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古典復活과 現代文學」
(白鐵)
1
근래에 와서 우리 현대문학의 문학운동적인 토의의 논제로서 고전에 대한 관심이 차츰 높아지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여기 대한 진상과 의의에 대하여 일차 그것을 검토 찬성하는 내 사견을 써보고 싶다.
먼저 여기 관한 자료를 들어보던 가까운 예로선 『현대문학』지가 10월호에서 고전문학과 대학강의에 관한 앙케이트를 특집하였고 뒤이어서 『자유문학』지에서 「고전과 전통」의 문제를 12월 특집을 하여서, 이 양지를 통하여 현문단인과 고전학자의 여러 사람이 의견을 발표하였다. 이 양지의 특집을 보아서도 이 고전의 문제는 현문단 저널리즘의 한 주제로 등장한 특징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알기엔 이 고전, 전통에 대한 문단, 저널리즘의 관심이 시초(始初)된 것은 재작년초(再昨年初)부터인데 일례(一例)를 들면 조선일보지(朝鮮日報誌)의 신년특집에 이병도씨를 비롯한 역사가 고전학자의 글이 실린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좀더 일반적인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금년들어서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한글기념일을 중심한 문총주최의 「문화의 달」의 행사중엔 「백일장」 육신묘(六臣墓)의 제사 등은 직접 간접으로 고대적인 부활의 운동과 관련되는 일로 볼 수 있다. 또 그보다도 직접 고전, 전통의 부활과 그 실천에 관한 논문이 신년 조선일보지에 내가 발표한 고전섭취에 방법론이 요구된다……는 일문을 비롯하여, 시조부흥을 제의한 이태극씨의 논문 등이 많이 발표된 사실이다. 이씨의 시조부흥론은 고전부활의 일례를 제시한 것으로서 그 논법에는 잘못된 것이 있어서 정병욱씨 등이 『신태양』지에 반발한 바와 같거니와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론을 들고 나선 점은 우리가 중시할 것이며, 우리는 대담하게 구체적인 고전부활의 방법을 제시하고 토의에 부하는 가운데서 수정할 것이라 생각한다.
현대문학을 위한 고전 전통의 부활 계승의 방법으로서 또 한가지 주목한 것은 『자유문학』12월호 특집 논문 「유산(有産)계승(繼承)과 창작(創作)의 방향(方向)」에서 전광용씨가 고대가사인 정송강의 「장진주사」와 현대시인 정지용의 「백롬담」의 구절을 대조 비교하여 그 관련 유사성을 지적한 것은 그 작품예가 적절하고 않은 것은 논평의 여지가 있다고 보더라도 그 방법 즉 고전작품과 현대작품의 예를 서로 대조해서 그 유사성 또는 그 비계승성을 비교 지적하는 것은 고전전통의 부활을 위한 효과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앞으로 나가버렸지만 여기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근년 특히 작년 일년간에 있어 이 고전 전통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커지고 여러 가지 면으로서 논의되었다는 사실. 여기에 우선 우리 문단에 좀 더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되는 것이다.
2
고전론(古典論)의 등장에 대하여 먼저 추구할 것은 그 동기에 대해서이다. 우리 현대문학의 창건에 있어서 왜 고전론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반문이다.
