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역참제와 안산
고려는 일찍이 역참제(驛站制)의 실시를 통하여 거의 전국적인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정치·군사·
경제상 요로에 설치된 역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는 역로(驛路)이기도 하였다. 교량이 없는 하천에는 진(津)이
있어서 도선(渡船)의 임무를 맡고 있었고, 진에는 진척(津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전체적인
도로망의 연결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에 거주하면서 참역(站役)이라고 하는 특정한 부담을 지고 있던 사람들을 흔히 역민(驛民)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법제적으로는 역호(驛戶)로 파악되었으며, 이 역호에는 역리(驛吏)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반
역민과 마찬가지로 참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역민과 역리가 맡는 참역의 형태는 각기 달랐다. 역리는
노역의 직접 담당자는 아니었다. 역리는 일반 역민의 우두머리로서 이들에 대한 노역의 분배·수취·감독 따위의
일을 주관하였다. 매 역에 배치되는 역리의 수는 역의 크기에 따라서 2~3명 정도였다.
역민이 지고 있는 참역이란 요역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국가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국가의 중대사, 특히 군사적 긴급 상황을 보고하는 따위의 일이었다. 이 밖에도 생산물의 운반이 중요한 업무
였다. 역은 교통량의 크기, 군사·경제의 중요성에 따라서 대·중·소의 3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공수전·
지전·장전이 차등 있게 지급되었다.
각 역에는 일정한 수의 관마(官馬)가 준비되어 역의 기능을 가능케 하였다. 예를 들면 관원이 공무로 지방에
가는 경우, 일정한 수의 말을 빌려 타고 갑역에서 을역으로, 다시 을역의 말을 타고 병역까지 가는 식으로
목적지를 찾아갔다. 「고려사」 82 병지 2 참역에는 참역의 계통이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역로의
간선은 모두 22도(道)이고 참역의 총수는 525개소에 달하였다.
그런데 안산 지역의 역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시대가 되면, 안산에 석곡역이 있었지만 그러한 역이 「고려사」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료에 그 기록이 누락될 수도 있고, 또 아예 역이 안산 지방에는 없었을 수도
있다. 아마 후자가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비록 이곳에 역은 없었지만 안산이 인근의 큰 고을에 있는
역을 통하여 전국의 도로망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7. 침략에 대한 고려인의 항쟁
(1) 대외관계와 외래족의 침입
고려에 대한 외래족의 침입은 고려의 대외관계라고 하는 좀더 넓은 시야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외관계가 순조롭지 못할 때에 외래족의 침략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고려의 대외관계는 시기적으로 보아
무신란(武臣亂) 이전의 전기와 그 이후의 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기의 대외관계는 상대 국가(민족)에 따라서, 첫째 거란(契丹)과 여진(女眞)과의 관계가 있고, 둘째 송(宋)
과의 관계가 있다. 먼저 거란 및 여진과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과의 관계는 고려가 건국 초기
부터 북진정책을 써서 영토를 확장코자 했던 사실을 돌려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태조는 후백제·신라를 통일·통합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태조의 북진정책이 처음으로 구체화된 것은 서경경영
(西京經營)에서부터였다. 그는 즉위 원년에 황주·봉주·해주 등 황해도 지방의 백성을 평양에 옮겨 살게 하여
이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고 사촌동생 왕식렴(王式廉)을 보내어 관할케 하는 한편, 뒤이어 서경으로
승격시켜 자주 순행하면서 성곽을 수축하였다. 이 서경을 중심으로 서북 지역을 개척하고 계속 북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의 영토가 대체로 청천강 유역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태조는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마음먹은 일조차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태조의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조의 북진정책은 그가 발해유민(渤海遺民)에 대하여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는 것과도 깊은 관계를
갖는다.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되었는데, 그 유민들이 대거 고려에 와서 귀순하였다. 태조 때만 해도 발해의
세자 대광현 이하 수만의 무리가 고려에 망명하여 왔다. 이들에 대한 태조의 대우는 극진하였다. 대광현의
경우만 보더라도 태조는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명을 사하여 종실의 호적에 편입시켜 주었고 높은 관직도
주었다.
그런데 태조의 북진정책은 그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될 수는 없었다. 거란이 점차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은 고려보다 2년 앞서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점차 이웃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확대하여 갔다. 거의 동시에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는 두
왕조는 처음에는 서로의 대외관계에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양국의 관계는 그런대로 사신의
교빙이 이루어지는 등 제법 원만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잠시뿐이었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어느 정도의 여력이 생기자 거란과의 국교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다. 표면적인 명분은 발해를
까닭없이 멸하였다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북방정책의 수행에 방해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태조 25년에
거란이 사신(使臣)을 보내오자, 사신 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를 굶어죽게 한 일은 유명하다.
태조는 국교 단절에 머물지 않고 거란을 아예 징벌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그의 북진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일전도 불사한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후진(後晋)과의 거란 협공을 생각했지만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의 거란에 대한
적대의식은 대단했다. 죽을 때에도 10훈요(訓要) 가운데 제4조에 ‘거란은 금수의 나라’라고 규정하여 언어·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일러 둘 정도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정신에서 북진정책이 채택되었고, 이 같은 정신과 정책은 태조를 이은 여러
왕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의 추진에서 맞닥뜨린 나라가 거란이었다. 거란과의 긴장
상태는 태조 이래로 계속되었으며, 그 긴장 상태는 마침내 거란의 선제공격에 의하여 전쟁 상태로 변하였다.
