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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의 思想
根本佛敎의 思想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a)가 35세에 불타(佛陀:Buddha) 즉 覺者가 되어서 창시한 敎이다. 불타는 80세(B.C.383년경)로 이 세상을 떠나고 그 후 교단은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되었으나 불타 입멸 후 100년경 교단내부에 의견의 대립이 일어나 부파(部派)로 분열되어 부파불교시대로 들어갔다. 그래서 부파로 분열하기 이전의 불교를 일반적으로 원시불교라고 부르는데, 다시 그 중에서 불타와 그의 제자들이 생존했던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고 해서 엄밀하게 구별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근본불교를 고타마 자신의 근본사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서술하여 보기로 하자.
고타마는 당시의 인도의 사상계에 있어서 논의되고 있던 갖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논쟁, 예컨대 「나와 세계는 常住하는 것인가 혹은 無常한 것인가. 나와 세계는 有限한가 無限한가. 육체와 영혼과는 하나인 것인가 혹은 별개의 것인가, 완전한 인격자(如來)는 사후에 생존하는가 혹은 생존하지 않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이렇한 문제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결코 해결을 얻을 수 없는 무익한 議論으로 끝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타마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에는 얽매이지 않고 內心의 적정(寂靜)① 아주 괴괴함, 정적 ② 번뇌를 떠나 苦를 滅한 해탈, 열반의 경지 의 경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고타마가 최초에 당면한 것은 人生苦의 문제였다. 우리들이 경험하는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無常), 거기에 고정적인 實體라는 것은 없는데(無我), 우리들은 거기에 무엇인가의 상주불변(常住不變)의 我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煩惱)가 생겨서 고민한다(苦). 그 煩惱는 無名(진리에 대한 無知)과 갈애(渴愛:執着)에 입각한 것이므로(十二緣起設) 바른 수행(八正道)에 의해 지혜를 완성하여 진리에 눈을 뜨면 마침내 갈애를 끊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解脫), 이상의 경지(涅槃)에 도달할 수가 있게 된다. 고타마는 이와 같은 것을 항상 제자나 신자들에게 설교하였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바로 사체설(四諦說)이다. 고타마의 근본사상 즉 근본불교란 이러한 내용의 것이다.
불타(佛陀)
불교의 開祖이며 교주로서, 불교는 인도의 가비라성(현재 네팔령)을 수도로 하는 석가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35세에 세계인생의 진리(法)를 깨달아(成道), 불타(覺者)가 되어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기 시작한(初轉法輪)데서 비롯된다. 불타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고 하는 것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인 覺者 고타마라는 뜻으로 우리들은 석존(釋尊) 혹은 부처님이라 부른다.
원래 세계인생의 진리 그 자체는 영원불멸한 것으로서 고타마의 출세․불출세와는 무관한 것이며 고타마 자신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데, 그 진리가 고타마 자신에 의해서 체득되고 설교되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으로서 거기에 고타마의 불타로서의 위대성, 교주로서의 존엄성이 있으며 후일 사람들이 신앙귀의(信仰歸依)의 대상으로서 초인화 하거나 절대화하게 된 요소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여래(如來)
여래는 부처의 10가지명호(名號:佛十號)중의 하나이며 그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범어(산스크리트어,인도이란어파,불교언어)의 타타가타(tatha gata)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如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眞實」「眞理 그 자체」를 뜻한다. 따라서 고타마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체험위에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지혜를 주로 한다면 「진리에로 간다」즉 「如去」가 되며, 반대로 진리를 깨달은 결과 나타난 힘, 즉 자비의 이타행(利他行)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진리에서 우리들 쪽으로 오는 것」 즉 「여래」가 되는 것이다. 한역(漢譯) 에서는 진리에 따라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으로 「여래」가 사용되고 있다.
