아님을 의미한다.
두우리 상정마을(斗牛上亭) 칠산정을 떠난 시각은 아침 6시 30분.
이 이른 아침에 묵직한 배낭을 메고 가볍게 걷고 있는 나를 누가 두달간의 병치레와 간
밤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룬 늙은이라 보겠는가.
밤중에 헤맨 염전지역을 어림해 보며 어제의 길을 역으로 걸었다.
영백염전 입구, 영광 천일염전명품화사업단 앞을 지나고 큰북재를 넘어서 야월리(野月)
기독교인 순교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는 스테판(Stephen)으로 알려져 있다.(사도행전6~7장)
한국 기독교의 첫 순교자는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이다.
그들은 1791년(正祖15년), 신해박해(辛亥迫害/敎難또는 邪獄)때 참수되었다.
장형(杖刑)의 후유증으로 그들보다 수년 전(1786년~87년)에 사망한 김범우(金範禹)를
순교자의 효시로 보는 이들도 있다지만.
한국 개신교에서는 1866년에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Robert J.Thomas) 목사가 참수
당함으로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한국인 첫 순교자는 1893년에 옥사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신도 백홍준(白鴻俊)장로란다.
"칼날에 더 가까이 가면 갈 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
속사도(續使徒)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117?)의 표어(標語)다.
"내가 야수들에게 넘겨져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도록 용납해 주시요.
나는 하나님의 곡식이며, 맹수들의 이(齒)로 갈려서 그들의 온전한 먹이가 되기 원하오"
"맹수들로 하여금 내 무덤에 와서 내 몸을 조금도 남김 없이 먹어치우게 하시요.
그래서 내가 잠들 때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요."
"내가 그리스도에게 가는데 아무 것도 시기하지 못하게 해주시요..... 온 땅을 통치하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요."
안디옥의 감독인 그는 로마로 압송되어 사나운 짐승들의 밥이 됨으로서 순교자가 된다.
위 글은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에 썼다는 편지중 일부 귀절이다.
그의 순교신앙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그리고, 그의 순교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은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확고한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도와 속사도, 교부 등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막중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복음 21:15~17)
예수가 베드로에게 3번이나 한 당부다.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당부를 이행하기 위해 분골쇄신 했으며 여기에는 순교까지 포함되어 있다.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없었는가 - 순교는 최고 선(善)이 아니다
그들의 순교신앙을 이어받은 한국가톨릭교회는 짧은 기간에, 좁은 땅에서 103인이라는
사상 유례가 없는 순교자를 배출했다.
"자기네가 믿는 성서에도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하다 했거늘 그들은 왜 이
존엄한 생명을 초개처럼 버렸을까.
일차적으로는 살 의미를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현실이 참담하기 때문이었겠지만 대망
신앙이 타는 장작에 기름붓듯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천국과 극락, 기타 보다 완벽한 신세계에 대한 대망(待望)사상이 없는 종교는 소위 앙꼬
(팥소) 없는 찐빵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마치 헌집에서 새집으로 이사가듯 기꺼이 수용한 것을 '순교' 라는 미명
으로 성화(聖化)하기 전에 그들에게 왜곡된 신앙을 주입함으로서 양산된 것 아닐까.
교회 창설 1백년만에 3대박해를 비롯해 수많은 박해에서 신도 1만여명이 순교함으로서
가톨릭순교사(史)의 새 장을 쓰게 되었다니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위 글은 내가 영남대로 죽산성지를 지날 때 쓴 '순교자 유감'(有感)이다.
9정맥과 10대로의 무수한 순교성지를 지날 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는데 여기 염산면의
순교기념관에서는 이제까지와 다른 유감(遺憾)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역의 순교는 유교사상의 철벽과 신문물을 두려워한 수구세력이 워낙 무자비했던
이조때 일이 아니고 6.25민족동란중 적치 3개월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괜찮으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복음26:39)
잡혀가기 직전, 게쎄마니에서 예수는 같은 뜻의 기도를 세번이나 했다.
