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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의 갱신을 위한 설교신학: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
허 도화
계명대학교 교수, 예배∙설교학
(본 연구 논문은 한국기독교 신학논총 46집(2006년) 219-250쪽에 실린 글이다.)
I. 머리말
20세기를 거쳐 온 우리 설교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어느 때보다 격하고 예기치 못하게 일어나고 있는 21세기에서 설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21세기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급하고 현격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어느 시대의 교회도 지금처럼 다양한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다. 교회는 정치, 사회, 경제, 인류, 철학, 생태 등으로부터 오는 거센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와 문화는 다시 분출되는 여성해방, 심화되는 개인주의, 뭉치는 자기중심적 웰빙, 호모 후모아(Homo Humour, ‘유머가 많은 사람’)의 전성시대, 확장되는 외인지대, 핵가족의 재분열, 고령화의 충격을 해소하기 위한 퇴직제도의 변화, 자녀에 대한 과보호 등의 다양한 경향들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도전들에 대하여 오늘의 한국교회의 강단은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기피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는 물량적이고 외형적 성장에만 관심을 쏟으며 복을 남발하는 설교가 일반화되고 인간의 철학과 윤리, 심리학을 성경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 실종 현상으로 한국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여 사회로부터 공신력을 상실하였으며 지속적인 교회 성장에도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강단은 설교의 질적인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우리가 왜 설교를 하는지,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지,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설교의 위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강단은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상황, 우리 주위 사람들의 요구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보다는 개 교회 자체의 문제에 깊이 빠져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의 강단이 타당성을 상실한 채, 과거 선배들이 누리다가 물려준 설교자의 권위라는 유물을 가지고 멋이나 부리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설교는 너무 많은 사회와 세계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죄책감과 무능력의 와중에 있는 덫에 걸렸다. 우리는 행동되어지는 진리, 정의, 사랑의 말씀을 외치고 싶다. 또한 우리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와 변화를 일으킬 설교의 방법을 찾고 있다. 어떻게 사회적인 현실을 다루는 설교가 오늘의 교회에서 다시 들려질 수 있는가? 어떻게 복음에 충실하고 세상에 대해 열린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의 강단을 갱신하기 위한 설교신학과 설교는 무엇일까?
II. 설교신학이 무시된 시대의 설교
오늘날 강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교신학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비록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강단이 새로운 도전을 맞이한다 해도, 설교신학의 관심은 여전히 동일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설교의 역할과 위치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변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현저한 거리감을 줄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설교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며 이런 이유로 설교를 통하여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설교신학은 공적인 영역을 다루는 설교까지를 포함하여 설교를 강하게 만든다. 신학에 기초를 둔 설교는 공적인 기능을 한다. 설교는 공적인 문제들에 대해 권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주된 신학적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라이셔(Richard Lischer)가 주장한 것처럼, 현대 설교학은 전반적으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을 구체화해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존 캅(John B. Cobb Jr.)은 믿음을 구하며 이해하는(Faith-Seeking-Understanding) 진지한 행위로서의 신학이 많은 교회들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슬퍼한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설교가 주로 인기 있는 심리학과 상식에 근거함으로 그것들을 재확인하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마련될 뿐, 복잡한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학적 사고가 무시된 시대에서 우리의 설교는 주로 목회적 돌봄, 교육, 훈련 또는 상담과 같은 개인적 이상주의나 실리주의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설교의 주된 사명은 목회적 돌봄이나 성서적 교훈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버트릭(David Buttrick)은 다음과 같이 오늘의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신학에로 돌아가서 신학적으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역이며 진정 강단의 사명은 우리가 사는 혼돈된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시대를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신학은 신앙을 현대 언어로 그리고 현대의 사고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만일 설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한다면, 그 때는 설교가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버트릭의 주장처럼, 이 시대는 우리의 설교가 신학에 근거하고 신학적인 생각을 진지하게 취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설교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설교가 분명한 목적과 초점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혼란되고 불확실한 강단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상실하게 된다.
III. 강단의 갱신을 위한 설교신학
설교학자들은 강단의 갱신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설교신학을 재발견할 필요를 주장해 왔다. 오늘날의 강단은 어느 때보다 설교학적 기대들에 관해 분명하게 설명하는 설교신학으로부터 설교에 대해 진지하고 철저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설교신학의 주된 주제는 설교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설교신학의 목적이 설교자로 하여금 성서를 바르게 해석하고 그 메시지를 회중에게 적절하게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강단의 갱신을 위해 설교신학에서 다루어야 할 신학적 주제들은 무엇인가?
설교신학에서 다룰 강단 갱신을 위한 주제들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설교와 교회 생활의 중심에 위치한 하나님의 의도와 방법에 대한 단순하고 지속적인 관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 성취하시려는 것에 대한 비전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런 관점과 비전에는 설교의 목적, 설교의 텍스트, 그리고 설교의 콘텍스트에 관한 신학적 주제들이 포함된다. 강단의 갱신을 위해 설교신학에서 다루어져야 할 주요 주제들은 설교의 위치와 목적, 설교와 복음의 관계, 그리고 변하는 다원적 세계에서 설교가 가지는 사회적 상황들이다.