법(法)
법은 다르마(dharma)의 번역으로서, 「지키는 것」․「지지하는 것」이 원뜻이다. 불교의 3보 중에서도 중심관념을 이루는 것인데, 인도에 있어서의 그 기원은 오래된 것으로서 베다에서는 신적의지(神的意志)에 대해서 인간편에 서서 인간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최고의 진리, 혹은 종교적 규범, 사회적 규범(法律,制度,慣習),행위적 규범(倫理,道德) 등 넓은 범위에 걸친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도 법은 교설(敎說)이나 성전(聖典,敎法), 최고의 진리(깨달음의 내용), 일체의 현실존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로 존재케 하고 있는 법칙과 기준, 법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유형, 무형, 심적, 물적의 일체의 존재(存在,現象),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등과 같이 매우 복잡다의(多義)하게 사용되고 있다.
특히 법을 일체의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인도사상 일반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독자의 것이며 법에 관한 타방면의 연구가 불교의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
오온(五蘊쌓을온) 정신과 물질을 五分한 것, 곧 色,受,想,行,識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현실존재를 해명하기 위하여 갖가지의 법의 체계가 설명되었으나, 그 대표적인 것이 5온설(五蘊說)이다. 온(蘊)이라는 것은 스칸다(skandha)의 역어로서 적취(積聚) 즉 「집합」을 의미하며 집합으로서 다른 집합과 구별되는 요소라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5온이라 함은 원래 우리들 개인의 존재가 5개의 요소의 집합으로써 보지(保持)되고 형성되고 있다는 견해에 의한 것으로서 그것은 「색(色)」,「수(受)) (의식의 感受作用으로서의 감각),「상(想)」(의식중 槪念․知覺․表象을 구성하는 작용으로서의 表象),「행(行)」(受․想 이외의 능동적인 心的作用으로서의 의지나 행동적 욕구), 「식(識)」(대상을 분석판단하고 종합 인식하는 마음의 활동) 이라고 한다. 「受」이하의 4종은 마음에 관한 것으로서 색인 육체와 합쳐서 오온은 몸과 마음, 즉 개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한다면 개인존재는 이 5온의 어느 것인가로 분해되며, 그밖에 「아(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데도 존재할 수 없다(無我)는 것이다. 후에는 5온을 개인존재에서 확대 해석하여 일체법의 구성요소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 경우에는 色이 물질계를 受한 마음에 관한 곳이 정신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苦)
고타마는 29세에 왕자의 위치와 처자까지 버리고 출가하였으나 그가 출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인생은 苦이다」라고 하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현실 세계의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직시(直視)한 고타마가 얻은 것은 모든 것은 자기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뜻대로 하고 싶다는 자기 모순적인 욕망이 인간의 내면에 감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苦라고 하며 자기모순적인 욕망이야 말로 고의 원인이라고 밝혀 낸 것이다.
후에 이 苦는 구체적으로 生老病死의 4苦와 계다가 사랑하는 자와 離別하지 않으면 안되는 애별리고(愛別離苦부모,형제,처자,애인,모든사랑하는 사람),원한 깊은 미운자와 만나야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구(求)해도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否得苦), 모든 것에 집착하는 데서 생기는 오취온고(五取蘊苦)의 4고를 더하여 4고8고(四苦八苦= 生,老,病,死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否得苦, 五取蘊苦)로서 정리되었다.
무상(無常)
무상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명제로써 무상을 설명한다. 즉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 마다 生滅,변화하고 있다.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이란 것은 하나도 존재할수 없다. 이와 같은 현실의 실상(實相)이 제행무상으로써 표시되었다.
그러나 일체는 무상한데 사람은 상(常)을 바란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苦가 있다. 경전에도 「무상한 까닭에 苦인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며 무상은 고의 전제라고 했다. 또 현실을 그와 같이 인식하는 것을 무상관(無常觀)이라고 하며 무상의 덧없음은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에 비유되어 불교적 인생관의 특색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을 방일(放逸)함이 없이 정진노력(精進努力)하려 하는 정신적인 결의가 생겨나게 되며 그것이야 말로 불교의 진의(眞意)라고 하는 것이다.
