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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Herod) 가계도:
▶안티파터(Antipater) 1세와 2세 :
B.C.55- A.D. 93년경까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팔레스타인과 그 인접 지역을 다스리던 이두메 왕조의 왕들을
말한다. BC1세기 초 알렉산더 얀네스(Alexander Jannes)에 의해 안티파터(Antipater) 1세가 이두메의 통치자
로 임명되면서 이두메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티파터(Antipater) 2세가 BC 47년 율리우스 케사르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 지역을 다스리면서 헤롯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안티파터 2세의 한 아들인 파사
엘 에게는 예루살렘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헤롯대왕에게는 갈릴리 총독 자리를 주었다.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
유아살해 명령을 내린 왕 안티파터 2세의 둘째 아들로 BC 47년, 25세의 나이에 갈릴리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
다. 갈릴리 지역의 도둑떼를 소탕하며 하스몬 왕가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갈릴리를 침입하였을 때도 그들을
물리치는 등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 안티파스가 암살당한 후 형 파사엘과 함께 유다의 분봉 왕으로 임명
되었으며 BC40년에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BC 37년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
하고 있던 파르티아 군대와 안티고누스 왕을 물리치고 유대인의 왕위를 얻게 되었다. 헤롯은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
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왕으로서의 정치적 수완을 보여 주었다. 지중해 연안에 항구 도시를 만들어 가이
사 아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가이사랴 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사마리아와 여리고 같은 도시들을 재건하
고, 헬라 양식의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 등과 같은 건축 사업도 활발히 수행하였다.
BC 20년에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 성전은 그가 죽은 후 68년경에
완성되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은 아니었다. 에돔 출신으로 선조가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반쪽짜리 유대인이었
다. 그래서 그는 하스몬 왕가의 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잔혹하
여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가족도 예외 없이 처단하였다. 그는 왕비 미리암네의 남동생 아리스토
불루스, 할아버지, 어머니, 왕비 미리암, 미리암의 두 아들을 차례로 죽였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자신의 왕
위를 지키기 위해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는 잔인함도 보였다(마 2:16-18). 헤롯은 자신이 죽은 후 국가적인 애도
기간을 확실히 하고자 여리고에 있는 경기장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BC 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헤롯 안티파스(Antipas) :
세례 요한을 처형한 왕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헤롯이 죽자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 되어 BC 4-AD 39년까지
다스렸다(눅 3:1). 성경에는 분봉왕 헤롯, 헤롯왕으로 나온다(마 14:1; 막 6:14; 눅 3:19). 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이복형제인 빌립(헤롯 2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다시 결혼하였다. 이것 때문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게 되자(막 6:18) 그는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막 6:17). 헤롯은 세례 요한을 두려워하
여 죽이지 못하다가 생일잔치 자리에서 헤로디아의 딸(살로메)의 요청을 듣고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말았다(막 6:
20-29).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여우라는 말을 들었는데(눅 13:32) 이는 협박과 속임수에 능한 헤롯의 간사함과 교활함을 단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헤롯은 빌라도에 의해 호송되어온 예수님을 재판하였는데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눅 23:7-11). 그는 갈릴리 해안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라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갈릴리 바다도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다.
▶헤롯 아그립바 1세 :
야고보를 죽인 왕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다. 헤로디아의 형제이며 헤롯 안디바의 조카이기
도 하다. 성경에서는 헤롯 왕으로 나온다(행 12:1).그는 로마 황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글라우디오
(Claudius)가 로마 황제로 등극하는 데 공헌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게 되었다. 또한 유대인
의 환심을 사고자 율법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지성소에 황제의 상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행12장에 나
오는 것처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으며(행 12:2) 베드로를 옥에 가두는(행 12:3-5)등 기독교인들을 핍박하
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고 말았다(행 12:23).
▶헤롯 아그립바 2세 :
사도 바울을 재판한 왕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17살의 어린 나이여서 부친이 다스리
던 지역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AD 50년에 칼키스(Chalcis)의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며 후에 갈릴
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 그는 누이 버니게와의 근친상간을 범하여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가이사랴
의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갔을 때 구류되어 있는 사도 바울을 보게 되었으며(행 25:13-22) 바울의 변증을 듣게 되
었다(행 26:1-29). 그는 바울의 변론을 듣고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석
방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행 26:30-32).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 70년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으며 100년경에 죽었다.
▶베스도(Festus)
네로 당시 벨릭스의 뒤를 이은 유대의 총독이다(행 24:27). 그는 A.D.60년에 부임하여 2년 후 죽었다. 그의 전임
인 벨릭스보다는 선량한 정치가였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한 뒤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유대인들은 2년 동안 벨릭
스가 가이사랴의 옥에 가두었던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소환하여 재판할 것을 청원했다(행 25:1-5). 베스도는 재판
을 열어 유대인의 청원에 대한 의사를 물었으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가이사에게 상소했다(행
25:6-12).
