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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청주박물관에서 - 박지원(중 1)
어제는 맡은 곳이 없어서 첫째 날 간 곳 을 다 썼지만 오늘은 내가 맡은 곳이 있어서 맡은 곳에 대해 쓸 것이다. 내가 맡은 곳은 국립 청주 박물관인데 청주의 유물들을 거의 다 있는 듯 했다. 처음에는 구석기시대의 돌 무기가 있었다. 망치로 사용된 넓은 돌, 사냥을 위해 만들 뾰족한 돌 등이 있었다. 이런 돌은 구하기 힘들겠지만 뾰족한 돌은 갈아서 만든 것 같았다. 옛날에는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생활 경험으로이 이런 것들을 만들게 된 것 같다. 또 두 번째로 동관을 보았는데 홈이 별로 없어서 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그리고 세번째는 돌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 한군데가 아니라 4면이 다 그림이 있었다. 옛 한반도는 3국이 있는데 3국이 다 불교의 부처님을 많이 모신 듯했다. 또 금강령과 현 향로도 있었는데 현 향로는 제사 때 쓰는 듯 했다. 마지막 네번째는 책, 사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동종은 선덕 대왕 신종과 비슷했지만, 맨 위쪽에 용고리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 흙으로 만든 인형과 망세가 있었는데 망세는 지붕에 다는 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경, 활자본들이 있었는데 활자본은 아무리 봐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엔 박물관 옆에 있는 어린이 박물관에 갔었는데 신기한 것이 많고 재미있었다.
박물관은 조금 어려운데 어린이 박물관은 거의 사람크기와 같은 인형들을 만들어 두고 사진도 같이 찍을 수 있고, 설명도 그림으로 되어 있고, 틀린 그림 찾기, 조각 맞히기 등등 많은 놀이가 있어서 재미있고 신났다. 정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 재미있는 우암어린이회관 - 조 우리(초 6)
내가 맡은 곳은 우암어린이회관이다.
우암어린이회관 입구에 들어가 보았는데 물고기들이 많이 있었다.
2층에는 신기한 것이 더 많이 있었다. 쇠파이프를 위쪽을 둥글게 구부려서 여러개 차례로 세워 놓은게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 보았는데 무슨 소리가 났다. 그래서 여러개 사이를 순서대로 가보니 계이름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 소리가 나서 엄청 신기했다. 애들을 불러서 거기에서 비행기 노래의 계명대로 차례차례 들어가 보니 정말로 노래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노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많이 틀렸다. 나는 더 쭉 농구공을 농구 골대에 넣는 게임이 있었다. 유경이가 하고 있어서 나도 한번 해 보았는데 농구공을 넣는 게 쉽지 않았다. 우암 어린이 회관을 모두 둘러보고 우암 어린이 회관 입구 앞에서 사진을 몇 번 찍고 차에 타서 그 다음 목적지로 갔다.
우암 어린이 회관에서는 오락실에 있는 게임기도 있었고 소리가 나는 음악터널도 있고 북한 한생들의 필기도구, 옷, 신발이 있었는데, 특히 신발이 내가 얼마 전에 신던 단화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휴전선이 있어서 서로 의사소통을 많이 하진 않지만 생각과 필요성들은 같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 상당산성을 지키는 장군 - 조양민(초 5)
나는 오늘 상당 산성을 갔는데 위에 올라가서 재미있게 놀았다. 둘레가 4.1m 라 이곳을 다 걸으려면 1시간이나 걸린다고 해서 나는 여기 다 보고 싶었는데 가지 말라고 해서 지원이 형이랑 성영이형이랑 성에서 눈을 던지고 놀았다. 그래서 다 못 맞혔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거기에 연못이 있어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갔다. 계단에 올라가면서 조금 미끄러져서 다칠 뻔했다. 그런데 중심을 잡아서 안 넘어졌다. 조심조심 올라가다 내려왔다. 내려와서 눈싸움을 조금 하다가 상당산성에 대해 쓰여 진 설명글을 읽고 여러 가지 지식을 얻었다.