1. 설교의 위치와 목적
설교 갱신을 위한 첫 단계는 설교의 역할, 즉 설교의 위치와 목적을 회복하는 일이다. 설교의 위치와 목적은 설교신학의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설교자들이 충실히 회복해야 하는 설교학적 유산이다. 이런 회복은 설교자들의 설교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기초되어야 한다. 기독교 설교의 기초는 신학적 기초 위에 견고히 서 있다. 어떤 사회적 현상들이 우리의 의식에 설교의 다양하고 새로운 차원들을 이해하고 추구할 능력을 요구한다 해도, 강단이 추구하도록 우선적으로 위임받은 것은 신학 자체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강단의 갱신은 신학적 근거를 가져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의 상황은 설교의 위치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중요한 이슈들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격하게 변하는 세계에 충분히 적응하기 위해 설교는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주변인들의 의식에 전해야 한다. 설교자들은 성서를 종말론적 지평을 가진 해방의 이야기로 받아야 한다. 설교의 임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들을 분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교회와 종교적인 역사뿐 아니라, 모든 역사의 빛에 비추어 설교를 준비하고 전해야 한다. 이런 관점이 때로는 세속적이며 비종교적인 방법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에 놀라움으로 반응하는 것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지와 본문에 관한 우리의 질문들은 설교의 목적에 관해 중요한 신학적 결심에 의존해야 한다. 비록 설교의 모든 형식이 함축적인 신학을 전하지만,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사역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설교를 통해 무엇이 성취되어야 하는가? 설교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강단의 갱신을 위해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오늘의 다원적 사회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전하기를 소망하는 설교자들에게 예언적 설교에 관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설교의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설교자는 충실하게 설교하는 것이 첫째이며 최선의 신학적 행위인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설교의 역할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가 방법론적 질문들 이전에 신학적 질문들을 묻지 않는다면 설교가 단순한 기술에 빠져 붕괴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왜 설교를 하는 것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설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설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찾는 것이다.”
신학은 개념과 실체를 형성한다. 설교자들이 신학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결심해야하는지의 문제는 그 자체가 신학적 문제이다. 그것은 설교의 위치와 목적에 관심을 가진다. 그것은 설교에 관한 신학적 이슈가 무엇이며 그 설교에 관한 신학적 이슈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일어나는지와 같은 생각들을 포함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생각하는지(우리의 “사고의 상황”) 그리고 왜 생각하는지(신학적 질문의 목적)에 의해 깨닫는 것 훨씬 이상으로 결정된다. 신학은 감추어진 사회적, 정치적인 의미들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복음의 가치에 의해 평가하도록 만드는 명령을 제공한다. 신학을 탐구하는 것은 복음의 공적인 목소리를 포함하면서 설교에 영감을 준다. 그러므로 신학은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 대한 책임을 전제해야 한다.
신학적인 말씀을 운반하는 설교는 신학에 의해 강조되고 하나의 사회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구속적인 사역과 관련된다. 설교는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삶에 대한 긍정이며 그러므로 죽음과 파괴의 힘에 반대한다. 설교는 개인들과 더 넓은 세계의 입장 모두에서 삶을 구체적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또한 설교는 하나님의 창조를 비인간화하고 훼손하는 세력들을 고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을 용기 있게 행한다. 이런 관점으로 이해할 때, 설교의 신학적 임무를 취하는 것은 교회가 설교를 통해 “덮개로 닫힌 거룩한 집”이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의 변화자”로서의 예언적 공동체가 되도록 만드는 수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 연구자는 설교의 목적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공동체에 의한 성과와 능력”에 기초하여 예언적 공동체를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설교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또한 설교는 신앙공동체가 세상에서 구체적이며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가 되도록 용기를 주며 도와야 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의 위치는 신앙공동체가 시대의 가장 빠른 풍조와 싸우는 칼날 위에 있다. 그 이외에 위치에서 또는 다른 이유로 하는 설교는 부끄러운 설교라고 불러질 것이다.
설교의 임무는 동시대의 역사를 조명하고, 중요한 선택을 분명하게 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세상에 대해 책임 있는 청지기직으로 부르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자들의 신학적 임무는 자신의 설교를 바르게 인도하고, 비판하고, 그리고 깊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로 부름 받은 것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예언적 설교의 위치와 목적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들 사이에 서야함을 의미한다.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 시대를 위한 설교자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한 확실성과 구약의 예언자들이 보여준 설교의 임무에 대한 충실성을 상실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미래에 관한 결정적인 형식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는 예언자의 비전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설교에서 온전한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회복해야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공적 토론의 장으로부터 사라지는 설교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에서 예언자의 입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서의 약속에 대한 예언자의 비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언적 설교를 필요로 하며 매우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환경에 집중하면서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인 설교신학을 필요로 한다. 예언적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서 환경의 성격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로부터 분리된 설교, 예언적 사귐 밖에 있는 설교는 무익하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새로운 이슈들에 대해 설교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더 이상 도움이 안 되는 옛 형식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온전한 복음에 충실한 설교
설교의 갱신을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연결시키며 우리의 전체 사역을 반영하는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에 대한 충실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설교학자들과 지역교회의 설교자들은 청중이 설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설교가 사람들의 필요와 관련이 있으며 실제적인 인간의 상황들에 대해 복음을 전하려는데 타당성이 있으며 도움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설교로부터 온 이런 설교학적 유산은 어떤 인간 실존에도 충실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온전한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복음에 충실해야 한다. 그들은 온전한 인격과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 복음의 필요와 약속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타당하다. 그래서 그런 복음에 의해 나타날 결과들은 설교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져야 한다. 온전한 복음에 대해 충실한 설교는 용기 있는 예언적 행동과 진실한 사회적 행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설교 사역에 대해 두 가지를 검증할 것을 제시하였다: 설교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창조적으로 그 말씀과 복음을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재해석하는가? 예언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취하여 그것을 다른 공동체들과 새로운 상황을 위해 재해석하였다. 예언적 설교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위대한 교훈은 예언자들에게서처럼 우리의 강단도 설교 사역의 임무에 대해 충실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강단의 갱신을 위해 중요한 설교학적 유산이다. 예언자들처럼 온전한 복음에 충실한 설교를 하려면 세상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방법에 대해 단순하고 지속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신학적 관점은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를 통해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 세상을 위하여 성취하시려는 것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런 관점으로부터 그리고 그런 비전과 함께 설교의 전체적인 계획은 그 목적, 방법들, 그리고 재료들과 관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설교자들은 다음의 질문들에 의해 도전을 받아야 한다. “당신은 자유롭게 온전한 복음을 설교하는가?” “당신은 설교 사역에서 온전한 복음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억압 받는 사회에서 설교하는 자유와 책임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도 복음과 관련된 설교자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를 개인적 관심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 또는 통치에 대해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설교하게 하는 신학적이며 경험적인 요소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해석학적 전제들을 더욱 잘 알고 우리의 설교를 복음에 충실하게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에 연결시킬 수 있는가?
