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사람들은 우물안에서 발버둥치는 돼지의 모습이 너무도 우습다.
곧 돼지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잔잔해진 수면위엔 우리의 얼굴이 비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감독 : 홍상수
각본 : 김알아, 서신혜, 여혜영, 정대성, 홍상수
배우 : 김의석, 김재성, 박진성, 이응경, 조은숙, 송강호, 손민석, 방은희, 박정학
음악 : 옥길성
제작 : 이우석
편집 : 박곡지
촬영 : 조동관
미술 : 조융삼
조명 : 김일준
112분. 1996년. 한국. 컬러.
0. 들어가며
1996년 가을로 기억된다.
소피 마르소의 대형 브로마이드와 몇 십 권의 「창작과 비평」, 몇 백 권의 책과 작기만 한 소형 모니터 그리고 문 앞에 패잔병처럼 널부러져 있는 소주 몇 병. 나는 선배 집에 놀러갔었고, 선배와 함께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이틀 동안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영화관에 일년에 한 번 가면 많이 가던 그 당시, 비디오도 어쩌다 남이 봐야 보았던 시절이었다.
나에게 있어 1996년은 군 입대를 앞두고 많은 것들을 정리하는 시기였고, 많은 것들을 잊으려는 몸부림을 역설하던 시기였다. 알콜과 불면과 논쟁으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봤던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나의 뜨거웠던 날은 그 여자가 신문지를 차곡차곡 펴놓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듯이, 그렇게 날아가 버리고 만 것 같다. ―가끔씩 느끼는 그 시절, 90년대에 대한 상실감은 나만의 것인가? 많은 이들은 뜨거웠던 80년대를 말하면서 90년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말한다. 그들이 죽었듯이 우리도 죽었고, 그들이 아파했듯이 우리도 눈물을 흘렸으며 때론 흘러내리는 피를 말리며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었다. 그러나 80년대 거리에서의 전위적 뜨거움과 2000년대 촛불의 대중적 성취 사이에서 90년대는 없다. 공지영의 은림(銀林)이 느꼈을 법한 무력감과 루이제 린저의 니나(Nina)의 상실감만이 나에게 얕게 그러나 질기게 씌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2003년.
그 동안 몇 차례 이 영화를 더 보기는 했지만, 그런 상실감과 무력감을 일깨워주는 시절을 추억케 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글을 적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이 영화를 보다. 딴엔 분석이란 걸 해보려고 끊어서도 보고, 사운드만 듣기도 하고, 묵음의 상태에서만 보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이 우스워진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제길.
잔잔해진 수면위엔 나의 얼굴이 비친다.
1. 인물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온다. 시나리오에서는 민수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거나 각색되어서 촬영되었다. 이 글에서는 영화를 텍스트로 보고 효섭, 동우, 민재, 보경 이라는 네 명만을 다루고자 한다.
영화에 나오는 네 인물의 특성을 우선 간략히 도식화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보자. ―영화뿐만이 아닌 모든 서사 구조를 가진 혹은 서사조차 없다 하더라도, 한 인물에 대한 분석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마치 신(神)의 성격을 분석하고 규정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들 인물의 성격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다. 어쩌면 이해되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들 삶에 있어서 한 단면만을 채집하여 좀더 부각된 그의 성격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것을 분석이라는 말로 치장하면서 지적 허영심을 체우고 나아가 그들을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지적 자위를 한다해서 행복해 진다면 모를까, 적어도 나에겐 그것은 삶과 사람, 행복의 본질은 아니다.
효섭 : 유아적이고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민재에게는 용돈과 교정 을, 보경에게는 정서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또한 여관 신 에서의 그의 모습은 소시민적이고, 출판사와 고기집에서는 내성적이다 못 해 나약한 현대인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즉 효섭은 지적으로는 지식인 계층에 속하지만, 경제적으로 성적으로 그리 고 대인관계에서는 유아적인 나약함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성격은 영화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다.