순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의 최후의 수단일 뿐 최고선(善)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염산면의 기독도들은 과연 죽움을 피할 수 없었는가.
자료에 의하면 북한군은 1950년 7월23일 염산면에 진입해 68일만인 9월29일 퇴주했다.
이 기간에 야월교회 전체교인(65인)이 희생되었는데 보복적 성격이 농후하다.
동란 발발 직전에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잠입한 북한군 일단을 야월교회 청년의 신고로
일망타진했으며 도주한 부상 잔당마저 이 교회 신도가 신고하여 전원 사살했단다.
신고의 당위 여부는 논외로 하고 공산군이 진주와 동시에 보복하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
임은 명약관화한데 신도들은 왜 속수무책이었단 말인가.
돌발적이며 일과성인 쏘나기라면 일단 피해야 하거늘 왜 고스란히 맞았단 말인가.
적치기간이 68일에 불과한데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을 적극적으로 방어한 기록이
없으니 하는 말이다.
순교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광의의
순교에는 주의와 사상을 위해 죽는 경우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순교의 참 뜻은 소극적으로 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사명 또는 신앙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청(양자택일)한 죽음을 말한다.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1818 ~1883)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규정한 것처럼
공산주의는 종교를 거부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격하고 탄압한다.
그러나, 남침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보다 자기네 동지들을 죽게 한 소위 반동집단에
복수한 것이며 신도들은 신앙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보복 살해된 것이다.
영문도 모른채 당한 유소년들의 죽음이야 말로 무책임한 부모들 때문에 생긴 참극이다.
굳이 평가한다면 높은 신고정신, 즉 신상의 위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애국심이라 할까.
애국심은 특정 종교와 무관하며 따라서 순교가 아니고 순국이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설도항의 순교탑 앞에서는 더욱 안타까웠다.
남반도가 완전히 수복된 후인 1950년 10월에 발생한 참상이었기 때문이다.
퇴각대열에서 낙오되어 야간 준동을 일삼는 빨치산(partizan)들에 의해 염산교회 신도
77인이 죽임을 당했단다.
이들이 당한 참변의 이유 역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군과 UN군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한 반동분자라는 것.
수복은 되었으나 치안의 한계로 인하여 후방의 산간벽지 도처가 상당 기간 낮에는 대한
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불리었다.
염산교회 신도들의 경우와 동일한 희생자도 부지기수다.
시골에 사셨던 내 아버지도 들판의 벼집단 속을 전전하며 위기를 넘기셨다고 들었다.
치안이 불안하면 자구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염산교회 신도들은 왜 소홀했을까.
그럼에도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자가 된다면 형평에 어긋날 뿐 아니라 순교라는 거룩한
단어의 남용과 오용이 아닐까.
그들의 죽음을 폄훼(貶毁)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교의 의미를 환기시키려는 것 뿐이다.
순교란 신앙과 사상을 고수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살 수 있는 대안을 거부하고
기꺼이 택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소크라테스가 될 수는 없다
유쾌하지 못한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서둘러 설도항을 떠났다.
'누워있는 섬'같다 해서 누운섬(臥島)이었는데 일제의 지명한자화 정책으로 설도(雪島/
눈섬)가 되었으며 1934년에 육지화되었다는 섬 아닌 섬을.
77번국도 따라 옥슬리 향화도(玉瑟里向化島) 선착장으로 갔다.
향화도 역시 설도처럼 본래 섬이었으나 간척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는 이름만 섬이며
어촌정주어항(어촌의 생활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이다.
못말릴 낚시 마니아들은 낙월도행 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문득, 내 책방에 걸려있는 그림의 글 "萬事無心一釣竿三公不換此江山"(낙싯대를 잡으면
만사가 태평하며 삼정승도 부럽지 않다)이 떠올랐다.