거란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그때마다 내침의 명분이 제시되기는 하였지만, 따지고 보면
양국의 전쟁은 고려의 집요한 북진정책의 추진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거란의 위기의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무난히 격퇴하였다. 그것은 고려의 치열한 항쟁을 통한
결과였다. 이 항쟁의 기록이 우리 민족사에서 빛나는 대외투쟁사의 한 대목이 되고 있음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한편 고려의 북진 길목에서 고려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민족이 여진이었다. 여진은 거란에 비하면 그렇게
신경을 건드리는 세력은 되지 못하였다. 여진은 북방의 여기저기에 산재해 국가도 형성하지 못한 채로 고려를
문명국가로 높이 받들었고, 고려는 이들을 주로 회유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회유정책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
었다. 때에 따라서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진이 금(金)을 건국하자 고려와 금의 관계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양국 사이에 긴장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다만 금과의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거란·여진과의 관계보다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할 나라는 송이었다. 송과 고려는 각기 일정한
기간의 혼란을 수습한 새로운 왕조로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송은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은 선진문명국이었으므로 그에 대응하는 고려의 태도는 남달랐다. 고려는
조공(朝貢)이라는 특유의 방식으로 송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그 관계가 비교적 평화적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으며, 송은 또한 고려의 문화적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었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고려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이웃에 두게 되었다. 북방의 몽고족(蒙古族)이 흥기하여
세계적인 대제국 원(元)을 건설했던 것이다. 몽고족과 고려는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군을 공통으로
토벌하면서 첫 접촉을 하였으며,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양국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몽고가 고려를 속국으로 생각하여 갖가지 힘겨운 공물(貢物)을 요구해 오자 고려는 이에 반발했으며,
둘 사이에는 불화와 긴장이 시작되었다.
압록강변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몽고의 사신이 피살되면서 양국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고,
뒤이어 몽고의 고려에 대한 기나긴 침략의 막이 올랐다. 고려는 몽고의 침략에 단호히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에로의 이도(移都)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나, 끝내 고려는 몽고에게 복속해야 했다.
항전의 반세기는 외래민족의 침입에 대한 민족의 끈질긴 저항을 유감없이 보여 준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을 무릅쓴 것이었다. 몽고에 복속된 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아야만 했지만,
양국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공존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고려는 말엽으로 치닫는 어간에서 또 다른 민족의 침입 앞에 당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홍건적(紅巾賊) 및
왜구(倭寇)의 침입이 그것이다. 특히 왜구의 침입은 고려의 멸망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줄 만큼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였다. 왜구는 일본의 중앙정부에 의해 파견된 군대가 아니라 한낱 해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침략이 야기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혼란은 매우 커서 고려의 최후를 재촉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의 대외관계는 전기에서는 거란·여진 및 송과의 관계였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몽고·왜구와의 관계가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송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고려는 다른 나라들과 대체로 긴장
관계를 지속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거란·몽고 및 왜구와의 관계는 피나는 투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투쟁의 역사는 한결같이 거란·몽고·왜구 등의 외래족이 침입해 옴으로써 단초가 열렸다.
(2) 몽고의 침략과 안산민의 저항
몽고군은 세계 정복전의 일환으로 고려에 침입하였다. 몽고는 전후 여섯 차례에 걸쳐 침입해 왔지만
고려는 이에 항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우(崔瑀)의 무인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결사적인 항전을
꾀하였다. 무인정권의 이러한 강인한 의지도 중요했지만, 전 계층이 합심하여 침략자를 격퇴하였다.
안산 지역에도 침략자의 발길이 비켜갔을 리 없고, 이 지역 사람들이 싸움을 마다했을 리도 없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없어 그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몽고와 화친관계가 이루어져
개성 환도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삼별초의 난’에 호응하여 궐기한 대부도민의 사례가 있을 뿐이다.
원종 11년 조정이 몽고와 결탁해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이에 반대하여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관부(官府)를 세웠다. 삼별초는 곧 강화도를 떠나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몽고군과 정부군에 맞섰으며, 진도 이외에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세력을 뻗쳤다. 삼별초가 남부 지역에서 독자적 세력을 뻗치자 내륙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농민·천민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원종 12년에는 경상도 밀양에서 박경순 등이 군민을 불러모아 밀양 등지의 수령의
목을 베고 경상도 지역을 점거하면서 삼별초에 내응하였다. 밀양인들의 봉기에 뒤이어 개경에서는 관노인
숭겸(崇謙) 등이 무리를 모아 몽고에서 파견된 다루가치와 개경 조정의 고위 관직자를 살해하고 진도 관부에
투항하고자 하였다.
개경에서의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도 주민들도 궐기하여 몽고인 6명을 살해하였다. 물론 대부도민들도
진도의 삼별초 관부에 합세하고자 하였다. 끝내 진도 관부는 몽고군과 정부군의 토벌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안산 지역 대부도민들의 봉기는 침략군에 대한 저항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57)
8. 고려의 불교와 안산
(1) 화엄종과 경덕국사
신라 말 국가의 불교 통제가 무너지고 후삼국을 거치면서 다원적인 불교 세력이 형성되었다. 태조는 당시의
불교계를 적극 보호한다는 이념을 내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나, “신라의 불교사원에 대한 통제가 무너지고
귀족과 토호들이 원당(願堂)이란 명목으로 사원을 무질서하게 창건함으로써 나라가 망하였다.”고 훈요(訓要)
로써 다음 왕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는 건국과 더불어 불교계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베풀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태조는 훈요의 둘째 조에서 사원은 각각의 종파를 고수하고 이들 간에 서로 바꾸거나 빼앗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태조는 다원적인 종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파는 고유성을 가지고 소속된 사원은 같은 종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교계는 물론 국가에 유익하다는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태조가 다종파를 인정한 것은 국가의
불교계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고 추측된다. 그 결과 고려에서는 여러 개의 종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였다. 화엄종(華嚴宗)·유가종(瑜伽宗)·천태종(天台宗)·선종(禪宗;조계종<曹溪宗>) 등이
그러한 예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우세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화엄종이었다.