이때 헤롯 아그립바 2세(Agrippa)의 등장: 신약 시대 유대의 왕인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AD 37
-44)와 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AD 50-93)가 등장한다(행 12:5,21; 25:13).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헤롯’
이라고만 명명되는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도 잡아 투옥하였다(행 12:1-19). 헤롯 아
그립바 2세는 ‘아그립바’로 명명되며, 버니게와 함께 가이사랴의 베스도를 방문했다가 바울을 심문했다(행 25:13)
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를 방문하기 위해 누이 베니게와 함께 가이사랴에 오고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바울에
관한 일을 보고했으며(행 25:13-22) 베스도의 주선으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변증(행 25:23-27;
26:1-32), 사도행전의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줌(8장 26절-40절) 바울의 회심과 이후 바울의 선교 활
동(9장-28장) 이달리야 부대의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가 거주했던 곳(행10:1), 오리게네스는 스스로 거세한 것
이 문제되어 알렉산드리아 주교 성직 서품,안수를 거부하고 팔레스타인 가이사랴 주교에게 서품)에 살면서 관광지
로도 매력있는 이곳 동굴을 알게 되어 "베들레헴에 그가 태어난 동굴과 배냇저고리로 그를 감싸누인 구유가 있다"고
썼다. 예수는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치료하고, 나인성에서 젊은이의 생명을 되찾고, 가다라에서 악령을 추출해 돼
지 몸속으로 던지고, 가버나움에서 로마인 백부장의 종을 치료하고, 갈릴리 바다위를 걷고, 폭풍을 잠잠케 하고, 해
변가의 군중들에게 설교를, 수심 209m, 해안선이 53km에 이르는 갈릴리 바닷가에 흩어진 정착지들은 천연의 항
구를 형성하며 게네사렛 평지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고, 해변가 마을로 디베랴, 벳새다가 가장 큰 마을이다. 복음서
들은 벳세다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출생지로 보고 있다. 갈릴리 북쪽 해변의 가버나움은 헬라 회당의 폐허로 서
있다. 그의 명성은 갈릴리 지역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후 45년과 65년경 사이에, 바울은 서너 차례 선교여행을 했다. 그의 시작점은 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인 안디옥이었다.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성경에서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네 사람 등장한다.
첫째, 예수님 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왔다가 만난 헤롯대왕이다(마 2:1).
둘째, 세례 요한의 목을 벤 왕인 헤롯 안티파스이다(막 6:18).
셋째, 베드로를 잡아 가두고 벌레가 먹어 죽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다(행 12:23).
넷째, 바울이 잡혀서 심문을 당할 때 그 앞에 섰던 왕이 헤롯 아그립바 2세이다(행 26:31).
그러면 헤롯 가문의 시작은 언제 되었을까?
그 시작은 마카비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카비 혁명의 성공으로 인하여 그 후계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
데 제4대까지 내려 왔을 때에는 예루살렘 동남쪽의 이두메(에돔지역)까지 정복하게 된다.
이때 이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게 되는데 에돔 사람 ‘안티파터’이다. 이 사람이 헤롯대왕의 할아버지
이다. 그러는 중에 로마의 세력이 커지자 안티파터는 친 로마정책을 펴게 된다. 특히 폼페이 장군은 여러 지역에 출
정해서 나라들을 합병한다. B.C. 64년에는 다메섹을 점령한 후 수리아 주(州)를 만들더니 1년 후에는 그 아래로 눈
을 돌려 유다를 정복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에돔 총독이었던 안티파터는 폼페이를 도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일조를 한다. 혁명으로 시작된 유다의 독립이 100년 후 다시 로마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이다.
폼페이는 안티파스(안티파터의 아들)를 ‘집정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지역을 다스리게 한다. 그 후에 폼페이는 가이
사와 패권을 놓고 싸우게 되고 폼페이는 죽는다. 가이사가 본국으로 돌아와 그의 충신 부루투스에 의해 살해를 당한
다(B.C. 44년). 그 와중에 안티파터도 살해를 당하게 되고 그의 아들 헤롯대왕은 정치적으로 곤궁에 빠지게 된다.