무아(無我)
무아란 이론적으로는 고정적 불변적인 실체로서의 我가 없다는 것이나, 고타마가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 즉, 我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는가 어떤가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고타마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아는 일반적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명제로서 설명 되었고 불교의 근본진리라고 하는 연기설(緣起說)은 이 무아설을 기초로 조직된 것이지만 불교로서의 생명은 무아의 실천이라든가 無我行이라고 하는 실천면에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고정성이 없고 (無我)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無常) 까닭에 우리들의 수양이나 노력에 의해서 역경을 극복하여 더욱 향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의 이상(理想․涅槃)이란 이 무아행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이란 니르바나(nirvana)의 음사(音寫)로서 「불어서 끄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탐욕(貪慾),분노(憤怒), 어리석음(우치愚痴) 등의 인간의 마음을 더럽히는 번뇌의 불이 꺼지고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는 이상적인 생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에 있어서는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解脫)있으므로 적정(寂靜)한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말 한다. 고타마는 현실의 생사의 苦의 세계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파악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苦를 滅한 理想의 세계를 「涅槃寂靜」이라고 한 것이다.
고타마가 생존했던 시기의 인도에서는 각종의 인생관이 존재하여 제각기의 이상세계란 것이 제시되고 있었으나 그 이상세계가 단순한 관념에만 끝나거나 혹은 사후에 있어서만 달성가능한 것이었던 데 비해 고타마가 이상으로 한 寂靜한 열반은 세계인생에 대한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현세에서 실현되는 것이었다.
3법인(三法印)
법이란 불교의 기치 또는 슬로우건이라는 것으로서 불교의 일대특색을 나타낸 것이다. 최초에는 「일체개고(一切皆苦)」․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의 세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으나, 후에는 「일체개고」를 대신하여 「열반적정」이 들거나 혹은 이 두가지를 넣어서 4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고타마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苦이다(一切皆苦)라고 하는 현실인식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苦인 원인은 인간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 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 각각 변화하고 있는데(諸行無常),인간은 항상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諸法無我)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고 하는 데에 苦의 원인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자기 모순에 빠진 자기를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인 것이다.
4성체(4체설)四聖諦(四諦說)
연기설(緣起說:인연으로 말미암아 만유(萬有)가 생성한다는 설(說).)이란 고타마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세계인생의 진리를 말하는데 그 연기(緣起)의 도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시키기 위하여 조직화하고 해설한 것이 4성체 또는 4체설이다. 체(諦)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성체는 인생의 근본 문제와 그 해결에 관한 4가지의 진리라는 것이다.
우선 방황하는 범부(凡夫)의 현실적인 생존은 고(苦)라고 하는 인식(認識:苦諦)은 다시 그 고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생긴것인가 하는 원인추구(集諦)로 향한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구명된 원인은 즉 범부가 갖는 갖가지 마음의 미혹(迷惑)․번뇌․욕망(慾望:渴愛)에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진리를 깨닫고 모든 욕망을 없애버리는 것(滅諦)이야 말로 우리들의 이상인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길(道諦)이라고 하는 것이 4체설의 내용이다.
4체설은 인생의 고(苦)와 낙(樂).무지(無知)로 인한 방황과 지혜에 의한 깨달음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부정(否定)을 매개로 한 인과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우선 고(苦)․집(集)의 2체(諦)에 있어서 우리들의 아직 인생의 시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뇌 많은 현실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과, 그 고뇌의 현실적인 원인․이유라는 방황의 인과관계(因果關係:(사물의 생성․변화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 流轉緣起: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가 설명되고 멸(滅)․도(道)의 2체(諦)에 의해서 이미 인생의 올바른 의의․목적을 자각하여 그 이상(理想)이 무엇이가를 알고 이 이상세계에는 어던 방법으로서 도달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인․이유라는 깨달음에 향하는 인과관계(因果關係:還滅緣起)가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인과관계를 각각「염(染:물들이다)의 연기(緣起)」․「정(淨:깨끗하다)의 연기」라고도 말하는데 이 양자도 서로 무관계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현실과 이상,인생의 고(苦:괴롭다)와 열반(涅槃:)의 낙(樂), 번뇌에 의한 방황과 지혜에 의한 깨달음과 같이 한 개인의 마음의 표리를 이루고 서로 타의 부정에 희해서 확립되는 인과관계에 있다. 즉 고가 있는 한 낙은 없고, 방황하는 한 깨달음은 없음과 동시에 고를 없엔 것이 낙이며 방황을 더난 것이 깨달음이라는 관계인 것이다.