상당산성을 들렀다. 어제 본 삼년산성과는 다르게 성곽 규모 및 구성하고 있는 문의 개수 등이 매우 많았다. 특히 성을 이루고 있는 돌의 크기가 크고 굵직하여 ‘그 누가 쳐들어와도 끄덕 이 없겠다.’라는 생각과 나도 예전에 태어났다면 저 성곽을 지키는 장군이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상당신성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철건물 창고 등이 있었고. 특징은 계곡을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서 재미있었다.
상당 산성의 남문을 가보았는데 상당이란 백제 때 상당 현 이라 불리게 되어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곳의 성벽은 포곡 식 으로 쌓여있었다. 다 가보지 못해서 섭섭하였으나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었으니 괜찮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 험함 산길을 한 창 동안 올라가서는 상당산성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남문의 누각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기로 하였는데, 눈이 내려 꽁꽁 얼어버린 계단이 너무 위험 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인 것 같다.
눈이 아직 덜 녹아서 계단이 조금 미끄러워 어려움이 없이 안아 있었지만 막상 성위로 올라가서 아래의 경치를 보니, 너무 아름다웠고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성벽은 모두 일정한 크기로 쌓아 올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듯 했다.
삼년산성과 비교해보면 돌의 크기는 더 크고 매끄러웠으며 조금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상당 산성 한 바퀴를 다 돌고 싶었지만, 다른 곳을 가야하니까 어쩔 수 없이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 손병희 유허지에서 - 김고운(초 4)
오늘은 충청북도 보은, 청주, 청원, 옥천 답사 2일째! 오늘은 국립 청주 박물관, 우암 어린이 회관, 상당산성을 거쳐 내가 담당인 손병희 유허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먼저 손병희 유허지 안에 있는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손병희 선생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밖으로 나와서 점심으로 김밥을 먹었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집을 봤는데, 초가집 이였다. 손병희 선생이 태어난 집 근처에도 7~8채의 집이 있었는데, 손병희 선생의 초가집만 두고, 모두 다 쓸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손병희 선생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손병희 유허지 밖에는 많은 태극기가 있었다. 태극기를 세어봤더니 모두 합해서 33개였다. 왜 태극기가 33개 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33명이라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태극기를 33개를 세운 것 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손병희 선생의 유허지 는 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 이였다.
손 병희 선생님의 기념관도 갔었는데 거기에는 손 병희 선생님께서 직접 사용하셨던 생활품들이 그래도 전시되어 있어서 매우 유익했다. 깔끔하게 잘 깎은 손 병희 선생님의 유허지 앞 잔디는 선생님의 훌륭한 발자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조용하고 넓고 깨끗하게 잘 보존 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 멋진 운보의 집 - 안 은지(초 6)
운보의 집은 7년 동안이나 만들어졌다. 운보의집, 정원과 더불어 아름다운 돌담장과 분재가 잘 어울려져 장관을 이룬다. 운보의집에는 우리 전통 양식의 한옥을 중심으로 운보미술관과 운보공방, 분재 난 전시장 야외도자기, 수석공원,3개의 연못 빛 분수대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수대 밑에는 잉어가 있었고, 그 옆에 나무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소나무(해송)가 약 450년이 가장 오래 됐다. 모과나무는 약 250년, 소사나무는 약150년, 주목나무는 약400년 느릅나무는 약100년, 매화나무는 약80년이나 오래됐다. 김 기창 화백은 고 랭이 와 거위, 나무 등을 키웠다고 한다. 작품에는 봄을 기다리며, 인물상이 있고, 태양을 먹는 새, 점 과선시리즈, 일출, 용, 시화도 있었다. 먹, 붓, 벼루 등이 여러 가지로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도 엄청나게 큰 벼루와 붓이 있는데 그것으로 시화 같은 데에 쓰이는 것 같다. 운보의집은 자원과 어울려 있어서 정말 아름답다. 수석공원에 들어갈려 했는데 우리들이 눈싸움을 해서 쫓겨났다. 그래서 수석공원에 못 들어가서 슬펐다. 그런데 수석공원의 수석이 뒤쪽에서 볼 때는 그냥 평범한 돌인데, 앞쪽에서 보면 멧돼지가 옆에서 쭈그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거북이같이 생긴 돌이 있었는데 그 거북이돌이 무척 신기했다. 그 거북이돌이 사람등치만 하게 생겼다. 그 별주부전에서 나오는 거북이 같았다.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였다. 운보의집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전통한옥이 잘 어우러진 문화 예술 공간이어서 정말 좋았다.