그러나 본래 이 고전론은 해방이후 우리가 새 문학의 방향과 주제에 있어서 민족적이란 메인타이틀을 내세우는 때에 있어서 그 동기가 내포 전제되어 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그 뒤 정치혼란 그 밖의 여러 가지 현실상의 급박한 사정을 응접하는데 겨를이 없어서 여유를 갖고 여기서부터 그 동기를 제시 강조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고전론을 전제했다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문학의 신출발에서 민족적인 이름을 부친다는 것이 단순한 정권영토의 회보기을 의미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면서 결국 문학상에서 상실했던 민족적인 특징적인 표현의 부활을 의미한 것일진대 그것은 당연히 우리 것이 독자적으로 표현된 어떤 고전의 문학시대와 관련되는 성질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해방과 함께 전진이 급급한 문학운동은 될 수만 있으면 고전 전통 등의 과거와의 건둔(蹇屯)스러운 관계를 약(略)하고 그대로 앞으로 나가보자. 그것이 시간적으로나 방법상으로나 직경일 것이다!고 생각했던지 모른다. 적어도 실제의 현상으로선 그 방면의 의견이 승(勝)하였다. 우리는 그 강행(强行)의 사실과 그 결과에 대하여 오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민족적인 감정의 강조, 예를 들면 반일제의 감정을 강렬하게 발로시키는 것이 곧 민족문학의 직로(直路)라고 감상한 것은 초기에 있어서 불가피한 반동의 형세였다고 보지만 결국 지나고 보면 그것은 극히 자연발생적인 주관적인 성질의 것이며 문학적인 작품의 성과로선 조금도 과거를 정정한 것도 회복한 것도 아니었다. 또 그런 감정이란 결국 질적으로 감상이며 곧 퇴색해버릴 성질의 것이었다.
반(反)커뮤니즘의 문학, 이것이 민족적인 문학의 길로 강조된 사실, 여기엔 초기의 반일적인 감정보다는 사상적인 항거, 인간성의 옹호, 등의 훨씬 문학을 위한 설정조건을 갖고 있는 재료였지만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태반이 역시 하나의 감정의 문학, 추상, 유형의 문학으로 되고 말은 것이다. 그 밖에 있는 딴 예도 이상의 두 가지 예와 같은 것으로 통산할 수 있다.
이제와서 보면 결국 이번 우리 경우에 있어서 민족적인 문학으로서의 그 과제가 추구되는 한 그것은 재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재료로선 우리는 역시 그때에 생성하는 모든 현실적인 중요한 단면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현대문학으로 되는 중요한 조건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대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민족적이어야 하는 조건은 그대로는 나와지지 않을 것이오, 결국 그것을 받아드리는 태도와 방법 등 즉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사고하고 동시에 어떻게 표시하느냐 하는 테크닉의 조건과 함께 오는 것, 여기에 우리가 해방이후부터 문학적인 전환을 꾀하는 우리만이 특히 요구되는 개편 재건의 의미가 있는 것인만치 그 문제가 요즈음 와서 그대로는 우리문학이 막다른 골목과 맞부닥칠 수밖에 없는 사정과 함께 그 타개의 방법으로서 고전전통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해방이후가 우리가 문학사적인 반성을 하고 민족문학의 재출발을 한, 그 직접반동은 먼저 지난 50년간의 신문학사(근대문학적인, 또는 20세기적인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반동하는 것이냐, 이것은 먼저 말한바, 단순한 그 정치성에 대한 반동이 아니고 문학 50년간의 비민족적(非民族的)인 무주체성(無主體性)의 모방문학사에 반동하는 의미의 것이었다. 우리가 밟아온 낭만주의 문학, 그리고 자연주의 문학 혹은 내부의식의 문학등을 열거해서 그것들은 모두가 남의 문학관과 나의 작품방법을 일시 빌어다가 써본 것이요, 그것이 정말 우리의 문학세계와 이 수법으로 타당한가 않은가는 비판검토 할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그 기회를 해방 뒤 또는 오늘에 있어서 가져보자는 것이며, 그것을 검토하는 기준은 역시 우리의 문학적 전통, 우리문학에 나타나는 느낌의 성질, 그것이 강력하고 약하고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것이라도 그것을 찾아서 이쪽의 주체적인 자세를 정하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요구될 때에, 여기에 우리문학은 불가피하게 일차 고전부활의 운동은 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된 것, 이것은 오늘 와서 고전, 전통론이 대두 논의되게 된 현실적인 동기이며 문학사적인 의의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우선 오늘의 고전, 전통론은 현대문학의 긴급한 과제로서 그 추진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서 