8정도(八正道)
八正道는 8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하며 「8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道라는 의미이다. 이 道가 파리어로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8개의 것이 하나의 성스러운 道義 각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8개 가운데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7개가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 즉 상섭(相攝:서로당기다)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8정도는 4성체,(영원히 변하지 않는 네 가지 진리. 곧,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 고집멸도) 인 도체(道諦:길을 살피다)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설명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8종이다.
(1)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라는 ᄃᄉ으로서 불교의 올바른 세계관․인생관을 가리킨다. 즉 연기(緣起:모든 현상이 생기고 소멸하는 법칙)의 도리라든가 4성체라든가 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진리에 관한 지혜라는 듯으로 그 체득․확립을 강조한 것이다.
(2) 정사유(正思惟:사제(四諦)의 이치를 추구․고찰하고, 지혜를 향상하는 일) ―올바른 사고방식, 올바른 마음 가짐을 말한다. 우리들은 항상 올바른 지혜에 의해서 바르게 사유(思惟:대상(對象)을 마음속에 그리며 생각함’을 이르는 말)하고 자기의 본분은 무엇인가, 자기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3) 정어(正語) ―바른 언어적 행위(言語的行爲)이다. 올바른 견해나 올바른 사고 방식에 의한 말이라면 당연히 바른 말이 될 터이다. 구체적으로는 거짓말(妄語), 욕설(惡口), 중상《兩舌:십악(十惡:, 몸[身]․입[口]․뜻[意]의 삼업(三業)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곧,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의 신업(身業)과, 망어(妄語)․기어(綺語)․양설(兩舌)․악구(惡口)의 구업(口業)과, 탐욕(貪慾)․진에(瞋)․사견(邪見)의 의업(意業)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십선〔十善:사미(沙彌)․사미니(沙彌尼)가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 살생(殺生)․투도(偸盜)․망어(妄語)․사음(邪淫)․음주(飮酒)를 삼가고, 몸을 꾸미거나 향을 바르지 말며, 가무(歌舞)를 듣지도 보지도 말고, 높은 평상에 앉지 말며, 끼니 아닌 때 먹지 말고, 금은보화를 지니지 말라는 내용〕의 하나. 두 사람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여 싸움을 붙이는 일, 하나의 일을 두 가지로 말하는 일. 거짓말을 하는 일》쓸데업는 말(綺語)의 4가지를 행하지 않을 것을 들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성실하고 정다운 말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4) 정업(正業) ―올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殺生),도둑질,불륜(不倫)등 잘못된 행위를 떠나 선행을 쌓는 것이다.
(5) 정명(正命) ―올바른 생활이라는 것으로서 신(身),구(口),의(意)의 3업을 바르게 하여 규칙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올바른 용기라는 것으로서 무엇을 하든지 용기와 노력을 가지고 임하지 않으면 성공을 얻을 수 없고 사회의 진보도 없다는 것이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상념, 올바른 의식이라는 것으로서 자기의 입장, 주위의 입장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는 것이다.