기분 좋게 도착한 운보의 집을 들어서면서부터 왠지 멋스러워 보이고 빨리 작품들을 보고 싶었다. 꽤 많은 분재들을 보았는데, 키우기 힘든 분재를 지극 정성으로 키워서 그런지 작지만 아름답고 풍성해보였다. 작품들 중에는 운보 김 기창 선생님께서 그린‘ 점 과선’ 이라는 작품이 별 볼일 없어 보이면서도 멋있었다. 그 작품을 보면서 서예를 배울 때 낙서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사는 낙서를 한다고 혼났는데 운보 김 기창 선생님은 작품이 되고 ............배우는 사람과 예술인과의 차이가 새삼 느껴지기도 했다. 점점 몸의 한계를 느끼면서 고 인쇄 박물관에 도착했는데 자랑스러운 금속활자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있어서 새롭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 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를 돌아보고 - 고은서(초 5)
내가 담당한 청주 고 인쇄 박물관과 흥덕사지 는 역사를 잘 알지 못해서 택하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공부 하였다. 우선 고 인쇄 박물관은 1958년 흥덕사 터를 운 천 지구 택지 조성 공사 중 옛 사찰 터가 발견되어 청주 대학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어 2000년에 박물관이 증축되었다. 고 인쇄 박물관에서는 신라 때 백지에 먹으로 쓴‘화임 정’과 대표적으로 ‘금속 활자본’, ‘무구정광 대다라니 경’, ‘기회신서’, ‘시종윤집’, ‘설정 집’ 등이 있었고 인형들이 첨단 기술로 움직이며 금속활자를 찍어내는 과정을 볼 수 있었고 활자제조기 자모제작용 철제압인 쿠 텐 베르크 금속활자본들 멋진 것이 많이 있어서 정말 즐거웠고 직기와 흥 덕 사실, 직지 금속 활 재연 관, 영상관, 인쇄 문화 실, 인쇄기기 전시실 등 많은 체험 관과 유물이 있어서 즐겁고 유익했다. 흥덕사지 에서는 1985년 충청북도와 청주 대학교 박물관이 청주 시 흥덕구 운현 동 일대의 절터를 조사하다가 주택지조성 공사 현장에서 ‘서원 불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을 비롯한 유물 등을 발견함으로서 처음으로 흥덕사 절터가 확인되었다. 1986년 이 절터 사격 제315호로 지정되고 충청북도와 청주 시는 유서 깊은 세계인쇄 문화 발원지에 청주 고 인쇄 박물관을 세웠다. 이 흥덕사지 터에서는 금구, 나발, 불발, 기와, 금강저, 치미, 청동소종 등이 발견 되었다. 오늘 모든 장소를 돌며 재미있었지만 특히 궁금증을 풀 수 있었던 이곳이 가장 인상 깊고 재미있고 유익해서 너무 좋았다.