다시 그 전통의 추구가 시기에 적합하다는 뜻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우리문학이 이상 더 서구문학의 뒤를 따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저쪽의 사상, 문학이 그들의 근대사적인 모든 문화과정의 필 ( )과 함께 앞길이 막혀버리게 된 때문에 우리문학이 지금까지는 후진성을 외이면서 저들의 뒤를 따라가는데 급급했지만 이젠 더 따라나갈 의의가 없어졌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이 시기, 이 장소에 머물러서 우리의 것을 추구 회복, 크게는 동양적인 본유(本有)의 것을 부활시켜서 현대적인 동력을 삼아 볼 수 잇는 기회가 아닌가 하는 하나의 산울림을 듣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고전 부활에 대한 세계문학사적인 의미의 자신을 가(加)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런데 이 항목에서 한가지 독자에게 주의를 일으키고 싶은 우리 문단이 고전전통을 내세우는 것은 그 전통의 현대문학작품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관계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신문학이 아무리 비전통과 외국선진문학에 대한 모방의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중엔 무의식인 흐름, 또는 자연발생적인 의식에 의한 고전적인 전통의 흐름이 현대작품에 반영된 것은 잊을 수 없다. 가령 전게(前揭)한 논문에서 전광용씨가 열거한 고대가사와 현대의 시가 연관성을 가졌다면 그것은 지금 말한바 자연생장적인 유전적 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에 우리가 각별하게 고전 전통론을 들고나서는 의미는 가령 어느 만치 그런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미약한 것이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먼저 말한 그 문학적인 주체성의 지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상의 강력한 것을 구하는 것, 그리고 무의식적, 자연생장적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고전 전통을 추구하는 문학운동으로 이것을 전개하자는 것에 지금의 고전부활론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문단적인 태도로선 현역의 일반 문단인들이 좀더 이 고전 전통문제에 관심과 필요를 느끼는 동시에 의식적으로 그 운동의 선두에 서는 적극성을 가질 것을 요망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한, 우리 문단인은 고전문학측에서 가해오는 다음과 같은 비판에 아무 답변할 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소적(小積)한 고문학의 무데기 속으로 현대문학가 자신들이 발을 벗고 팔을 걷고 들어서야 할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문학은 어디까지나 체험의 세계를 관계화한 것임에 남의 해석과 비판에 의존하느니보다 자신이 직접 그 일에 참획(參劃)함으로써 고전설정의 첩경을 개척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요청되는 시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땅에 흔히 떠도는 말로 우리는 고전이 없다는 둥 고전자료가 빈약하다는 둥 하는 말이 있다. 「천만의 말씀」나는 서슴치 않고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그런 불평을 말하기 전에 우리들의 고전자료의 목록이라도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 보고자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묻고 싶다」(전병욱씨의 소론 「고전과 현대문학의 과제」『자유문학』, 12월호)
이것은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문인측(文人側)에서 현역문학인에게 보내는 하나의 멧세지와 마찬가지이다. 고전문학측에서도 소장인들은 이와같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긴급한 결연운동(結連運動)을 요망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내가 보기엔 역시 긴급한 것은 현대문학측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더 큰 관심을 이 방면에 기울이면서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3
고전부활은 지금 우리문학의 전진을 위하여 필요한 운동형식인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 고전 부활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진될 것인가.
