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제 문화 Life 기사 내용
아내와 그네 (최창순 지음, 다시올문학 펴냄)=30년 공직생활 틈틈히
시를 써온 저자가 평범함 속에서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감동의 순간을
그린 시 78편을 모아 시집으로 펴냈다. 소소한 일상을 민요적인
리듬에 실어 때로는 서정적으로, 해학적으로 그려낸다.
또 일상적인 물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생의 행복은 관념적인
이상이 아닌, 바로 우리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9,000원>
헤럴드 경제 신문 기사 내용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최창순 시인이 시집
‘아내와 그네(다시올문학)’를 출간했다.
시인은 지난 2009년 문예지 ‘다시올문학’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했으며
영등포 문화원 민요판소리 연합회장을 역임했다.
시인이 30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틈틈이 써내려온 시들을
한 권으로 엮었다. 시집엔 표제시인 ‘아내와 그네’를 비롯해 ‘혈육’
‘예쁜 똥’ ‘버려진 장갑’ ‘동거’ ‘대나무의 고집’
‘가시들의 엄포’ 등 78편이 담겨있다.
시인은 소소한 일상을 민요를 닮은 리듬에 실어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시인은 우리가 쉽게 쓰고 버렸던
물건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인생의 행복은
관념적인 이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마경덕의 시 잃기에 소개
최창순 시집「아내와 그네」서평 (2014. 다시올) /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뿌리와 역동성
마경덕의 시 읽기 2014/03/18 11:38
http://blog.naver.com/gulsame/50191090941
최창순 시집「아내와 그네」서평 (2014. 다시올)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뿌리와 역동성
마경덕
행복을 습관으로 가진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감사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불행을 습관으로
가진 사람은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늘 피해의식과 이기심을
갖게되어 스스로 불행해진다고 한다. 전자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뛰어넘었고
후자는 당면한 환경에 사로잡혔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한계가 있다.
습관에 갇히면 이것을 뛰어 넘기란 쉽지 않다. 같은 조건이라도 긍정과 부정,
선택한 쪽의 기울기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환경을 초월하는 힘이 곧
행복을 키우는 힘이다. 이렇듯 행복이라는 좋은 습관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장소이다. 독자는 단어와 문장을 통해 시인을
대면한다. 시인이 발견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어떤 사실이나
가치를 새롭게 깨닫고 동참하는 것이다. 그때 독자의 안목으로 시는 ‘활기’를
얻고 ‘생명’을 얻는다. 시인에게 시는 발견이며, 독자에겐 새로 시작되는
‘개인의 탐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작품은
재창조 되는 것이다. 최창순 시인은 행복을 습관으로 가진 사람이다.
마음으로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기쁨'은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된다. ‘기쁨’은
감정과 주관이 포함된 개인의 직관이기에 조건과 환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퇴직 후 경기도 양평군 다대리 산골로 귀촌해서
방 두 칸짜리 황토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 시인의 얼굴이 해맑다.
자연이나 이웃이 시와 뒤섞여 구체적인 진술로 표출되고 아름다운 삶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시인의 품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현시대가 복잡다단
해지면서 시도 함께 난해하게 변형되고 단순한 일상을 소재로 생활을
기록한 시들이 폄하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굳이 타인의 몸짓을 흉내 낼
필요가 있을까. 최창순 시인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가파른 시적행간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오래 쌓아온 연륜이며 급변하는 세상에서 한 걸음 느리게 살아온
삶의 방법이다. 최창순의 시적 성향은 ‘측은지심’이다. 과잉과 결핍의 시대,
폭발직전의 난폭하고 불온한 냄새마저 시인의 손을 거치면 정화되고
평온해진다. 그러나 시선이 도시로 옮겨지면 시의 촉이 예리하게 반응한다.
