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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시 주부 명예기자 원문보기 글쓴이: 김옥
2008년 광주. 전남 방문의 해
2008 명량대첩축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 호남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온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승리의 신화창조. 그 장엄 웅대한 축제의 막이 오르다.
기억하세요! 10월 11~14일을!!!
민초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얼쑤~~
주민과 참가자 모두가 주인공일세. 어우렁더우렁
모두 모여 질펀나게 놀아보세. ‘에헤 좋다’
전남도는 해군의 협조를 받고, 해남· 진도군의 어민 소유 130여척의 선박과 인원 3000명을 동원하여 주경중
영화감독(영화 동승)의 연출로 명량해전 재현의 완성도를 높인다.
관광객은 실전과 같은 명량대첩 재현을 보게 된다.
관람자들의 탄성은 명량의 노도보다 높아질 것이다.
영화보다 더욱 스릴과 박진감 넘치는 해상전투 재현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왜선인 안택선의 전투사항이 궁금하지 않나요?
행사일정 홈페이지 참조
축제 프로그램과 기획 연출을 진두지휘하는 전국연극인협회 최솔 사무총장
관람만 하는 축제가 아닙니다. 관중들도 함께 참여하여 어우러지는 축제입니다.
영화와 연극을 접목하는 축제로 민초들의 중심으로 열리는 기획으로 연출됩니다.
호남인의 기상과 의기와 충절을 핵심을 역사적 조명으로 그려내고 화합과 평화의 상징성을 시도한 게 이번 축제의 포인트입니다.
그의 말에는 철저한 준비성과 강한 의욕이 넘친다. 성공적인 대축제가 될것임을 암시해주고있다.
장군 복장의 박춘맹씨-남도국악단 단원
명량대첩축제 이모저모
●삼군수군통제사 출정식
1000대의 자전거 행렬과 칼의 노래 김훈작가와 함께한 1000여명의 기차 투어, 1000여명의 버스 투어 등 역시 기행 프로젝트로 펼쳐진다.
●사상 최대 규모 백의종군 랠리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모함에 의해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잃고 3월 4일 투옥되었다가 결백이 증명되자 4월 1일에 사면된다. 이순신이 사면이후 서울에서 우수영으로 오는 과정을 역사기행 프로젝트 형식으로 꾸며진다.
●명량해전 전투씬
울돌목 바다에서 13 대 133의 전함이 등장하는 전투신도 해남진도 지역민들이 출연한다. 3000명의 출연진들은 명량대첩의 신화를 재현하기 위해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왜선 안택선에 승선해 전투사항을 리얼하게 선보인다.
안택선(安宅船-아타케부네)이란?
안택선은 일본 함대의 주력이었다. 얼핏 보기엔 갑판이 네모난 게 서로 비슷하다.
안택선은 배 밑 부분의 앞이 뾰족해 속도가 판옥선보다 빠르다.
●세계 굿 페스티벌
굿 페스티벌은 진도 씻김굿, 중국 강족의 석비굿, 브리아트 샤만의 굿, 일본 가구라 등이 초청돼 생소한 외국의 굿을 선보인다. 또 서울 새남굿,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남해안 별신굿, 황해도 만구대탁굿이 공연된다.
●10리길 강강술래, 2km 만장행렬
3만 명이 어우러지는 강강술래와 3동의 상여와 500개가 넘는 만장행렬도 또 다른 볼거리다.
기념식과 각종 공연을 위해 조성되는 수변무대도 2000석의 스탠드와 함께 우수영관광지내 갯바위 주변에 들어선다. 연습 내용 공연 실황 축제전 10월 7일 KBS1 오후 2-3시 방송 예정이다.
●민속저자거리 조성
테마파크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우수영 민속촌 저자거리는 주막과 물장수, 전통옹기전, 곡물전, 대장간 등이 들어서며 당시대를 보명하는 거리를 재현하게 된다.