보경 : 모성적이다. 그녀는 효섭과의 사랑을 통해 마치 죽은 아이와 정서적으로 부재인 남편에의 보상을 받으려는 듯 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벗어날 용기가 없다. 남편과 효섭의 외도에 죽음을 꿈꾸는 것에서, 영화의 앞부분 입은 청바지에서 그녀는 일탈을 꿈꾸지만 그녀의 모성은 반항심에 앞선다.
보경은 경제적으로 중산층 여성을 대변하고 있으며, 수동적인 여성상이라 는 것을 일정정도 대변하기도 한다. 어쩌면 평범한 주부의 모습 그대로를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재 : 22세에 출판사에서 효섭은 만났고, 24세에 자취를 하며 혼자서 생활을 해 나가는 것, 그리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효섭과의 기념일 등을 챙 기는 것에서 그녀는 생활력이 강할뿐더러 자신이 사랑하는 인물에 대해서 는 헌신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헌신적인 그녀의 태도는 효섭에 대한 모 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순수한 사랑 혹은 신분상승이라는 자기만족적인 성 향이 더 강하다 할 수 있다. 이것을 반증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지방 출신의 고졸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22세에 출판사를 그만둘 때 효섭을 만 났다면, 최소한 1~2년은 그 출판사에서 일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그녀가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20세 정도였을 그녀는 대학가 앞에서 하숙을 하거나 90년대 중반에 유행 했던 스파르타식 입시 학원에서 살았을 것이다.
즉 민재는 경제적, 지적(지적 열세=하층민 이라는 등식의 성립이 가능하 다면, 어쨌거나 여기는 ‘꿈★은 이루어’지는 한국이고 인격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본의 사회니까)으로는 하층민이고 성격적으로는 의지적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독자성 혹은 창조력이 결핍되어 있기에 누군가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하려하는 성향이 강하다.
동우 : 그는 규격화된 인물이다. 그의 단정한 셀러리맨의 외모와 머리스타일, 그 리고 인상에 이르기까지 그는 불온함이란 애초에 모르는 인물같이 그려진 다. 그리해 그는 결벽증적 증세를 보이고 있다. 시외버스 휴게소와 여관, 집에서의 보경과의 잠자리 신 에서 그의 이러한 결벽증은 명백히 드러난 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고 사회에 순응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즉 그 에게 있어 평범한 삶은 어떤 의미로는 완벽한 삶일 수도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 인물은 초창기 영화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도시 서민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으며, 또한 성적 일탈을 꿈꾸고 그것에 쉽사리 만족하며 안주하려는 것에서 나약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 인물들에서 현대영화적인 인물의 특성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외감에서 찾을 수 있다.
2. 서사
이 영화의 서사구조와 그것을 기술하는 방식 또한 고전영화와 비교해 볼 때 그 차이점이 매우 큼을 우리는 쉽사리 알 수 있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다른 코드로 이해를 하고 말을 한다는 것은 고전 영화 작가들에게는 영화를 잘 못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모호함’을 오히려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영화적 시간과 공간의 파괴는 이미 현대 영화를 고전영화와 구분 짓는 하나의 잣대가 되지 않았는가.
이 영화에서는 위 네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소외와 상실감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홍상수는 그들의 심리에 대한 관객의 몰입보다는 그들 각 인물에 대한 불편함과 이질감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소외와 상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특히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나 푸도프킨의 ‘벽돌 이론’에서 주로 비판되는 관객의 감성을 조절한다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행해진 60년대 프랑스의 새로운 물결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에서의 모호함은 충분히 현대영화의 흐름을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색체
이 영화에서 색체의 사용은 매우 상징적이다.