시인은 ‘민중의 지팡이’로 젊음을 소진했다. 경찰이라는 근엄한 제복을 입고
밤낮없이 세상의 어둠을 쫓아다닌 것이다. 도시의 음지에서 만난 절망과
소외감, 범죄를 추격하는 팽팽한 긴장감, 시대와 개인의 불행을 몸으로
체험한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삶의 내면을 응시하고 그늘진 구석구석에
초점을 맞춘다. 긴장감 속의 평안함, 부드러움 속의 날카로움, 시인은
두 개의 색채를 띠고 있다. 서로 이질적 요소를 지닌
두 요소들이 공존하기 위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늦은 아침을 먹으려는데
손녀딸이 다급히 부른다
세 살배기
엉거주춤 내 눈치를 살핀다
바짓가랑이 속 한줌의 똥
손에 묻어도 냄새조차나지 않는
누런 황금빛이다
텃밭에 묻고
아침상을 받는데 아이의 웃음이
까르르 무릎으로 굴러온다
손 씻고 먹으란다
그 똥이 내 똥
내 똥이 그 똥인데…
-「혈육」전문
갓난아이가 똥오줌을 가리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냄새 나는 똥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부모는 기저귀를 갈아주면서도
마냥 행복해한다. 그저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큰 기쁨이다. 이때 ‘똥’은
‘오물’이 아닌 소중한 ‘분신’으로 바뀐다. 손에 묻은 오물마저 개의치 않는
자식을 향한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같은 핏줄일 때 가장 큰 힘을 지닌다.
세상엔 ‘예쁜 똥’도 있다. 시인에게 어린 손녀의 누런 똥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똥’이다. 피를 이어받은 끈끈한 혈육의 힘, ‘너’와 ‘나’가 한 몸인
무조건의 사랑이다. 아낌없이 주어도 다시 재생되는 사랑, 손녀에게 쏟아
붓는 사랑도 ‘배설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삼대로 이어진 혈연관계는
지금원활하게 ‘소통’중이다. 시인은 모티프가 되는 ‘똥’을 통해 치부를
드러내는 허물없는 사이, 혈육으로 밀착된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준다.
「혈육」「예쁜 똥」은 ‘똥’을 통해 ‘내리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집의 표제시인「아내와 그네」에서도 그네를 타며 공중에서
반달웃음 짓던 손녀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한 달 만에 찾아간 시골농장
누군가 다녀갔다
간이화장실 모퉁이
누군가 버린 까만 군인 가죽장갑 한 짝
칸막이 소변실 주위를 맴돌던
지린내가 장갑에 묻어있다
늦가을 한두 번 훈련하는 군부대
어느 병사가 버렸을까
문득, 옆을 보니 똥 한 무더기
누군가 휴지대신 사용한 저 장갑
민망한 듯 눈길을 마주치지 못한다
한 사내가 쏟아버린 다급했던 시간이
증거물로 남아있다
-「버려진 장갑」전문
사람의 몸엔 입구와 출구가 있다. 입에서 항문까지 이어진 몸의 길은
터널과 같아서 식욕과 배설이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탈이 난다.
우리는 날마다 섭취해야하는 음식에서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장은 영양과 수분을 흡수하고 불필요한 찌꺼기를 몸 밖으로 내보낸다.
몸이 공장이라면 똥은 제품인 셈이다. 구불구불 몸의 길을 통과한
‘똥’은 장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이다. 공장이 잘
돌아가는지는 똥의 완성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한 달 만에 찾아간 시골농장 간이화장실 모퉁이에서 발견한 군인
가죽장갑 한 짝은 누군가의 다급했던 흔적이다. 부재중 누군가 다녀간 자리,
어쩔 수 없는 선택 앞에 가죽장갑은 최선의 방법이었다.
버려진 가죽 장갑 한 짝은 버려진 누군가의 시간이다.「버려진 장갑」
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버림받은’ 사물을 통해 하릴없이
버려지는 것들의 ‘쓸쓸함’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에겐 ‘참아야하는
시간’과 ‘참을 수 없는 시간’, ‘버려야하는 입장’과 ‘버림을 받을 처지’가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배설 또한 ‘버려지는’ 방법으로 이쪽과 저편의
경계를 넘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다.
닭똥냄새가 가득 찬
닭장 안 귀퉁이
작은 거미가 둥근 집을 지었다
도시의 아파트도
정원이 딸린 별장도 아니다
그저 내리는 비나 막아줄
허공에 매달린 초라한 집 한 채
오늘도 닭과 거미는
공생 아닌
동거를 하고 있다
서로 노려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동거」전문
「동거」는 종(種)이 다른 닭과 거미의 불안한 동거를 통해 같은
침상(寢床)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을 보여준다.
생존을 위해 닭똥냄새가 진동하는 ‘닭의 집’에 거처를 마련한 거미는
약자의 위치에서 닭의 눈치를 살펴야한다. 닭은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이
있지만 거미에겐 거미줄뿐이다. 질긴 거미줄로도 닭을 잡을 수는 없다.