문의-해남 문화관광과 061-530-5229
찾아가는 길
(숭용차편)
-광주→해남읍→진도방면→우수영(진도, 녹진) (2시간 소요)
-목포→영산강 하구둑(산이 방면)→산이 구성 삼거리(화원방면)→화원→우수영(진도, 녹진)
(1시간소요)
-순천→강진→해남읍→진도방면→우수영(진도, 녹진) (3시간 소요)
(대중교통 이용)
-광주(목포)→해남읍→우수영(또는 진도, 녹진)
(해남읍~우수영간 6:30부터 1시간 간격 운행)
-목포→우수영→진도 녹진(6:10부터 50분 간격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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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셨나요? 저를 따라오시와요
둘러볼 코스-첫째 날
해남-우수영관광지-축제장 도착-참여-중식-충무사-문내면 우수영성지-망해루-동외리마을-옛우물터-진도대교-녹진 전망대-강강술래터 -종일 축제참여-석식-숙박-자유시간 |
둘러볼 코스-둘째 날
기상-조식-만의총(몰무덤)-용정사-충절사-삼충사-산이면 노송마을 노송사-황조별묘 -계곡면 용지사-귀가 |
임진왜란의 서막과 성웅 이순신의 신화 탄생
땅땅땅-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총구에 불이 붙다.
풍신수길의 부하인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1558~1600)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약품 무역을 하는 거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통일전쟁 때 군수물자의 보급업무를 잘 수행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어 우도성의 성주가 되었다.
무역관계로 인하여 사위와 같이 조선을 수차례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풍신수길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이시다 미쓰나리와 조선말에 능통한 사위 소오 요시도시와 협력하여 전쟁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가 되어 결국 전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1592년 4월 3일 15만 8천 8백여 명의 전체 병력 중 제1군의 장수로 18,700명을 이끌고 나고야를 출발하여 참전하게 되어 드디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전장에 내몰린 비운의 장수의 운명의 서막이 시작되면서 조총에 불이 붙는다. 땅 땅
명량 대첩-민족존망의 기로에서 치켜세운 환희의 깃발
“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명량 대첩은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 왜군이 재차 칩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킴으로써 전무후무한 대승의 금자탑을 쌓는 명량대첩의 영광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순신은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러 칠천량에서 패해 온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을 정비하고 또 1척을 수리하여 총 13척으로 왜병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
“장군님, 9월 14일 적의 함대가 해남 어란 포에 들어온다는 첩보입니다.”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9월 15일 13척의 전함을 이끌고 진지를 진도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 명량해협으로 옮겼다.
동양최대의 울들목 유속을 이용한 작전을 짰으며 대사리 뒤에 있는 독굴산(노적봉)에 짚이엉을 엮어서 노적더미로 만들었고 망금산 동편 산자락에 터를 다듬어 군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동원 강강술래를 시키고 녹진 뒤의 백토지 흙을 바다에 흘려 쌀뜨물인양 위장 전술을 펼쳐 적을 속였다.
드디어 적 함대는 9월 15일 야간을 이용, 벽파 앞바다에 출현한 것은 9월 16일 오전 들물 때였다.
이 충무공은 민간인 배를 위장한 수척의 병선으로 벽파 앞바다에서 대항하다가 도망하는 척하며 우수영으로 유인했다.
왜적은 지형이 어떠한지 전혀 모르고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전함을 보고 크게 비웃고 깔보며 달려들었다.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학이진 전법을 펼치며 화포를 쏘고 비 오듯 한 활을 쏘아 날리니 왜군은 맥도 못 추리고 우왕좌왕 하다가 활에 맞고 화포에 배가 깨져 물에 빠져 죽은 왜군 수는 그 얼마나 많았던가. 이때 이오죠오의 성주였던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는 화포를 맞고 배가 깨지자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그의 친동생 도지우끼도 함께 전사했다.
심한 부상을 입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자신이 이끄는 왜선 31척이 모두 침몰되어 거센 물살 속에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통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불과 13척의 전함으로 불과 2시간 만에 적함 31척을 수장시켰으며 92척을 사용불가 상태로 대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약 2만 명을 일시에 몰살시킨 신화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군 피해는 고작 70명, 왜군 사상자는 최소 8천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수가 썰물로 바뀌는 순간 왜선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리 바다에 쇠줄을 걸었던 것을 끌어올려 퇴로를 차단시켰다.
울둘목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부르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른다.
명량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도 왜군을 막아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 "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영세귀감이 된 일사보국의 정신은 후세토록 길이 빛날 것이다.