고려의 화엄종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에 의하여 완성된 교학불교(敎學佛敎)에 기원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학파 시대를 지나, 신라 말에 의상과 그의 계승자에 의하여 창건된 지방 사원을 중심으로 수도인 경주의
통제를 벗어나 종파로서의 독립성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하나의 종파로서
화엄종을 인정하였다.
고려의 화엄종은 법왕사(法王寺)와 귀법사(歸法寺)와 같은 중앙사원을 중심으로 광종 때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하면서 가장 우세한 종파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균여(均如)와 탄문(坦文)은 고려 초기 화엄학의
대가였으며, 왕권의 강화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여 준 대표적 화엄 승려이기도 했다.
그후에도 화엄종에서는 안산 출신인 김은부(金殷傅)의 아들인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과 같은 여러
왕사·국사를 배출하였는데, 특히 고려 중기에는 왕자나 종실에서 출가한 고승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외척 문벌
세력에 의하여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자로서 화엄종에 입문한 대표적인 이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었다. 의천은 화엄종의 승려로서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의 가르침을 받고
활약하였지만, 그는 그 뒤 천태종을 개창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무신란 이후 화엄종은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문벌의 후예들과 연결되어 여러 차례 도전하다가 종세가 크게
약화되었고, 지방에 기반을 둔 사원과 고승에 의하여 겨우 종세를 유지해 왔으나 공민왕(恭愍王) 집권기에
이르러서는 종세가 더욱 침체하였다. 이렇게 보면 고려의 화엄종은 주로 고려 전기에 크게 떨쳤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고려 전기에 화엄종은 왕권을 중심으로 국민의 단합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화엄종에서 안산에 본관을 둔 김은부의 아들인 김난원이 한때 그 종파를 대표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안산 지역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김난원58)은 앞서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듯이 김은부의 둘째아들로, 목종 2년(999년)에 태어나 문종 20년(1066년)에 죽었다.
그는 문종 19년(1065년)에 왕사에 임명되어 문종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죽은 뒤에는
승려의 지위로서는 가장 높은 국사(國師)에 추봉(追封)되었고 경덕(景德)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화엄종의
인맥으로 보아도 고려 초기 화엄의 대가였던 균여와 탄문에 이어 특히 문종 치세에 화엄종 최고봉의 지위와
권위를 누렸다. 그리고 그는 휘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원경왕사와 의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2) 천태종과 대각국사
고려에서는 여러 종파를 모두 인정하였지만 실제로는 교종(敎宗), 특히 화엄종에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족적 기반 위에서 성장한 고려에서 선종(禪宗)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이 양립하는 형세에 놓여 있었으며, 그들의 편집에서 오는
분열과 대립이 있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을 정리하여 불교계를 혁신하려고 한 데에서 천태종이 성립되었다.
천태종은 원래 광종(949~975년) 때 「천태4교의(天台四敎儀)」를 지은 체관(諦觀) 등에 의해서 주창되었다.59)
그러나 그들은 고려에서보다 중국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므로 고려에서 종파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독립된 종파로서 천태종을 성립시킨 사람이 바로 의천이었다.
의천은 그의 자(字)이고 본명은 왕후(王煦)였는데, 문종 9년(1055년)에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숙종 6년
(1101년)에 죽었으며 대각은 그의 시호였다. 문종이 김은부의 외손자였으므로 의천은 김은부의 외증손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출가하여 선생으로 모신 김난원, 즉 경덕국사와도 혈연 관계에 있었다. 의천 쪽에서 보면
김난원은 아버지(문종)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의천의 출생도 안산 김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문종 19년(1065년) 당시 왕사였던 화엄학의
거장 김난원에 의하여 정식 승려가 되고 그에게서 불교(특히 화엄학)를 배웠다. 그러므로 그의 불교의 바탕은
화엄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천의 특성은 화엄에 그치지 않고 그 밖의 여러 분야에 걸쳐 불교를 두루
섭렵하였다는 데 있다. 그는 심지어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에 이르기까지도 깊이 공부한 바 있었다.
