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지금 동료들의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택시 안에 있어요. 밖에는 비가 내리고 유리창은 빗물과 서리가 고여 있군요. 좀전에는 캐롤과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그녀도 다른 곳에서 모임 약속이 있는데 남자동료가 우연히 이 자리를 보고 제게 자기와 다른 이들이 주말에 모임이 있으니 시간이 되면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 왔어요. 캐롤은 자신의 모임에 와도 좋고 그 모임에 가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편하게 얘기했지만 그 얘기를 어떻게 편하게만 들을 수가 있겠어요. 어떤 모임에 가든 선택을 하면 그 결과는 명확해 지겠지만 그 전까지는 모든게 불투명해 보이는 게 사실이에요. 택시 유리창에 고인 빗물과 서리 사이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처럼.
캐롤, 캐롤 에어드라고 불리는 그녀를 처음 본건 몇 달전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백화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죠. 이런게 하나의 운명같은 만남인 걸까요. 그 많은 군중들, 고객들의 움직임 사이에서 그녀는 단연코 돋보이는 존재였어요. 잠깐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서는 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이 어떤게 좋은지 물어왔어요. 저는 기차와 역이 있는 모형세트가 좋겠다고 추천해 줬어요. 그녀는 고맙다고 계산하고는 장갑을 두고 갔죠. 그 장갑을 그녀에게 우편으로 부쳐준 후 감사의 전화를 받고 저녁을 같이 하면서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었죠.
캐롤과의 관계가 진전되어 간 것은 아직은 20대 초반인 저에게는 그녀의 호의적이고 사려깊은 말투, 세련되고 자기다움이 묻어나는 패션에도 아마 그 영향이 있었을 거에요. 그러나 사실은 그녀와의 대화가 진짜 대화라는 거였어요. 제게도 남자친구가 있고 아는 남자들도 있긴 했지만 그 관계는 대화라기 보다는 그냥 아는 사이일 뿐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존재가 아니었죠. 대화라는 것이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인데 캐롤과 대화할 때면 내 생각을 얘기하면 그녀가 받아주고 그녀의 얘기도 제가 들어주었어요. 저의 테레즈라는 이름조차 테레사가 아니라서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이라는 그녀의 언급은 뻔해 보이는 듯해도 뻔하지 않은 언급이었죠. 우리는 그렇게 서로 대화하며 소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지만 작지 않은 기쁨을 느꼈을 거에요. 그녀에게도 이쁜 딸이 있지만 남편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이혼소송중이란 것도 알게 되었죠. 그녀의 집에까지 초대되어 가긴 했지만 남편과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후에 연말연시를 우리 둘만을 위해 아이오와의 워터루까지 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죠.
“연말연시에 난 늘 혼자였지요. 남편은 사업에, 고객들에, 일에 둘러싸여”
“저도 늘 혼자였어요. 백화점 고객들에 둘러싸여”
그런데 이렇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죠. 캐롤은 제가 백화점 점원으로 있지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최신의 카메라를 선물받았어요. 그 물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얼핏 좋아한다는 것을 듣고는 그것을 잊지 않고 주는 마음에 크게 감동했죠. 그리고 캐롤을 좋아했기에 그녀를 피사체에 담아 찍은 사진은 남들이 봐도 매력적으로 보였나 봐요.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도 사랑스럽게 보이나 봐요.
제가 이제 20대이고 남자친구가 있긴 했지만 그런게 잘 안 맞았어요. 남자친구는 세계여행을 가자고 얘기하곤 했는데 제가 사진찍는 걸 좋아하든 다른 무엇을 원하든 그런 것엔 큰 관심이 없었죠. 관계는 소통이고 소통에서 서로의 발전이 있을텐데 그런 관계에서 저에게든 남자친구에게든 결과적으로 무슨 도움이나 발전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워터루에서 둘만의 더없는 짧은 시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작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후 캐롤과 저는 떨어져 지냈고 저는 혼자였지만 사진의 적성을 살려 저에게 더 좋은 곳인 언론사로 직장을 옮겼죠. 그러다가 캐롤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거에요. 전 이제 언론사에서 사진 일을 하면서 큰 변화나 인생의 소용돌이없이 살아야 할까요. 그녀에게 다시 가야 할까요. 이 택시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추억들을 잠깐 반추해 봤어요.
