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저수지 주변 수백 년 노송들 즐비
산기슭 괴불주머니 꽃도 지천으로 깔려 춘심 울려
의림지 표지석 주변에 널린 노송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거나 이기려고 바다나 산 계곡과 같이 물이 있는 곳으로 간다.
6월에 때 아닌 이른 더위가 오면 9월까지 계속될 더위에
마음이 움츠러들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고온 때문에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 멀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는 제천 의림지와 그 주변의 숲은 초여름을 극복하는 좋은 장소다.
천 년 된 저수지둑의 솔밭에 앉아 늘어진 능수버들과 함께 반짝이는 물을 바라보면 더위가 한껏 가실 것이다.
의림지는 충북 제천시 모산동에 있으며, 시내 북쪽 4km에 위치한 지방기념물 제11호다.
만수면적 13㏊, 최대 수심 13.5m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 시대의 3대 수리시설의 하나로 가장 오래 된 저수지다.
의림지는 본래 이름이 임지였으나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기 때문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 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고 하며,
700년 뒤 현감 박의림(朴義林)이 견고하게 새로 쌓았다고 한다.
조선 세조 때 체찰사(體察使)인 정인지가 이곳에 왔다가
3도 병력 1,500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공사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농업용수가 넉넉지 못한 청정들(주변의 靑田洞)의 농사는 전적으로 이 물에 의존한다.
삼국시대부터 농사는 백성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기본이요,
농사를 잘 지으려면 제방을 쌓고 물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는 말에서 농사의 중요성이 묻어나온다.
429년에 김제 벽골지가 축조되었는데,
그 길이가 2,170보(步)라 했다. 일보가 50cm라 해도 1km가 넘으므로 당시에는 엄청난 역사였음에 틀림없고,
수리시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또한 저수지 부근이나 상류에 숲이 조성되면 수자원이 좋아진다는 기록도 많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숲이 우거지면 땅의 기운이 습윤해지고 재해가 없어진다’고 했고,
예종 원년(1469년)에는 ‘무식한 백성들이 큰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나무를 베고 개간해서 산이 헐벗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지력이 줄어들고 비가 오지 않게 되어 한발로서 농사가 못쓰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산이 헐벗으면 강우량이 감소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종 19년(1488년)에도 ‘산수무밀 연후천택불고(山藪茂密 然後川澤不枯)’라 해서
‘산에 나무가 많이 서 있으면 시내에는 항상 물이 흐르게 된다’고 했다.
또 영조 5년(1729년)에는 ‘옛적부터 산허리 윗부분의 나무를 끊지 않으면 시냇물이 마르지 않는데,
나무를 끊어 산이 황폐하고 수자원이 고갈되어 지난 날 좋던 논이 나쁜 논으로 된 사례가 있다’고 하였다.
1 연리목처럼 서로 껴안은 소나무.
2 의림지 제림 위로 노송들이 가로수처럼 펼쳐져 있다.
3 의림지 주변 벚나무 가로수 사이로 본 수양버들 섬.
정조 5년(1781년)에는 대사간 홍양호가 고하기를
“우리나라 북경의 강변을 따라 산이 헐벗어 땔감을 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강물이 제방을 붕괴시켜 국토 경계가 변할 지경이니
강변을 따라 나무를 심고 제방을 수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나무를 심으면 국경을 보호하고 적의 침입을 막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옛 책에도 느릅나무로 요새를 만들고,
버드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적의 침범을 막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버드나무를 심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로 국토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며,
둘째는 적의 침입을 막으며,
셋째는 물로 제방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고,
넷째는 땔감을 얻을 수 있고,
다섯째는 바람을 막아 환경을 좋게 합니다.”라고 했다.
숲과 물의 중요한 관계를 선조들은 일찍이 파악한 것이다.
노송 모든 나무에 번호 매겨 관리
의림지 주변은 직경 1m도 더 되는 200여 년생 소나무들이 180여 그루나 있고,
물가에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 고목이 주는 경치는 제천시민의 휴식처로서 큰 몫을 차지한다.
또한 해빙기에 산란하러 이곳에 모이는 빙어(氷魚)도 유명하다.
둑에서 시작되는 노송무리는 벌써 첫째 나무부터 예사롭지 않다.
제천시 산림녹지과에서 모든 나무에 번호를 매겨 관리하는데,
저수지쪽 소나무를 시작으로 저수지 바깥쪽 나무를 끝으로 하여 제자리에 온다.
둑 가장자리 183번 소나무는 누워있는 형태로서
밑동에서 뻗은 2개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수직으로 뻗었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꺾여 땅으로 기었다가 다시 하늘로 오른 모습이 마치 승천하는 용 같다.
더욱이 줄기 아래의 수피는 황토색을 띠고 팔각형 조각은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용비늘 같다.