낚시와는 100% 무관하지만 허달재(許達哉/毅齊 許百鍊의 손자) 화백이 그려준 이 그림
속의 조사(釣師)만은 늘 선망하고 있는데 저들도 그런 류(類)의 조사들일까.
낙조가 일품이라는 향화도항은 지금 한 공사가 막 시작되었다.
2014년 3월까지 준공하여 지역의 랜드 마크로 활용할 계획이라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과 높이 99m의 '바다매체타워'다.
영광군은 곧 착공하게 될, 향화도항~무안군 해제면 도리포항을 잇는 영광대교(가칭)가
완공되면 백수해안도로, 영광대교와 연계시켜 서해안 관광 허브를 구축할 것이란다.
꿈은 야무지지만 착공도 하기 전에 다리이름에 시비가 붙을 만큼 심한 지역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지.
그러나, 나는 감히 권한다.
77번국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방조제로 대체하라고.
무지한 늙은이가 기술적 문제를 어찌 알랴만 길이가 시화방조제(12.7km)의 15% 미만
(1.84km)인데 반해 효과는 어림잡아 시화지구에 대등할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함평만이 사라지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국토확장(특히 농지)이 지상(至
上) 과제인 우리에게 고민할 여지가 없는 선택이겠는데.
다시 시작된 '해안 따라 걷기'는 곧 방조제를 건넜다.
함평군 손불면과 경계를 이루는 방조제로 노후하여 보수공사가 한창인 옥실방조제다.
함평땅에 들어서서 맨 먼저 마주친 것은 "수산자원보호구역안내표지판"
안내판이 아니라 "2년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이하의 벌금"을 물린다는 경고판이다.
산과 들과 바다, 거리와 골목,실내와 실외,차를 타도 걸어가도 가는 곳과 머무는 곳마다
금지판이고 무시무시하게도 징역 보내고 벌금 물린다는 엄포판이다.
내가 대간과 정맥들을 탈 때 위반한 것을 징역과 벌금으로 환산하면 나는 아마 옥살이
수십년에 억대의 벌금 무느라 햇볕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리라.
위반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남발을 비판하는 것이다.
금지와 징역과 벌금의 협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몽둥이 민주주의국가에 다름 아니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카르노는 교도민주주의라고 했고 우리나라
군사쿠데타의 한 주역은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각기 비단(緋緞) 포장을 했다.
법(규제)은 적을수록 좋고 법조문은 간결할수록 더 좋다.
법의 권위를 위해서도 모두가 반드시 준수해야만 하는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
가령, 입산금지법은 지켜야 할만한 가치가 없는 법이다.
무단입산자에게 형벌(징역 또는벌금)을 과한다는 것은 입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의
예방을 위한 법이 아니다.
입산자를 벌하는 법이 아니고 입산절차의 미비자를 벌하기 위한 법이기 때문이다.
본말전도의 법이며 우리는 이처럼 황당한 법망에 갇혀 살고 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건지 혼란스러우며 녹비에 가로왈자
(鹿皮曰字)식 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황당하고 자조적인 법언을 낳았다.
한심한 입법자들 때문이며 더욱 한심하게도 그들을 뽑았기 때문이므로 자승자박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소크라테스가 될 수는 없다.
종심(從心)을 넘어선지 오래인 늙은이가 악법 준수의 거부를 선동은 하지 않는다 해도
소크라테스처럼 독배를 마시지도 않을 것이다.
법의 유무와 무관하게 여생을 소욕불유구(所欲不踰矩)의 늙은이 답게 살 것이니까.
함평해안 - 걸으며 생각하며....
학산리 함평항을 지나면 안악해변으로 가는 직선방조제(?) 공사가 진행중이다.
공사장 식당 앞에 이르렀을 때 돌연 시장기가 들었다.
하루쯤은 물만 마시면서도 산을 타는데 아무 지장이 없던 내 몸에 수술후 변화가 왔나.
간밤에 부실하게 식사한데다 새벽부터 벌써 여러 시간을 걸어왔으니 당연한 현상일 터.
