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9일 오후 4시께. 청승맞게 비가 뿌리고 있었다. 서울 서초구민회관 현관 건물 옥상에는 플래카드가 비에 젖어 나부꼈다. 「이정식의 서울 재즈 오케스트라 음악회」. 공연까지는 3시간30분이 남아 있었다. 이때 알토 겸 테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40)이 막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와는 현관 로비에서 4시30분에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5시가 다 돼 가는데도 현관 로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홀에서 콘서트단원들과 그날 공연할 음악을 맞춰 보고 있었던 것이다. 5시 20분께, 객석에서 그와 만났다.
『재즈 하면 색소폰 아닙니까? 재즈는 색소폰의 심볼이지요. 우리나라 제 1세대 섹소포니스트로서 저와 이름이 같은 이정식 선배도, 세계적 색소포니스트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도 이젠 다 전설이 됐습니다』
그는 곧 올릴 무대가 자꾸만 켕기는 모양이었다. 처삼촌 벌초하듯 얘길했다. 요즘 바쁘다. CBS FM에서 「0시의 재즈」라는 4시간짜리 프로가 만만치 않다. 또, 여기저기 초청 연주가 적지 않다. 거기다 밤이면 이곳저곳의 재즈 클럽을 전전해야 한다. 방학중이어서 대학 강의를 하지 않아 그나마 수월하다. 그는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전임교수다.
『색소폰은 감정의 섬세함까지 표출할 수 있는 표현 영역이 매우 넓은 악기입니다. 그러나 너무 관능적이에요. 섹시하다는 등으로 클래식에선 못마땅하게 여겨 왔었지요. 당초 유럽에서 클래식용으로 개발됐지만 제 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선 재즈나 팝 악기로 자리 잡았지요』
이정식. 전남 함평 출생. 초등학교 때부터 하모니카를 잘 불었다. 색소폰도, 하모니카도 입으로 부는 악기다. 함평중 때 밴드부원이었다. 처음엔 트럼펫을 불었다. 그러다 색소폰에 매혹돼 이내 트럼펫을 버리고 색소폰을 잡는다. 함평농고 밴드부에서도 역시 색소폰만 잡았다.
『저는 농고를 다녔지만 농사꾼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요. 그때 이미 색소폰으로 승부수를 띄우자고 작심했던 거예요.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가지고 학교에 갔지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 색소폰만 불었지요』
당시 주 레퍼토리는 「대니 보이」, 「해변의 여인」 등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무작정 서울로 갔다. 서울은 철저히 타향이었다. 서울역 앞. 「살롱 밴드 구함」 전단을 들고 찾아갔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조건」이면 그만이었다.
그전에도 목포 등지에서 가발을 쓰고 살롱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서울은 물론 경기도 송탄, 전곡, 연천 등으로 일자리를 따라 흘렀다. 어느 날 미군 기지촌 부근에서 노랫말도 없는, 그전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묘한 음악을 들었다. 그게 재즈인 줄 그땐 몰랐다.
그러다 유랑극단에 합류한다. 1980년대 초였다. 컬러 TV의 등장으로 유랑극단은 한물 갔었다. 어떤 때는 입장객이 고작 대여섯 명뿐일 때도 있었다.
전국을 누볐다. 전남 고흥, 소록도, 그리고 해남, 우리나라 땅 끝까지 갔다. 유랑극단 생활은 1년여 만에 끝이 났다.
『출연료고 뭐고 있나요? 자장면 한 그릇 얻어 걸치면 운수 대통이었지요. 하루 한 끼로 사는 날이 많았습니다. 여관비가 없어, 앰프도 잡히고,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어 시계를 풀어 주곤 했지요. 그래도 생각하면 그때가 그리워요. 모두들 인정이 있었거든요』
『저기 피아노 치는 애가 제 딸입니다』
이때도 짬만 나면 재즈 판을 구하기 위해 기지촌은 물론 청계천을 이 잡듯이 뒤졌다. 좋은 재즈 판이면 어떻든 빌려 복사해 신주단지처럼 모셨다. 그리고 수백 번씩 흉내 내며 색소폰을 불었다.