결국 헤롯은 이집트로 도망가 있다가 로마에 들어가 로비활동을 하게 되는데 로마의 원로원들은 헤롯을 유대의 왕
으로 임명한다. 이때가 B.C. 37년경이다. 이때 유대 땅은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안티고누스가 차지하고 있
었다. 그런데 헤롯을 유대의 정식 왕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그 땅을 빼앗으라고 하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헤롯은
안토니우스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 성을 빼앗아 다스리게 된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않으면 헤롯 가문과 같이 비열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까지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 헤롯의 통치 중의 로마의 상황 :
동부의 군사권자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B.C36년에 결혼하자, 안토니우스는이미로마의 대권자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했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이 파생됨.* 악티움 해전 : B.C. 31년 옥타비
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악티움에서 결전을 벌여 옥타비아누스가 승리(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피
하여 수년 후 둘 다 자살함). 헤롯은 안토니우스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는데, 안토니우스가 패하고 옥타비아누스가 로
마를 통일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계속해서 팔레스틴 지역에 통치를 계속 유지함. 옥타비아누스에
게 원로원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제1대 황제의 자리를 줌.
* 헤롯의 통치
제1기(조성기) :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권좌에 앉았으나, 집권과정에서 하스모니안가의 인물들을 제거하여 많은 반대세력을 두
게 됨. 반대세력 : 바리새인(중산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무리, 헤롯이 이두매 계열의 “HALF JEWS`라는 것과 친로
마파이기 때문에 반대함).하스모니안 가문(헤롯의 장모 알렉산드라가 자기 아들 아리스토불루스를 제사장의 자리
에 앉힐 것을 요구하고 난 후, 아리스토불루스가 익사체로 발견되자, 알렉산드라는 헤롯을 의심하고, 이때부터 바
바스때까지 계속해서 반대함)클레오파트라: 알렉산드라의 문제로 인해 헤롯의 통치영역을 빼앗음(후에 옥타비아누
스에게 다시 보상받게 됨). 안티오고구스의 귀족들: 헤롯이 로마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의 기득권을 빼앗아 갔으
므로.- 알렉산드라와 하스모니안 대표자들, 마리암네 등(아들까지도) 음모죄로 처형시킴
제 2 기(번영기) :
가이사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운동경기를 개최함, 건축 사업(극장, 원형 경기장)→율법을 어기는 것이 많고, 로마
의 문화를 유대 사회에 도입함.* 예루살렘 성전 건축:B.C. 20년(혹은 19년)부터 A.D. 63년까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위해-유대 사회에서는 유대인으로, 유대밖에서는 이방인의 율례대로 살았음. 사마리아성 재건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사바스테 “Sabaste`라고 칭함.
제 3 기 :
10명의 아내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가정의 문제가 복잡함. 도리스에게 안티파터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마리암네
와 결혼하기 위해 두 모녀를 추방함. 마리암네에게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를 낳고, 마리암네2세와 결혼했으며,
네 번째로 말테스와 결혼해서 아켈라오와 안티파스를 낳음.⇒ 마리암네의 두 아들을 헤롯이 사랑하여 후계자로 칭
했는데, 안티파터의 모략으로 두 아들을 처형함, 그 후 안티파터가 후계자 자리를 계승했으나 안티파터도 역시 처
형됨.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빌립을 낳아 아켈라오, 안티파스, 빌립에게 유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함.+
헤롯의 유언 : 사망 5일 전에 여섯 번째로 유언을 변경함. 아켈라오는 최후의 유언이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을 주장
했고, 안티파스는 헤롯의 정신상태를 지적하여 거부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여 둘 사이의 갈등이 있음 → 아우구스투
스는 헤롯의 유언을 인준하면서 아켈라오에게 “분봉왕”칭호를 사용하도록 제한함.
●헤롯 대왕(B.C.37년-B.C.4년)의 심장은 이두메인, 정신은 로마인이었다.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하였던 헤롯 안티파터2세(B.C.43년 말리쿠스에게 살해됨)는 아들 파사엘(Phasael)과
헤롯을 각각 유대의 군대 사령관과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으로 삼았다. 헤롯 안티파터의 둘째아들 헤롯대왕은
열 명이 넘는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간에는 끊임없는 권력에 대한 암투가 벌어졌다. 헤롯대왕
은 첫 번째 부인인 도리스와 3살 난 그의 아들 안티파터(헤롯의 아버지 이름과 같음)를 버리고 10대의 마리암과 결
혼하여 전통적인 유대교 제사장(사제) 가문과 결합하였다. 헤롯대왕은 힐카누스 2세 가문의 손녀(공주)로 둘째 부
인인 마리암 1세에게서 난 두 아들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루스를 대역죄로 사마리아에서 처형하였으며, 죽기 직전 자
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안티파스를 축출했다.