■ 백제유물전시관에서 알게 된 것 - 김 유리(초 5)
내가 처음에 담당을 이것으로 정했는데 백제유물전시관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것을 알아냈다. 이곳 청주는 옛날백제에 마한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드나드니 처음으로 온화한 모습을 한 금동대향로가 있었다. 그 토기의 이쯤은 세발토기라는 것이다. 세발토기는 발이 세 개여서 세발토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 사람은 화장해서 넣은 단지, 음식을 넣은 단지도 있었다. 그 뒤로 계속 가다보니 백제 사람들이 만든 무덤이 있었다. 그 묘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안내원 아저씨가 오셔서 여기에는 옛날에 묘 자리였다는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여기가 묘 자리인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묘의 이름과 설명을 해주었다. 첫 번째로는 돌방무덤이 있는데 그 것은 관을 옮길 수 있는 길과 문을 포함하고 벽돌을 쌓은 후 내부에 관을 놓을 수 있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은 말 그대로 널안에 관을 넣은 것이고 그 무덤에 있는 사람은 세력이 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널무덤이 있다. 널무덤은 토광에 관과 유물을 넣은 후 마무리 하였다. 네 번째로는 화장 묘다. 오늘날처럼 사람을 화장해서 단지에 넣어서 묻는 것인데 이것은 특별한 의식에 사용되는 곳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화장 묘는 맨 밑이라고 한다. 또 무덤을 만들 때에는 돌이 필요한데 그 쪽은 돌이 별로 없어서 무심천에서 가져왔는데 그것을 강가에서 가져오느라 힘들기 때문에 높은 사람들만 차지 할 수 있었다. 이것을 보고 사람의 세력에 따라 무덤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백제는 온화하고 단조로운 문화재의 특징이다 는 것을 알았고 우리 문화재를 보존 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 냇가에 있는 용화사 - 주 슬기-
용화사는 1983년 7월 20일 경삼남도 문화자료 제10제로 지정되었다. 용화사 위에 그물을 쳐 놓았는데 제비가 집을 짓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이다. 다른 절들에는 쳐져있지 않는 데 그 만큼 용화사가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라 선덕 여왕 때 은점이 미륵산 중턱에 집을 짓고 정수사라 지었는데 고려시대인 1260년에 산사태로 허물어진 것을 3년 뒤, 자윤, 성화, 두화상이 미륵산 제 3봉 아래 로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짓고 천택사라고 하였다. 1628년에 화제로 소실된 것을 1752년에 다시 짓고 용화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2번이나 허물어 졌는데도 불과하고 다시 짓고 이름을 붙여주다니 정말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용화사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 배기와 집인 보광 전을 비롯하여 좌측1칸에 효 봉 영각을 차려놓은 명부진, 미륵불 좌상을 봉안한 용화 전, 강당인 탐진 당, 선실인 적묵 당 문루인 해월 루 등 목조건물과 육모정형태의 종류가 있다. 그 위쪽에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고 있는 불과사리4사자 법륜사탑과 효 봉 대종사 5층 사리탑이 있다. 이 절이 이젠 절대 허물어지지 않고 튼튼하게 오래 있어서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고 싶다.
■ 절 안에 서있는 7개의 석불(칠촌석불) -김다현(초 4)
칠촌석불은 비석 모양이며 돌에 불상을 조각하거나 글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반타원형의 곱돌로 만들었다. 마름모꼴의 돌 표면에 본존여래상을 중심으로 칠 존 석불 주위에는 여러 개의 불상이 있었다. 끝부분에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연줄기 위에 앉아있는 본존불만이 내밀고 있는 나한상이 밖으로는 안왕상이 사자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광배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 7구의 작은 부차가 새겨져 있었다. 삼국시대 조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이 석상은 조각 양식으로 보아 비 암 사와 연화사의 비상들과 당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연대는 문무 왕 18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각각 원형의 머리광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배 모양의 광배에 포함되어 있다. 본존불은 얼굴이 마멸되었지만 당당한 신체에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게 양 어깨를 감싼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 시내 중앙에 서 있는 당간기 -김혜령(초 3)
다른 곳은 물건을 차근차근 보고, 당 간기를 맨 나중에 보았다. 당 간기에 무슨 한자가 써져있었다. 나는 한자가 무엇인지 몰랐다. 왜냐하면 당간 지주가 없으면 당간기가 쓰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간 지주를 세운 것 이다. 그런데 원래 당 간기는 30개인데 조선시대 때 대원군이 당 간기를 10개 가져가서 당간기가 20개밖에 안 남았다. 그리고 성안에는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 건물, 그리고 행사 있을 때 깃발을 건다. 당간 지주가 없으면 당간기가 쓰러지고 당간기가 없어졌을 것 같다. 다행히 당간 지주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외국사람들도 우리 문화유산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나라 우리 가족이 없으면 문화유산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유산을 잘 보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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