10대로를 걷다가 한바(飯場/일본어)로 불리는 공사장 식당에서 식사한 적이 더러 있다.
다른 어느 식당보다 맛이 더하고 저렴해서 다소 상거가 있어도 찾아가기를 자주 했다.
오늘도 시장한 참이기 때문에 그러고 싶었으나 나그네가 2시간 이상 기다릴 수 있는가.
공사장 책임자는 안악해변까지 가란다.
안악은 북적거리거나 요란스럽지 않아 조용한 피서에 알맞는 숲속의 해변이다.
식당도 있으나 솔로인 내게는 그림의 떡에 다름 아닌 메뉴들이다.
대부분의 해변처럼 해물 일색인데다 1인용 메뉴가 없기 때문이다.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지만 주식(主食)으로 대체한 빵을 구하기가 용이하다는 편의성이
높아 내 나라 땅보다 걷기가 더 편했음을 다시 느끼게 했다.
고창 동호해수욕장에서 처럼 식당에서 밥1그릇과 김치를 구입하고 라면을 끓였다.
공복에 포식하면 식곤증이 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이다.
더구나 마을 지인들인 듯한 옆 식탁의 초대로 소주를 거푸 마신 까닭인지 더욱 그랬다.
예수는 게쎄마니에서 생사가 걸린 기도를 할 때 제자들에게 졸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거듭 곯아 떨어진 제자들을 보고 그는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아마, 마지막 날에 종일 동분서주하느라 극심한 공복 상태에서 가진 최후의 만찬이으로
식곤증 또한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상에서 잠시 시에스타를 즐기고 월천방조제 길 따라 해당화꽃길 기념비 앞으로 갔다.
2000년8월에 내습한 태풍 프라피룬(Prapiroon)이 입힌 피해의 복구공사로 태어났다는
연장 1.300m(안악마을 ~ 백옥마을)인 방조제에 세운 비(碑)다.
해당화(海棠花)는 바닷가 또는 물가 사토(沙土)와 산기슭에 군락을 형성해 자라며 번식
력이 강한 장미과 낙엽 활엽관목이다.
국내외 도처에 자생하는 흔한 꽃이라 특별하게 주목받는 꽃길은 아니다.
한데, 여기 방조제의 해당화길은 자생이 아니고 조성이다.
조형물은 "함평만의 해안선이 주는 부드러운 곡선의 안정감과 미래를 향한 푸른 함평
건설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함평의 기상을 형상화" 한 기념비란다.
기념비의 소녀상은 트로트의 여왕이라는 여가수가 부른 가요 '섬마을 선생님'에 나오는
총각 선생님에 대한 섬처녀의 간절한 기다림을 담았다는 작품 설명이다.
긴 문장으로 인해 주어가 애매한 해설보다 단순한 시각적 감상이 오히려 나을 듯 싶다.
지자체들은 명인 명물이 자기 고을과 실낱같은 개연성만 있어도 홍보에 동원한다.
심청은 인천시 옹진군(백령도)과 전남 곡성군이 원류(源流) 다툼을 하고 있다.
전남 장성에는 홍길동 테마파크가 있고 충남 공주에는 홍길동 테마임도가 있다.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와 강원도 철원을 비롯해 여러 고을에서 이름을 날린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은 김삿갓(金炳淵)의 무덤이 발견된 후 면 이름을 아예 '김삿갓면'
으로 개명했으며 그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차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수 이미자, 작곡자 박춘석, 작사자 이경재 그 누구도 함평과는 관련이 없다.
함평군의 해안선은 영광군 염산면 옥슬리 상해마을과 경계인 손불면 학산리 복학마을
에서 무안군 현경면 해운리 후동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함평읍 석성리 성들마을 까지다.
연장 20.6km(咸平郡史/다른자료에는 25.65km)나 되지만 섬이 없는 함평땅이므로 노래
섬마을 선생님과도 무관하다.