(1) 의상
우선 각 인물의 의상에서 그러한 것이 보여지는데, 이것은 상징이라기보다는 성격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효섭의 오래된 정장바지와 때국물이 묻을 법한 황토색 점퍼는 마치 나사 하나가 빠진 듯 단추 하나가 열린 효섭의 모습을 그대로 외연화 시키고 있다. 민재의 경우도 성색 계통의 의상을 통해서 깔끔함과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보경은 청바지로 상징되는 자유에의 갈망과 베이지색 또는 흰색 계통의 상의를 통해 가정이라는 소속감에의 열망이라는 두 가지 이율배반적 심리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우의 경우는 좀더 직접적이다. 회색계통의 단정한 정장으로 인해 그는 전형적인 화이트컬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상은 상당부분 성격화에 기여하고 있고 그 인물의 성격과 색체는 유사하지만, 그 유사성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는 인물이 전형화 되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2) 화면 배색
여기에 인용된 신의 번호는 시나리오 상의 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화면 배색에 대한 것은 영화에서의 것을 말하는 것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신 번호와 실제 제작일지에서의 신 번호는 오차를 나타낼 수 있다.
① 동우의 여관방 (한 프레임 속에 상반된 두 가지 색조. 푸른색과 자연색)
S#75 동우가 앉은 침대는 푸른색으로 레지가 있는 방바닥과 벽은 자연색으로 처리되어 있다. 동우의 동떨어진 곳에서의 이질감을 푸른색으로 레지의 일상적 상황의 재현은 자연색으로 표출되고 있다.
② 동우의 여관방 (붉은 색조만 사용)
S#76에서 동우와 레지의 정사 중 스탠드를 꺼버리게 되면, 화면은 온통 붉은 색조로 처리되어 보여진다. 붉은 색이 가지는 상징성이 어렴풋하게나마 확인되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③ 영화관 앞 거리 (한 프레임 속에 상반된 색의 극명한 분할. 푸른색과 자연색)
S#91. 카메라의 위치는 매표소 들어가는 입구 문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고, 매표창구 안과 영화관 앞 거리를 거의 완벽하게 2등분 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영화관 매표창구가 그들에게 인간적인 유대감 보다는 괴리감을 더 깊이 심어주고 있음을 상징한다. 본 영화에서는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면 이러한 색의 극명한 분할은 좀 더 쉽게 이해된다.
④ 민재. 원고 교정을 보는 매표창구 안 (노란 색조만 사용)
S#101에서 매표창구의 노란색 아크릴판에 투영되는 빛으로 인하여, 그 화면을 잡은 손의 클로즈업과 민재의 바스트 샷은 온통 노란색으로 처리된 효과를 가져다준다. 이 부분에서 노란색은 희망인지 희망을 가장한 절망인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영화에서 보여진 분위기로 유추하면 희망을 가장한 절망을 상징한다고 조심스레 언급할 수 있다.
⑤ 민재. 효섭의 옥탑 앞 (한 프레임에서의 이질적 색조의 사용과 푸른색의 확장)
S#111에서 문틈으로 열린 효섭의 집안은 자연색이다. 그러나 민재가 있는 밖은 검푸른 색조이다. 조금 뒤 보경이 나가고 효섭이 따라 나간다. 민재는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사태를 파악하고 문을 닫으면서 화면의 색조는 온통 푸른색조로 변하게 된다. 드디어 푸른색이 그들의 갈등을 대변하기 시작한다. 아주 서서히 침착하게.
⑥ 정육점 앞 (붉은 색과 푸른색의 상징과 대비)
S#112. 정육점 진열대에 놓인 고기의 붉은 조명과 어두운 밤거리를 푸르게 처리하여 이 신에서는 오직 두 가지 색조만이 자리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이 신에서의 붉은 색은 위 둘의 인물에게 공통적이면서도 서로 상반된 의미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효섭은 민재를 이용하고자(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과의 표출과, 진열되어있는 붉은 고기처럼 싱싱한 듯 하나 죽어버릴 것 같은 보경과의 성적인 욕망에의 위기감의 표현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민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닌 상품으로써만이 진열되어 있는 붉은 고기들처럼 자신의 순수한 사랑 또는 지적 허영심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 둘에게 있어 붉은 색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것에는 같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전혀 상반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신에서 보여지는 많은 프레임들은 붉은 색과 대비되는 검푸른 색을 또한 함께 잡고 있다. 이는 이들의 욕망이 결국은 민재의 꿈은 애초에 떡잎부터 노랗게 탈색된 거짓 희망임을, 효섭에게 있어서는 유아적 삶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이다.