우수영 관광지(명량대첩지)
진도대교가 보이고 다리 아래에는 늘 거센 물살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울둘목(해남 화원 반도와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명량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기를 통하여 해전 사상 유례없는 가장 위대한 전투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량대첩기념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격파해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수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높이 17m, 넓이 19.12m의 화강암으로 된 명량대첩 탑과 어록비가 있다.
충무공 을 중심으로 관군과 의병들의 전투모습이 조각된 군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온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는 비문은 호남 지역의 중요성을 잘 일깨워 주고 있다.
충무공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의 실제모형과 판옥선의 모형, 명랑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명량대첩비의 탑본과 무형문화재 8호인 강강술래의 배경화가 전시되어 있고 그 때의 활약상을 담은 슬라이드도 상영한다.
우수영관광지 관리사무소 (☏ 061-532-4088)
우수영
우수영은 백제 때 황술현의 한 지역이었으며 고려 때에는 영암에 속한 황원군의 땅이었다.
1448년(세종30) 해남 현이 된 곳이다. 이곳에 전라수군의 본영이 설치된 것은 1440년(세종22)의 일이었다. 1432년(세종14) 무안 대굴포에 있던 처치사영(處置使營)이 현재의 목포로 옮겨지고 목포에 있던 병선들이 지금의 우수영인 황원의 주량(周梁)으로 옮겨지면서 이곳에 목포만호를 두게 되었다. 목포로 옮긴 대굴포수영은 다음해부터 점차 그 본영을 황원으로 이동시키며 1439년(세종21)에는 목포에 만호진을 개설하고 그 다음해에 본영을 완전히 이곳 주량(우수영)으로 이동시켰다.
주량의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된 것은 성종10년(1479) 부터의 일로 전라도 서남해안이 너무 광범위하여 여수에 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우수영이 된 것이다.
우수영 성터
우수영 마을안 일대는 우수영 성터마을이다.
우수영 성지는 문내면 동외리 해변의 석축과 망해 산(望海山)의 토축이 혼합된 성이었다. 이곳의 성벽들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우수영의 지형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해안에 접한 남쪽 성벽은 크고 작은 돌들이 틈틈이 쌓아올려진 석축성(石築城)이고 북쪽은 흙을 이겨 빈틈없이 쌓아올린 토축성(土築城)이다. 또한 동벽(東壁)과 서벽(西壁)의 경우 남쪽 벽에 연결된 부분은 석축으로 북쪽 벽에 연결된 부분은 흙으로 쌓아 올려 튼튼하게 축조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의하면 우수영 성은 4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돌로 쌓은 남벽은 문내면 서외리 문재훈 집에 남아 있는 길이 20m, 높이 1.5m와 선두리 박무림씨 집에 길이 20m, 높이 3m로 남아 있다. 동쪽 벽과 서쪽 벽의 석축 연결 부분은 거의 도괴 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서쪽 벽의 토축은 길이 50m, 하폭 5m, 안쪽높이가 3m, 하폭 5m, 상폭 1.5m이다. 현재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북벽(北壁) 중간 부분에 북문터 만 남아 있다.
북문터 성내의 우물과 비석
비에는 건항(乾降) 17년 임신(壬申) 9월, 가경(嘉慶) 9년 갑자(甲子)년에 세운 우물이다.
우물 건립비와 중수비 그리고 여섯 개의 돌기둥이 세워진 육각형의 우물이 남아있다.
돌 지주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통제를 했단 것으로 보인다.
비석군 앞에는 제를 지냈던 돌 제단이 남아있다.
제단 아래에는 두 마리의 석사자 조각이 있는데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충무사와 명량 대첩비(보물 제503호)
우수영 학동리에서 가장 먼저 이 충무공의 발자취를 만나게 된다. 충무사와 명량대첩 비이다.
충무사가 있는 바로 이곳이 바로 옛 우수영 터로 우수영 성지의 동문 밖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90여년이 지난 1688년(숙종14년) 숙종은 명량대첩의 의의를 기리고 그 뜻을 후손들에게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명량대첩 비를 건립했다.