세상은 강자보다는 약자가 훨씬 많지만 “소수의 강자”가
“대다수의 약자”를 지배하고 있다. 악취마저 견뎌야 무허가의 보금자리를
지킬 수 있는 위험한 생, 거미에겐 냄새보다도 거미줄에 달라붙는 비가 더
무서운 천적이다. 약자에겐 아무 것도 아닌 것마저 위협이 되는 법,
인간이 사는 법도 이와 비슷하다. ‘불신’의 ‘관계’를 유지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관계’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인가. 포기하고 절망하며 살아가는
‘거미 부부’들, 거미줄처럼 엉킨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한 지붕 아래 동거 중이다.
땅속 깊이 터를 잡은
대나무
기초공사 튼실하게 해놓고
사년 만에 떡잎을 내민다
조급함이 없다
뒤늦게 키를 늘리며
놓쳤던 시간을 따라 잡는다
그의 속도를 따라갈 나무는 없다
뿌리가 깊어 하늘로 곧게 뻗는
대나무
바람이 흔들어도 꺾이지 않는다
속을 비우고
눈비 내려도 파랗게 웃음 짓는 유연한 자태
비워야 채움이 있다
참 선禪이다
-「대나무의 고집」전문
대밭(竹林)은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에서 유래되어 문학작품
속에서 흔히 ‘은거지(隱居地)’의 뜻으로 쓰인다. 2차 대전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무는 대나무였다니 가히 생존력이 놀랍다.
인간이 지진에 대비해 지진의 파동이나 진동을 계산해서 건물을 올리듯
대나무도 바람과 맞서지 않고 바람의 방향대로 움직인다.
‘순응’ 이 곧 생존’이다. 뒤늦게 출발해서 앞지르는 대나무,
죽순은 하루 동안에 1m까지 자라기도 한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은
대나무의 ‘번식’과 ‘속도’를 증명하는 말이다. 키가 큰 나무는 뿌리도 깊다.
그만큼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대나무도 훤칠한 키를 유지하기
위해 기초공사를 튼튼히 한다. 무려 4년의 공사를 끝내고 잎을 내민다니
대나무는 훌륭한 건축가가 아닌가. 스스로 “진폭의 공법”을 터득한 것이다.
“칸칸의 방”이 대나무의 ‘뼈’를 이루고 높이 허공을 딛고 오른다.
무리를 지어 바람을 부르고 바람을 가지고 논다. 성대를 건드려주는
바람이 있어야만 대숲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바람이 흔들어도
꺾이지 않는 ‘유연성’이 “대나무의 힘”이다. 올곧은 선비처럼 대나무는
기개를 뽐내며 고집스럽게 키를 높인다.
햇빛 한 무리 울타리를 붙잡은
장미가시에 찔렸다
발버둥 치며 떨어지는 햇살이 몸살을 앓는다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사방을 경계하는
눈빛이 빨갛다
사이로 덤벼드는 벌 나비들
기세도 당당하다
눈을 부릅뜬 여인, 하지만 울타리를 붙잡아야만
설 수 있는 몸이다
엄나무 두릅나무 가시오가피나무 모두 가시로
몸을 감쌌지만 속은 무르다
몸과 뿌리가 약할수록 나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엄포다
-「가시들의 엄포」전문
사물과의 교류는 시인에게 필수이다. 시인은 사물의 특징을 읽어내고
생각을 접목한다. 사물이 숨겨둔 의도와 그것을 파헤치려는 시선이
부딪치며 ‘가시’는 다시 태어났다. 「가시들의 엄포」는 흔한 소재를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시인은 가시에 찔리는 햇빛을 보았다.
시인의 촉이 얼마나 섬세한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날카로운 예각으로
정곡을 찌를 때 독자는 시적 감흥을 느낀다. 자신만의 색채감으로
시적호흡을 유도한 시인은 기존 시법에 독창성을 접목하였다. 기존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익숙함에 창의성을 덧입혀 무뎌진 ‘둔각’을
“날카로운 예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천하의 아름다움도
붙잡을 곳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어느 시인은 화병이 들면 엄나무
생가시를 가마솥에 삶아 마시라고 했다. 세상에 찔려 죽을 만큼 아플 때는
가시가 곪은 상처 터트려 주는 명약이라 하였다. ‘가시’는 ‘공격’보다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보호의 목적”이 더 크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속이 무르다고 하니 곧추세운 가시는 “다가오지 말라”는 ‘엄포’인 것이다.