예수님이 태어난 것을 알고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인 바로 그 해에(마2:16~18) BC 4년, 헤롯대왕은 여리고
겨울 궁전에서 죽고 자신이 만든 무덤인 헤로디움에 묻혔다. 헤롯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로마 황제의 도움을
받아서 유다의 왕이 되자 이로써 약 100여년간의 하스모니안 통치가 종결되었다. 본래 로마의 안토니우스를 지지
하다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카이사(Caesar 시저)의 양아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에
게 정권다툼에서 실패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찾아가 자신의 왕관을 벗어들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대왕을 처벌하지 않고 그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다. 헤롯대왕은 머리가 비상한 책략가였고, 잔
인한 독재자였다. 헤롯대왕은 왕이 된 뒤에 자신의 정치기반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아내와 장모, 동서와 힐카누
스 2세를 죽였다. 그는 황제 신전,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예루살렘을 그리스-로마식으로 바꾸어 새로운 도
시로 꾸미고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세바스테’라고 명칭을 붙였고, 가이사랴에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요새와 왕궁을 건축했다. 그리고 정부 요직에 헬라주의자들만 요직에 앉힘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사
기도 했다. 그러다가 통치 말기에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
을 다 죽이는 참혹한 죄를 범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스룹바벨 당시에 지었던 무려 46
년간이나 계속해서 공사를 한 예루살렘 성전(요2:20)을 증개축하는 일에 몰두해서 지은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3번 건축되었다. 제 1성전은 솔로몬 왕이 지은 ‘솔로몬 성전’으로 7년만에 지어졌고, 제 2성전은
에스라서에서 스룹바벨의 지휘로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재건축한 ‘스룹바벨 성전’으로 짓는데 23년 걸렸고, 제 3성
전은 폐허가 된 성전을 헤롯왕이 지은 ‘헤롯 성전‘으로 기존 성전의 확장이므로 ‘제3성전'으로 부르지는 않는데,
예수님이 공생애 당시 가셨던 곳으로 46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솔로몬 성전’(첫 건축/B.C.957년~B.C.586년)과 ‘스룹바벨 성전’(재건/B.C.515년)과 ‘헤롯 성전’(증축/A.D.
63년~~A.D.70년)은 모두 같은 자리에 세워졌다. 즉 재건한 것이거나 증축한 것이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다. 사실 성전은 그가 죽은 뒤 오랜 뒤에야 봉헌되었다. 이 성전은 유대국가의 장엄한 기념물로서 당시 로마 세
계에도 잘 알려진 건축물이었다(눅21:5). 그가 지은 화려한 성전과 자신의 왕궁, 안토니아 성채와 다윗의 망대 등
은 비록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오늘날까지 일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그 규
모와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행사한 헤롯도 결코 해결하지 못한 일은 유대인과의 화해였다.
탁월함과 잔인함은 그의 이미지를 폭군으로 몰아갔다.
이는 그가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이두메인(에돔 족속의 후예)으로 불리는 약점과 로마의 충성스런 가신이었다는 점
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토라에도 없는 외국인이 유대인을 통치한다는 불만, 헤롯에 대한 증오심이 내면에 자리
잡았다.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파도 사두개파도 정당성이 없는 헤롯을 지지하지 않았다. 헤롯대왕의
마지막 통치 기간은 열 명이 넘는 부인과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 간의 불화로 예고된 비극이었다. 기원전 7년, 헤
롯은 유대인 부인 마리암 1세에게서 난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러스를 대역죄로 사마리아에서 처형하였으
며, 죽기 직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안티파스를 축출했다. 헤롯대왕은 왕위 계승을 두고 유언서에 지명자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다고 한다.
B.C.4년 헤롯대왕은 거의 70세로 저열 병, 가려움증, 심한 내장의 고통, 복부가 부어오르는 증상과 성기가 썩어 벌
레가 생기고 심한 기침에 시달렸으며, 그의 수족은 경련을 일으켜 사해의 북동쪽에 있는 칼리로(Callirrohoe)의 온
천에서 따뜻한 목욕 요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의사들은 헤롯의 체온을 높여보려고 욕조에 뜨거운 기름을 타 보기
도 하였다. 그는 며칠간 잠시 생기를 회복하는 듯했지만 창자의 암과 수종으로, 그가 살해한 자의 잔영의 괴롭힘을
당하여 여리고 겨울 궁전에서 주전 4년 4월 1일에 사망하였다. 자신이 생전에 만든 무덤인 헤로디움에 묻혔으나 아
직까지 그의 무덤은 발견된 바 없다. 예수는 헤롯대왕이 죽기 전 사내아이들을 살해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마 2:
16~18, 눅 2:1~2). 헤롯대왕이 죽자 그의 왕국은 셋으로 분할되어 유다, 이두메, 남부 사마리아는 말타크에게서
낳은 아켈라오(Archelaus)에게,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은 그의 친동생 안티파스에게, 갈릴리 북동부는 대왕의 다섯
째 아내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난 아들 빌립2세 에게 각각 돌아갔다.