(8) 정정(正定) ―올바른 선정(禪定:속정(俗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 삼매경에 이르는 일)이며 정신의 안정으로서 이에 의해서 사물을 정확하게 보고 올바른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중도(中道)
고타마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어 불타로 될 때까지의 6년간 그 대부분을 가혹한 고행의 도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 고행도 고타마에 잇어서는 몸을 괴롭게 하는 것뿐으로서 참된 인생문제의 해결은 되지 않았다. 출가 전의 고타마는 왕자로서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여 즐거움에 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러한 물질적인 풍족함난으로는 인간을 구원 받지 옷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타마는 출가 전의 낙행(樂行)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락 양면을 더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도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자각한 것이다. 성도(成道) 후 그때까지 함께 고행을 하고 있던 5인의 비구(比丘: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 중. 비구승)들에게 우선 설교한 것이 그것이었다. 중도는 8정도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지탱되는 준엄한 도이며 여기서는 나태․번뇌․노여움․어리석음에 의해서 부지중에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하는 여하한 일변도 모두 버려햐 할 것이 강조된 것이다.
연기(緣起)
고타마가 보리수 밑에서 얻은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의 이법(理法)이라고 말해지며 따라서 연기는 불교의 근본진리이며 불교에 의한 세계관․인생관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아니, 반드시 불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타고마의 출세․불출세와 무관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의 진리․보편 타당한 객관적 진리라고 하며 이것을 법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든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라고 말해지고 있다. 즉 진리로서의 연기를 올바르게 보게 된다면 불교를 이해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연기란「연(緣:원인을 도와 결과를 낳게 하는 직접적인 작용을 하는 것)해서 생겨나 있다」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 감각으로 느낄 수 있거나 경험할 수 있는 세계. 형이하(形而下)의 세계. 객체계(客體界)의 존재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일체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 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 난다는 것이다. 그 연기의 법칙이란 3법인(三法印)이나 4법인(四法印)에서 도출되는 것으로서 「제행무상」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으며, 「제법무아(諸法無我」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타(他)와의 관계없이 고립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된다.「일체개고」로서의 현실의 방황하는 인생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지혜에 의한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 욕망을 없앰으로써 이상(理想)으로서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상이며 무아인 모든 현상이 변화하고 서로 관계를 맞고 있는 그 양상은 결코 무궤도적인 것이 아니라 거기에 관계 변화의 법칙이 있어서 그에 다라서 생멸하며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법칙이 연기의 법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서 그것도 멸한다」라는 말로써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12인연(十二因緣)
12인연은 12연기․12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하며 12지, 즉 12항목으로 된 연기의 설(說)을 의미한다. 연기의 법칙의 구체적 내용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잇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라고 하는 「이것」과 「그것」과의 두 개의 항목에 대해서 그 두가지가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다고 하는 상태를 표시한 것이며 4체설(四諦說)의 고집멸도(苦集滅道:고(苦)’는 인생의 괴로움인 사고팔고(四苦八苦),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의 모임, ‘멸(滅)’은 그 번뇌에서 벗어난 열반, ‘도(道)’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인 팔성도(八聖道)를 이름)를 설명한 것으로서 12항목으로 이루어진 설이며 그 12지의 내용을 보면
(1) 무명(無明:번뇌로 말미암아 진리에 어둡고 불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란 明 즉 지헤가 없다는 것, 현실적으로는 연기의 도리를 올바르게 알 지혜가 없고 올바른 인생관․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2) 행(行:스스로 수행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란 앵위와 그 행위 경험의 축적(蓄積)을 말하는 것으로서, 만일 무명에 의하여서 야기된 행위라면 필연적으로 고뇌에로 이끌어갈 그릇된 行이 된다.
(3) 식(識:대상을 식별하여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 이라 함은 안이비설신(眼耳卑舌身:눈,귀,코,혀,몸)의 전5식(前五識)에 의한 감각작용(생체(生體)가 어떤 자극에 반응하여 의식하는 일. 보통,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으로 분류함)과 제6의식에 의한 지각(知覺:감각 기관을 통하여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작용 및 그 작용에 의하여 얻어지는 표상(表象)․추리(推理: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기억(記憶:(어떤 대상이나 일, 지식 등을) 머릿속에 잊지 않고 새기어 보존하는 일. 또는, (그 대상․일․지식 등을) 되살려 생각해 내는 일)․판단(判斷:(사물을) 어떤 기준이나 근거에 따라 어떠하다고 생각하거나, 어떠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등 일체의 의식작용 및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모든 행위(行)가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4) 명색(名色:어떤 자격으로 그럴듯하게 불리는 이름. 또는, 허울만 좋은 이름)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서 이 현상세계의 일체의 존재를 가리킨다.