우선 그 고전부활이란 것이 결코 무조건이 아니란 것은 구라파의 문예부흥사적인 예에서나 우리의 문학사관에서나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전게(前揭)한바 작년도 신년 논문에서 고전과 전통의 섭취(攝取)에는 방법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아무리 고전이 희소가혹 귀중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것이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가져다가 부활시키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실은 그 점에 있어서 현재까지 고전학자나 대학에서 취급되는 고전문제에 대하여 불만과 이의가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교수하는 것은 거의 기계적으로 고대문학의 지식을 패러프레즈하는 경계선을 넘은 것들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즉 고전문학을 강의하되 그것이 현대문학과의 관련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산지식으로서 젊은 세대에 전달하는 교수는 극히 드물지 않았던가 보는데 근래 문과대학생의 국문학에 대한 동태가 고전에서부터 차츰 현대문학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격증하는 숫자를 제시하고 잇는 것도 고전문학 교수들의 반현대적인 교수태도에 기인된 것이 크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또 『현대문학』지가 10월호에 대학의 고전문학(古典文學)교정(敎程)을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특집(特輯)한 것도 그런 젊은 세대의 반응과 문단적인 여론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그 점에서 정병욱씨가 전게한 「고전과 현대문학의 제과제」(『자유문학』,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논급(論及)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고전문학과 고전이 혼동되는 관념 속에 깡그리 휩쓸려 있다는 사실은 곧 고전의 의의를 엄격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전연구가의 이론적 궁핍에서 기인되는 점은 물론 지적될 것이다. 그보다는 좀 더 기본적인 문제로 현대(즉 역사적으로 본 현대)의 성격이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데에도 그 과반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알기에는 고전이나 전통의 탐구는 항상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알고 있다. 다라서 고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판단의 기준에 입각한 비판적 태도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판이란 단순한 문헌학적비판에서 고칠 것이 아니라 현대적 의의 즉 현대의 요청에다 그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 현대적인 입장, 이것이 고전부활운동에 있어서 먼저 방법론의 의의를 띈 것이라 본다. 우리가 고전문학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문학 그 자체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대문학을 위해서 필요한 한(限) 그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커다란 방법론적인 중점, 또는 기준이 설정되는 것이다. 그 고전문학에 대해서 우선 그 중점으로서 제산(除算)한다라는 데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중점을 가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대소의 면에 적용되는 산법일 것이다. 예를 들면 시대적인데 대해서도 어느 시기에 중점을 두느냐하는 것, 다음엔 문학의 장르에 있어서도 그 어느 것에 더 대표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 나가선 구체적으로 일작품의 감성 검토에 있어서도 그 작가와 그 작품의 어떤 특질을 중시해서 현대적인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일이 각각 동경(東經)의 차이를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 과거의 문학자료(내용과 기교)에 대하여 현대적인 것과 관련한 전형성의 것을 취택(取擇)해 오는 태도이다. 여기 대하여 직접 전통섭취의 경우가 아니고 역사소설의 경우를 설명한 것으로서 코넬대학의 교수 데이치즈씨의 다음 같은 말이 참고로 될 것이다.
「소설가는 물론 작품의 플롯에 있어 역사적인 재료를 쓸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진실한 소설가라면 그의 일은 단순히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를 명시(明示), 첨화(尖化)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어떤 일반성의 도덕화나 추상적인 유추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전형화하고 현대화하는 방법에 의한 것이다. 역사적인 재료를 쓰는 소설가는 그 재료에서 전형적인 것을 설정하는 것이 주요한 일이다. 왜 그러냐하면 그 역사적인 재료라는 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서 온 것이 아니오 작가가 예쑬가로서 주제를 파악하는 의식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론」「문학·역사·과학」 난(欄), p. 99)
이 논구(論句)에서 우리들은 고전부활에 대한 중요한 방법적인 암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과거가 현재에 대한 각관이 될 수 잇는 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대소의 여러 가지 경우에서 필요한 것에는 어떤 중점기준에서 선택이오 추상이다. 그것이 전형적인 것, 그것의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현대적인데서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그 전체의 형식인가 그 일부분인가 등을 판단하여 섭취하는 것이 어려운 가운데 기어히 필요한 여과작업인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국문학교수 이태극씨는 시조부흥론으로서 구체적인 부활론을 제의하였는데 여기 대하여 우리가 제의한 그대로 전적인 찬성을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현대문학을 위하여 그 시조형식을 고스란히 그대로 가져다가 부활시킬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조부활론은 전기(前期)에도 일차(一次)있은 일이다. 즉 1926년 병인년을 기하여, 그때 프로레타리아 문학의 대세와 대항키 위하여 주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 선 문학자들, 이광수, 최남선, 손진태, 이병기씨 등이 주동이 되어 민족문학론을 제창하고 민족문학의 대표적인 형식으로서 시조형식을 부흥 시용(試用)할 것을 제창한 일이 있다. 결국 이 부흥론이 결실을 갖지 못하고 행방미명으로 되고 말앗는데 그때의 무성과는 물론 일제 정치하의 환경관계도 있지만 역시 그 주원인은 그 시조형식을 기계적으로 부흥시키려는 무리가 이넝T던거 생각되는데 근래 이태극씨를 중심한 시조부흥론에 있어서도 내가 딴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기의 예와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고 있는 경향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의를 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고전부활의 형식 그 자체에 어떤 방법적인 전도(轉倒)의 기계성을 느끼는 것이다. 아무 현실적인 문학요구의 전제 없이 일방적으로 고전형식을 가져온다는 것은 과거에 액센트를 두고 현대문학의 위치를 무시한 대치와 같은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은 반응의 순서로서 어데까지든지 현대문학적인 액센트를 두고 그 구체적인 현실적인 요구조건이 전제로 되어서 고전문학을 향하는 것이라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대로 현대문학의 과업을 추구하고 잇는 것은 불변이다. 우리가 고전과 전통을 향하는 일도 똑같이 현대문학적인 과업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적어도 그것이 방법적이오 효과적이다. 그러면 현대문학의 어떤 구체적인 면에서 고전문학은 향하고 그것과 연결을 하게 되는 것인가. 한 두 개의 예를 들어 그 사정을 설명 할 수 있다.