향기와 사나운 가시를 기르는 장미, 꽃은 버릴지언정 가시는 버리지 않는다.
술독을 해독하고
주눅이 든 간을 보호한답시고
아름다운 꽃향기마저 채취하여
끓여 마시는 사람들
재래시장 한쪽 귀퉁이
뿌리까지 쌓아놓고
칡의 피를 파는 장사꾼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 몰려온다
오가는 이 없는 깊은 산속
외로이 피었다 지는 보랏빛 웃음
산을 오르는 발소리에
칡꽃은 해마다 피가 마른다
-「칡」전문
무엇이든 휘감고 오르는 칡덩굴, 추위에 강해 얼어 죽지 않고
매년 뿌리는 굵어진다. 양지바른 산자락이나 야트막한 언덕에 무성하게
자라 8월에 잎겨드랑이에서 홍자색 꽃이 핀다. 콩과인 등나무와 사촌이라
꽃도 비슷하고 향기도 좋다. 간을 보호하고 숙취에 좋다는 칡꽃,
“시들어가는 피”를 살려보겠다고 “남의 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해마다 산을 오른다. 불안에 노출된 칡꽃은 피가 마른다.
시인은 ‘꽃’이라는 자연적 서정을 빌려와 삶의 힘겨운 여정을 대변한다.
아름다운 향기의 내면에는 “불안한 삶”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아다니지만 ‘불안’은 ‘소멸’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자연의 질서”가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파괴된다.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칡」은 눈앞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 서문 사적 제57호
우익 문
수어장대 밑 굴문을 지나
세 갈래 길, 고로쇠나무
등산객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뼈에 이롭다는 골리수骨利樹
곰쓸개에 대롱을 박아 피를 빨더니
나무의 수액까지 빼먹는 인간의 식탐에
해마다 피가 마른다
봄이 오면
무릎이 시큰거리는 고로쇠나무
옆구리에 비닐호수를 꽂고
플라스틱 통에 떨어지는 제 피를
바라보고 서있다
-「고로쇠나무」전문
시인은 주변에서 생명의 질서를 찾아내고 고로쇠수액을 뽑아내는
객관적 현실과 부딪친다. 시인의 성향은 보편성 보다 개별성이 강하기
때문에 ‘나무의 피’는 “나무의 것”이라고 라고 ‘경고’한다. 보편적인 평화는
‘수액’을 뽑아가는 폭력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인간은 ‘자연파괴’라는
‘재해’에 노출되어 있다. 고가(高價)의 ‘상어의 지느러미’와 ‘코뿔소의 코’를
얻기 위해 필요한 부위만 잘라내고 산 채로 버리는 잔인한 상술처럼 제철에
채취한 고로쇠수액도 매매로 이어진다.「고로쇠나무」는 풍요가 넘치는
시대에도 곰쓸개까지 빨아먹는 식탐과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결핍증을
앓는 사람들을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냉정함’ 속에는
‘각성’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의 ‘측은지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양복 안주머니는 늘 어둡다
캄캄한 어둠속에 작은 다세대 한 채
안방에는 신사임당 여사가 살고
윗방에는 세종대왕님
사랑방에는 이이 선생님
문간방에는 이황 선생님
주인은 행랑채에 산다
맨 위층에 사는 신사임당 여사는
어디로 출타중인지 연락이 없고
제일 아래층에 사는 이황 선생님만
혼자 빈방을 지키고 있다
누구 손을 거쳐 왔는지 매달 말일이면
잠깐 얼굴 비쳤다가 아무리 붙잡아도
어디로 가는지 지갑이 훌쭉하다
-「지갑」전문
근대산업사회의 경제구조는 ‘이윤’을 창출하고 그 대가인 ‘돈’은
권력을 가진다. 화폐가 나오기 이전에는 물건과 물건을 바꾸는
‘물물교환이 성행하였다. 조가비, 짐승가죽, 옷감, 소금, 농산물 등이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거래되었다. 요즈음은 금속이나 종이로 만든
‘동전’ 과 ‘지폐’가 나와 소지하기에 편리해졌다. 산업혁명을 거쳐 이윤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고 노동력이 상품화된 자본주의가 발달하였다.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나 재산 축적으로 이용되는 돈은 액수만큼 막대한
힘을 가진다. 돈의 위력을 나타내는 속담 중에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라고 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는
속담은 천한 일이라도 하면서 벌고 쓸 때는 떳떳하고 보람 있게 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니 돈을 쓰는 일도 버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각 나라마다 지폐 속에는 왜 ‘위인’들이 그려져 있을까?