⑦ 여관 방 (검푸른 색의 의미 명확화)
S#116. 민재와 민수의 정사 신 또한 검푸른 색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는 이 검푸른 색의 의미를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시나리오에서는 전혀 다르게 기술되고 있다. 그리해 영화에서는 민수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축소되고 있기도 하다.)
민수 : 민재, 사랑해. (더듬거리며, 어색하게)
민재 : 난 자살하는 거야. (무표정하게, 작은 목소리로 체념한 듯)
⑧ 계연 딸방 (노골적인 푸른색조의 사용)
S#149에서 보경이 자신의 장례식 꿈을 꾸다가 깨어나는 장면 또한 위 S#116과 마찬가지로 노골적인 죽음의 색으로 푸른색을 사용하고 있다.
⑨ 효섭의 옥탑 방 실내 (4가지 색, 원색의 끔찍함)
S#158. 창가로 스며든 빛에 의해서 효섭의 방안이 보인다. 안에는 효섭, 민재, 민수가 있고 한명씩 돌아가며 바스트 샷을 찍은 후 방 전체를 보여준다.
민재, 검푸른 색조를 바탕으로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다. (푸른색과 붉은색)
효섭, 노란 방바닥에 피를 흘리고 죽어있다. (노란색과 붉은색)
민수, 그늘져서 검은 부분과 푸른 부분에 걸쳐 있다. 두 손과 얼굴에 묻은 피. (검은색, 푸른색 그리고 붉은색)
영화에서 주되게 사용된 모든 색이 이 신에 다 나온다. 마치 보경의 장례식에서 인물들이 다 모였듯이, 마치 그들 인물들이 각각 상대와 한번씩만 정사를 했듯이.
이 영화에서 논란꺼리가 된 장면이 있다면 단연코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신만큼은 그러한 논란 보다는 홍상수의 주제 의식을 극명하게 표출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주의할 만 하다. 특히 효섭과 민재의 경우 살았을 때 그들이 주로 노출된 색조와 죽은 후에 노출된 색조가 뒤바뀌어 있다. 민재의 노란색 암울한 희망은 죽은 효섭이었고, 효섭의 그런 상태는 민재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도 저도 되지 못한 민수는 모든 색을 다 머금은 검은색에 걸쳐있다.
⑩ 아파트 주차장 (암시적 기능의 푸른색)
S#164. 영화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시나리오 상에서는 동우도 죽는다. 우리는 동우의 죽음을 목격하지는 못하지만, 동우가 교통사고로 죽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암시를 이 신에서 볼 수 있다.
⑪ 보경의 아파트 배란다 (희미한 푸른색―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S#168.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법한 마지막 신이다. 영화에서 보경이 배란다 창문을 여는 순간 창문의 중첩으로 인하여 푸르스름한 창문이 확연히 푸른 색조를 띄게 된다. 그러나 더 이상 문제는 삶과 죽음이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경의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지나가면서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는 것 뿐.
위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이 영화에서의 색조는 명백한 상징의식을 가지고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영화가 대부분 흑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비교의 범주가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고전적 문법을 따르는 현대 영화에서도 이러한 색조의 상징적 사용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것만을 가지고 영화의 현대성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하겠다.