그런데도 저변10m, 높이13.5m의 화감암 조형물을 세우다니?
내가 지나치게 꼬장꼬장하고 사물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함평군사에 의하면 손불면(孫佛)은 군내에서 불교와 관계되는 이름을 가진 유일한 면
답게 불교색이 짙은 각종 이름과 전설이 수두룩하다.
월천리(月川)의 안악(雁岳 또는 安樂)과 백옥(白玉 속칭 일공구) 등 월천방조제 마을도
주목할만한 유래와 전설이 있다.
굳이 조형물을 원한다면 황당한 섬마을 선생님보다 지역과 연관된 주제가 있으련만.
태풍 프라피룬이 없었다면 내가 이처럼 상쾌한 방조제를 걷는 일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방방곡곡의 태풍 피해 현장에서 싸잡아 하는 원망과 달리 획기적으로 복구된 현장을 볼
때마다 사용해온 내 단어는 언제나 '전화위복'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애니메이션(animation) 제목으로 기억되는 "파괴는 진화의 시작이다"
를 사용해야겠다.(이날 밤의 메모다)
문득 생각난 제목이 더 진화된 표현이라 생각되어 그랬을 것이다.
백옥교를 건너 손불방조제 초입의 정자로 갔다.
한낮의 강렬한 불볕과 싸운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 판단되어 그랬는데 정자에서 양
눈을 가리고 피서하던 나이 든 남녀가 보이지 않을텐데도 늙은이를 반겼다.
60대 후반의 부부인데 함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단다.
한 눈씩 교대로, 부부가 시차를 두고 받지 않고 한꺼번에 받았으니 애로가 많겠다.
당자들은 더 불편하겠지만 자녀들의 수발기간이 짧은 이점도 있겠기에 그랬다는 것.
자녀들의 권유로 그랬다지만 자식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읽혀졌으며 10년 전에 '작은
모임더불어'를 태어나게 한 울주군 상북면 배내골 A씨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자식은 제 몸 간수도 못하고 수술받지 못해 실명 위기에 처해 있다며 장탄식하던 A씨.
그의 수술비 40만원을 갹출해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으니까.(메뉴'백두대간과아홉정맥'
68번글 참조)
동일한 천륜인데도 날로 심해가는 양극화로 인해 상처받는 가족관계가 안타깝다.
나는 가족관계를 유교적 전통의 틀 속에 가둬놓을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다.
내게 자식은 성인이 될 때까지 위탁 양육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유전자 운운하지만 자식들에게 반영된 내 뜻은 전혀 없으니까.
기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실망하는 일도 당연히 없는 나를 참고하면 안될까.
함평에서 만난 사람
햇살이 엷어질 때까지 정자에서 기다릴까 했는데 목포 C의 전화를 받고 바로 일어섰다.
백두대간을 역으로 남하할 때 태백시 비단봉~금대봉 간에서 인연이 열린 분이다.
(메뉴 '백두대간과 아홉정맥' 71번, 續思母曲15회 글 참조)
철마(鐵馬)를 몰고 전국을 달리다가 정년 퇴직 후에는 두 발로 팔도 산야를 누비고 있는
그가 서남동 길 남해의 길목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를 피해서 갈 수는 없다.
목포 도착일을 묻는 그에게 내일(3일)로 못박았으므로 오늘 함평땅을 벗어나려는 것.
다시 긴 방조제 길이 이어졌다.
친일기업이었다는 족쇄가 채워져 있기는 하나 일제강점기 때 서해 간척의 대명사였던
삼양사가 1931에 대규모 함평만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손불지구 방조제들은 모두 그 때 축조되었다.
당시에 축조된 둑들은 80여년이 경과되었을 뿐이지만 열악한 기술력과 장비들, 자금의
부족으로 인함일까 부실해서 대대적인 개보수가 불가피한 상태다.
국가관리방조제로 편입되어 개보수작업이 마무리 단계인 손불지구 방조제다.
