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 수려한 시조 서한묘(徐閈墓)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는 옛 성현의 말이 있듯이 대구서씨(大丘徐氏)들은 조선조에서 많은 영재(英材)를 배출하여 5대 문벌(五大門閥)에 들어가는 명문(名門)이 되었는데 이들 서씨 중에 선비형 용모에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가 많다는 평판을 받는다.
그 까닭은 서씨 문중의 대표적인 길지(吉地)로 알려진 충남 예산군 신양면 탄방리에 있는 대구서씨 시 조인 서한(徐閈) 묘와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에 있는 13세 서해(徐嶰)묘의 산세(山勢)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두 묘를 탐방해보면 한결같이 아주 좋은 길지(吉地)에 자리해 있는데 산세가 유연하고 단아해서 위 전설들이 헛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먼저 서한의 묘부터 살펴보겠다.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에서 출맥(出脈)하여 금강이북의 충청남·북도 땅을 아름답게 수놓은 산가지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이다. 이 산맥은 출렁이는 파도와 같이 느릿느릿하게 끊어졌다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며 흘러갔기 때문에 많은 기(氣)를 함축시켜 큰 길지(吉地)가 많이 맺어졌다고 평가한다. 이 산가지중 하나는 공주(公州)와 예산(禮山)의 접경에 있는 봉수산(鳳首山 : 534m)을 지나 남은들 고개에서 평지과협(平地過峽)을 한 뒤 준수(峻秀)한 도고산(道高山), 안락산(安樂山), 토성산(土城山)을 세워 동·서로 길게 횡장(橫障)한 뒤 남쪽으로 뻗어 내렸다. 이 산가지는 삽티고개에서 다시 과협(過峽)하고 시산리(詩山里) 뒷산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내렸는데 봉우리들이 생기가 넘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이 아름답다. 이 용맥 끝에는 고결(古訣)에 충청도 제1호 명당으로 전래돼온 계배떼기(蟹腹)형 길지가 맺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장군을 수행했다가 귀화한 풍수지리학자 두사충(杜師忠)이 남긴 이 명당에 대한 결록을 소개하면 “甲開丁一口 千里行來休, 山帶道高氣 穴藏蟹腹湫, 虎呑佳字縮 龍吐夜氣流, 萬馬明堂裡 羅星對案留”로 기록돼있다. 필자의 견해로 충청도에는 이보다 월등히 큰 명당이 많다고 보지만 이 자리도 일개황조(一個皇朝)를 탄생시킬 대원국길지(大垣局吉地)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예부터 이 명당을 찾아 쓰고자 많은 인사들이 이 일대를 샅샅이 누볐으나 지금껏 보전되어 있으니 아직 용운(用運)이 도래치 아니한 연고 때문일 것이다. 이 토성산 남쪽 용맥 중 다른 한가지가 시산리 뒷산에서 서주남행(西走南行)한 뒤 예당저수지 둑 동편 용맥이 마무리되는 곳에 위 서한묘가 조성되어있는데 혈장(穴場)은 밝고 안온하며 토색(土色)도 황홀하여 누구나 좋은 길지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명당에 묘를 쓰게 된 일화가 전해져 오는데 서한의 장례 길에 갑자기 선인(仙人)이 나타나 상여를 이곳으로 인도하고 “이 땅을 파면 둥근 흙덩이가 무수히 나올 터인데 묘를 쓴 뒤 이 흙덩이 수만큼의 많은 인재가 배출될 것이다”라고 예언한 뒤 표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묘는 서서남쪽으로 입수(艮寅入首)하였으며 남남서향(癸坐丁向)을 했다. 내청룡(內靑龍)과 내백호(內白虎)는 혈장과 균형을 이루면서 야무지게 이중(二重)으로 회포해 바람을 가두어 이루어진 명당인 완벽한 장풍국(藏風局)을 이루었고 안산(案山)은 세모꼴 관모(冠帽)와 같아 다정하다. 이 묘의 내용·호(內龍·虎)너머에는 국사봉, 법화산, 비봉산, 천마봉과 봉수산(大興소재) 등 명산들이 가까운 산은 낮게 먼 산은 높게 층을 이루면서 첩첩이 둘러싸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모습이다. 특히 내백호 끝가지에는 검은 바위로 된 두개의 인사(印砂)가 서있어 이 땅이 귀한 곳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묘지의 내당수(內堂水)는 남남서쪽에서 큰 냇물과 합해져 서쪽을 휘돌아 흘러 예당저수지로 유입되니 귀한 모양새다. 선인이 예언한대로 이 묘를 쓴 뒤 서한의 후손 중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조 성종(成宗)때의 대학자이며 문인인 서거정(徐居正 : 四佳亭)과 선조 때의 학덕 높은 명신이었던 서성(徐 渻 : 藥峰)등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용·봉·구(龍·鳳·龜) 산세 겸비한 대길지 서해묘
대구서씨 13세인 서해(徐嶰 : 涵濟)는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 특히 의리가 출중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며 그와 그 부인의 묘가 포천 해룡산(海龍山) 남쪽에 자리해 있는데 특대명당(特大明堂)에 준하는 큰 길지로 예부터 풍수지리학계에 널리 알려진 명묘(明墓)이다. 또한 위에서 밝힌 서성(徐渻)은 서해의 외아들로 대구 서씨 중시조(中始祖)예우를 받는 분이며 그분 역시 위 서해묘역 안의 아담한 길지에 안장돼 있다. 서해의 결혼에 얽힌, 특히 그의 부인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져오는데 간략히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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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서해와 부인 고성 이씨묘(오른쪽이 서해묘임) | |
서해의 부인은 고성이씨(固城李氏)로 비록 장님이긴 하였지만 우리나라 삼대현모(三大賢母)중 한분으로 숭앙받는 사람이다. 이씨부인은 우리나라 전통음식으로 애용되는 약주, 약과, 약식을 처음으로 고안해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세태에 청량제 같은 얘기가 될 것 같아 위 서해와 이씨부인의 결혼에 얽힌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다. 청고한 성품에 큰 덕을 갖춘 청년선비 서해가 매파의 중매로 군수의 딸인 이씨부인에게 장가들기 위해 그의 부친(參議公 徐固)과 함께 신부 댁으로 갔다. 예식을 올리기 전 사랑방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던 중 이 집 하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신부(新婦)가 앞을 못 보는 장님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대노한 신랑 부친은 펄쩍 뛰면서 아들에게 파혼하고 돌아가기를 명했다. 그러나 심사숙고한 뒤 신랑은 아버지에게 돌아감이 불가하다고 말씀드렸다. “만약 파혼하고 돌아가면 사대부(士大夫)가에서 자란 신부가 참괴스럽고 한스러워 필경 자결할 터인데 남아 대장부가 이만한 일로 여자의 한을 사고 살아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침내 아버지도 동의, 결혼하고 보니 이 이씨부인은 기품 있고 어질며 생활력도 강할 뿐 아니라 앞일까지 훤히 내다보는 도통한 분이었다. 전해오는 얘기가 많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이씨부인은 집 뒤에 해마다 왕에게 진상하는 은행을 수확하는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가 서있는 자리가 좋은 명당자리임을 신통력으로 알고 있었다. 사사로이 벨 수 없는 나무인 까닭에 이따금 나무주변에 남몰래 금(金)싸라기를 뿌려서 사람들이 파헤치게 하는 꾀를 써서 종내 나무를 쓰러트리고 그 자리에 큰집을 새로이 지었다. 이 터는 지금의 서울역 서쪽 약현(藥峴)땅에 있는 약현성당 터로 상당히 큰 양기명당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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