이제 전 내려야 해요. 남자와 직장동료들의 모임이 있는 곳으로 가야할지, 캐롤이 모임하고 있는 곳으로 가야할지. 결국 선택은 제가 해야겠죠. 저의 삶이니까요.
--------------------------------
이 영화의 원작이 지금으로부터 60년도 전에 나왔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이라는 원작소설을 기초로 했다는 점은 놀랍다. 그녀는 [태양은 가득히]로도 불리는 리플리 시리즈의 원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에 동성애라고 하면 아직 제대로 인정받기는 커녕 질병의 하나로 인식되던 시대에 이런 소재로 썼다는 것은 그녀가 필명을 통해서 발표했지만 여전히 대단하고도 인상적인 사건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원작이 21세기를 넘어서 영화로 재탄생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배경인 미국을 들더라도 각 주정부의 입장은 다르지만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미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에 대한 합헌을 판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과거의 원작을 과거의 것으로만 남겨 두는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인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에서는 더더욱.
그렇지만, 토드 헤인즈 감독의 최신작인 [캐롤]은 외형상 퀴어영화의 모습을 띠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 관계, 진전,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존재시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자아를 확인하고 발전시켜주기 위해 존재시키는 것. 일방이 아닌 서로의 소통을 위해 사는 것. 그 소박하고도 간단한 삶의 방식은 이성 뿐만이 아니라 동성 간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경험들은 현대사회에서는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용어처럼 희귀한 일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캐롤]은 동성간의 애정을 통해 그 희귀한(?) 사례를 극복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과 시점은 1950년대 뉴욕 백화점의 한 곳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후에 점점 알게 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채 바로 관객들을 옛날 어느 곳의 도시로 데려간다.
[캐롤]은 21세기에 범람하는 특수효과나 기술을 거의 배제하면서도 가장 오랜 장르관습인 드라마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전혀 식상하지 않게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점이다. 너무나도 식상해 보일 수 있는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가 이리 참신하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캐롤]에서 전달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대사가 큰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손짓, 몸짓 그리고 눈빛에서 만남과 사랑, 이별의 순간들이 대사와 함께, 어떤 때는 대사없이 전달이 되고 있다. 카메라는 과도한 움직임을 극히 자제하면서도 감정의 흐름과 소통의 장면들에서는 어김없이 순응하는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 테레즈의 어깨 위에 캐롤이 그저 손을 얹는 장면마저도 아름답고 짜릿한 순간으로 느껴진다.
내가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은 자연광 위주의 촬영방식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장면에서 자연조명과 그 장소에서의 진짜로 쓰였을 조명 이외에는 그 장면을 훤히 보여줄 특수조명이나 별도의 인공조명을 전혀 쓰지 않고 빛과 그림자가 보이는 그대로 촬영했다. 이는 인물과 배경을 별도로 보이는 게 아니라 한곳에서 하나의 대상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50년도 더 된 옛날임을 상기하더라도 그 과거의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런 자연스러운 조명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시대적 배경을 위해 동원되었을 야외 세트나 자동차, 인물, 소품 등의 고증도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이 자연광 위주의 촬영방식이 이런 자연스러움에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이런 역할에서 옛날 방식의 16m 필름 사용은 이의 효과를 더 자연스럽게 살려준다.