우선 제재와 그 표현에서이다. 가령 현대작가가 농촌과 농민을 취재할 때에 현재 우리는 서구의 근대문학 수법으로선 인물의 창정(創定)이나 그 묘사가 다 일종의 만네리즘에 떨어져서 불만인 때문에, 일차 우리 고전소설의 농촌농민 푷련에 대한 태도와 수법을 대질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때마다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나 적어도 그 실험에 의하여 반성적인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현대와 같이 부패 타락한 주위의 현실을 그리는데 있어서 그것을 서구적인 지적인 수법 가령 풍자 냉소 비판의 수단만으로 할 것인가, 비슷한 시대적인 재료를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 고대작가들은 어떤 테크닉을 썼느냐, 가령 그것을 해학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서구적인 풍자와는 어떤 특질에서 구별될 것이냐, 그것은 우리의 독특한 것이면서, 같이 혹은 이상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면 그 서구적인 것을 우리 해학으로 제하고 종합한 어떤 현대적인 신수법을 체득할 수 잇을 것이다.
현대문학의 신수법으로서 「의식의 흐름」이란 것이 성행하지만 여기 대해서도 우리 고전작가들이 심리를 운반한 수법이 있다면 그것을 먼저 토대로 해서 그것을 받아드리는 순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는 현대시에 있어서 암유(暗喩, 메타포-)라는 것이 많이 사용되지만 이 비유법이란 우리 나라 고전시나 민요에서도 많이 그리고 묘용(妙用)되지 않았느냐 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재검토하고 재활(再活)시킬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적당한 예는 아니지만 전에 상허(尙虛)는 그의 현대작품에서 가끔 고대(古代)시구(詩句)같은 것을 삽(揷)하여 특별한 효과를 내인 것이 있다. 일례를 들면 그 전쟁중의 일제하의 정세가 차츰 험해지는 장면을 상징 암시하기 위하여 「이상견영지(履霜堅泳至)」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 같은 것이다. 지금와서 우리문학이 그런 고전부흥법을 쓰자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현실적인 것을 그리는 그 절박한 측면에서 과거에 필지(必至)하는 연락을 취하는 일례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여기에 고전부활론에 있어서 우리가 의식할 것은 그러니까 먼저 현대문학적인 요구에 응해서 할 것, 동시에 고전과 전통이 부활되는 경우엔 이번엔 그것이 우위적인 주체성이 되어서 근대 및 현대적인 구미의 문학수법을 비판 종합하여 새로운 질적인 비약을 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4
나중으로 다시 생각하고 싶은 것은 그 고전부활이 현대문학에 중점을 두고 제기된다고 해서 잘못하면 현대작가들이 종전대로 우리고전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인용한 정병욱씨의 말과 같이 현대작가가 우선 고전문학에 깊은 관심과 그 지식을 가져야 될 사실이다. 이것은 현대작가가 고전문학을 알고서야 그 섭취여부에 대한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요는 그 고전문학이 광범하게는, 중국, 인도 등에 걸친 동양적인 고전세계가 이 정체한 웅덩이 물을 새롭게 흐르게 할 수 있는 저수지인 것이다. 오늘의 이 웅덩이 물은 오직 그 저수지의 물줄기를 받아 넣음으로써 맑아질 수 있고 새로운 유파적인 불줄기로써 힘차게 재출발할 힘을 회복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현대작가에 대하여 고전은 필수과목이다.