(5) 6입(六入:色聲香味觸法:아름다운 색(色)에 집착하지 말라,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집착하지 말라, 향기나, 맛, 촉감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은 6처(六處)․6근(六根)이라고도 하며 6개의 감각기관으로서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식(識)이 작용하게 되어 명색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6입과 명색과 식과의 접촉이
(6) 촉(觸)이며, 그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7) 수(受)이다.
(8) 애(愛)는 갈애(渴愛)라고 하여 맹목적인 애념(愛念)을 말한다. 감수 작용이 강하면 애증(愛憎)의 염(念)도 그 만큼 강한 것이다.
(9) 취(取)는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애증의 염(念)에서 일어나는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여럿 가운데서 쓸 것은 골라 쓰고 버릴 것은 버림)의 행동이며, 이러한 애(愛)․취(取)라는 행위가 잠재적으로 되는 데에 현존재, 즉
(10) 有가 규정되며 그것에 의해서
(11) 生이
(12) 老死의 苦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순관․역관(順觀․逆觀)
연기설은 일반적으로 12支의 연기로서 설명되고 세계인생의 일반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제현상의 관계항목을 가리킨 것처럼 보여지기 쉬우나 연기가 설명된 본래의 목적은 그러한 일반적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고뇌가 생기고 또 어떠한 인연조건(因緣條件)에 의해서 고뇌를 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인생의 현실과 그 초극(超克)으로서의 이상실현의 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연기설이 문제로 하고 있는 현상은 선악업(善惡業)과 그 과보(果報)로서의 고락과 같은 종교적 윤리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그 경우 현상이 가치적으로 악화하는, 즉 苦가 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明)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하여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고 촉에 연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고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잇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고 생에 엲서 노사(老死)․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라고 정형적(定型的)인 글에 의해서 표시되어 있다.
이에 대응해서 현상(現象)이 순화(純化)되고 정화(淨化)하는, 즉 고뇌의 유전(流轉)이 멸해지고 이상의 열반계(涅槃界)로 돌아가는 연기의 관계는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말해지며 또 이것을 연기의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無明)이 멸하기 때문에 行이 멸한다. 행이 멸하기 때문에 識이 멸한다. 식이 멸하기 때문에 名色이 멸한다.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六入이 멸한다. 六入이 멸하기 때문에 觸이 멸한다. 촉이 멸하기 때문에 受가 멸한다. 수가 멸하기 때문에 愛가 멸한다. 애가 멸하기 때문에 取가 멸한다. 취가 멸하기 때문에 有가 멸한다. 유가 멸하기 때문에 生이 멸한다. 생이 멸하기 때문에 老死․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가 멸한다」와 같이 설명된다.
또 연기의 순관은 현실의 노사 등의 고에서 소급해서 고의 근본으로서의 무명에 이른다고 하느 것이 보다현실적이며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도 하지만, 경전에 설명된 정형적인 글로서는 무명에서 고에의 연기가 나타나있다.
해탈(解脫:속세의 번뇌와 속박을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일)
해탈이란 「해방된다」,「자유로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심신의 고뇌․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이 해탈에 대한 생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목표를 이 해탈에 두고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서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 즉,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세계인생의 진리로서의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작용이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여실하게는 지견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무명을 멸해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라고 하는 연기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라고 했던 것이다. 이 해탈에의 도는 中道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8정도(八正道)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해탈은 불교에서는 이상으로서의 열반과 동일시 되고 있다.