설교학에서 결정적인 이슈는 설교가 복음 자체에 뗄 수 없을 정도로 묶여져 있는 이유를 아는 것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설교에서 복음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설교자는 설교에서 온전한 복음에 대해 충실함의 중요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설교 임무에 대한 이해가 설교자로 하여금 더욱 충실하게 설교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강단의 갱신을 위한 신학적 임무는 모든 시대에 강단이 어떻게 설교의 임무, 즉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충실한지 그렇지 않은지로 평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의도는 예언적 설교에서 나타나는 복음에 충실함의 특성을 오늘날 강단의 갱신에까지 확대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인간 개인의 삶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간 모두의 실존적인 상황에도 충분히 관계하시는 것으로 인식하는 온전한 복음에 대해 공적으로 이야기 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개인적 삶에 대해 그리고 또한 우리를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더 큰 사회와 세상의 구성원들인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세상에서 완전히 사회적인 분이며 철저하게 현재적인 분”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설교에서 온전한 복음이 우리에게 개인적인 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이며 구조적인 죄로부터도 돌아서도록 부르며 또한 우리의 자연 환경을 강탈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지기직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복음에 대해 충실하는 것은 설교가 이런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깨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언적 설교에서 온전한 복음에 대해 충실함은 영혼과 제도 모두의 변화를 위해 관련된 정의,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복음이란 주제들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며 뿌리이다. 이런 예언적 설교의 범위는 인종차별, 정의와 함께 하는 평화, 그리고 짓밟힌 자들에 대한 공적 관심과 같은 이슈들에 관해 널리 퍼져있는 문화적 가치들과 연속성을 가진다. 부르기만은 이것을 “세상의 변화”를 제시하는 설교의 장르, 또는 강단의 용어로 말한다면, 팔자 좋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부른다.
강단이 예언적 설교에 대해 개방적일 수 있지만, 강단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할 때 왜곡되게 사용될 수 있다. 설교자가 설교에서 온전한 복음의 입장으로부터 다양한 인간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거나 복음을 인간 조건의 전체 영역과 연결시키려 하지 않을 때 그렇다. 복음에 충실한 설교자는 설교와 종교를 사적인 방법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그런 설교자는 자신이 개인적인 회심, 신앙 발전, 그리고 영적 양육뿐 아니라 정치적 실체, 경제적 분배, 피조물 관리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 설교할 때에도 설교 사역을 의심하거나 희미한 근거 위에서 보지 않는다.
설교에서 복음은 주변 사람들의 개인적 삶에서 뿐 아니라 그들의 공적 세계에 있는 도덕적 힘이다. 우리의 전체 사역에서의 설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위한 관심에 대한 증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인간 조건의 모든 영역과 연결시켜야 한다. 목자적 목소리와 예언적 목소리 모두 안에 있는 복음은 우리의 처음 관심이 자연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일 때에라도 총체적 희망에 의존한다. 복음은 공적 문제들과 사회적 관심들과 관련된 설교에 집중한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의 상황을 포함해야 하며, 그래야 우리는 더 넓은 사회와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복음을 구분할 수 있다면 설교는 사회적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확신들, 열망들, 평소의 주장들을 가져와야 한다. 우리가 설교하는 목적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어 그들의 신앙을 공적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이 복음의 침투의 의미를 탐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차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시대에는 갈등 있는 세계에서, 갈등 있는 신앙공동체에 속한, 갈등 있는 개인들 앞에서, 설교자들이 강단 뒤에 숨거나 논쟁적인 이슈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마주치는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의자가 빈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개인들에게 제한될 수 없고 개인들이 살고 있는 상황의 변화까지 포함해야 한다. 버트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강단이 복음을 선포할 때, 그것은 사람들을 “단순히 내적 억압으로부터가 아니라...우리를 포로로 만드는 제도들, 사회적 태도들, 습관들, 그리고 억압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는 단순히 공포, 억압, 신경성 불안들과만이 아니라, 또한 세상의 정사와 권력들과도 싸워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우리를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구조적인 죄로부터도 돌아서도록 부르며 또한 우주적이며 제도적인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충실함을 요구한다.
3. 설교의 사회적 차원
설교의 갱신을 위한 세 번째 단계는 복음의 개방성에 집중된 설교의 사회적 차원들을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세계에 적용하는 것이다. 복음은 공동체의 삶에 대한경험으로부터 나타난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설교로부터 오는 이런 설교학적 유산은 본능적으로 “사회적 행동”이며 공적 생활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면들과 관련된 복음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설교의 사회적 차원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사회적 이슈들에 충실해야 한다. 설교의 사회적 차원들은 우리의 경험,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선택된 사회과학 지식에 대한 친숙함으로부터 일어난다. 사회적 상황과 사회적 분석은 설교를 위한 주된 중심점들이다.