나그네 본연의 무심으로 돌아간 듯 둑 내륙쪽의 방목 염소떼를 동무 삼아 걷고 있었다.
방조제 길이 811번 지방도로인데 왕래 차량이 없어 편하기가 비할 데 없는 길이다.
그러나 방조제가 끝나면 돌머리 해변으로 가는 해안이 막연하다.
옥실방조제 이후 방조제로 일관된 해안선이 끝나기 때문이다.
지방도로와 농로를 따라서 우회를 거듭하며 함평 게르마늄해수찜에 도착해야 주포항을
경유하는 돌머리(石頭) 해안길이니까.
둑길의 끝이 다가오면서 잠시 심란해 가는데 백옥쪽에서 달려오던 한 트럭이 멈춰섰다.
도로를 따라 많이 우회해야 하므로 해안이 나오는 지점까지 태워주겠단다.
대기업의 간부직을 명퇴하고 귀향하여 고향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하려 했으나 수포가 될
지경이라는 50대의 운전자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서행하는 듯이 보였다.
고향친구의 권유로 명퇴금을 투자했으나 돈과 친구 다 날릴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죽을 듯 하여 죽림에 들어가 "오군이여려이"(吾君耳如驢耳/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는 복두장(이발사/삼국유사 경문왕편) 처럼 사람은
자기 말을 진지하게 경청할 누군가가 필요한 동물인가.
그렇다 해도, 돈을 잃게 된 것보다 죽마고우의 배신이 분노와 비애에 빠져들게 한다는
그는 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로 하필 생면부지의 늙은 길손을 택했을까.
낙동정맥 만불산 아래 아화고개 일대에서 만난 이들(메뉴'백두대간과 아홉정맥' 62번글
참조) 생각이 나서 나도 진지해졌으며 그의 이야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해수찜 삼거리 해변인데도 차를 멈출 기미가 없고 주포항을 지나 돌머리해변까지 서행
하며 이야기의 범위를 확대해 갔다.
명퇴도 역량이 부족한 친구에게 승진 기회를 주기 위해 과감하게 자리를 비워준 것인데
친구는 승진은 했으나 능력에 비해 과중한 업무의 압박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했단다.
선한 의도가 도리어 화를 불러왔다는 것.
차는 돌머리 해수욕장에서 멎었다.
'돌머리'라는 우리말 마을 이름이 돌두리(乭頭)로 한자 표기되고 일제 강점기에 한자를
한자화 하는 난센스(nonsense)로 석두(石頭)가 되었다는 마을의 해수욕장이다.
오전에 지나온 안악보다 월등히 넓기 때문인지 쓸쓸할 정도로 한가롭다.
1읍 8면 272리 488마을인 함평군의 인구가 피크(peak)였던 1965년에 14만 1천여명이
었으나 현재(2012년) 3만 5천여명에 불과하단다.
1만 1천여(30.9%) 고령을 제하면 군민을 다 해안에 풀어도 성이 차지 않을 형편이다.
해안에는 원거리를 달려올 만큼 매혹적인 미끼도 없다.
지자체들은 투자하기 전에 분수를 알아야 하는데.
돌머리에서 무안으로 가는 해안은 간만 조류와 관계 없이 이어갈 수 없다.
손불지구보다 더 심하게 지방도로와 논밭둑을 따라 지그재그해야 한다.
이 지역의 길이라면 농로까지도 훤하다는 운전자는 헤어지려 하기는 커녕 다시 승차를
권하고 중단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해안에 가장 인접한 농로를 따라 무안국제공항이 있는 톱머리 해변으로 갔다.
이후의 목포 길은 택리지 답사때 누비고 다녔으므로 훤하다.
2010년에 걸었던 길인데 목포 도심까지 가겠다는 운전자를 설득해 도중에 하차했다.
초의선사 생가를 지나 1번국도변에 있는 관광안내소 앞에서.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