의천은 마침내 송나라에 유학해서 불교를 계속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특히 화엄과 천태를 열심히 배우고
귀국하였으며, 교종(특히 화엄종)과 선종이 대립하여 있는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즉 그는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하였고, 잡념을 멈추고 마음을 집중시켜 바른 지(智)로써 사물을 관조하여 그 본체를 밝히는 지관
(止觀)을 중요시하는 천태종을 폈다. 이에 이르러 고려의 불교는 비로소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의천은 천태종을 열면서 선종 9산의 뛰어난 인재를 모집하였는데, 이것이 선종을 자극하여 선종 종래의 9산을
해체하고 조계종을 성립시키게 되었다. 여하튼 의천에 의하여 성립된 천태종은 그 세를 크게 떨쳐 나갔다. 의천이 거느린 문도(門徒)만도 덕린·익종·
경란·연묘 등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문도들이 의천 이후의 천태종을 이끌고 나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후기에 이르러 천태종은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더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실천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전남에 있었던 만덕산의 백련사(白蓮寺;만덕사<萬德寺>)는 천태종의 대표적
사찰이었는데, 고려 후기에 민중을 교화하는 실천종교로서의 천태종을 상징해 주던 사찰이기도 하였다.60)
그러나 고려 후기의 천태종이 민중과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태종은 중앙의 귀족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귀족들의 세속적 이익 추구의 염원을 당시의 천태종은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3) 유가종과 수리사
유가종(瑜伽宗)의 중심 경전은 「금광명경(金光明經)」·「심해밀경(深海密經)」 등이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유가종이 중시한 것은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의 자은종(慈恩宗)과
같았다. 또한 유가종은 고려 시대에는 일명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불리었다.
유가종은 신라의 원효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뒤 경흥·태현·진표로 계승되어 고려로 넘어왔으며, 고려에 와서
비로소 종파로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가종의 세력은 고려 초기에는 크게 떨치지 못하다가 현종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크게 융성하기에 이르렀으며, 현종 이후 당대의 문벌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의 비호와 후원을
받아 발전하였다.
더욱이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모두 왕실의 외척으로서 국왕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유가종은 문벌귀족
뿐만 아니라 왕실의 각별한 배려 속에 크게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현종은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지목하여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했는데, 이 현화사가 유가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인종 중기 이후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나면서 인주 이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유가종도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그 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비록 종파로서의 위치는 잃지 않았지만 그 세력을 떨치지는 못하였다.
유가종과 관련해 고려 시대에 가장 중요한 사찰은 현화사였다. 현화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진전사원으로 현종이
창건한 절이었다. 현종은 아버지 안종의 묘를 경상도 사천에서 개경의 영취사 아래로 옮겼으며, 아버지를 위하여
가까운 곳에 진전사원으로서 유가종 사원인 현화사를 개창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종이 현화사를 얼마나
중시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 이후 현화사는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 되었으며, 유가종의 고승들은 대부분 만년에 현화사의 주지를 역임하는
것이 상례처럼 되었다. 물론 그렇게 안 되었다 하더라도 유가종의 고승들은 생애에 적어도 한 번쯤은 이곳
주지를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현화사는 유가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찰이었다.61)
현화사 이외에 유가종 사원으로 중요한 것은 해안사·천흥사·수다사·삼천사·월악사·수리사·법천사·금산사
등이었다. 이 중 수리사(修理寺)는 안산의 수리산에 있었다. 수리사는 고려 중기 유가종의 고승
관오(1096~1158년)가 주지한 적이 있었던 사찰이었다. 이 수리사가 고려 중기에 어떻게 유가종의 유력한
사찰이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현화사가 현종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유가종의
중심 도량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현종은 어째서 유가종에 관심이 많았을까. 그는 즉위 전 위태로울 때 유가종 사원에서 보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즉 그는 쫓기는 입장에서 오늘날 서울 근교에 있는 삼각산의 유가종 사원인 장의사·신혈사 등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원들이 인주 이씨와 안산 김씨와 일찍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인주 이씨가 그러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인주 이씨는 대대로 유가종 승려를 배출해 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삼각산은 인주나 안산이나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웃해 있던 근접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수리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수리사는 아예 안산에 있었으므로 특히 안산 김씨와 전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안산 김씨와 왕실이 밀착되면서 유가종의 수리사는
더욱 커다란 후원 세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9. 고려 후기의 안산
안산현은 현종 9년 이후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산현은 수주(水州)에 예속된 속현의 지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 때에 이르러 이러한 예속 관계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안산 지역이 경기
(京畿)에 편입되면서 개성부(開城府)의 관할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하여
다음 기록을 참고해 보기로 하자.
“문종 16년에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부활시켜 도성(都城)에서 관장하고 있던 11현을 여기에 예속케
하였다. 또 ……우봉군을 이에 예속시켰다. 충렬왕 34년에 부윤(府尹) 이하의 관리를 두어 도성 안을 관장케
하고 따로 개성현(開城縣)을 두어 성밖을 관장케 하였다. ……공양왕 2년에 경기를 나누어 좌·우도로 하고,
장단·임강·토산·임진·송림·마전·적성·파평으로써 좌도를 삼고, 개성·강음·해풍·덕수·우봉으로써 우도를 삼았다.