4. 앵글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특이한 앵글을 보여준다. 동우가 고속버스 휴게실의 화장실에 들어가는 장면의 경우 동우의 머리 바로 위에서 찍은 것이 특히나 눈에 이질적인 감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들 역시 인물의 소외를 말함에 있어 어느 정도 공통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즉 인물이 소외를 느끼는 장면에서는 주로 인물의 뒷모습을, 4~5미터 떨어진 듯한 시선의 뒷모습으로 바스트 샷이 많다. 또한 대부분 고정 촬영을 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극중의 인물에 대한 동일화는 쉽사리 잃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은 언뜻언뜻 숨어서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이는 영화의 주제와도 어느 정도 일치하여 주제에 대한 전달을 좀더 용이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장면의 예를 민재가 녹음실에서 신음소리를 잘 못내는 것에서나, 동우가 2번째에 탄 고속버스에서 뒷모습 그리고 효섭이 고기집에서 동문들을 만날 때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어느 정도는 비일상적인 카메라의 앵글은 현대영화가 가지는 형식적 특성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고전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초반부 효섭이 고기집에서의 장면이나 중반 동우가 여관에서 옆 방 커플의 실갱이 모습을 보는 것에서는 원근법을 파괴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효섭과 사람들의 관계이다. 그러나 눈에 뻔히 보이는 그러한 이질감의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그 신에서의 잘 차려진 ‘음식들’ 이다. 잘 차려졌다고 하나 풍요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규격화된 음식들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빛 좋은 개살구처럼 값싼 그들의 인간관계의 한 단면이다.
5. 음향
이 영화의 현대성이라는 측면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결코 음향이 가지는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초기의 무성영화들에서의 끊없는 배경음악의 삽입은 말 할 것도 없고 40년대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서 조차도 우리는 상당히 많은 외재적 음향을 사용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주제를 강조하는 부분에서만 강조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 같은 음의 반복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심리적 강도가 강하게 다가온다. 또한 영화의 시작 자막이 올라가는 부분에서 잠시 나오는 ‘청기 올려. 백기 올려. 청기 올리지 말고 백기 올려. ….’라는 민재의 대사는 이 사회의 모든 것은 규정되어 있고, 그 것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단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것이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까페에서 민재가 효섭의 원고를 읽고 있는 동안, 효섭이 화분에 있는 벌레를 가지고 장난치는 장면에서 테마뮤직이 반복되는 것에서 발견된다. 이는 마치 민재가 효섭의 통재 하에 있음을 상징하는 듯 하면서도, 효섭 역시 그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그 벌레와도 같은 농락을 당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테마뮤직의 반복은 프로토프의 몽타주 이론 중에서 영상의 반복에 의한 몽타주의 효과가 현대에 어떻게 차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6. 무관한 영상의 삽입
작년에 나는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이 영화를 떠올렸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는 <자전거 도둑>과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냉소적이기까지 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의 공통점은 사회의 회색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과, 영화의 서사와는 무관한 영상을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연상이 되었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그러한 장면이 나오는데, 첫 번째는 고기집에서 비직업배우를 사용했음이 너무나도 극명하여 오히려 과장된 연기로 보이기까지 하는 숯불을 운반하는 사람과 효섭과의 대화 신이다. 그 신은 36초 간이나 산 쇼트로 찍혔는데, 그 부분을 잘라내도 전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리고 동우가 출장지에서 기다리다 보경에게 전화하기 전에 약 3초간 중국집 주방의 신이 삽입되어 있다. 이러한 서사구조와는 무관한 장면의 삽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작가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낯선’ 장면의 삽입의 통해 관객이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물들의 모호함의 구축에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3류 소설가인 효섭과 어느 정도 팔리는 작가인 이문열의 이야기, 결벽증이 있는 동우와 지저분해 보이는 중국집 주방의 대위는 그들이 처하게 될 상황의 악화를 암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닐까?
7. 영화를 읽고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최소한 나는 위 인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빨리 깨닫게 될 착각이다. 본질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자유로운 인간관계가 어디 있는가?
나는 필요에 의해서 ‘청기 올리지 말고 백기 올려. ….’를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살아가야만 동시에 천천히 죽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다만 루 살로메의 푸른 하늘의 한 구석을 보고 싶은 따름이다. 오늘 날씨는 맑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네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 단테
※ 참고 자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1996년. 112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시나리오> 홍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