설교자에게 설교는 사고하는 한 방식일 뿐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이다. 설교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뿐 아니라 행동에 의존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 사역에 대해 충실하게 만들며 설교의 사회적 차원들에 대해 정의롭게 만든다. 그 이유는 설교에서 온전한 복음을 나누는 효과적인 방법들의 하나가 설교의 공적 차원들에 대해 충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단순히 비난이나 사회적 비판을 도덕화 하는 것 이상의 사회적 차원들을 가질 때, 그것은 복음에 대해 더욱 충실한 증언이 된다. 그래서 설교에서 복음에 대한 충실함은 진실한 기독교의 사회적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오늘날 강단은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문화 속에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말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윌리몬(William H. Willimon)과 하우어워즈(Stanley Hauerwas)는 이와 같은 설교 상황의 까다로움을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말한다. 물론,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윌리몬은 설교를 복음에 대해 세상 속에 널리 퍼진 세속적이며 시민-종교적 세계관들과 마주치는 복음전도로 이해한다. 오늘날 다원 사회와 변하는 세계에서 강단은 공적 영역의 문제들에 관련하여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질문들을 고려하고 그것들에 반응하도록 요구된다. 사회적 운동들과 다른 역사적 현상들이 도덕적 차원들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예언적 설교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한다. 트레이시(David Tracy)는 인간의 지식과 실존의 모든 면들이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영역들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들은 그런 차원들에 관한 행동을 확인하고 다듬고 안내하도록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정책에 대한 도덕적 차원들이나 압제 양식들로 나타나는 종교적 차원들은 항상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오늘날 강단은 다시 공적 영역에 간섭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설교의 한 목적이 사람들을 격려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공적 영역에로 확대하고 이 복음 침투의 의미들을 탐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은 성경이 시작부터 끝까지 사회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적 문제들과 사회적 차원들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퍼뜨린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강단은 심하게 힘이 빠지고 있으며 계속 명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럼에도 설교는 부흥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하는 사역으로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설교에서 전해진 말씀은 성육신된 말씀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 진 말씀을 해석한다.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사회 안에 있는 공동체를 섬김으로 확실하게 포용되고 철저하게 탐구되는 한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이다. 설교는 한 때 전해지고 쓰여 진 단어들을 다원 문화 속에서 공적 의미를 가지고 다시 진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오늘날 강단의 갱신을 위하여, 우리는 설교신학의 공적인 면을 발전시켜야 한다. 설교 사역의 갱신을 위한 우리의 많은 신학적 임무는 일반적으로 강단의 사회적 차원들로 인식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항상 사회적 상황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학을 위한 신학적 임무는 교회생활에서 강단 갱신의 “실제적인 기대”와 관련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강단들은 건전한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설교학을 위해 개념적이며 실제적인 기초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설교의 사회적 성격이 지역교회에서 매 주일 이루어지는 설교의 실제적인 세계를 채워야 한다. 애비(Merril R. Abbey)가 주장하듯, 설교자는 “올바른 것과 그 올바른 것이 공적인 문제들과 뗄 수 없을 정도로 묶여져 있는 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설교의 사회적 차원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설교자들은 예언적 설교로부터 강한 자원들을, 즉 어떻게 선배 설교자들이 예언적 설교에 대한 자신들의 신학적 이해를 실제적 필요들에로 돌리고, 그리고 어떻게 예언적 설교가 그들의 설교 사역에서 역사하였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설교자는 예언적 설교의 관점으로부터 설교의 사회적 성격의 다양한 차원들을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IV.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
21세기에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복음의 균형에 대한 신학적 이해로부터 급변하는 사회에서의 설교 사역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설교자들은 그 어떤 방법보다 설교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에서 통전적 변화(the Holistic Transformation)를 위한 전인적(몸, 마음, 영혼) 목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모든 인간의 제도와 또한 개인의 문제들을 기독교화 하려는 목적을 반영하기 위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강단은 인간의 영적 필요를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함께 조화시켜야 한다. 모든 설교에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함께 다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복음을 개인적이고 내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방향이나 아니면 사회적이고 외적이고 단체적인 방향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브르기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보다 광범위한 공적인 세계에 대한 어떤 책임이나 기여함이 없이 그저 자기 가정이나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서 사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주관성으로부터 좋은 설교가 방해를 받는 경향이 있다. 우리 가운데 널리 만연되어 있는 속임수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인간됨을 형성하는 거대한 공적인 주제들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설교를 자의적으로 개인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로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청중들의 삶의 전 영역을 복음과 만나게 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의 설교가 목양적 색조를 또는 예언적인 색조를 짙게 띠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분명한 종류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복음의 균형, 인간의 모든 삶의 조건을 포함하는 총체적 복음에 대한 충실한 증언을 침묵시키려는 어떤 경향에도 맞서 계속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으로 들어 갈 때부터 우리 주위의 환경을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그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균형 있는 복음 즉, 온전한 복음을 끝까지 증거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온전한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 즉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제도까지 포함하여 변화를 일으킬 설교는 무엇인가? 강단의 갱신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설교신학의 주제들, 즉 설교의 역할, 설교와 복음과의 관계, 그리고 설교의 사회적 차원들과 관련하여 설교에서 전인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통전적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1. 예언자의 직관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에 먼저 필요한 것은 예언자의 직관(Prophetic Instinct)이다. 예언적 직관은 통전적 변화를 위한 복음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 사회와 세계를 해석하려는 삶과 목회의 한 방법이다. 교회의 실존은 예언적이다. 그래서 만일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세계에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휴브너(Harry Huebner)는 “교회를 단순히 하나의 예언적 임무를 띠고 있다고 보는 것보다 본래부터 예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가에 강한 영향을 준다.”고 말하였다. 또한 요더(John Howard Yoder)의 제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건들을 계속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모인 백성으로 시작되었으며 존재하였다고 이해될 때에만 예언자들의 중요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관점으로부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해석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실존에 매우 중요하였다.