1. 불교적 염세주의
고〔(苦)Dukkha의 개념은 불교 철학과 종교에서 주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자신의 경험을 주의 깊게 이해해 본다면 부딪히게 되는 부조화, 모순, 좌절 그리고 불행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는 개인의 주관적 열망(upadana)과,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외부 상황에 말미암는 한계나 습관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나타난다. 고는 인간적인 이상, 자기 동일성 그리고 관심이 장애에 부딧혀서 형성된 우울함, 의기소침, 상실감 등을 표현한다. 인간의 다양한 기대와 바람 그리고 그 충족에 대한 자연의 결핍과 제한 사이에는 끝업는 갈등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인간의 삶은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이라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꼐끼와 그에 대한 끝없는 공포는 철학자와 시인들의 표현속에 언제나 충만해 있다. 수 세기 동안 죽음으로 상징된 절대적 소멸과 엄청난 무력감은 냉혹한 사실로서 그리고 철학의 영원한 원천으로 여겨졌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한때 철학을 죽음에 대한 명상이라고 정의하였다. 중국의 성현인 공자(孔子)역시 어머니의 죽음에 크게 자극을 받아 이타주의적 실천 속에서 위안을 구하였다.
苦에 관한 불교의 이론은 병듦(病), 나이먹음(老)그리고 죽음(死)과 같은 자연 현상에 기인하는 불행과, 그러한 뼈아픈 상실감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무력감을 나타낸 것이다. 실행과 자각은 한계가 있다. 야망과 열망이 실현되지 못할 때 인간은 좌절 한다. 자신의 좌절과 절망 그리고 불행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 한다. 붓다는 늙은 사람, 병든 이, 죽은 사람 등을 통하여 이 모든 현실적 노력의 무의미함이 자신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이러한 직접적이고 강제적이며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슬픔과 절망 그리고 괴로움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세속적인 어떤 이득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허무뫄 소멸감이 더욱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진 채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아스퍼스(K.Jaspers)와 같은 실존 철학자들이 ‘근원적’리라고 부르는 현상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로 인해서 붓다는 苦를 벗어날 수 있는 도덕적이고 심리학적인 길을 발견했다. 그는 고통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강건하고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제기했다.
2. 불교 이전에 나타난 인도 문화 속의 염세주의
우리가 모렌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의 유적에서 알 수 있는 그 당시 문화의 성격은 세속적인 문제나 물질적 만족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다. 그 속에 환상설이나 염세주의의 단초를 나타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민들은 상업적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건축술이 극도로 발달했고 도로의 건설, 예술, 수공업 그리고 도구와 노리개 등을 만드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그러한 세계에서 현실적인 기쁨과 만족을 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학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헨조다로에서 쉬바Siva신의 형상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이 상업주의적인 공동체가 뒤에 자비와 평화 그리고 행운과 고행으로 구체화되는 신의 이미지를 생각해 내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쉬바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시 사람들은 신을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개념적 토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문명 속에서도 다른 세계(피안)를 그리는 어떤 요소가 오가 수행자인 쉬바의 개념에 자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베다는 조화와 완성의 정신을 품고 있다. 그것은 정적인 온화함의 정신을 발휘하면서도 정복, 증진, 장수 기리고 믈질적 풍요에 대한 생생한 욕망을 특성으로 삼고 있다. 베다의 신들은 강하고 자비로우며 세속적인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인드라는 아리안 족이 좋아하는 대중적인 신이다. 인드라 신에 헌신하는 자들은 그 신을 찬향하면서 그의 용감한 행위를 끝없이 찬미한다. 인드라는 이를 기뻐하며 헌신자들에게 은총을 베푼다. 당시의 다른 신들 역시 거대한 힘을 지닌 형상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고행을 통한 도덕적 완성과 침묵 또는 포기의 정신보다는 오히려 활력, 힘 능력, 열정 불타는 복수심 그리고 호전성 등을 자신의 특징으로 삼는다. 사제나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때는 언제든지 신에게 도움을 구한다. 루드라Rudra 신의 화살은 매우 강력하면서도 무시무시하다. 그러므로 루드라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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