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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법륜상 (사르나트 고고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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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붓다의 깨침은 중생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고 붓다의 생애는 중생들의 영원한 삶의 모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붓다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2600여 년 전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았던 붓다의 삶은 간 곳 없고 기도하고 매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신통자재한 부처님만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찾는 붓다는 우람한 불전(佛殿)에 안치된 불상도 아니요, 우상화되고 신격화된 붓다도 아니다. 자신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인간 고따마 붓다이다. 고따마 붓다의 삶은 붓다 자신의 존재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래서 고따마 붓다의 삶은 붓다가 살았던 구체적인 역사상황을 통해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고따마 붓다와 오늘 우리의 만남은 항상 새롭고 신선미 넘치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글과 머리로 만나는 건조함이 아니라 삶과 가슴으로 만나는 온전함이어야 한다.”(501쪽)
강남포교원장 성열 스님의 『고따마 붓다』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덧붙여진 신화와 설화의 더께를 걷어내고 실존했던 붓다의 맨 얼굴을 드러낸 역작이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여래의 몸은 금강신인데 어떻게 병이 나고 어찌 괴로움이 있다는 말이냐’(유마경) ‘만약 여래도 늙음과 죽음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놈은 지옥에 들어가기를 마치 자기 집에 가듯이 할 것’(대반열반경) ‘석가모니 부처님은 금생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랜 과거에 깨달았다’(법화경)는 식의 초월적인 붓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아난다에게 “나는 인생행로의 끝에 도착했고 생의 한계를 맞고 있다. 나는 이제 쉬고 싶을 뿐이다”라고 했던 분.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제자에게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봐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이라고 강조했던 분.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임종의 날을 향해 천리 길을 걸으면서 자비 가득한 말씀을 나누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자신을 뵙고자 했던 이면 그가 누구이건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주었던 분, 바로 인간 고따마 붓다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방대한 초기경전과 각종 연구 성과를 토대로 훗날 대승불교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실상(實像)을 허상(虛像)에 묻어버렸던 역사적인 붓다의 존재를 되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와 인생의 밑바닥에 깃들어 있는 이치를 통찰하는 철학자,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하는 개혁자, 무지한 대중을 지혜의 길로 이끄는 교육자,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을 꿰뚫어 통찰하는 심리학자, 민생고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경제학자,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이들을 경계하는 윤리학자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또 구도의 길에서 천둥번개 치고 폭포수가 내리쏟는 듯한 치열한 싯닷타의 삶과 정각 후 평온하고 자애로운 성자 고따마 붓다의 모습도 밀도 있게 조명하고 있다. 평생 아들을 생각하고 임금 자리를 중하게 여겼던 아버지 숫도다나 왕을 화장하는 자리에서 한 붓다의 설법을 비롯해 물로 인해 다투는 사캬족 백성들과 출가를 위해 자신을 찾은 아들 라훌라를 향한 법문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 특히 붓다가 열반에 들자 “부처님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행복한 분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세상의 빛이 너무 빨리 사라졌다.”라고 울부짖었던 사람들의 절망과 깊은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뽀얀 먼지 켜켜이 쌓인 거울은 더 이상 거울이 아니다. 성열 스님의 『고따마 붓다』는 지혜롭고 자비로웠던 인간 붓다의 진면목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인간 붓다’의 가르침과는 사뭇 동떨어진 한국불교를 새롭게 닦아내려는 아픈 자성의 몸짓이다. 2만2,000원.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944호 [2008-04-08]
첫댓글 좋은정보 고맙습니다.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제자에게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봐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이라고 강조했던 분...] ==>> 이때 "나(=세존)" 는 주격으로 "나"가 아닌.. 행위한 자에 대한 지칭 대명사가 아닙니까?..
좋은 말씀이네요. 행위자를 지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