이렇게 예언자의 역할을 해석자로서 본다면, 예언적 직관은 우리의 모든 목회에 규범이 되어야 한다. 이런 예언적 역할은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에 의해 확인된다. 우리가 인종, 빈곤, 그리고 전쟁문제 등에 관한 예언적 설교로부터 배우는 것은 정의에 대한 증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데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관심과 행동이 필연적으로 비정의에 대해 심판을 가져옴으로 예언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땅에 체류하는 자들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필수적으로 응답하는 하나의 복음이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신앙공동체를 위해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평화에 대한 진지한 요구는 군국주의로부터 이익을 보는 자들과의 논쟁을 위해 필수적이다.
비록 오늘 우리의 문화가 예레미야나 호세아의 시대와 외관상으로는 거의 닮지 않았을지라도, 오늘에도 예언적 말씀을 위한 필요는 그 때처럼 매우 요구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우리와 매우 다른 환경에서 독특한 설교자로 간주된다 해도, 사실 오늘 우리는 예언자들의 미래를 향한 비전과 사회적 비판을 통해 예언자 전통이 지닌 가장 깊은 진리를 보존해야 한다.
예언적 전통은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공동의 생활과 공적 이슈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예언자의 직관을 요구한다. 설교자들은 말씀을 구체화 하는 사회 정의와 핍박 받는 자들을 위한 관심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교회,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함으로 이상론적인 개인의 관심들에 쏠리는 설교의 안이함에 도전하고 구속적인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유대-기독교의 예언자의 전통에 있는 예언자의 직관으로 우리는 인간 삶의 전체 영역을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사랑 안에 유지할 수 있다. 설교에서의 첫째가는 전제는 어떤 이슈나 관심이라도 설교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말하는 것은 삶의 어떤 특수한 차원에 있는 하나님의 죽음이나 무관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적 설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혼란시킬 만큼 사랑하신다는 믿음에 기초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황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정말 총체적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은 세상과는 상반되는 인간 상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해석자의 역할을 위한 예언적 직관은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에 두 가지 비판적 차원을 제시한다. 하나는 개인적 동기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설교의 목적이다.
첫째로, 통전적 설교를 위한 예언적 직관은 사회적 관심과 문제들을 다루는 설교를 하도록 조심스럽게 동기를 부여한다. 반 시터스(Arthur Van Seters)는 설교자들이 고려해야할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설교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내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도록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회중을 참여하도록 하는(또는 참여시키기를 주저하게 하는) 방법에 나의 사회성이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가? 어떻게 나의 사회성이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설교를 하도록 생각을 형성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예언적 직관에 관하여 설교자들이 통전적 변화를 위한 개인적 동기를 생각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우리의 편견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청중들에게 죄책감을 지우는 식으로 분을 내며 설교하는가? 혹은 예레미야처럼 우리의 관심을 표현하는 슬픔과 비탄의 마음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대표적인 주변인들로 여기는데 관심이 있는가? 혹은 교회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상처를 받는 자들과 복음의 관련성에 관해 깊고도 지속적인 확신이 있는가?
둘째로, 통전적 변화를 위한 예언적 직관은 설교의 목적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설교의 목적에 대한 주된 질문은 “본문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사회적 이슈들과 연관시키려는 설교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은 흔히 두 번째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질문들로 씨름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시작이 본문이든지 아니면 대화 주제이든지 상관없이 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사로잡힐 것이다.
설교에서 예언적 직관은 청중이 성서와 신학을 기초로 설교자의 전제들을 평가하도록 용기를 줄 수 있다. 우리는 청중에게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기초를 강화시킬 도전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관점들이 신앙공동체를 받쳐주고 인도하는 이런 기초들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진다: 결단과 희망적인 비전에로의 도전과 부름. 이 도전과 부름에 대해 사이더(Ronald J. Sider)와 킹(Michael A. Ki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적 관심을 다루는 설교는 사람들을 특수한 입장을 향해 인도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그런 입장에 도달할 자료들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 설교는 사람들에게 문제들에 대한 예언적 이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결단에 대한 도전과 부름은 예언적 의도를 가진 우리의 설교들 뒤에서 그 동기를 부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 편의 설교 속에서 열정을 가지고 삶의 깊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희망과 변화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비전을 나누고, 통찰력을 높이고, 지평을 넓힐 때 가장 잘 훈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강단은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분간하는 에스겔의 시간 중심의 전통 속에 서 있다. 또는 믿음, 소망, 그리고 기대에 관한 예언으로 포로로 사는 사람들의 좌절을 해결하는 이사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열정과 정의의 윤리적 행동에 대해 철저히 뉘우침으로부터 금식에 대해 철저하게 재해석하는 권위를 받은 제2 이사야의 전통에 서 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자유하심 속에 있는 미래는 보통 회개에 대한 부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오한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때에도 다름없다.
2. 목자의 감수성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에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목자의 감수성(Pastoral Sensitivity)이다. 목회 현장에서 오랜 동안 사역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목자적인 것과 예언적인 것 사이에 있는 밀접한 관계를 거의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에 띄게 양떼들을 돌보는 부드러운 목자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대담한 예언자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성서적 묘사보다는 더욱 현대의 고정관념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베버(Max Weber)는 예언자를 “순전히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으로 정의를 내림으로 예언자는 전통이나 제도 그리고 제사장에 반대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기독교 전통을 세웠다. 이런 이해는 예언자와 제사장 사이, 예언자 개인과 공동체 사이, 그리고 정의와 자비 사이에 3종류의 이율배반을 가정하고 있다.