이 비석은 나라에 큰일이 생기려고 하면 물방울이 맺힌다고 하는데 6 25전쟁 때에도 비석에서 땀이 흘러내렸으며 1980년 5·18 민중항쟁 때 이 비에서는 두 말이 넘은 량의 땀이 나왔다고 한다. 이는 이 충무공의 불멸의 호국 의지를 이 비석의 징조를 통해서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충무사 계단 중간 지점에 전라좌수영내 주둔했던 병장들의 선정과 공적을 담은 영세불망비 30여기가 자리하고 있다.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마멸되었지만 가진런히 세워진 이 자리에 숙연한 마음으로 일일이 비를 쓰다듬는다.
임란과 명랑해전의 빛난 별들이시여
용정사(龍井祠, 五忠祠<오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임란의 영웅들을 모신 용정 사를 방문하기 위해 해남읍 용정리로 간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과 그를 도와 용맹을 떨쳤던 유형 장군, 이억기 장군, 이유길 장군, 이계년 장군 등 다섯 충신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712년(숙종 38)에 건립되었다.
●유형 장군
1597년 해남 현감으로 부임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 대첩의 공을 세운 인물로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이억기 장군
1592년 전라우수군절제사로 부임하고 임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옥포, 한산도 등의 해전에서 적선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 칠전량 해전에서 원균 장군과 힘을 합쳐 왜군을 격퇴시키다가 순절했다.
●이유길 장군
17세 어린 나이로 충무공의 막하에 들어가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에 활약하였다.
●이계년 장군
임란 때 의병들을 모아 진주성으로 전격 입성하고 김천익, 최경희 등과 역전 하다가 1953년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찾아가는 길
해남읍사무소-완도방향-호천리-굴다리-(우)―송용마을회관-용정리 경로당-용정사
충절사-임란의 빛난 별 충장공 정운 장군.
충장공 정운 장군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옥천면 대산리에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는 충장공 정운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정운 장군(1543~1592).
공조판서 정응정의 장자로 해남군 옥천면 대산 리에서 태어났다. 불과 7세 어린 나이 때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검에 '정충보국'이라고 새겨 스스로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할 만큼 우국충절 의 인물이었다. 선조 3년(1572년)에 무과 급제하여 만주 국경 수비대 장교로 임명받아 그 해 10월 두만강을 건너 침략한 외적 20여명과 맞대결하여 전멸시킨 맹장이었다. 49세 되던 해에 유성용의 천거로 녹도만호(현 장흥군)에 임명되자 전쟁이 닥칠 것을 미리 예감하고 군사와 병선을 철저히 대비하기도 하였다. 1952년 9월 1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다대포) 해전에서 왜적선 500여 척과 싸워 100여 척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 함대의 휘하 참모인 우부장으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길에 왜군의 철환에 맞아 순절하고 말았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일기를 보면 당시 정운 장군의 의기를 넉넉히 알 수 있으며 그의 용맹함과 장렬함을 선명히 조명해 본다.
삼충사(三忠祠).
충절사 입구에서 왼쪽 마을 바라보면 통천 최 씨 삼충신을 모신 사우가 보인다.
이곳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무장으로 왜구 토벌에 공이 컸던 양장공 최운해(1347~1404), 호연정 최윤덕(1376~1445)과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옥포 최산정의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향유나 후손․제자들에 의해 건립된 문중 사우이다.
만의총(萬義塚-몰 무덤)―의병들의 외침이 들리는가?
나라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항거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잠들어 있는 커다란 봉분이 길가에 있다. 정유재란 시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3만 왜군을 맞아 성산대교들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만인의 영웅들의 넋이 고이 잠들어 있는 합장묘이다.
명량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도 왜군을 막아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영세귀감이 된 일사보국의 정신은 후세토록 길이 빛날 것이다.
당시 의병을 이끌었던 해남 윤 씨 가문의 지도층 인사들의 활약으로 가문을 빛낸 지대한 공로도 매우 크다. 허지만 죽을 줄 뻔히 알고도 나라를 위해 살신보국 하고자 분연히 창궐한 이름 석 자도 기억하지 못한 수많은 백성들의 뼈가 으스러져 묻힌 그들의 넋들이 더욱 크게 빛난다. 당시 6기가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묘소의 복원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명량대첩의 역사현장 답사 시에는 반드시 방문해야할 곳이다.