또 문종의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문종 23년 정월에 양광도의…… 과주·인주·안산·금주…… 등의 주·현을 경기에
속하게 하였다. 양광도의 ……안산·교하·양천·금주·과주 ……를 좌도에 속하게 하고,
양광도의 부평·강화 ……를 우도에 속하게 하고 각각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었다.”62)
위의 사료를 보면 문종 23년 1월에 안산이 경기에 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기는 문종 16년에
지사를 장관으로 하는 개성부가 부활되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개성부의 관할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충렬왕 34년에 이르러 개성부는 도성 안만 관장하게 되고, 성밖의 경기를 위해서는 별도로 개성현을
설치하였다. 그러니까 문종 16년 이래 개성부의 지휘를 받던 경기가 충렬왕 34년 이후에는 따로 설치된
개성현의 관할로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는 경기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좌도·우도로 나누어진 경기를 보면, 여기에 안산이 빠져 있다. 물론 안산만이
빠진 것이 아니라 문종 23년에 경기에 포함된 지역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해당 지역 대부분은 애초부터
경기에 속해 있던 곳이었다. 물론 이들 처음부터의 경기를 좌도·우도로 나누고, 이어서 안산 등 문종 23년에
편입된 지역도 좌도·우도로 나누어 이에 속하게 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경기를 나눌 때, 본래의 경기 지역과 문종 23년에 그곳에 편입된 지역을 구별하여 취급하였다는 점,
특히 후자의 경우를 문종의 옛 제도에 따라서 처리한다고 한 점, 이 사실을 협주를 사용하여 따로 기록하고
있는 점 등 모두 우연한 일일 수는 없다. 그것은 안산이 문종 23년에 경기에 편입되었다가 어느 때인가 그것이
해체되었고, 그 상태가 공양왕 2년의 조치 때까지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요컨대 안산은 문종 23년 1월에 경기에 편입되었지만, 그 뒤 언제쯤인가 그 편입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시기를 갑자기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공양왕 2년이 되어 안산은 다시
경기에 편입되었고, 경기 가운데에서도 좌도에 속하여 이곳의 장관인 도관찰출척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중앙과 연결될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지금까지는 안산의 상하 예속 관계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어떻게 변천하였는가 하는 점을 보아 왔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시대가 변하여 후기가
되면서 이 지역의 지위가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안산현은 ……현종 9년에 와서 속하였다. 뒤에 감무를 두었다. 충렬왕 34년에 문종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올려 지군사(知郡事)로 하였다.”63) 위 사료는 우선 현종 9년에 안산현이 수주(수원)에 속현으로 예속되었음을 일러 준다. 속현의 지위에 있는 한
중앙관이 장관으로 부임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뒤 안산현에 충렬왕 34년 이전 언제인가에
감무가 임명되었다. 감무는 “예종 3년에 여러 작은 현에 감무를 두었다.”64) 고 한 점으로 보아, 예종(睿宗) 3년
이후에 두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안산현은 예종 3년에서 충렬왕 사이의 어느 때인가에 두었다는 말이 된다. 감무는 작은 규모의 현에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안산현은 작은 현으로 간주되어 처음으로 감무가 부임되어 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지위를 올려 주는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안산현은 감무가 두어진 뒤에 다시 한 번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충렬왕 33년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이곳에 지사(知事)가 임명되어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안산이 문종의 탄생지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안산군이 지사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고려 말까지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홍승기(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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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사찰 북한산 삼천사지 베일 벗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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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박물관 "삼천사지(三川寺址) ?발굴에서 전시까지" 유물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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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속에 묻혀있던 역사의 흔적은 어떻게 발굴되고 복원되어 지금, 현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유물전시가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월 22일까지 열리는 발굴유물특별전 "삼천사지(三川寺址) ?발굴에서 전시까지"다. 삼천사지 유물 전시전은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이 지난 2005년부터 2007년 말까지 북한산 증취봉 인근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일원 소재) 삼천사(三川寺)지 탑비구역 일대를 발굴 조사한 성과인 유물 1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발굴과정, 유물 복원 과정 엿볼 수 있어 박물관은 단순 유물 전시에 만족하지 않고, 삼천사 터 탑비 구역 주축 건축물인 '탑비전'(塔碑殿)을 3차원 입체 모형으로 복원해 현장의 생생한 느낌을 살렸다. 삼천사지 터 과거의 모습을 3D 영상으로 복원하는 한편, 발굴조사 현장의 모습을 동영상 자료로 생생하게 담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유물들을 수습하고 보존 처리했는지 자세한 사진 자료도 곁들였다. 유물만 전시하지 않고 발굴 과정도 엿볼 수 있는데다 도자기 파편 등 발굴 유물이 어떻게 처리되어 복제, 복원되는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녹슬고 찌그러진 청동유물을 어떻게 보존처리하여 복원하는지, 복원후 조사가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 은평시민신문 | |
▲ 유물 복원 보존처리 과정에 사용한 각종 기구들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 은평시민신문 | |
▲ 청자상감유문매병. 조각조각 나 있는 발굴상태, 어떻게 접합하고 복원하는지를 볼 수 있다. ?은평시민신문 | | 지난 12월 27일 역사박물관 사종민 조사연구과장은 유물전시 현장에서 은평향토사학회 등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갖고 "큰 바위 아래 부서진 대지국사탑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기계장비나 전기 등 문명의 이기를 일절 사용할 수 없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오직 인력에만 의존하여 바윗돌을 끌고 굴렸다. 3년 동안 찌는 더위, 장대비, 혹한을 견디며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작업했다."며 "붓으로 흙을 털어내며 하나의 파편을 찾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작업한다."고 발굴 과정을 설명했다. 또한 "유물 보존 처리부서가 있는 박물관은 역사박물관을 포함하여 10개가 되지 않는다. 산산조각 난 파편 조각들을 엑스레이로 찍고, 복제, 복원하고, 찌그러진 청동을 세척하며 새롭게 명문을 발견하기도 한다."며 유물 보존처리와 연구가 병행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 은평향토사학회 회원과 삼천사지 유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관람객들을 위해 지난 12월 27일 하루 특별히 유물조사과정에 참여했던 사종민 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이 나와 안내와 설명을 하고 있다. ? 은평시민신문 | |