설교에 관하여 이런 이율배반은 다음과 같은 거짓 개념들에로 연결된다. 첫째로, 예언적 설교는 설교자를 신앙공동체와 반대 위치에 놓는다. 둘째로, 설교자들은 서로 다른 부름에 의해 자신들이 예언적인 설교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목자적인 설교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예언자의 직무는 정의에 기초를 두는 반면, 목자의 직무는 자비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엘런(Ronald J. Allen)이 지적한대로, “예언적 설교자는 신앙공동체 안에 속한다. 예언적 설교자는 신앙공동체 위에 군림하거나 반대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래서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목자가 되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다. 예언적 설교는 가장 목자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이스라엘의 정통적인 예언자들의 사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언자들의 설교에 관한 기본적 관심이 공동체의 생명을 확립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목자의 관심이거나 감수성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성서 본문들은 공동체의 본문들로 그 신앙공동체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었다. 그것들은 고립된 개인들에 의해 고안되었거나 그들을 위한 특권적 메시지들로 전달되지 않았다. 구두로 형성되고 전승되고 결국은 공동체에 의해 쓰여 진 형태로 경전이 된 매우 다양한 본문들은 하나님과 신앙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렇게 간접적인 의미에서 모든 본문들은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보존하는데 하나님의 목적과 연관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설교는 교회 뿐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와 세계에서 불의와 압제로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돌보고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적 설교는 목회적(목자적) 설교의 한 확대이다. 목회 현장에서 목자와 예언자로서 설교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설교에 의해 회중을 형성하고 공동체 생활에 영향을 주고 바로잡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설교는 먼 곳 뿐 아니라 집만큼 가까운 곳에서도 불의로 고난당하는 자들을 포함하도록 관심의 영역을 넓히고 특별히 그들의 고난의 원인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사회와 세계에 관해 해석하는 양식은 널리 퍼져있는 태도와 행동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공동체로 하여금 그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의 중요한 면들을 주장하거나 재주장하는 것이다. 예언적 설교는 공동체 안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관심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처럼 예언적 설교의 역할을 해석하며 강조하는 것은 목자의 감수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는 목자의 감수성을 위한 필요와 연관된다. 이에 대해 윌리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예언자의 옷을 입을 때에라도 우리의 목자의 관심을 제쳐놓지 않는다. 그런 감수성은 정서적 강압, 도덕적 잔소리, 그리고 소위 많은 예언적 설교에서 제시되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프로그램들에 반대하는 뛰어난 안전장치이다. 날마다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목자적인 면은 예언적 설교가 고발하고 날카롭게 하는 면을 충분히 무디게 만들지 않는다.
목자로 사람들과 견고하게 연결되는 것은 예언적인 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비록 예언적 목회가 목자적 목회의 확대라고 해도, 예언자의 역할은 목자의 경험들에 의해 날카롭게 된다.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는 정의에 관한 문제에만 제한되지 않고 우리가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계시된 진리의 빛에 비추어 해석하는 문제까지 포함한다. 그처럼 해석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런 이야기에 의해 변화된 사람들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정의로운 행동이나 제도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이방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에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설교의 주제가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인 이유이다.
통전적 변화를 위한 예언적 설교에서 오늘의 설교자는 공동체 안에 그리고 그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예언자로서의 목사 임무는 공동체 앞에서 그 공동체의 존재를 결정하고 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사가 예언자같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그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목자의 임무는 교회의 사역에 대해 특수한 수단들이 공동체에게 그 공동체를 예언적으로 만드는 이야기를 기억나도록 하는 한에서는 예언적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성만찬을 제공하는 것 이상 더 예언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두 가지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목사가 예언적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목사가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의 본질을 지닌 예언자같이 되어야 하는 것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부터 이해하면, 원칙적으로 목자의 임무와 예언자의 임무 사이에는 어떤 갈등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설교는 항상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신뢰관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그 신뢰관계는 예언적 설교에서 일어날 때 두 배가 된다. 만일 우리 설교자가 목자로서 회중을 향해 신실하게 움직였다면, 회중 역시 우리가 그들이 이미 경험하고 관심을 가졌던 예언자로서 그들을 향해 움직이도록 허락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어헤드(Lee S. Moorehead)는 “설교가 대담하고 거의 거만한 일이기 때문에, 설교를 하는 자들은 스스로 겸손하게 섬기는 삶으로부터 설교하지 않는다면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역교회 설교자들은 목자의 감수성을 가지고 어느 정도 인정된 강단의 자유를 누린다. 그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이용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강단의 자유에 대해 평신도와 함께 상호 탐구하는 일이 가능함을 깊이 깨닫게 된다. 강단의 자유가 설교자와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단의 자유가 지닌 한계는 무엇인가? 설교자와 그의 회중의 책임은 무엇인가?
목자적인 것과 예언적인 것은 모두 안수를 받는 자들의 기능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생활에서도 서로에게 속한다. 예언적 사역은 안수 받은 자들의 엘리트주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되는 신앙공동체에로 부름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름을 받는 것은 보냄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언적 설교와 사역은 세상과 관련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기능이다. 목자의 감수성은 상호 설교를 위한 기대 장치를 위한 길을, 그리고 특별히 예언적인 말을 하기 위한 길을 마련할 수 있다.
