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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한 장소로의 여행
세상은 넓고 우리가 가본 곳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존재이며 그것이 무엇에 관련한 것이든 단순한 호기심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들 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꿈을 꾸며 산다. 누구나 가슴에 품고 사는 여행이라는 단어, 그 중 미스터리한 유적지로의 여행은 조금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몇 해 전부터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대학생들의 유럽 배낭여행도 젊은 시절의 값진 경험이 되겠지만 마치 그것이 유행인양 되버린 것에 싫증이 났다면,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의 여행을 꿈꾼다면, 일생에 한번 가볼까 말까 한 미스터리한 장소로의 여행을 추천하고자 한다. 자, 지금부터 같이 가볼까요?
여러분은 남미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One. 여기서 잠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냥 나온게 아니다! 일단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마추피추와 나스카라인에 대한 기본 지식을 쌓아보자
[잃어버린 잉카도시, 마 추 피 추]
[신들의 흔적일까? 나 스 카 라 인]
페루 남부 지방의 사막지대인 나스카 평원에서는 하늘 위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이 지역에는 새, 거미, 물고기, 원숭이, 도마뱀, 나무, 꽃 등 온갖 동식물이 약 100여개 정도 그려져 있으며 삼각형, 사각형, 원 같은 도형과 어지럽게 널려있는 직선과 곡선 등 기하학적인 문양까지 있다. 이 그림들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이 그려진 면적이 대략500km2에 이르고 있으며 평지만이 아니라 바닥이 드러나 하천의 가운데나 깊은 계곡, 바위 등 굴곡이나 장애와는 상관없이 정밀도가 높은 진석으로 그려져 있다. 각 그림들이 작은 것은 30m 정도되는 것도 있으나 정교하게 그려진 새의 날개는 130m이고 날개를 가로지르는 선분의 길이는 6km나 된다고 한다. 선 하나를 그리는 데만 몇 톤의 자갈이 필요했을 것이며, 전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수백만 톤의 자갈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파라카스의 무덤에서 나온 그림과 그 직물에서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 직물을 조사한 결과 현재 사용되는 낙하산이나 열기구의 소재보다 훨씬 섬세하게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도자기에는 기구나 연으로 보이는 깃발과 끈을 늘어뜨려서 비행하는 물체의 그림이 수없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양의 한쪽 끝에는 불에 탄 구멍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열기구에 바람을 넣기 위해 불을 지폈던 흔적이라 추측한다. 잉카의 전설에서도 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스카의 그 활주로는 특별한 행사나 종교 의식 때 열기구가 하늘로 올라가던 장소라 추정된다. 도자기와 직물의 그림을 본 따 당시의 기술만을 이용하여 열기구를 만들어 시험해 본 결과 열기구로 비행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즉 나스카 인들은 그 열기구를 타고 있는 사람의 지시로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나스카 평원 부근에서 발견된 작은 그림으로 보아 더욱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약2m2의 설계도를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말뚝에 끈을 묶어 똑바른 직선을, 컴퍼스와 같은 원리로 중심점을 이용하여 선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말뚝을 박았던 흔적과 중심점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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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문명의 유적지와 유물들을 보면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게 된다. 잉카의 수도 쿠스코의 거대한 삭사이우아만 성채와 마추픽추 유적들의 석조건축물, 모레이 농업작물시험장의 계단식 시설, 고산지대에 있는 염전, 앉아있는 미라, 해골에 보이는 외과 수술의 흔적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줄을 잇는다.
잉카 제국은 4개 지역 세력의 연맹체로서 1430년에 성립되었다. 쿠스코에 수도를 정하고 강력한 왕권으로 각 지역세력을 통제하며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태양의 신전을 통해 잉카의 왕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또 잉카의 왕이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해 시간을 측정했으며 일식이나 월식을 예견하기도 했다.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크게 하난쿠스코(높은 쿠스코)와 후린쿠스코(낮은 쿠스코)의 두 지역과 13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쿠스코에는 많은 벽돌집들이 있었으며 잉카의 왕궁은 금은 박판으로 선을 두른 석재로 벽을 만들었다. 거리는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상하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쿠스코 지역의 벽은 핀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히 짜맞춰진 돌들로 세워졌다.
잉카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가지 크기의 돌들을 서로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는 데 있다. 1950년 쿠스코를 덮친 대지진 때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건설한 건축물은 파괴됐지만 잉카인이 만든 건축물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만큼 튼튼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요새인 삭사이우아만 성채는 쿠스코 뒤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쿠스코에서 북쪽으로 3㎞ 떨어져 있는 산 정상에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와 같았다. 해발 3,700m인 이 성채에 오르자 숨이 가빠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요새는 세로로 긴 지그재그 형태를 한 3단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단은 그 길이가 300m가 넘는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수십, 수백 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들은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데 가장 아랫단의 돌들 가운데는 그 높이가 9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몇 배나 되는 규모다. 성벽에는 가장 아랫단에서 윗단에 이르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세 개의 탑이 있다. 거대한 돌 하나하나를 주변 바위의 모양에 맞추어 세밀하게 깎고 다듬어 올렸다.
바퀴와 같은 운송수단이나 철제로 만든 도구가 없었던 잉카에서 이렇게 정교한 석조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기술과 많은 인력, 그리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문자도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술을 어떻게 전수하였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삭사이우아만 유적이 군사적인 방어 요새인지 또는 종교적인 유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일부 고고학자들은 태양을 모시는 왕실 건축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회에서 왕권을 차지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제사권과 군사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삭사이우아만 유적은 군사적 요새와 제의적 공간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고대의 유적에서도 군사와 제사의 유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사권이 왕권을 정신적으로 유지해주는 기반이라면 군사권은 왕권을 물리적으로 지탱해주는 기반이라고 하겠다.
왕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도 중요하다. 잉카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농업생산의 발전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고, 제국은 농업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을 것이다. 모레이 농업작물시험장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감자와 옥수수의 품종을 개량하여 그 종자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확대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조세를 받아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또한 소금 염전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이를 지역세력과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지역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소금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소금의 재분배를 통하여 지역 세력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잉카제국이 네 지역의 지역연합세력이었으므로 각 세력을 결속시키고 컨트롤하기 위해 소금을 적절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잉카 문명의 신비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잉카인들은 이집트보다 앞서 미라를 만들었으며, 출토된 해골에 남아있는 외과 수술 흔적은 의학의 발달을 입증한다. 잉카제국은 하드파워 뿐 아니라 소프트파워도 갖춘 스마트파워의 문명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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