어느덧 스물 둘, 광주 극장식 비어 홀에서 있었다. 그때 KBS 경음악 악단장 김강섭이 단원들과 광주에 무슨 행사가 있어 왔다. 그때 단원 중 몇 사람이 이정식이 있는 업소에서 술을 마시다 이정식의 색소폰 연주를 듣고는 반했다. 『어린 녀석이 대단한데, 시골에서 썩기는 아깝다』며 김강섭 악단장에게 추천했다. 마침 색소폰 연주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김강섭은 일단 일주일만 이정식을 지켜보고 싹수없다 싶으면 자를 참이었다.
『색소폰 불 때 조금만 음정이 틀려도 김강섭 악단장께서 당장 불호령을 내리는 겁니다. 죽을 맛이었지요.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나가라는 말이 없어요. 그 후로도 엄청 더 시달렸지요. 그런 세월이 1년쯤 흐르자 악단장께서 저의 연주를 듣곤 「좋다,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았다. 20만원이었다. 당장 해방촌에다 월세방을 얻어 시골에 있던 식솔들을 데려왔다. 이정식은 스물에 결혼, 이미 딸이 있었다. 이정식은 이때,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피아노 치는 애가 제 딸입니다』
김강섭은 그동안 이정식의 연주를 악보까지 짚어가며 꼼꼼히 체크했다. 김강섭 악단은 유명 재즈 연주인들의 집결처였다. 트럼페터 강대관, 드러머 류복성, 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정식에게 「재즈를 하라」고 권했다. 김강섭 악단에서 4년여 만에 나왔다. 돈벌이가 좋긴 했지만, 반주자로보다는 재즈 뮤지션이 되고 싶었다. 이때 색소포니스트 길옥윤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길옥윤 선생님이 서울 신사동 제일생명 뒤편에 「창고」라는 재즈 클럽을 운영하고 계셨어요. 이때 신관웅 선생님이 「창고」에 계셨는데, 저더러 같이 일하자고 해 길옥윤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된 겁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서부터 무대 매너 등.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감 있게 연주하라는 말은 명언이었다.
그러면서 재즈 이론가 이판근에게서 재즈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워 나간다. 그 즈음, 자기만의 색소폰이 간절했다. 그러나 색소폰을 산다는 건 신기루였다. 염치 불구하고 길옥윤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색소폰 하나 주십시오. 돈은 천천히 벌어서 갚겠습니다』
길옥윤은 그런 이정식을 쳐다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이 사람아, 돈은 무슨, 그냥 주지.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네』
『뭡니까?』
『내 딸이 커서 훗날 시집갈 때 자네가, 이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축가를 불러 줄 수 있겠나?』
당시 그 딸은 돌을 갓 지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도 가슴을 친다.
『그 색소폰을 들고, 한 번은 어느 악기점에 들렀는데, 색소폰을 본 주인이 꼬드기는 겁니다. 그 색소폰을 주면, 테너 색소폰과 소프라노 색소폰 두 개를 주겠다고. 눈이 번쩍 띄었지요. 그만큼 길옥윤 선생님이 주신 그 색소폰은 명품이었던 겁니다. 그때 철이 없어, 그 짓을 하고 나서 뒤에 그 색소폰을 사방천지로 찾아다녔지만 허사였어요』
먼 훗날, 방송국이나 음악회 등에서 길옥윤과 여러 번 무대에 함께 섰다. 색소포니스트 이봉조와의 기억도 없지 않다.
한 번은 국내에 리드(Reed・관악기의 혀)가 수입이 안 돼 동이 난 적이 있다. 그때 이봉조가 김강섭 악단에 들렀다. 이정식이 『리드가 없다』는 타령을 했다. 그때 이봉조가 말했다.
『도대체 그걸, 말이라꼬 하나? 그런 건, 미리 미리 준비해 뒀어야지. 프로는 핑계를 대선 안 되는 기라』
그러면서 리드 한 박스를 이정식에게 건네 줬다. 이정식은 1998년 베이시스트 론 가터, 피아니스트 케니 베론, 드러머 루이스 네쉬, 트럼페터 히노 데루마사와 공동으로 음반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