▶안티파스는 헤롯대왕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한 자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린 왕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고 하였다(눅13:32). 사마리아 출신의 네 번째 부인 말다크가 낳은 막내아들 안티파스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말다크가 낳은 큰아들 아켈라오도 있었지만 헤롯은 아켈라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안디파스(안디바)
는 아버지를 따라 헬라 문화를 퍼트렸고, 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나, 두번째 부인 마리암2세(시몬 뵈투스 대사장의
딸)가 낳은 아들인 동생 빌립1세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였고, 본부인을 쫓아내고 헤로디아를 아
내로 맞이했다. 이 사실을 세례요한이 헤롯 안디바에게 책망한 일로 세례요한은 감옥에 투옥이 되었다가 헤로디아
는 자기 딸 살로메를 시켜서 헤롯 안디바에게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청한 결과 목이 잘려 순교당했다(막 6:27).
그는 AD 39년에 폐위되었고, 그 후에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는 야고보를 죽인 자(행12:1~3)였고, 베드로를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으며, 초대 교회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히
다가 AD 44년에 죽었다(행12:20~23).
●헤롯대왕은 그의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철저한 계획을 수행해 하스몬 왕가의 안티고누스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제
거되었고, 어린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의 심복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익사하였다. 노령의 힐카누스는 살해되었고,
헤롯의 아름다운 부인 마리암(Mariamne)은 헤롯의 여동생인 살로메(Salome)에게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살
해되었다. 11년간 헤롯은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그의 치세 중 마지막 10년(주전 14-4)은 또 다시 정권을 위한 가족
내의 암투가 벌어졌다. 그는 통치 기간의 종말을 향하면서 잔학하고 살인광적인 늙은이가 되었다. 그의 통치 중에
그가 자신의 왕위와 이익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을 축출하는데 주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리스토불루스
3세의 여동생이며,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인 마리암은 마카비 왕가의 공주였으며 헤롯대왕이 가장 사랑하였던 부인
이었다. 헤롯은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그녀의 아들들도 총애하였으나 그의 장모인 키프로스(Kypros)와 그의
여동생인 살로메가 하스모니아 왕조를 대변하는 알렉산더와 마리암1세을 미워하여 흉계를 꾸며 마리암을 사형시
켰다.
얼마 후에 자기의 실수를 깨달은 헤롯은 또 다른 피바람을 일으켰고 로마의 황제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졌다. “헤롯
의 자녀가 되기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세 명이 처형되었다. 헤롯이 불치의 병
으로 고생하게 되자 그는 자주 잔인함과 살인을 자행하였고 통치의 말년의 잔인한 행동 중에 하나는 아마 주전 4년
의 베들레헴에서 무죄한 유아들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헤롯은 그의 임종시 애도를 확실히 하고자 국가의 고관들을
경기장 안에 감금시켜놓고 그가 죽는 순간에 그의 군대에 의해 처형시킬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 명령이 군대에 이르
기 직전에 헤롯의 여동생 살로메가 갇힌 자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헤롯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터 2세가 BC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헤롯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한 아들인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헤롯(헤롯대왕, '영웅의 아들'이
란 뜻)에게는 25세에 갈릴리 총독 자리를 주었다. 예수탄생시의 헤롯대왕(B.C.37~B.C.4)의 뜻에 따라 그의 왕
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즉, 아켈라오(Archelaus, B.C.4-A.D.6)는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의 왕으로,
예수가 ‘여우’(눅13:32)라고 부른 안티파스(Herod Antipas, B.C.3-A.D.39)는 갈릴리, 베뢰아의 분봉왕으로,
이복형제인 헤롯 빌립2세(Herod Philip,B.C.4-A.D.34)은 이두래, 시리아 남서쪽 드라고닛 인근 지역의 분봉왕
으로 내정되었다. 이러한 헤롯의 조치는, 특별히 왕위에 있어서는 로마의 인준을 받아야 했는데 로마는 어느 왕도
그 왕위를 세습시키는 것을 불허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이사는 헤롯의 유언에 따라서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
고 원칙적으로 처리하였다. 따라서 안티파스와 빌립은 분봉왕(Tetrarch)으로, 아켈라오는 대공(Ethnarch)으로만
불려졌다. 이러한 로마의 호칭은 별 의미가 없었고, 이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왕’(king)들로 간주되었다(마 2:22;
막 6:14, 26; 마 14:19 등).