현대문학인은 시간과 기회 있는 때마다 고전작품과 친근할 것은 그때마다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작가가 작품행동 등의 현실적인 창작에 바쁘다면 전언한 바와 같이 그때 작품 제재주제와 관련 비교되는 연구 검토도 할 수 있고 그 대상, 광범할 때는 고전문학자의 협동검토라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또는 고전문학자와 현대문학자의 공동기관이 있어서 발표회 기타의 방법으로서 의견을 교환 토의 협조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하여튼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현대문학의 직면한 과제로서 될 수 있는 노력과 기회를 다해서 일차 고전문학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의 기회를 가져보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개인적인 발의나 문제적인 논의로선 그 성과를 바라기 어렵고 좀 더 전문단적인 운동으로서만 시대적인 기운을 크게 조성하는 기회과 와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년전(年前)에 모지의 문화부장, 문화부기자와 동석한 자리에서 이 고전전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것은 한 신문에서 특집 할 것이 아니라 일차 각 주요신문의 문화부장회의를 개최하고 공동특집을 하면 어떠냐고 제의한 일도 있었다. 또는 작년도의 한글기념일 때에서도 모회석상에서 이야기가 나와서 명년은 좀 더 이 기념일을 거족적인 성전(盛典)으로 해서 전체적(全體的)인 분위기를 일으키자고 한 일도 있다.
천재와 창조는 고립과 분산 속에서는 성취 되기가 어렵고 전체적인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 싹은 크게 트고 또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잇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문예부흥사적인 사실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시대와 환경의 행운을 가지면 이상 좋은 일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 필요는 하되 주위의 환경조건이 무지(無知) 무성의(無誠意) 무감각(無感覺)해서 거기서부터 오는 조성의 조건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는 문화 지식인이 중심이 되고 또 그것도 광범위여서 무리하다면 문학자들만이 모여서 하나의 기운을 일으키고 그것이 확대되어 전문화전문명(全文化全文明)의 영역까지 퍼지게 되고 오늘의 혼란된 경제, 부패한 정계에까지 정화의 효과를 가지게 된다면 가선 아니가지게 못된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나는 단언한다. 일시적인 권력행사는 개인적으로도 명예가 아니며 더구나 국가민족의 역사에 주는 기여는 정말 수포와 같은 것인 대신에 정말 민족(民族)만대(萬代)에 긴 생명이 되는 것은 그 민족의 참된 문화의 전통을 찾아 수립해서 그것을 모든 것의 기준척도로 삼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진부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문학의 부흥융성을 단순한 문학상의 일로 보지 않고 결국 그것은 민족의 참된 발전, 나가선 인류의 참된 행복을 위한 커다란 문명사적인 일에 참획(參劃)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의 고전부활로써 우리 현대문학을 재생 발전시키자는 것이 진실로 성과가 난다면 그것이 어디 일문단(一文壇)의 조그만 동태에 그칠 것이리오. 나는 이것이 나의 주관적인 감상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이 잠시라도 밖에 나가보면 그들의 근대국가가 확실한 국가일수록 그들이 자기문화 문학의 전통,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기에 대하여 얼마나 소중하는가 하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 대신 우리 현대문학과 같이 아무 것도 자기 것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의 고민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고전(古典)을 부활(復活)하자. 그 속의 살릴 것을 살려서 우리 현대문학의 새 생명으로 세워가자. 이러한 선전적(宣傳的)인 문구(文句)로서 고전(古典)과 현대문학(現代文學)에 대한 소감의 글을 끝내려고 한다.
(『현대문학』. 195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