수백 년 된 소나무답게 자태를 뽐내고
허약한 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달고 있듯이
이 나무에는 자그마한 솔방울이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붙어있다.
원래 둑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뿌리가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둑에 구멍을 내어 붕괴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림지는 수백 년 된 노송이 있어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만든 속설 같다.
괴불주머니 꽃의 아름다운 모습.
저수지 근처의 오래된 버드나무도
같은 두께로 물쪽으로 가지를 늘어뜨려 비단 같은 머릿결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한다.
영호정(暎湖亭)과 경호루(鏡湖樓) 옆에는
직경이 1m도 더 되는 소나무 덕분에 그늘을 만들어 쉼터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
소나무 사이에 있는 휴게소나 음식점이 가끔 소나무의 삶을 방해하지만 그들도 소나무에 가린다.
길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점 뒤에도 숨어있다.
길만 따라 휙 지나가면 그만큼 다른 모양을 가진 소나무를 볼 수 없다.
소나무를 두고 이리저리 어화둥둥 내 사랑처럼 감상하는 방법을 권한다.
가까이서는 알 수 없던 모양을 다른 방향에서 보거나 멀리서 보면 각양각색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소나무들이 너무 많아 그렇게 자세히 관찰하면
소나무의 감추어진 맛을 잘 알아버릴 것 같아 혹 싫증이 날 수도 있지만,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이 감동을 깊숙하게 각인하는 방법이다.
호수 동쪽에 만들어 놓은 넓은 주차장에 차를 두고
안개에 쌓인 나무다리를 건너 소나무를 일일이 보면서 있는 동안만이라도 소나무처럼 정중하고 의젓해 보고 싶다.
의림지에서 북쪽으로 2km 더 올라가면 용두산(874m) 남쪽 기슭에 제2 의림지가 있으며,
둑 바로 밑에 솔숲이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저수지 여수로를 빠르게 흐르는 물 위로 아름다운 나무다리가 놓여있어
이를 건너면 바로 온갖 형태의 소나무들의 울창한 숲이 나온다.
숲이 약간 비탈진 곳에 조성되어서 침식을 막으려고 아래쪽에 3단으로 돌을 쌓았고,
그 안에 굵기가 다른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구부러짐의 미학이 심상치 않은데 붉은 색 수피보다 검은 색 수피가 더 많다.
줄기 밑동에서 여러 갈래 줄기가 나온 소나무도 보인다.
50m쯤 떨어진 저수지 둑 근처의 소나무들은 상당히 굵다.
둑으로 올라간다.
둑을 덮고 있는 풀밭이 의외로 아늑하고,
둑에 오르니 인기척에 화들짝 놀란 재두루미와 오리가 일시에 날아오른다.
제방길이가 100여m로 맑은 물을 담고 있는 저수지 때문에 솔숲의 정취가 더하다.
밑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따라 다시 숲으로 들어오자 곧 30년쯤 된 잣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초록을 더하고 곁의 리기다소나무들도 한 식구다.
텅 빈 농구장을 숲 안에 설치한 이유가 뭔지 불평하면서
전나무 가로수와 산기슭 가까이 나란히 서 있는 밤나무 고목 세 그루를 본다.
숲 가운데 50cm 폭의 3단으로 돌을 가지런히 쌓아 이끼가 덮인 모습은 숲의 풍치를 돕는다.
전나무 가로수와 밤나무 고목 세 그루
소나무들의 직경은 50~60cm이고,
수고가 10~15m로 그렇게 크지는 않으나 오랜 세월동안 서 있는 까닭에 이끼로 치장하고 소나무 특유의 형상을 갖고 있다.
소나무끼리 가지를 맞대고 돌며 자라는 특이한 모습도 있다.
ㄱ자형으로 생긴 소나무 줄기는 반대쪽으로 돌출하여 바위와 엉켜있는 뿌리와 대조적이다.
음수대 부근의 굵은 소나무는 공간을 마음껏 확보해서인지 가지가 튼튼하다.
아름다운 소나무숲을 지나 오른쪽 충혼각을 끼고 능선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소나무숲 사이에 보인다.
까치봉 백곡산으로 가는 길은 완전히 자연생 솔 그늘에 가려있으며,
약간 가파르다가 저수지쪽으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면 저수지 부근의 활엽수림을 거쳐 둑으로 내려온다.
봄에는 산기슭에 지천으로 핀 괴불주머니 꽃이 나무 밑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어서 마음조차 화사하게 물든다
제2 의림지 솔숲은 20여m 폭으로 약 500m 정도 계속된다.
세명대 입구쪽에는 소나무가 드문드문하여 오히려 시원하다.
도로 한쪽에 상점과 음식점이 많아 유원지 역할을 단단히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처럼 밥을 먹고 솔숲을 걸으면서 송뢰를 듣는다면 무엇이 부러울까.
이천용 숲과문화 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