▲ 열심히 메모하며, 깊은 관심을 보이는 관람객들 ? 은평시민신문 | | 천년 고찰 삼천사(三川寺) 베일을 벗다 삼천사지(三川寺址)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후 존속되다가 임란 이후 폐사되었다고 전해지나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 고려사>, < 동국여지승람 >, < 북한지 > 등에 극히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번 발굴조사는 255점의 명문 비편과 탑비전으로 추정되는 고려 전기 건물지를 새로 확인했다. 기록이 부족하여 베일에 쌓여있던 북한산 삼천사지 및 고려전기 법상종 승려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게 된 점이 큰 성과라고 역사박물관측은 밝혔다. 삼천사지는 폐사된 이후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정도가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었던 것. 김우림 역사박물관장은 법보신문 기고문에서 "문헌기록에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을 대지국사 비문을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 실려 있지 않은 새로운 자료도 다수 발견되어 사료가 부족한 고려시대사 연구에 있어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가히 고려시대 유물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삼천사지 출토유물은 그 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 숨어 왔던 고려시대 삼천사를 환생시키고 공백상태에 있는 남경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종민 조사연구과장도 "고려시대 유물 특히 전기 유물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흔적을 찾았다는 게 의미가 있다. 대지국사탑비 발굴 규모는 삼천사지 본 사역의 1/10도 되지 않는다. 삼천사지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 훨씬 큰 성과가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 255점 명문 비편 가운데 하나의 모습 ? 은평시민신문 | | 대지국사탑비 명문 비편과 고려시대 유물들 다수 대지국사 법경은 왕사에 이어 국사를 지냈고, 고려 현종(1009∼1031)대에고려 법상종의 종찰인 개경 현화사의 초대지주를 지냈으며, 고려 전반기 법상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활동을 입증해줄 유일한 자료인 비문이 일찍이 파손되어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해왔다. 이번 조사로 총 255점(630여자)의 명문 비편이 수습되어 고려전기 불교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
▲ 석조보살두 사진 출처: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 | | 명문 비편이외에도 이번 조사에서는 지름 8.9cm, 높이 8.3cm의 청동사리합이 출토됐는데 사리합의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법경과 연관된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지금껏 출토된 적이 없는 특이한 형태의 보살두가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 3.7㎝의 소형 보살두로 고려시대 유물이다. 삼불부관(三佛寶冠)에 입술 일부와 화불(化佛) 일부에 붉은 채색을 하였으며, 머리 부분에도 검은 채색을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5불이나 7불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석조 보살두는 특이하게도 3불을 표현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바가 없어 불교미술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가순궁주의 명문이 새겨진 금니목가구편도 함께 출토됐다. 목가구편의 겉면 칠기막에 금니로 ‘가순궁주왕씨’라는 문구가 남아있어, 이 가구편의 연대가 13세기경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려사에는 가순궁주가 고려 21대 희종의 4녀로서 신안공 왕전(~1261)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은제투각칠보문장식(銀製透刻七寶文裝飾)은 은제투각칠보문구슬 3개와 청동제 16화형(花形)고리 1개, 3개의 사다리꼴 장식편으로 구성됐다. 구슬 일부에서 금색이 관찰되는데 이는 은으로 구슬을 만든 후에 표현에 금도금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유사한 장식이 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과 일본 동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에 남아 있다.
사종민 조사연구과장은 “고려시대 장식문화, 궁중문화를 알 수 있으며, 일본인 오쿠라가 도굴된 유물을 값싸게 수집해 화차 두 대 분량에 이르는 많은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오쿠라 컬렉션에서 수집한 물품이 가야, 신라시대 뿐 아니라 고려시대 유물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자칫 지루하기 쉬운 유물전시회, 북한산 증취봉 아래 삼천사지 터를 둘러보고 발굴에서 전시까지 과정을 한 눈에 들여다보는 전시를 접한다면 아이들에게는 물론 어른들도 우리 지역의 문화유적에 각별한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여겨진다.
김우림 역사박물관장의 설명 중에서
삼천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은평구 진관내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삼천사 주차장을 지나 삼천리골로 들어가야 한다. 삼천리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10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대웅전 등 삼천사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삼천사 사역(寺域)이 나타난다.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이 일대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삼천사지 사역에 중대규모의 군대 막사가 세워지고, 연병장을 조성하면서 넓고 편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발굴 대상지는 이 등산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20분 가량 더 올라가서 증취봉 아래 산중턱에 있는 대지국사 탑비유적이다. 삼천리골 등산길 곳곳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삼천사 주차장에서 약 30분간 올라가면 그곳에도 옛 삼천사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흔적은 진관내·외동을 비롯한 북한산 일대가 고려시대 삼천사의 사역이었음을 증명한다.
| ['09.1.9 은평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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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 서쪽 기슭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건립한것으로 알려진 삼천사(三川寺)가자리잡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산 정상 부근에있었는데 임진왜란때 불에타 지금의 자리에다시 지었고, 한국전쟁때 또절 일부가 파손돼 1960년대 들어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지었다.
경내에는 석종탑과 5층탑이 보존돼 있고, 대웅전 위쪽 30㎙ 지점에는 보물 제657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바위에새겨져 있다.