▶아켈라오(Archelaus, B.C.4-A.D.6)
아켈라오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확정되었으나 통치자로서 호평을 받지 못하여서 그가 통치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 더 그를 싫어하였다. 그는 자기 일로 로마에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
였으며 그의 군대는 유월절에 3천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그의 전 통치 기간은 혼란과 피바람으로 특징 지워졌
다. 그는 헤롯의 죽음이 남기고 간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은 그로부터
유대인의 충성심을 갈라놓았으며 헤로디아(Herodias) 일가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고조시켰다. 두 번에 걸쳐서
그는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자신이 직접 야만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권력의 욕망이
강했고 잔인하였기에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들이 그의 파면을 황제에게 요청했을 때 쉽게 허락될 수 있었다. 그의
치리 가운데서 한 가지 칭송받을 반한 모습은 그의 건축계획이었다. 10년간에 걸친 아켈라오의 분봉 왕으로서의
통치 기간에 쌓인 그와 유대인 사이의 알력이 폭발하여 그는 로마인에 의하여 고울(Gaul)지방으로 추방된 것은 로
마 황제가 보기에 그가 너무 오랫동안 유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 땅에 대규모의 반란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유대는 이어서 코포니우스(Coponius) 출신의 총독을 맞아들였다(A.D.6-9).
아켈라오가 해임되고 로마 총독이 유대 땅을 지배하게 되자 로마인들은 주민들의 등록을 지시했다. 이것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와 같은 조치는 일단의 유대인 집단을 격분시켰으며 반로마적 저항 운동을 촉발시키
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 중에는 특히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그들의 반감을 표시했던 열심당원 혹은 열혈당원,
혁명당원이 있었다.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 언급된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2~23) 이미 그 당시에 그는 포악
한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요셉은 그를 피하여 갈릴리로 향했던 것이다.
▶안티파스(Herod Antipas,주전4-주후39)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형 아켈라오와 마찬가지로 헤롯왕과 그의 사마리아인의 처 말타스(Malthace) 사이에서 태
어난 사람으로 그의 사마리아인 모계 혈통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를 더 싫어하였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두 지역이
그에게 주어진 이유는 아켈라오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일부는 비옥했
고, 다른 부분은 개발 가능한 지역이었다. 특히 갈릴리는 인구가 조밀했고 무역과 어업이 번창하였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 왕으로서 안티파스의 통치는 그의 형 아켈라오에 비하여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참을 만하
였다. 그는 대규모의 건축을 실시하였고 그의 국방을 견고케 하였다. 안티파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존중하려고 했
다. 그는 예루살렘의 축제에도 나타났고 사람 형상이 없는 동전도 발행했으며, 유대 총독 빌라도가 헤롯의 예루살
렘 궁전에 황제의 이름을 쓴 금 현판을 두려고 했을 때 반대하였다. 그는 중용의 길을 택하여 어떠한 동요도 없이
30년 동안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는 신약에서 특별히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엄격한 유대
인의 관점에서 보면 헤로디아와 그의 불법적인 결혼은 그의 간음죄를 지적하였기 때문에 투옥시킨 세례 요한의 목
을 자른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저 여우’(악하고 간교하며, 참된 힘과 위
엄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라고 했다.
이 헤롯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성금요일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헤롯과 동일인이었다(눅 23:
7-12).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Caligula, 주후 37-41)에게 왕의
칭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의 청원을 수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헤로디아와 함께 추방
당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형제를 시기한 헤로디아를 심판하셨고, 쓸데없는 여인의
수다를 들은 헤롯 또한 심판하셨다.”
▶빌립(Herod Philip,주전4-주후34)
헤롯의 셋째 아들인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동부에 위치한 속주의 분봉왕이었다. 헤롯의 아들 가운데서
그는 단연코 최상의 통치자였다. 빌립은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품의 지배자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그가 죽을 때
까지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다스렸다. 아마도 그는 헤롯왕의 아들 중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통치하는 영지의
주민은 대부분 아람인이나 헬라인이었다. 야심이 많지 않은 그는 주어진 영지를 평화롭게 통치하여 무역과 문화를
진흥시켰다. 그는 인상적인 기념물은 남겨 놓지 않았으나 중요한 두 도시, 즉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와 벳세다-줄리아스(Bethsaida-Julias)를 확장하였다. 빌립은 신약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복음서 저자들은 바리
새인들의 증오심이 예수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때 주님은 빌립이 다스리는 지경으로 피신하였다고 적고 있다. 쉬
러(Schürer)의 견해를 따르면 빌립의 통치는 “온건하고 공정하며 평화로웠다.”
헤롯 빌립 1세(헤롯 대왕과 대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 1세와의 아들. 헤로디아의 처음 남편(막 6:17). 살로메의
부친. 공직에 있지는 않았다.)