그분들의 생애와 업적을 생각해보고 옳은 일에 쓰라는 암시일까?
아무튼 시인의 지갑에 머무는 ‘위인’들 매달 말일이면 잠깐 얼굴 비쳤다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여러 위인들을 모시고 사는 다세대(지갑)는
금세 텅 비었다. 돌고 도는 유통구조로 타인의 손을 거쳐 온 돈이 또
누군가에게로 건너간다.「지갑」은 근근이 살아가는 서민들의 일상을
재치 있게 그린 작품이다. 소유할 수 없는,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의 모습들이 생생하다.
논현동 뒷골목
잠자던 가로등이 실눈을 뜨면
늘어선 카페들 기지개를 편다
골목마다 바쁘게 문 여닫는 틈새로
장미넝쿨 줄줄이 뻗어나간다
밤에 피는 장미들
미니스커트 갈아입고 꽃망울 터트리면
지하에 숨어있던 벌 나비 떼
이 골목 저 골목 자리싸움에
담장 밑 찢어진 날개 수북하다
해가 지면 취객들보다
먼저 비틀거리는 골목
논현동 밤 0시
어둠을 가르는 호루라기 소리
요란하게 날아간다
벌 나비 떼 혼비백산 흩어진다
동트는 새벽이 올 때까지
잠 못 드는 골목, 가로등이
이 골목 저 골목 순찰을 돈다
-「논현동 밤 0시」전문
「논현동 밤 0시」는 세상이 묵인해 온 “위협적인 현실” 앞에 만연된
일상을 펼쳐놓는다. 취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요염한 꽃들과 벌과 나비의 관계,
“질서와 단속”은 ‘호루라기’로 압축되었다. 논현동 뒷골목에 초점을 맞춘
시인은 취객들과 호객행위와 꽃의 피를 빨아먹는 지하에 숨은 어둠을
끄집어낸다. 질서는 무너지고 폭력이 오갈 때 달려가던 호루라기소리,
한때 경찰이었던 시인이 지나왔던 밤 0시의 풍경이다. 어둠이라는 배경
속에 사건은 은폐되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피어나는 도시의 붉은 장미의
덩굴만무성하다. 벌 나비는 꽃을 찾아 날아들지만 아름다운 장미에게는
가시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밤의 한 자락일 뿐, 어둠이라는 배경에 얼마나
많은 침묵이 살고 있을까. 밤 0시는 자정을 넘긴 시간, 어제를 보내고 첫발을
딛는 순간인데 그들에게 새날은 보이지않는다. 쾌락을 향해 뻗어가는
환락가 가시덩굴에 반복되는 불행이 갇혀있다. 시인은 끊을 수 없는
“불신의 고리”와 “가파른 삶”을「논현동 밤 0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법을 다루는 경직된 직업과 다르게 최창순 시인의 정서는 다분히
목가적(牧歌的)이다. 시인의 뿌리는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뻗어나왔다.
농부였던 할아버지, 그리고 ‘다대리 농장’과 파뿌리 같은 이웃이 시 속에
들어있다.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표현한「면장 감」아버지의 일생이
담긴「삽」에도 정직한 흙의 성품이 보인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을 이르는 ‘측은지심’, 이미지가 선명하고 간결한 시편들이 역동적이다.
오염된 마음조차 걸러주는 “시의 필터”가 건강하고 싱싱하다. 늦깎이로
시작한 “시의 뿌리”는 더 깊이, 더 넓게 뻗어나가 차곡차곡
성실한 열매를 보여줄 것이다.
최창순 시인
강원도 출생
2009년 <다시올문학> 신인상
영등포 문화원 민요판소리 연합회장
현 양평 햇빛농장 경영
|
첫댓글 이런 정열적인 친구가 있다는 사실자체가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
어깨가 으쓱해진다.
소식을 전해준 친구에게도 감사한다.
엄영식씨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