3.02m 높이의이 마애상은 고려초의 조각기법을 나타내고 있어조성연대를 11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애불로 1.5㎞가량정상 쪽으로 오르다 보면 울창한숲속에 방대하게 흩어져있는 삼천사의 옛터를볼 수 있다. 아직도 거대한 석축과 주춧돌등 당시의 석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출처 : 한국일보(200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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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삼천사지 | |
지금은 은평구 진관외동인 속칭 북한산 삼천리골에 삼천사가
세워져 있다. 이 삼천사의 원래 절터를 찾아가기로 한다. 10여 개에 달하는 북한산의 폐사지는 거의 산성(山城)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삼천사지는 산성 바깥에 있으며 산내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찰이기도 하다. 폐사지를 대하는
서글픔이야 어느 경우이건 마찬가지지만, 학술적인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사지를 보노라면 더욱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삼천사지 역시 그런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과연 어느 곳이 삼천사의 원래 절터였는지, 또는 삼천사의 규모는 어느정도에 달했는지
문제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결론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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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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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년 폐사에도 얇기만한 연구성과
우선 삼천사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조사를 벌이는 가운데 삼천사의 정확한 사찰명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三川寺'와 '三千寺'라는 표기상의 혼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단편적인 내용의 내용이지만 <고려사>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川'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삼천사와 관련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삼천사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의 비편에서도 '川'자로 표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로 본다면 삼천사의 본래 이름은 '三川寺'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千'자로 표기하는 사찰명이 등장하였을까? 우리는 1745년(영조21)에 편찬된 <북한지(北漢誌)>라는 자료에서 처음으로 '千'자가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었따.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팔도 도총섭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성능(性能)스님이 지은 이 책자는 북한산성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에 '三千寺'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고 있다. '三川寺'는 18세기 무렵부터 '三千寺'로 바뀌었고, 그것이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삼천사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폐사의 모습으로 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폐사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 모두 삼천사가 폐사로
남아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1530년부터 1745년 사이에는 폐사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삼천사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적어도 4백여년 간 지금과 같은 황폐한 모습으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4백여 년에 걸쳐 이 산을 오르내리던 수 많은 사람들이 초라한 삼천사지를 보면서 계속 지나쳐
버린 일을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근대 이후에 몇몇 학자들이 삼천사지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불우조의 "삼천사는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라는 기록에 나오는 대지국사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삼천사지를 주목했던 것이다.
그 첫번째 시도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을 비롯한 조사단 일행이 근처까지 왔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나
현장답사를 단념하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은 <大正 5년도 고적조사보고>라는 책자를 통해 삼천사지의 중요성과 그 위치 등을
나름대로 정리해 놓았으며, 대지국사비의 몇몇 조각들이 <대동금석서>, <해동금석원> 등의
금석문 책자에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동안 삼천사지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부터 3년 여에 걸쳐 진홍섭(秦弘燮)·
정영호(鄭永鎬)·최순우(崔淳雨) 선생 등에 의해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대지국사비의
조각편들을 다수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 때 발견된 비편들을 판독한 내용이 최순우 선생에 의해
발표된 바 있지만 이후로 최근까지 더 이상의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글/ 김상영(중앙승가대 교수), 최태선(경북대 박물관 연구원) 자료 출처 - 대중불교 149호(19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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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벗은 북한산 삼천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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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역사 파편 맞춰 옛 모습 찾은 고려 성지
기사등록일 [2007년 12월 03일 14:41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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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김 우 림 관장 특별기고
지난 11월 5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 삼천사지(三千寺址) 탑비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대지국사 법경 스님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명문비편 등
10~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삼천사는 661년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법상종의 중심사찰로 11세기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크게 융성했다가 임진왜란 이후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에 극히 간략한 언급만 남아있을 뿐
이에 관한 문헌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삼천사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 삼천사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울역사박물관 김우림 관장이 상세히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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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삼천사지탑비구역 전경. 증취봉 능선 중단부(해발 342.4m) 일단을
정지하여 탑비전지와 대지국사탑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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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탑비전지 근경. 삼천사지 본사역을 바라보며 남서향 하고 있는 건물지로
원형주초와 고맥이석을 이용하여 건물을 축조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고려시대에 서울은 수도 개경과 더불어 3경(京)의 하나인 남경(南京)
이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길지(吉地)라 평가되어 고려시대 내내 천도(遷都)를 대비하여
궁궐과 객사 및 향교, 사찰 등 많은 도시 시설들을 계획하고 건축했다.
특별히 국교로 공인된 불교 사찰이 남경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역대 왕들의
행차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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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청동사리합. 양식 및 연대로 보아 대지국사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내부 사리구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고려시대 남경의 사찰로는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중흥사, 태고사, 미타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의 사찰은 개경이 아닌
남경의 북쪽 변두리 북한산을 중심으로
한 곳에 있었다.
남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나 외곽지역에
있었던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사찰은 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중창(中創)이나 신축을 통해 가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일부 사찰은 폐사되어 터만 남아 있거나 사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석물(石物) 몇 점씩만 남아있는 경우도 흔하다.
북한산의 중흥사지와 삼천사지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중흥사지는 최근 발굴조사에서 사찰의 역사와 성격이 규명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유구에 대한 보존대책을 세우고 있다.
고려시대 주요사찰 삼천사 발굴
그러나 삼천사지는 폐사된 이후 축대와 일부 석물 이외에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폐허화된 상태이며,
그나마 사찰의 흔적으로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657호)과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의 귀부(龜趺)와 이수 및 지면에 노출된 일부 건물지 유구
정도가 남아 있어 옛 삼천사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삼천사지 탑비가 있던 자리에는 당당한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음에도
아직까지 이렇다할만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고 그나마 남아있는 석물이 계속 훼손되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시 전역에 산재하는 문화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였다.