헤롯 빌립2세(B.C.4-A.D.34) 헤롯 대왕과 그의 다섯째 처(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이두레와 드라고
닛 지방의 영주가 됨(눅 3:1). 헤롯가에서 가장 존경을 받은 인물.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함
●로마의 총독들
처음 세 명의 로마인 총독들은 이 나라를 지혜롭게 통치한 듯이 보인다. 유대인이 로마의 통치를 요청하였을 때,
그들은 수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주후 6-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대를 통치한 총독들 가운데 첫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 당시 총독(總督)에는 두 종류(원로원 계급 출신, 유대와 같은 소영지를 통치하는 기사 계급)가 있
었다.
유대의 첫 총독은 코포니우스였다. 그는 헤롯이나 아르켈라우스가 가지고 있던 특권 외에도 대제사장의 법의(法衣)에 대
보호권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총독은 주후 9년경에 마르쿠스 암비비우스(Marcus Ambivius)가 교체되었다.
세 번째 총독은 주후 15년경 디베료 황제에 의해 11년 재임한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로 대치된다.
돈을 벌기 위해 그 기간 동안 무려 4명의 대제사장을 쫓아내고 다시 임명하였다.
네번째 총독은 주후 26년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주후 26-36)가 총독이 되니,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고
사형을 언도한 자이다. 필로에 의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고집불통이며 고집과 잔인으로 혼합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이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궁전에 도금한 방패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기에는 헌납자인 빌라도의 이
름과 대상인 가이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유대 지방은 요단 지역의 동부와 에스다엘론(Esdaelon)의 남부를
포함하는 전 지역을 말하며, 이 지방은 차례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11개의 지구(toparchy)로 분할되었다. 하
나의 지구는 하나의 대도시와 수 개의 부락을 포함하는 인근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유대력에 의한 중요한 절
기 때는 예루살렘에 머물곤 했어도 그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다.
총독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다. 그의 직무는 “로마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 그 속주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보다 중요한 사건의 재판”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주(州)가 아니라 제국의 속주(屬州)였기 때
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가이사에게 보내졌다(마 22:17).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징수에 종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한 개인이 어떤 군(district)에 매년 할당된 액수의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청구하며, 그는 어
느 정도 더 징수하여서 만일 배당액을 초과하게 되면 자기가 가져도 되는 과정에서 부당이득(토색)의 여지가 상당
히 있었다. 따라서 세리(稅吏, 라틴어publicani)는 ‘외세에 봉사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유대인의 미
움을 받았다.
세리들은 다양한 세금(도시에서 도시로 전입되는 상품의 수출세 및 수입세, 주에서 주로 가는 선편에 대한 세금,
세금에 부과한 세금, 다리의 통과세, 입항할 때의 세금 등)을 징수하였다. 사법기능 또한 총독이 관장하였으며 사
소한 사건들은 보다 저급한 유대인의 법정이 다루도록 위임된 반면에 중요한 범죄들은 그가 판결하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을 선고할 권세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와 같이 총독(總督)에게 회부된다. 일상적인 민
사소송이나 형사사건은 지방의 공회(公會)에 위임되었다.
총독은 또한 군사적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들을 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
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전선이었던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의 파견부대가 질서유지
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자 즉시 수리아인 총독은 한 가지 세금을 징수하도록
명령하였고, 이것은 유대인에 의한 반란을 조장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총
독들은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 유대를 통치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10년간 총독의 직임을 수행하였지만,
결국 주후 36년에는 유대인에 대하여 매우 잔인하다는 이유로 가이사 티베리우스(Tiberius)에 의하여 고울 지방으
로 추방되었다. 빌라도의 후일에 대한 기사로서,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는 가이우스가 황제로 다스릴 때, 빌라도는
“자살로써 스스로를 심판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를 무섭게 뒤쫓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헤롯의 손자들
▶헤롯 아그립바1세(Herod Agrippa I,A.D.41-44)
헤롯 안티파스가 주후 39년에 왕위를 박탈당하고 고울로 추방된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는데 그
는 젊은 시절을 로마에서 대단한 사치와 방종 속에서 성장하였다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가자 그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남부 팔레스타인의 구석진 곳에 피신하였다. 빈곤과 파산에 직면한 그는 자살하기로 작정하였
으나 그의 신실한 아내가 그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수차에 걸친 절망적인 경험 끝에 그
는 로마로 가서 그의 채권자들에게서 몸을 숨기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양자인 가이우
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의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가 어느 날 칼리굴라와 함께 마차를 탄 자리에서 만일
황제가 죽는다면 좋을 것이라는 한 마디를 들은 티베리우스가 그를 투옥하였다.