에드워드 러취맨의 카메라는 예의 언급처럼 과도한 움직임은 자제하고 있지만 인물의 감정선과 관련된 흐름에선 미세하면서도 순응하는 반응을 보이며 관객들을 감성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캐롤]처럼 이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치고 영화적 촬영의 기술이나 작위성을 자제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분에서 뉴욕의 풍경을 부감샷으로의 이동을 통해 조망하는 장면을 잠깐 보여주고 중간부분의 두 여성의 여행장면에서 이동하는 부감샷을 보여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전 고전영화에서 봤던 촬영기술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한 평범해 보이는 편집을 통해 드라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감성의 흐름과 변화에 관련된 부분에서 카메라는 조금씩 변화를 보이면서 절제했던 카메라의 위력을 감성부분에서 표출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한 대상에게는 줌 아웃을, 다른 대상에게는 줌 인을, 그것도 과하지 않게 살짝 준 것에 불과한 데도 그동안 모아뒀던 감성을 터트리게 만든다.
새로 나온 영화에서 새로운 기법을 기술적으로 보다 보면 관객들은 새로운 기법을 이해하느라 정작 이야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영화를 분석하기에 바빠지는 경우가 있다. [캐롤]은 가장 오랜 장르이자 식상해 보이기까지 한 드라마 장르를 통해서 편하게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두 배우를 중심으로 한 몸짓과 손짓, 눈빛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끈다. 영화는 이를 위해 매우 자연스럽게 - 사실은 매우 주도면밀하게 - 이야기를 풀어가며 관객들에게 공감이입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흐름과 감성에 촬영과 배경이 역할을 했다면 음악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첼로와 피아노, 플룻 등으로 필립 글래스의 영향을 받았음에 분명한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음악기법으로 감성의 움직임과 변화와 흐름을 카터 버웰의 음악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등의 코엔 형제의 영화들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카터 버웰은 [캐롤]에서 더도말고 덜도말고 이야기와 감성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아름다운 소절을 들려주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마치 이 지구에 없을 듯한 - 배경이 지구가 아니라 중간계(Middle Earth)이므로 가장 어울리는 캐릭터인 셈이다 - 매력적인 한 여신의 역할을 했던 케이트 블란쳇은 캐롤의 역할을 통해 세련되면서도 노련한, 그러면서도 중년여성의 자기다움을 온전히 보여주는 중성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루니 마라는 테레즈라는 역할을 통해서 열정과 용기, 순수함과 도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매력을 보여주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이 모든 것을 지닌 듯한 그녀의 눈망울을 보면 그 누가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50년전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적 배경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고전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이 자연스러움에는 제시 로젠탈을 비로한 프로덕션 디자인 팀과 샌디 포웰의 의상 담당이 큰 역할을 했다. 튀어 보이는 것은 쉽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두세배 이상 어렵다.
[캐롤]은 동성에 끌리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이 많은 험난함과 용기를 감수하고라도 갈만한 삶임을 공감케 해주고 위로해 주는 영화일 것이다. 또한 이성에 끌리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도 진정한 소통과 관계, 자아의 발전에 대해 서로를 생각케 하는 감성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껍데기의 관계, 형식상의 관계가 아닌 진정한 소통의 문제에서 현대인들은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처럼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덧붙여서 얘기한다면 이 영화는 화장 안 한듯한 여자가 진정 아름다워 보이는 처럼 과도한 기술을 쓰지 않은 기술적 영화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란 장르의 관습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중요점에서는 포인트를 살림으로써 이야기할 것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관계자나 영화학도들은 이 영화를 텍스트 삼아 연출, 연기, 촬영, 세트, 의상, 조명 등등에서 여러번 보고 분석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캐롤]을 통해서 여성감독이 해야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등을 떨친 채 이 영화의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을 훌륭히 극복했고 큰 성과를 이루었다. 양질의 훌륭한 퀴어영화가 지금 시대엔 적지 않게 많긴 하지만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보인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다. 가까운 시절로 보자면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중 대중성을 겸비한 것으로 꼽힌다면 [캐롤]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대중성을 겸비한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의 하나가 되었다.
첫댓글 얼마전에 본 영화인데,
율리시즈님의 글을 읽으니... 한번 더 보고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어줍잖은 영화 여러개 보는 것보다 좋은 영화 반복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인것 같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