조사 결과 수많은 유적을 찾아내었고, 조사 내용을 토대로 서울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와 DB를 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적의 훼손 정도가 심해 조사가 불가피한 유적을 대상으로 시·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첫 번째 발굴 대상지로 북한산 삼천사지 탑비가 있는 구역을 선정하고,
문화재청으로부터 학술발굴조사 허가를 받아 2005년 9월 12일부터 2007년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삼천사지로 가기 위해서는 은평구 진관내동의 대한불교 조계종 삼천사 주차장을 지나
삼천리골로 들어가야 한다.
조계종 삼천사의 한문 표기는 ‘三千寺’로서, 이는 고려시대 법상종 삼천사(三川寺)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
현재의 三千寺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여래입상 한 구가 있는데 이 입상은
고려시대 三川寺와 연관 있는 불상이다.
삼천리골에서 문수봉 방향으로 약 10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길 왼편 산자락에 대웅전 등 삼천사의 주요 건물이 있었던 삼천사
사역(寺域)이 나타난다.
1968년 당시,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이 일대가 민간인출입금지구역
으로 지정되면서 삼천사지 사역에 중대규모의 군대 막사가 세워지고, 연병장을 조성
하면서 넓고 편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발굴 대상지는 이 등산길에서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20분 가량 더 올라가서 증취봉 아래 산중턱에 있는 대지국사 탑비유적이다.
삼천리골 등산길 곳곳에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흩어져 있다.
또한 삼천사 주차장에서 약 30분간 올라가면 그곳에도 옛 삼천사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흔적은 진관내·외동을 비롯한 북한산 일대가 고려시대 삼천사의
사역이었음을 증명한다.
얼핏 보아도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려시대 삼천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고, 가람은 어떻게 배치하였을까.또 삼천사가 배출한 인물은 누구이고, 고려시대 삼천사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던 절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갖게 될 법하다.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 매우 제한돼 있다. 우선 폐사로 말미암아 폐허가
된 상태인데다 폐사 이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문헌 사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
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고려사(高麗史)』에조차 삼천사 기록은 단 두 줄뿐이다.
고려 현종 정묘 18년(1027) 조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금지된 것을 범하여 술을 빚은
쌀이 합계 360여 석이오니 청컨대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거늘 이를 받아 들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삼천사 관련 기록이다. 삼천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지리서에서도 일부 올라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
비고(東國輿地備攷)』등에 보면 삼각산에 삼천사가 있는데, 거기에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주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지국사비명이다. 바로 삼천사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단서인 것이다.
국사(國師)는 고려시대 승직(僧職)의 최고 권위이다. 통상적으로 왕사(王師)를 거쳐
국사로 임명받는데, 이곳에 대지국사비명이 있다는 것은 삼천사와 대지국사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삼천사의 승려가 국가로부터
국사로 인정받았으며, 이 승려를 기리는 비를 삼천사에 세우게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법상종 사찰…주지는 법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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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대지국사탑비 귀부. 높이
137.5㎝, 넓이 240㎝, 길이 270㎝크기로
용의 머리와 흡사하며, 배면(背面)
귀갑문에 ‘王’字 문양이 새겨져 있다. |
또한 1027년에 삼천사의 승려들이 술을 빚었다는 기사에서 적어도 1027년 이전에 삼천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지국사는 법경(法鏡) 스님을 일컬으며, 삼천사의 주지를 지냈다. 그는 삼천사에 있는 동안 왕사가 되었으며, 이후 국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냈다는 내용이 개경 현화사비명(1021년)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소략한 문헌자료를 보충해 줌으로써 산산이 흩어진 역사의 궤적을 바로 맞출 수 있게 하는 실물 자료가 바로 명문비편(銘文碑片)이다. 언제 누가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지국사탑비의 비신은 이미 산산이 깨어져 사방에
흩어진 상태였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선비들이 지표에 드러난 비편 일부를
수습하여 소개한 적이 있고,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제보를 받고 현장에 나가
비편 일부를 발견하고 이를 보고한 자료가 있지만 삼천사의 성격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얻어낸 최대의 성과는 고려시대 거대사찰 삼천사의
성격과 법상종의 태두였던 대지국사 법경의 이력을 밝힐 수 있는
다량의 명문비편을 수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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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대지국사탑비 이수. 앞뒷면에
각각 두 마리 용을 대칭적으로 배치했으며,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장면을 운문과
더불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
비편의 내용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삼천사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사찰이다. 법상종은 유식종(唯識宗) 또는 중도종(中道宗)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법상종의 경전으로는 『제심밀경』, 『성유식론』, 『유가사지론』등이 있다. 우주 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하여 설명하는 종파이다. 신라의 원측(圓測) 스님이 중국 당나라의 현장(玄奬) 스님으로부터 배워 와서 신라에 도입한 이후 경덕왕(景德王) 때인 8세기에 진표 스님이
금산사에서 이 종파를 크게 중흥시켰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법상종 계열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고려 최고의
종파중의 하나였다. 익히 알려진 개경 현화사도 법상종의 사찰이며, 이 절의 초대
주지였던 대지국사 법경은 두 말 할 나위 없는 법상종 승려였다. 927호 [2007년 12월 03일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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