강단은 우리 시대에 핵심적인 이슈들을 전하기 위한 여러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어야 한다. 논쟁적인 설교 주제들은 평신도들을 직접적인 토의 과정에 포함시키는 심포지움과 대화에서 탐구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한 편의 설교와 관련된다. 설교자는 전해져야 할 모든 견해들을 위한 기회를 통해 먼저 공적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그 다음에는 설교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한 주제가 논쟁적일수록, 다른 의견들을 청취하기 위한 포럼을 더욱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복음을 모든 삶의 영역에 연관시키는 강단의 책임까지도 목자의 감수성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강단의 자유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설교자들은 다소 우리의 설교에 매료된 청중이 믿음의 동료들로 구성된다는 것과 상호 나눔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감수성이 있는 목사는 진리 뿐 아니라 회중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들을 수 있는 권리도 종종 신앙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진 통찰과 경험에 의해 전해진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3. 제사장의 말씀 구현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에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말씀을 신앙공동체 속에 구체적으로 경험케 하는 제사장의 말씀 구현(Priestly Embodiment of the Word)이다.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통전적 변화를 위한 설교자의 주된 역할은 설교의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상황에 관한 예언적 직관과 성서와 설교의 관계에 관한 목자의 감수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통전적 변화를 위해 놓칠 수 없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예전적 상황에서 발견되는 “제사장의 말씀 구현”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예언자의 직관과 목자의 감수성과 함께 신앙공동체에 의해 경험되어야 하는 말씀, 공동체 생활, 그리고 성례전의 통합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강단은 성례전을 설교의 콘텍스트로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제사장의 말씀 구현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예언자의 열정과 목자의 돌보는 힘(능력)에 “인간의 조건이 피할 수 없으나 인간이 된 말씀의 신비에 의해 변화되는 상황에서 성만찬을 축하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한다.” 라이스(Charles L. Rice)가 주장하듯이, 제사장적 설교자는 신앙부흥보다는 성례전에, 청중보다는 회중(Congregation)에게, 그리고 전자로 된 토크쇼 매개체보다는 인간화 된 공동체의 모임에 더 관계된다. 그래서 제사장적 설교자는 성만찬에서처럼 설교를 구체화하여 신앙공동체의 삶을 자신과 더 밀접한 것으로 확인하도록 한다. 설교의 예전적이며 성례전적 상황에 있는 제사장적 설교자는 “전체 공동체에 속하고 있는, 예수의 고난을 의미하는 부수어진 빵과 포도주와 같이 설교하는 순간에 나누어진 공동의 삶과 이야기를” 구체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의 말씀 구현은 예언자의 비전을 풍성하게 하여 예언적 설교를 위한 문을 열 수 있다.
우리의 설교가 통전적 변화를 위해 진실로 예언적, 사회적, 그리고 우주적이 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비평의 수단 뿐 아니라, 예전적 상황 주위에 있는 문화적인 비평의 수단을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더욱 성서적, 교회적,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의식의 그 무엇(what)과 이유(why)는 예언적 설교에 대한 관심의 중앙에 있어 왔다. 그러나 그 무엇과 이유는 항상 어떻게(how), 즉 만져볼 수 있으며 볼 수 있는 표현을 갈망한다. 설교는 하나님과 교회가 주고받음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예전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의식으로부터 설교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강단은 먼저 사회적으로 그리고 우주적으로 형성된 예전의 몇 가지 상황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조사하고 크게 그리고 넓게 흩어져 있는 성도들의 모든 가정을 방문하거나 모든 병든 자들을 방문하고 또는 영적 인도가 필요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예언자이며 목자로서의 설교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설교자의 심장을 가지도록 계속 계발할 수는 있다. 설교자는 성례전을 축하하면서 사람들과 그들의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관심 뿐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위한 자신의 진정한 관심까지 전할 수 있다.
그 외에 무엇이 될 수 있든지, 교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예배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관한 복음을 기억하고, 재연하며, 다시 현존하게 하며 다시 소유하기 위해 모이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만일 교회가 놀라움, 사랑, 그리고 찬양을 잃지 않는다면, 교회는 섬김, 희생, 그리고 성화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만일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인간성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이라면, 그 때는 확실히 문어로, 구두전승으로, 또는 언어로 한 방법이나 또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는 예전은 우주적 이미지들과 관심들에 의해 전달될 것이다.
예언자의 비전을 주고 유지하는데 성례전이 가지는 위치는 무엇인가? 라이스는 브루기만이 제시한 두 가지 예언자의 행위--죄악 된 삶과 습관을 벗기는 것(dismantling)과 활기를 돋우는 것(energizing)--를 근거로 “성만찬은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선을 핍박하는 힘의 구조를 제거하는 것과 모든 것들이 기다리는 분의 임재를 활력 있게 하는 것을 결합하는 예언적 행위”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상징적으로 모든 것이 거룩해지고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성만찬 식사,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음식이 되는 성만찬 식사에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비전을 행동으로 옮긴다. 세례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충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에로 향하도록 만드는 신앙공동체에 속함을 선포한다. 세례 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공평함을 표현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가족 안에 속함을 표현한다. 성례전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아무 공로 없이 받는다는 의미에서 인간 해방을 위한 강력한 힘이 된다. 그러므로 예전적 상황에서 설교자들은 이런 의미들을 해석하여 예배자들이 알 수 있도록 한다.
성만찬 보다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관점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성만찬 초대는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에 헌신하도록 만든다. 점차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으로 나누는 것이 교회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주일예배 이상인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 주님의 몸의 부러진 덩어리를 나누는 것은 예언적 비전으로 우주적인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공동의 인간성의 문제, 즉 부한 자들과 굶주리는 자들, 핍박하는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 그리고 중심에 있는 자들과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 사이의 극도의 불균형의 딜레마의 문제, 결국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필연적으로 모든 기독교 신학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우주적 은혜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은 우리를 우주적 헌신을 위한 관심 속으로 몰아넣는다. 예전과 삶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것은 예언자로서의 목사에게 부여된 핵심적인 일이다. 현재 우리의 예전을 의미 있게 설명함으로, 우리 설교자들은 예전의 함축적인 의미들을 끌어올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예언적 설교의 기초를 위한 우리의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관심을 키우고 제공할 수 있다.