주후 37년에 티베리우스가 죽자 칼리굴라가 계승자가 되자 석방되고 그의 총애를 입어 주후 39년에 왕으로 임명
되고 클라우디우스로부터 빌립의 분봉국(tetrarchy)을 떼어 받았으며 얼마 후에 유대와 이두매, 사마리아도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는 4년간 괄목할 만큼 성공적으로 통치하였기에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사실은 그가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고, 초대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혔으며(행 12
:1-3), 44년에 죽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발을 살만한 일은 피했다.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칼리굴라
가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하였을 때 이것을 저지함으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비록 그
가 예루살렘을 흥미있어 했지만 사실상 그는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다. 그는 심각
한 질병을 얻어 주후 44년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헤롯 아그립바2세(Herod Agrippa II,A.D.48-70)
그 뒤를 이어17살 난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5장)는 그의 연소함으로 인해 이때부터 이 지역은 로마의 영
토나 다름없이 지배를 받았다. 후에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Cholchis) 지역을 분배받았다. 이때부터 유대는 로마
의 영토나 다름없이 통치를 받다가 얼마 후 그는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빌립의 이전 분봉국을 얻어
주후 53년경 빌립의 분봉왕 직을 획득하게 된다. 그는 네로에 의하여 갈릴리와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
리게 되어 영토가 확장되었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에 저택을 갖고 있었지만 왕국의 수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였다. 유대인들은 그가 명목상의 유
대인임을 알고는 그를 싫어하였다. 66년에 이 지역에서 누가는 그가 바울의 재판에 참석하였다고 적고 있다(행
24:13-26:32). 그의 통치 기간에 큰 반란인 유대 전쟁(A.D. 66-70)이 발발하였고,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였
으나 70년 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성전을 중심으로 하
던 유대교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주후 100년경에 죽자 헤롯가문은 몰락했다.
●제2기의 총독들(A.D.44-66년 사이 팔레스타인의 7명의 총독들)
①파두스(Cuspius Fadus, A.D.44-48): 자기가 통치하려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해보니 불안한 상태인 것을 깨달
았다. 유대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광적이었고, 열
심당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파두스는 유대에서 강도들의 만연을 해소하였다. 그는 대제사
장의 제복을 빼앗아 안토니오 탑에 보관하였으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변인을 보내어 그 제복의 관리권을 갖게 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클라우디우스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다. 처음 두 총독 파두스와 알렉산더의 행정은 비록 이따금
그들에게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온건하고 평화스러웠다.
②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
③쿠마누스(Ventidius Cumanus, A.D.48-52): 통치는 심각한 소동으로 점철되었다. 유월절에 한 로마 군병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발발한 전쟁에
도 개입하였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징계하는 대신에 그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쿠마누스의 추방을 초래
하였다. 세 번에 걸쳐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자행한 책임이 쿠마누스에게 있었다.
④벨릭스(M. Antonius Felix, A.D.52-60): 황제의 모친인 안토니아(Antonia)의 해방 노예였다. 그리고 로마제국
의 재정을 맡은 팰라스(Pallas)의 형제였다. 팰라스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음모의 위험에서 구한 일이 있어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고 재무장관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졌으며 큰 부자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으로 벨릭스가 총독이
된 것이다. 그는 유대인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의 전임자들보다 더욱 거칠었다. 시카리(Sicarii, ‘단검을 찬 자’)로
알려진 일단의 무리들이 사람을 죽이는 흉포함 때문에 그들로 인한 공포가 나라 안에 퍼졌다. 시카리 단원들은 끊
임없이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행21:38). 또한 메시야의 출현이
가끔 있었다. 행 24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바울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주후 60년에 총독 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베스도가 이어받아 총독이
되었고, 그는 전 총독으로부터 물려받은 바울 문제를 빠르게 처리했다. 즉 그는 바울을 로마의 황제에게 보낸 것이
다. 그는 명문 출신이었고 선량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의 반 로마감정은 완화시키지 못했고 주후 62년에
죽었다.
⑤베스도(Forcius Festus): 통치 기간은 상황이 괄목할 만하게 호전되었으나 그는 유대인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환되었다. 주후 44-66년 사이에 유대인의 격분과 광란의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며 피
어린 전투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⑥알비누스(Albinus):
⑦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다스렸다.
▶헤롯 아그립바1세가 죽자,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B.C.10~B.C.54, 41년에 제3대 황제 칼리
굴라가 암살되자, 4번째 아내인 소(小)아그리피나는 자신과 전 남편 사이의 아들인 네로를 로마 5대 황제로 만들
기 위해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먹을 버섯 요리에 독약을 넣어 암살함, 율리아 아그리피나(형 게르마니쿠스의 딸)와
혼인하지만 율리아 아그리피나는 정치적 야심이 큰 여자로, 클라우디우스를 없애고 자신의 핏줄인 네로를 황제에
즉위시킴)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아래 두었다. 이들 7명의 총독들이 다스리는 기간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
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