산이면 노송마을 노송사
해남군 산이면 노송마을에 영조 4년(1728년)에 창건한 노송사(老松祠)가 있다.
이 사우에 배향된 김안방(1553~1638) 선생은 임란이 일어나자 장남 선지를 데리고 고경명과 함께 금산에서 크게 싸웠다. 정유재란 때 명랑해전에서 김성원 백진남, 동생 김안우 등과 더불어 피난선 수 십척을 인솔하고 군량을 수송하여 이순신을 도왔다.
명나라 진린(陳璘) 제독의 후예촌과 황조별묘(皇朝別廟)
산이면 덕송리에는 광동진씨 도독공파 진린 제독의 후예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황조 마을이 있다.
황조별묘는 정유재란시 명나라에서 조선구원군 도독으로 왔던 진린을 향사하는 곳dlek.
1679년(숙종 5년) 진린을 모시는 단을 만들어 제향 하다가 1871년(고종 8년)에 별묘를 건립하였다.
제례일은 매년 한식날이다.
계곡면 용지마을 용지사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도와 명량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오홍적과 오극신 두 분을 배향한 용지사(龍池祠)가 있다. 오홍적은 의주로 파천한 선조의 행재소까지 사재를 털어 식량을 지원했다. 그 공으로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까지 사양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인솔하고 흑석산 전투에서 왜적을 대파하는 큰 공을 세워 그 공을 또다시 인정받아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끝내 사양한 진정한 선비의 청렴을 보여주었던 분이다. 오극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계적과 조카 홍적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막하로 들어가 수많은 적선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명량 해전에서 다시 이순신 막하로 들어가 적병 수십 명을 참살하고 아들 계적과 함께 순절하였다.
계곡면 여수 마을 용연사
정유재란 때 이순신 막하에서 명량대첩의 공을 세운 순천 사람 김정언, 김정윤 효자 형제를 배향한 용연사(容淵祠)가 있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두 형제는 해남 현감 유형각 하로 들어가 통제사 이순신을 도와 명랑해전에서 수훈을 세웠던 인물이다.
여행정보길라잡이TIP-가을의 미각여행길
용궁 해물탕-해물탕의 명가
황점이 여사는 강인하고 부지런하다. 수년간의 실패를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똑순이다.
매일 새벽부터 목포 완도 여수 등 20군데가 넘는 수산시장을 누비며 신선한 재료를 구입한다.
부지런함은 타고난 자신의 운명이라도 한다. 맛의 승부사 근성이 따로없다.
오직 싱싱한 생물만 올리는 게 그의 철학이다.
30여 가지의 싱싱한 해물을 이용한다,
조리과정에는 일절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시원한 맛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과연 남도의 명가다운 맛이 펄펄 살아있다.
예약-061-535-5161
메뉴-3만원(2인분), 4만원(3~4인분), 5만원(5~6인분)
해물탕 대(5만원) 중(4만원)
위치-해남읍 군청 앞
금강산 횟집-신선미의 차별화
금강산 횟집은 일단 건물이 멋지고 운치가 넘친다. 우수영 구민관광지와 진도대교를 관광할 수 있는 최적의 뷰-포인트 전망을 자랑한다. 청결은 기본이고 음식문화개선 시법업소로 지정되었다.
감성돔 맛의 진수를 느낄수있는곳이다. 접대음식문화의 품격을 잘 반영해 나가고 있다.
각지의 유명인사들이 즐겨찾는곳이며 최근에는 김대중 대통령 일행이 오찬장으로 찾았던 곳이다.
계절요리뿐만 아니라 싱싱함에서 나오는 깊은 맛이 우별나게좋다.
특히 돔지리탕은 혀를 감아 돌만큼 개운하고 깊은 맛이 난다.
메뉴 - 회 세트 메뉴 9-10만원
해초비빔밥 6000원 회덮밥 10000원
겨울별미-간재미회무침_ 35000원-45000원
문의-(061-533-5335)
위치-진도대교 뽀짝 옆
첫댓글 Who are you going to interview with?
I had an interview with Choi Sol. He is working out a program for Myong-Ryang Festival master pal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