셰퍼드(Massey Shepherd Jr.)는 “예전은 주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제공하고 그들이 그 사명을 위해 불타도록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적으로 올바른 예전에 의해 제공된 설교는 강제적인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를 피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일(the Work of the People: 예전)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요청할 것이다. 충실하며 창조적인 예전에서의 설교는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키고, 사람들의 필요를 향해 움직이도록 격려하고, 그리스도의 넓은 사랑을 기억하도록 집중하게 하는 믿음의 상징과 이미지를 높이고, 모든 형태의 억압과 노예화 문제를 제기하는 하나님의 나라나 통치를 향하도록 할 것이다.
V. 맺음말
오늘날 우리 강단의 갱신에 대한 필요는 점차 늘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인류, 철학, 생태 등 교회를 둘러 싼 환경으로부터 오는 급하고 현격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사회로부터 공신력을 상실하고 있는 강단에 갱신에 대한 필요를 더 하고 있다. 더 넓고 다양한 문화의 상황들은 질적인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설교에 설교의 위치와 목적, 통전적 복음(Holistic Gospel)에 대해 충실한 설교, 설교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설교는 설교신학을 전제한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 자는 복음 선포에 대한 관점을 전제로 한다.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는 설교를 하는 이유와 설교의 목적을 포함하여 복음에 대한 신학적 사고로부터 일어난다. 설교 행위는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청중의 삶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수단임을 암시한다. 설교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든, 그리고 설교자가 그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설교의 목적은 항상 신학적인 근거 위에 있다. 그래서 설교 행위는 이미 신학적인 진술을 함축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강단이 변하고 있는 사회와 세계에 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예언적 설교를 통해 갱신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신학적인 설교는 문화에 대한 민감성과 설교자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설교는 계속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복된 소식, 즉 복음 선포가 될 것이다. 설교는 계속 철저하게 성서적이며 동시에 가장 최근의 커뮤니케이션 이해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언적 설교는 설교자들에게 믿음과 삶의 중심 문제들에 접근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 이 시대의 인간 경험에 근거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회중은 설교자들에게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함께 나누기를 요구할 것이다. 설교자들은 설교를 통해 회중을 대신하여 그 삶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고 삶의 경험에서 발견한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눌 것이다.
예언적 설교는 어떤 한 그룹에 의해 주장될 수 없다. 우리는 예언적 설교를 오직 특별한 사명으로 부름을 받은 설교자들에게서만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 질문이 아직도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예언적 설교가 모든 설교자들에게 가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설교학적 관심을 “균형 있는 복음”에 둠으로 그리고 그 복음을 우리의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삶의 더 넓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토론함으로 예언적 설교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균형 있는 복음은 모든 설교자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와 상황에 타당성을 갖는 성서적 설교 방법을 제공한다. 균형 있는 복음은 오늘을 위한 설교신학의 출발점을 제공하여 예언적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분명히 설명할 기회를 가진다.
우리의 통전적 목회에 대해 생각할 때, 복음을 인간 삶의 모든 영역과 연결시키려는 설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설교의 목적은 예배, 상담, 교육, 또는 섬김에로 이끄는 것과 충돌되지 않는다. 신앙공동체를 대표하는 우리의 통전적 목회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문제들에 대한 관심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목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우면, 우리는 많은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인간의 위엄과 가치를 높이는 제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증하는 자들로 보이고 들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 억압 받는 자들, 주변으로 밀린 자들에 관계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이 강단으로부터 갑작스런, 귀에 거슬리는 외침이 되지 않고, 우리의 통전적 목회의 성격을 드러내야 한다. 성도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야 하는 것은 강단이 시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고, 그리고 우리 목회의 나머지 영역과 불일치하는 침묵이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에 민감하고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변화 모두를 위한 설교자로 부름 받은 책임에 충실해야 한다.
* 논문 주제어 : 강단갱신, 설교신학, 통전적 변화.
(The Renewal of the Pulpit, A Theology of Preaching, The Holistic Trans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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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heology of Preaching for the Renewal of the Pulpits:
Preaching for Holistic Transformation
Huh, Do-Hwa
Assistant Professor
Keimyung University
Daegu, Korea
This project attempts to set the stage for investigation of a theology for the renewal of the pulpits in the 21st century. We suggest that there is an increasing need for the renewal of homiletics today. We then undertake to understand that need in the context of the wider cultural movements. That leads us to postmodernism and the attempt to describe the characteristics of theological reflection in such age, especially as it relates to preaching: the place and purpose preaching, fidelity to the whole gospel in preaching, and social dimensions of preaching.
The very act of preaching assumes a theology. One who preaches presupposes a view of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Why preach at all? What os the purpose of preaching? The act of proclamation arises from a reflection on the gospel. It supposes that the articulation of the gospel message is in some sense a fundamental means by which the gospel does its work in the lives of the listeners. There are always theologically grounded purposes for preaching, whatever they may be and however unreflective the preacher may be about them. The very act of preaching is already an implicit theological statement.
All of this points us toward the necessity for a renewal of the pulpit through prophetic preaching in response to the changing world, but of a prophetic preaching that will take new forms. In this article, we hope to suggest ways in which preaching for theological formation can be done with both cultural sensitivity and fidelity to our calling. Preaching will continue to be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the good news of what God has done for us in Christ. It will continue to be radically biblical and will be shaped by the most recent understandings of communication. But prophetic preaching for a new century will need to provide the preachers access to the central issues of faith and life, and show how these issues are rooted in contemporary human experience. Congregations will ask their preachers to share with them their quest for life's meaning and purpose. Preachers will speak the search on their behalf and share with the congregation in the discovery of frameworks of reference for life experience. How that might be begun will be the subject of the next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